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 두 편은 2007년 10월2일 평양에서 열리는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바라보는 두 사회학자의 견해가 담긴 글이다. 먼저 서울대 송호근교수가 남북정상회담을 실랄하게 비꼬는 글을 중앙일보에 실었는데 이 글에 대해 한신대 김종엽교수가 날카로운 비평을 한 글이다.
이 두 편의 글을 비교해서 읽어보고 남북정상회담을 바라보는 올곧은 관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가다듬어 보자.


1. [중앙일보 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황태자를 위하여   2007년8월13일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대중가요에 등장하는 기차의 이미지는 ‘이별’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싣고 냉정하게 발차한다. 어느 가수는 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에 목 놓아 울었다. 그러나 기차는 행선지가 있다. 새로운 만남을 향해 떠나는 것이다. 기차가 가는 곳에는 장이 섰고, 사람이 모였고, 건물이 지어졌다. 씩씩하고 우렁찬 기적소리는 만남의 설렘이었고, 당차게 내달리는 육중한 질주는 연결의 기약이었다. 만남과 연결, 그것은 지난 5월 17일 코레일 특별열차가 도라산역을 출발했을 때 이미 예정돼 있었다.
코레일 열차가 비무장지대를 통과할 때 일으켰던 작은 진동이 드디어 거대한 폭풍으로 진화했다. 누군가 저 열차를 타고 북상할 것임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상상력의 미학에는 경계가 없으므로, 미국 대통령 부시를 태울 수도, 러시아의 푸틴을 태울 수도 있다. 6자회담의 대표들을 탑승시켜 평양으로 내달려도 좋다. 그러나 그런 상상보다 남북 정상들이 탑승하는 장면이 가장 현실감 있는 시나리오일 터이다. 기차는 만남을 예약한다. 당시 그 열차에 탔던 240여 명의 승객들은 남북 정상들의 만남을 예비한 치어걸이었다.
2000년 6월 15일에 있었던 1차 정상회담은 ‘신중’과 ‘호방’의 만남이었다. 여간해선 표정도 안 바뀌는, 묵직한 경륜의 노(老)정치가 앞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날개 큰 호랑나비처럼 펄럭거렸다. 받을 것 다 받은 뒤였으므로 온갖 애교 다 부려도 밑질 것은 없었다. 그러나 받아낼 목록을 내밀어야 할 지금은 ‘저돌형 정치가’ 노무현 대통령 앞에서 어떻게 변신할까. 마중은커녕 의욕적인 뉴프로젝트를 내놔봐야 ‘잘 놀다 가시라’고 내숭을 떨지도 모른다. ‘저돌’과 ‘음흉’의 만남, 아웃파이터와 인파이터의 조우가 될 듯하다. 씨름에 비유하면 이렇다. 노 대통령이 밭다리 걸기를 시도하면, 김 위원장은 등배지기나 엎어치기로 응수할 것이다. 노 대통령이 혹시 다리걸기에 성공하면 ‘평화협정’ 같은 의외의 성과를 따낼 터이고, 등배지기에 들려 넘어지면 ‘곱빼기로 퍼주기’를 약속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과에 상관없이 그 만남은 쇠잔하는 정권에 힘을 돋워주는 특제 약인 것만은 틀림없다.
특효가 나타날 것은 또 있다. 28일 아침 북으로 향할 저 기차-아직 이동편이 확정되진 않았지만-가 대선정국에서 ‘황태자 책봉’의 길과 연결돼 있음은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흔히 ‘역사적 사명’으로 포장된 국가프로젝트에 고도의 치밀한 정치 기획이 내장돼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후계자 문제가 혼선을 빚고 있는 대선정국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 남북 정상회담은 여권의 경선 개막을 알리는 선언이다. 왜 하필 지금이냐고 울상 짓는 한나라당도 딱하게 되었다. 그것은 정치 담론을 온통 뒤흔들 만큼 위력적이어서 유권자의 관심도 매스컴의 초점도 몽땅 휩쓸 것이다. 야당에 빼앗겼던 판을 회수하는 와일드카드로 이만 한 것이 없다.
한나라당의 흥행은 이것으로 끝장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참신한 메뉴 없이 자질 시비로 점철된 이명박-박근혜 공방에 슬그머니 염증이 났고, 또 다른 흥행이 개막되기를 고대하던 참이었다. 이런 때 터져 나온 이 ‘시대적 프로젝트’는 8월 19일 야당 대선후보 탄생에 쏟아질 시선을 희석시키고 9월과 10월까지 대선 쟁점의 고삐를 잡아챌 것이다. 그것이 ‘김정일 정국’일지 ‘통일 정국’일지는 모르겠지만, 여권의 최대 약점이자 야당의 최대 호재인 ‘노 정권의 실책’이라는 뇌관을 대선정국에서 제거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말하자면, 남북 정상회담은 대선정국의 담론골격, 즉 프레이밍(framing)을 결정했다. 노 대통령은 유권자의 관심을 ‘실책’으로부터 대북정책과 미래 구도로 이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연결의 종착역, 황태자 책봉에 나설 것이다. 벌써부터 여권주자들이 자신의 공로를 애원하는 것을 보고 노 대통령은 모처럼 느긋해할 것이다. 평양에서 타전될 수많은 뉴스, 정상 간 합의, 후속 사업 등과 관련된 화려한 논의의 후광을 한 몸에 안을 황태자가 누구일까를 짐작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두 정상이 축배를 들 때 축사는 ‘통일을 위하여’겠지만, 나에게는 이렇게도 들린다. ‘황태자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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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창비 주간논평) 폭력 너머의 사회학을 위하여 / 2007년8월21일

