노마디즘은 침략주의인가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 대한 이정우·홍윤기 논쟁에 답한다

                                                        ▣ 이진경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나는 철학자의 책을, 그것도 원문으로 몇 번이고 읽어야 철학이나 철학자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오역이 있어도 엔간하면 번역서를 읽는 게 좋다는 입장이다. 철학이란 철학적 문헌을 다루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유하고 사유를 삶으로 만드는 것임을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훌륭한 이론과 개념에 대해 말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혹은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지식이나 사유를 삶에서 분리된 것으로, 고상하고 그저 지적인 것으로 분리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이나 사상을 무력화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들뢰즈’를 전공한 분이 원전 타령?

그렇기에 나는 농사꾼도, 노동자도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자본주의의 극단화된 분업이 가로막아서 그렇지,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처럼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농사꾼이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굳이 대비해서 말하자면, 농사꾼이 철학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삶을 사유하고 그 사유를 통해 새로운 삶을 구성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즉, 농사꾼임에도 철학을 할 수 있다는 기대 밖의 가능성보다는 농사꾼이기에 자신의 삶을 걸고 그것으로 얻어낸 사유의 강도가 중요하다고 믿는다. 거꾸로 자신의 철학에 따라 농사를 짓게 된 철학자 역시 존경한다.

내가 알기엔 들뢰즈도 그렇다. 그는 스피노자를 전혀 읽지 않았지만 스피노자의 사유대로 사는 사람이 있다면 스피노자주의자라고 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반면 스피노자의 개념들을 잘 알지만 그저 알 뿐이라면 ‘스피노자주의자’라는 말에 값하기 어렵다. 그래서 프랑스어로 원전을 읽지 않았다면 들뢰즈 철학에 대해 말해선 안 된다는 말을, 푸코나 들뢰즈 철학을 ‘전공’하신 분이 말하는 것이 무척 당혹스럽다. 들뢰즈도 푸코도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들어 발언할 주체의 자리를 제한하려는 이런 태도를 쉽게 받아들일 것 같지 같다. 그것은 담론의 권력이 작동하는 가장 통상적인 방법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발언의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들뢰즈의 사상이 서양철학사의 정점에서 나온 철학이라는 말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는 철학사라는 이름으로 행사되는 지적 권력에 대해, ‘주류’(majority)를 형성하며 그 척도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배제하거나 억압하는 권력에 비판적이었고, 따라서 그의 사상은 차라리 철학사와 대결하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철학이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농사꾼이든 철학자든 다른 사상이나 철학자에 대해 언급할 때는, 정확하게 이해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모든 이론을, 더구나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이론을 성실히 엄밀하게 읽고 이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확신하기 어렵다면 극단적인 비난이나 비판의 말은 아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들뢰즈가 억압으로부터 욕망의 해방을 주장했다는 말, 욕망의 해방이란 대중문화 수용자가 유행이나 이미지 등을 즐기는 찰나적 해방이라는 말, 인간의 욕망의 근원을 성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말은, 들뢰즈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들뢰즈는 욕망의 근원을 성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이유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한다. 욕망은 처음부터 사회적으로 투여된다는 것, 따라서 성적인 것으로 환원해선 안 된다는 것이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책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그리고 욕망이 해방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혁명은 의무가 아니라 욕망이었기에 있을 수 있었다”)을 주장한 것은 분명하지만, 욕망과 억압, 욕망과 권력을 대비시키는 단순한 구도는 거꾸로 그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다. 가령 정치학의 근본 문제란 “어째서 대중은 마치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양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하는가?”라고 말할 때, 그는 욕망이 억압을 원하는 사태(파시즘의 경우가 대표적이다)가 바로 문제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권력과 욕망이 다른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권력이 바로 욕망인 것이다.” 욕망은 어떤 배치를 형성하는지에 따라, 혹은 어떤 배치에 들어가는지에 따라 혁명을 향하기도 하고 권력을 향하기도 한다. 따라서 문제는 욕망의 배치를 이해하고 변환시키는 것이다.


