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금실 前법무장관이 변호사 시절 쓴 변론기다. 1997년 음란문서 제조 등의 혐의로 기소된 소설가 장정일의 변론을 맡았던 때를 회상하며 쓴 글이다. 이 글은 2002년 행복한 책읽기 출판사에서 나온 『우리시대의 인물읽기』 시리즈 1호인 ‘장정일편’에 실린 것을 토대로 했다. 2004년 대입 수시1 모집, 서강대 논술고사에서 제시문의 하나로 출제되기도 했다.

1. 장정일-소년, 혹은 스님 같은

2001년 8월 21일 서울에서 장정일을 만났다. 내가 변론을 맡았던 그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음란물여부에 관한 항소심재판이 1998년 2월에 끝났고, 그 무렵에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으니 근 3년만이었다. 잿빛 티셔츠에 행낭주머니 같은 가방을 어깨에 매었는데 원래 짧았던 머리는 더 짧게 깎았다. 그는 이마가 툭 튀어나오고 눈은 푹 들어가 둥그렇게 크다. 단단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얼마 전 뵈었던 서울의 큰 절 주지스님 얼굴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는 해인사 부근 산속에서 규칙적으로 시간을 쓰며 수행하다가 내려온 스님같은 느낌을 주었다.
처음 그를 만났던 때의 인상이 떠올랐다. 그가 1997년 1월 13일 기소된 후 혼자 재판받다가 징역 10월의 실형을 선고받고서 법정구속된 것이 1997년 5월 30일이었으니, 아마도 한 달쯤 뒤인 1997년 6월 무렵 서울구치소로 그를 찾아가 접견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결수들의 청승맞은 짙푸른색의 제복을 입고 있던 그는 무척 수줍은 듯 조용하며 말수가 적었다.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변호사가 건네는 말에 어눌하게 말을 아끼며 대답을 몇 마디 하였다. 그는 소년이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에 소년을 만나서 돌 던져 물이 번지듯 가슴속에 퍼지는 감동을 느껴 그 인상이 매우 오래갔다.
소년, 혹은 스님으로 겹쳐지는 그의 이미지는 나로 하여금 세계와 떨어져 있는 사람, 세계 안의 사람과 다른 눈으로 세계의 정체를 바라다보고 있는 사람으로 그를 읽게 한다. 내게 장정일은 글을 잘 쓰기 때문에 작가가 되었다기보다는, 세계 밖으로부터 안과의 소통의 방편으로 글을 선택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

2. 세계와 소통하는 길로서의 性/육체

내가 장정일을 이해한 방식에 따르면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그가 세계와 소통하는 하나의 길로 기능하는데, 그는 이 소설에서 육체적 성관계의 가장 밑바닥에까지 파고들어가는 극단적인 실험을 하고 있다. 소설의 줄거리를 짧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몰락한 조각가이며 유부남인 제이(J)가 18세의 여고생 와이(Y)를 만나서 성관계를 맺는다. 폰섹스, 구음성교, 제이의 와이에 대한 가학성교, 계간(鷄姦)-계간 후의 똥먹기로 전개되고, 급기야는 와이의 제이에 대한 가학성교로 관계가 전도된다. 제이의 친구 우리는 제이와 동성애적 관계를 맺다가 스스로 처녀성을 파괴한다. 와이는 리오데자네이루에 건너가서 남성들을 상대로 한 가학성교클럽에서 가상 여신의 역할(남성에게 가해하는 것)을 맡아 일하고, 제이는 부인에게 돌아가는데, 부인은 제이에게 “내게 거짓말을 해봐”라고 묻는다. 우리는 조각가로 성공한다.

이 소설은 더 이상 솔직하고 자세한 묘사는 있을 수 없다는 듯이 성관계를 하는 시간만큼 길게 이어지는 노골적인 묘사로 가득차 있다. 예컨대 그에 대한 기소 내용으로 문제가 된 대목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글 내용을 싣기가 조금 민망스러워 예로 든 것을 생략함. 원본은 첨부파일에서 보시길)

세계와 떨어져 있는 사람이 하필이면 이와 같이 세계 안 욕망의 저장고인 육체의 한 가운데 천착하여 그의 길을 닦고 있는 것은 매우 역설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것도 같다. 세계의 중심에 곧바로 뛰어들어 휘저어놓는 소년의 순진성이 발휘되는 방법 같기도 해서이다. 그러나 세계 안의 상식에 익숙하여진 사람들에게 갑자기 소년같은 표정으로 벌거벗은 몸을 들이밀어놓으면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이 발간되었던 1996년 10월 무렵의 신문자료들을 보면 대체로 곤혹스러움, 어찌 이리 뻔뻔스럽고 점잖지 못하게 노골적일 수 있나하는 불쾌감들이 나타나 있다.
장정일은 이 소설을 통하여 우리 사회에 하나의 화두를 던졌다. 이 소설은 음란한가 아닌가. 음란하다면 왜 음란하고, 아니라면 왜 아닌가.