김종엽 (한신대 교수, 사회학)
  
송호근 교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교수 문필가이다. 그의 신문칼럼은 그저 당면한 현실을 분석해서 전하는 여느 사회과학자들의 글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역사와 문학을 종횡하는 박람강기(博覽强記)도 눈부시고, 그것을 엮어내는 솜씨 또한 날렵한 검기(劍氣) 같은 문체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메씨지에 정치적으로 동의할 수 없을 때조차도 그의 글은 늘 읽을 만하고 느낌도 상큼한 편이었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을 주제로 한 지난주 중앙일보 칼럼 <황태자를 위하여>를 읽은 뒤에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결이 매끈해 보이는 그의 칼럼이 실은 유릿가루 섞은 풀을 먹인 듯 섬뜩하게만 느껴졌고,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 하는 반감을 누르기 어려웠다. 연전에 그가 황우석 교수를 비판하는 MBC <PD수첩>을 꾸짖다가 구설수에 휘말렸던 칼럼(중앙일보 2005.12.8)을 보았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말이다.
말이 나온 김에 첨언하자면, 당시 글을 처음 읽었을 때 고개가 갸우뚱했지만, 나중에 황우석 교수가 사기꾼이라는 게 밝혀졌을 때도 그의 칼럼에 큰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의 글은 같은 대학의 동료교수에 대한 정상적인 수준의 신의를 가진 사람이 그저 사태를 너무 빨리 단정하고 쓴 탓에 저지른 실수였을 뿐이다. 그래도 주요 일간지에 쓰는 칼럼인데 신중했어야 하지 않느냐는 비판을 할 수 있겠지만, 사람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고 실수에 너무 엄격한 것은 그것대로 악덕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번 글에도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이 기차로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회담 자체도 연기되었으며, 그로 인해 정상회담의 정치적 의미도 일정한 변화를 겪을 테니 너무 서둘러 써서 생긴 실수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실수는 넘겨버린다 해도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남북정상회담의 파급력을 막아라!  
모두가 알다시피 현재의 남북정상회담은 분명 국내정치적 파급력을 가지고 있다. 어쨌거나 이번 대선행로가 그럭저럭 순탄하다고 생각할 야당과 보수언론으로서 그런 파급력은 반가운 일이 아니다. 이런 파급력을 억누르기 위해 이들은 한편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이 정략적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그런 정략 운운은, 그렇다면 남북정상회담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라는 반문에 답하기 어렵다.
그래서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얻어내기 어려운 데까지 기대수준을 높이려고 했다. 어떤 성과가 나오든 그것을 평가절하할 틀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조차 효과적일지는 알 수 없다. 그만하면 이번 회담의 성과가 나쁘지 않다는 국민적 평가를 얻는다면 보수언론의 맹공이 그리 효과를 보기 어려우며, 더불어 이런 식으로 틀을 짜는 것이 어쨌거나 남북정상회담에 이목을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야당이나 보수언론으로서는 이런 상황이 까다롭게 여겨질 법하다.