‘전쟁기계’ 개념은 무엇인가

유목주의와 전쟁기계에 대한 비판도 이와 비슷하다. 먼저, 들뢰즈가 말하는 ‘전쟁’은 가치와 가치의 충돌이고, 어떤 지배적인 가치와 대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좋은 전쟁에서는 화약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썼고, 들뢰즈는 카프카의 책이나 클레의 그림을 ‘전쟁기계’라고 했다. 전쟁기계란 기존의 지배적 가치에서 벗어나는 탈주선을 그리는 집합적 배치의 이름이다. 그래서 그것은 새로운 가치의 창안을 통해서 기존의 가치, 이미 지배적 장치와 결합된 가치에서 탈주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과 충돌하게 된다. 대개는 국가 장치나 지배적 가치가 탈주선을 가로막으며 시작되는 충돌이다. 여기서 ‘전쟁’이 발생한다. 따라서 전쟁기계는 전쟁을 목적으로 하지 않지만, 전쟁을 회피하지도 않는다.

유목민의 전쟁도 이러하다. 유목민은 전쟁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유목하며 자유로이 이동할 뿐이다. 그러나 땅을 ‘소유’하는 정착민들은 울타리를 쳐서 그들의 유목 행로를 차단하고 저지한다. 전쟁이 시작되는 것은 바로 거기다. 유목민의 번호적 조직은 이동과 유목에 적합하지만, 전쟁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정착민이 자신이 소유한 것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만들 때조차 그들의 전쟁기계가 조직의 모델이 된다. 이처럼 국가가 장악한 전쟁기계로 인해 유목적 전쟁기계는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기계로 오해되고 혼동된다. 자유로운 행로를 차단하는 울타리가 잊혀진 채, 유목이 남의 땅을 침범하고 침략하는 것으로 비난되듯이. 그러나 소유나 울타리가 없다면 침범이나 침략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자유로운 이동이 만들어낸 길들이 침략의 길로 간주되는 것은 그것을 차단하려는 소유의 벽, 울타리와 성벽(만리장성!) 때문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따라서 “들뢰즈가 유목민이 정착민 다음에 출현했다고 했다”는 말은 부적절한 말이다.)

노마디즘은 몽골이란 또 다른 기원으로 회귀하려는 복고주의가 아니다. 따라서 몇몇 민족주의자들이 그것을 확장된 민족주의로 바꾸어버리는 것에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유목민을 차라리 “움직이지 않은 자”로서 정의했다. 즉, 외형상의 유목이나 움직임이 아니라, 앉아서도 끊임없이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안하는 ‘태도’를 유목주의라고 정의한다. 유목민을 이주민과 구별한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이동한다는 이유만으로 신자유주의와 유목주의를 동일시하는 것 역시 부적절하다. 신자유주의, 혹은 세계를 이동하는 자본이란 어디를 가도 오직 돈밖에 모르는, 하나의 목적에 고착된 정착민이고, 잘 봐줘야 자신이 착취하던 것이 다 소진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 다시 착취하기 시작하는 이주민일 뿐이다. 삼성이 ‘디지털 노마드’를 자사의 광고 카피로 삼았다고 해서 노마디즘을 부르주아적이라고 하는 것은, 자본가가 게바라를 상품화했다고 해서 그를 부르주아적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생태주의자의 적대감 이해 못해

마지막으로 덧붙이면, 생산성으로 유목과 농경을 비교하는 것은, 정확하게 공업에 의해 농업을 축출했던 논리를, 개발주의의 논리를 반복하는 게 아닐까? 유목민이 불모의 땅에서 산다는 조건을 고려하지도 않은 채 비교된다는 것은 접어둔다고 해도, 자본과 개발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에서 자기가 사는 땅을 그로부터 지키려는 농민이나 갯벌이나 산을 개발에서 지키려는 생태주의자는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는 전쟁기계가 된다(배치가 달라지면 생태주의나 농업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생태주의자가 유목주의에서 위협과 적대감을 느낄 이유가 없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