3. 음란과 외설, 예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재판의 변론을 맡았던 당시에 나는 장정일이 던진 화두를 제대로 풀지는 못하였다. 검사가 소설이 명백히 음란하다고 주장하고, 판사도 음란물을 버젓이 내놓고 반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가둬놓은 상황에서, 나는 그를 변호하기 위하여 소설이 왜 음란하지 않다는 것인지 해답을 찾아야 하였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하여 ‘음란’과 ‘예술’의 개념 사이에서 헤매인 과정이 그에 대한 변론과정이었던 듯하다. 노골적이고 구체적인 성묘사로 가득 차 있고, 장정일 스스로 “자기모멸을 위하여 포르노의 양식을 빌어왔다”고 밝힌 작품을 눈앞에 두고 음란하지 않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예술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나는 “예술이냐, 외설이냐”하는 2분법적인 명제와 한참을 다투어야 하였다.
육체를 성적인 맥락에서 성적인 자극과 흥분상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 외설이라고 한다면, 예술이 그와 같은 표현형식을 사용할 때는 분명히 예술도 외설이 아닐 수 없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고정관념으로 고착화된 “예술이 아니면 외설”이라는 식의 개념정리는 그런 의미에서 잘못된 것이다.
육체는 성적으로 다루어질 자유를 가지며, 예술을 포함해서 사회의 모든 외설적 성표현물을 모조리 금기시할 수는 없다. 국가권력이 나서서 금기를 선언할 수 있는 외설의 범위는 그 가운데 범죄적 수준의 반사회성을 띠는 경우에 해당하는 성표현물들로 국한된다. 이점에서 외설과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은 의미가 달라진다.
소설은 법이 보호하는 예술의 자유의 보호영역에 속하고, 예술은 존재 그 자체로서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 예술은 현실을 반성하고, 현실의 보이는 것 그대로를 회의하고 정체를 뒤집어보는 실험의 성격을 갖고 있으므로, 예술적 실험은 본질적으로 기존가치, 질서와의 충돌을 내포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술이 지니는 하나의 본질적 기능임을 받아들여야 하고, 예술은 사회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외설적인 성표현물이라 하더라도 예술에 해당한다면 사회적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서 반사회적 범죄의 소산이라 할 수 없어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에 해당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이 해서 재판 당시 내가 도달한 생각의 끝지점은 장정일의 소설이 표현에서 외설(음란)이기는 하지만 예술이므로,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에는 해당할 수 없어 무죄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항소심에서는 그의 소설이 예술장르로서의 문학의 범주에 속하는지 여부를 문학평론가들에게 조회하였는데, 그 회답은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예술장르로서의 소설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이인화교수는 “음란성이 문제시되는 경우 그 표현의 음란 여부를 떠나 거울처럼 자기를 비춰봄으로써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바가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위 소설의 성애묘사는 스스로 성을 통한 자기모멸을 시도함으로써 경쟁사회로부터 면책과 휴식을 꿈꾸는 한 인간의 심리적 정황을 핍진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예술장르로서의 소설에 속한다”고 하였다. 황현산교수는 “엄밀한 의미에서 예술장르로서의 문학소설과 그렇지 않은 소설을 구분할 수 있는 준거는 없다. 다만 가치판단의 관점에서 성실한 문학과 불성실한 문학은 구분된다. 사회적으로 익숙한 사고방식과 기성논리에 의존하여 일반적 통념을 반성없이 되풀이함으로써 독자에게 영합하는 문학은 불성실한 문학이며, 인간의 내적. 외적 생활에 있어 사회적으로 은폐되어 있거나 왜곡되어 있는 사실들을 들추어내어 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결책에 접근하기 위해 새로운 언술체계를 만들어내려는 문학은 성실한 문학이다. 위 소설은 성실한 문학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도덕에서 특히 보수적인 우리나라의 법원이 음란성에 대한 평가에서 나와 같은 견해를 취하리라고는 처음부터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나의 변론기는 음란이라는 말 자체의 의미와,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과, 예술의 개념을 두고 무언가 산뜻하게 해명되지 않는 해답을 찾아서 도리어 나 자신에게 의문을 던지는 하나의 질문지 수준에 그쳤던 듯하다.
법원은 1997년 7월 23일 변호인의 보석허가청구를 받아들여 장정일을 석방하였다. 그는 1998년 2월 18일 항소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의 선고를 받았다. 상고심인 대법원은 2000년 10월 27일에 이르러 변호인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대법원은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이라 함은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과 선량한 성적 도의관념을 현저히 침해하기에 적합한 것을 가리킨다”고 정의를 내렸다. 또한 “문학성 내지 예술성과 음란성은 차원을 달리 하는 관념이므로 어느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에 문학성 내지 예술성이 있다고 하여 그 작품의 음란성이 당연히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 할 것이고, 다만 그 작품의 문학적·예술적 가치, 주제와 성적 표현의 관련성 정도 등에 따라서는 그 음란성이 완화되어 결국은 형법이 처벌대상으로 삼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법원은 장정일 소설의 3/4 이상이 폰섹스, 구강성교, 항문성교, 가학 및 피학적인 성행위 등 매우 다양할 뿐만 아니라 묘사방법도 노골적이고 구체적이어서 그러한 묘사부분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이 사건 소설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고, 특히 38세의 유부남과 18세의 여고생이 벌이는 괴벽스럽고 변태적인 섹스행각의 묘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 소설은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에 해당된다고 판단하였다.