보수층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은유법
송호근 교수는 이런 상황을 다루는 한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보수층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어휘를 늘려주고자 했다. 철도에 대한 낭만적 비유로 시작한 그의 칼럼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말하자면, 남북정상회담은 대선정국의 담론골격, 즉 프레이밍(framing)을 결정했다. 노대통령은 유권자의 관심을 '실책'으로부터 대북정책과 미래구도로 이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연결의 종착역, 황태자 책봉에 나설 것이다. 벌써부터 여권주자들이 자신의 공로를 애원하는 것을 보고 노대통령은 모처럼 느긋해할 것이다. 평양에서 타전될 수많은 뉴스, 정상간 합의, 후속사업 등과 관련된 화려한 논의의 후광을 한몸에 안을 황태자가 누구일까를 짐작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두 정상이 축배를 들 때 축사는 '통일을 위하여'겠지만, 나에게는 이렇게도 들린다. '황태자를 위하여'(<황태자를 위하여> 중앙일보 2007.8.14).
그는 '기차'와 '황태자 책봉' 사이를 '종착역'이라는 낱말로 잇는다. 세 단어의 연결은 의미심장하다. 칼럼 서두에서 기차는 "새로운 만남을 향해 떠나는 것"이라고 운을 뗐을 때 그는 기차를 둘러싼 수많은 은유 가운데 특정한 하나를 선택한 것인데, 이제 '목적'의 은유로도 쓰이는 종착역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동안 추진된 남북철도 연결사업의 의미를 처음부터 정상회담을 위한 '목적사업'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만일 노무현 대통령이 철도를 이용해 방북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스펙터클이 될 것이다. 그리고 송호근 교수는 이 스펙터클의 위험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을 미리 침식하고 있는 셈이다.

'황태자 책봉'이라는 부정적 연상고리
그런데 그에 의하면 종착역은 정상회담이 아니라 황태자 책봉이다. 황태자 책봉이란 말은 종착역이라는 단어보다 더 의미심장하다. 언뜻 송호근 교수는 여권의 차기 대선주자들이 정상회담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정략적인 면모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며 굳이 사회학적 폭로라고 할 만한 것이 못된다. 그는 분명 그 이상을 말하고 있다. 황태자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범여권 대선주자의 예상되는 행동에서 능동성을 박탈해버리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한 사유의 갈래를 따라가면 범여권 대선주자는 정상회담의 성과를 자신에게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과정 전체의 수동적 수혜자로 전락한다.
이와 더불어 황태자라는 단어는 폭로의 수사를 경유해서 모호한 정서적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황태자는 황제를 전제하며, 여기서 황제는 노무현 대통령인 듯하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에게 황제라는 이미지는 어울리지 않는다. 황제는 고사하고 대통령으로서 존경받을 만한 이미지를 구축하기도 힘겨웠던 인물이다. 오히려 이 단어가 오랫동안 보수언론이 즐겨 써왔던 부정적 이미지인 왕조국가로서의 북조선 그리고 아버지의 권력을 승계한 김정일 위원장의 이미지로 연결되고 있다고 한다면 과도한 해석일까? 그의 글은 김정일 위원장이 남한 여권의 대선주자를 황태자로 책봉한다는 식으로까지는 나가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김정일 위원장을 황태자 책봉의 조연으로 출연시킴으로써 그의 행동이 남한 내정에 간섭하는 것으로 파악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그런 연상의 흐름은 정상회담 전반에 대해 역겨운 감정을 자아낸다.

