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눈박이 문화’와 대선
  
                                                   조광호/신부·인천가톨릭대 교수


모든 동물은 두 눈을 지니고 있다. 한 눈으로는 거리를 측정할 수 없을뿐더러 정확한 공간개념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한쪽 눈을 감으면 어지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도 예외없이 두 눈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동물과 달리 그 내면에 또 다른 두 눈을 지니고 있다. 인간 내면에 주어진 두 눈은 이성과 감성, 주관과 객관, 미와 추, 선과 악을 판별하는 능력이 되고, 그 눈은 마침내 한 인간이 지니는 고유한 ‘인격’이 된다.

  희랍신화에 등장하는 거인 폴리페모스(Polyphemus)는 아침·저녁으로 사람을 잡아 먹는 야수이다. 스페인 고야의 명작으로 거듭 태어난 ‘거인’ 폴리페모스는 ‘외눈박이’이다. 가장 비인간적이고 야비한 인간의 모습을 신화화할 때 ‘외눈박이’로 묘사했던 고대 희랍인들의 지혜는 참으로 놀랍다. 이기적 탐욕으로 인간이 내면의 한쪽 눈을 실명하게 되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인이 외눈박이가 되면 온 나라가 시끄럽게 되어도 모든 것이 남의 탓이라고 오히려 큰소리친다. 거대 기업이 외눈박이가 되면 모든 부를 자기 주머니에 넣으려고 온갖 부정을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없게 된다. 종교인이 외눈박이가 되면 마치 모든 진리를 자기가 독점한 듯 착각하여, 독선적인 인간이 되고, 이들이 권력에 잘못 맛들이면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는 복음선포가 아니라 오히려 인민의 아편이 되어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가 있다.

  ‘외눈박이’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은 물론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무례한 외눈박이들이 많이 사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행복할 수가 없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남을 배려하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움이 되는 지경에 이르는 ‘외눈박이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는 늘 불안하고 살벌한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출세를 위한 경쟁에 집중된 외눈박이 교육과 집단 이기주의 문화가 팽배한 ‘외눈박이 사회’의 특징은 모든 가치 기준이 ‘나의 이익과, 나와 얽혀 있는 집단에 이익’이 된다면 무슨 일이든 상관없이 모든 것이 용납된다.

  오늘 우리 사회가 온통 ‘외눈박이들이 득실거리는 사회’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드러나지 않을 뿐 우리 사회 저변에는 너무나 많은 ‘착한 이웃’들이 살고 있어, 오늘 이 사회를 지탱해 가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사회학자 랑케는 한 나라를 지탱해 가는 힘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니라 오히려 ‘그 나라 국민이 지니고 있는 도덕적 역량’이라고 했다. 이 역량으로써 획득한 ‘제3의 눈’을 통하여 미래를 가늠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창조적인 선진 사회로 입문하게 될 것이다.

  오늘로서 대선이 1주일이 채 남지 않았다. 눈 앞에 다가온 선거를 앞두고 내 주변의 많은 이들이 ‘찍을 만한 후보가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일은 ‘열 두 명의 후보자’들이 바로 오늘 ‘우리의 열 두 자화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면 그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투표하는 사람은 외눈박이 인간이다. 그는 ‘외눈박이 거인’을 뽑아 그 스스로가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출전 / 경향신문 2007년 12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