사회학, 깊이 있는 폭로의 학문
송호근 교수가 자아낸 이런 연상의 흐름은 고약하긴 하지만 은밀하고 복잡해서, 보수언론이 새로운 프레임으로 채택할 만한 선동적 간결함이 없다. 그러니 그의 글의 흐름을 비판하는 것이 정치적 우려 때문은 아니다. 내가 그의 글을 비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까닭은 그와 나 모두의 밥벌이 수단인 동시에 마음 깊이 사랑하는 사회학이라는 학문 때문이다.
사회학은 유난히 폭로적인 학문이다. 우리가 몰랐던 사실을 폭로한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사유의 틀과 언어의 선택과 그 사용에 깃든 조작과 은폐에 침투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아마도 사회학자가 쓰는 칼럼에 약간이라도 신문기자를 넘어서는 분석력이 들어 있다면, 그것은 이런 폭로의 깊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폭로하고자 하는 자가 자신의 폭로에 생기와 감정적 힘을 불어넣고자 은유를 남용하는 것은 자신을 새로운 기만의 출처로 만들 수도 있다. 나아가 어떤 사회적 대의도 행위자의 저의에 깃든 이익이나 권력 추구로 여기는 것이 사회성원 대다수에게 상식이 된 사회에서 폭로의 가치는 신중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라면 사회학은 상식화된 폭로작업으로 야기된 냉소주의의 일반화를 제어하는 데 기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송호근 교수의 이번 칼럼이 기차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기 때문에 나 또한 사회학자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또다른 철도의 비유를 들고 싶다. 오래전 막스 베버는 이해관심 또는 열정이 이념이나 가치와 맺는 관계를 기차와 전철수(철도의 선로를 바꾸는 사람)의 관계로 비유했다. 그에 따르면 ― 그리고 우리가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도 ― 인간이 행동하게 만드는 것, 기차를 움직이는 것은 고귀한 이념이나 대의명분이기보다는 사람들의 물질적 이익 그리고 정서적 열정이다. 하지만 종종 이념은 마치 철로의 방향이 기차의 행로를 규정하듯이 인간행동의 방향을 규정한다. 사람들의 이익과 열정이라는 에너지 없이 기차는 결코 움직이지 않겠지만, 기차가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는 물질적 이익이나 열정에 의해서만 규정되지는 않는다. 이익과 열정이 투쟁하는 장(場) 자체를 규정하는 것은 가치와 규범일 때가 많다.

정략이라는 상식적 폭로 너머를 기획하자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는 동기는 정략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정략적 자기이익과 열정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상회담 같은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오히려 반가운 것은 남북교류 확대와 정치·군사적 협력, 경제적 통합 강화가 어떤 정파의 이익이 되는 세력편성이 가능해졌을 만큼 우리 사회가 발전했다는 점이며, 정략적 정치계산과 열정이 전체 사회성원의 더 나은 삶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배수로를 찾았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학자 모두의 스승 막스 베버라면, 폭로를 심화하고 냉소를 뿜어낼 것이 아니라, 폭로할 것도 없이 번연히 드러나 있는 정략적 계산에 힘입어 달리게 되었지만 그것을 초월해 더 먼 길을 가게 될 기차의 행로가 좋은 방향이 되도록 조정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기차의 순항을 도모하기를 권할 것이다. 그리고 베버라면, 모든 사람의 공적 발언이 각자의 권력이나 이익 추구의 산물이라 폭로하는 데 대부분의 사회성원들이 숙달되어서 규범과 가치가 형해(形骸)화되어버린 사회에서 사회학은 폭로가 아니라 폭로 너머를 기획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2007.8.21 ⓒ 김종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