4. 음란성 판단의 문제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관한 나의 변론이 외설(음란)이지만 예술작품으로서의 사회적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형법에서 말하는 반사회적인 음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로 요약된다면, 법원의 결론은 후자에 해당될 정도로 음란하다는 것이다. 법원이 취하고 있는 음란성 판단기준대로 성적 수치심과 성적 도의관념을 ‘현저히’ 해치는 성표현물이 반사회적인 ‘음란’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소설이 음란한가 아닌가의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회에 속한 사람들의 성적 수치심과 도의관념의 수준에 달려 있게 된다. 사람들이 수치심을 느끼고 부도덕하다고 여기면 소설은 음란한 것이지만, 같은 소설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와 같은 정도로 느끼지 않는다면 음란한 것은 아니게 된다. 이와 같은 판단의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폐해를 막기 위해서 외국의 경우에는 포르노그라피 자체를 내용의 강도에 따라 분류한다든가, 사회적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기준으로 도입하는 시도들을 하고 있으나, 그 분류의 기준, 가치여부를 따지는 것 또한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음란성 판단은 궁극적으로 그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무엇을, 어느 수준에서 음란하다고 느끼는가 하는 심정적 수위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결국 장정일이 던진 화두의 해답은 사람들이 소설을 음란하다고 느끼면 음란한 것이고, 음란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음란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고, 그의 소설은 묘사 그 자체로서 존재할 뿐, 음란 여부는 전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달려 있다. 내가 처음부터 일단 외설에는 해당한다고 접고 들어가게 된 이유도 그 정도의 묘사라면 사람들이 외설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나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것이다. 또한 나 또한 그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외설을 전제로 한 나의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에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재판이 끝난 후 3년의 시간이 지나 장정일을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그가 내게 주는 이미지 속에서 그 이미지와 연관하여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다시 더듬게 되었고, 순수로부터 세계로 이르는 그의 문제의식 선상에서 비로소 이 소설은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육체의 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며, 미래의 어느 시기에서는 음식을 먹는 일을 묘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수준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더 열린 사회가 올 것이라는, 장정일이 멀리 앞서가고 있는 작가라는 사실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5. 재판과정에서 장정일의 태도와 의미

소설이 음란한 것인지 여부에 관한 화두의 대답은 처음부터 장정일 자신의 손안에 쥐어져 있었다. 그는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육체와 육체의 부딛침과 섞임에 대하여 투명하고 냉정하게, 그것을 감싸는 문체의 수식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뢴트겐 사진을 펼쳐 보이듯 제시한다. 손바닥을 펼쳐보인 그의 손안에 아무 것도 없다. 음란성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다. 국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음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소설을 처벌한다.
마음이 음란해지는 것은 마음의 주인이 책임져야 할 일이지, 장정일의 책임이 아니지만, 소설 자체가 음란한 것도 아니지만, 그와 같은 원인을 제공하는 행위를 차단하려는 국가의지에 대하여 장정일은 거리를 두고 ‘사실’로 받아들이는 입장을 계속 취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음란성이 소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이 음란하다고 죄를 묻는 재판과정에서 단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소설은 음란하지 않았고, 그 재판은 소설 자체가 아니라 소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형법으로 재구성하는 문제였으므로 그가 개입하여 소설을 변명하는 것은 작가로서의 자신을 비하시키는 결과밖에 가져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재판전 검찰에서의 신문과정에서의 문답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문 : 피의자의 작품을 청소년들을 비롯한 피의자의 작품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인이 읽는다면 어떠한 영향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는가요.

답 : 만일 청소년들이 저의 작품을 읽는다면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의 작품은 성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작품이기 때문에…….

문 : 지금 여고생이나 여중생의 임신이 문제가 되고 있을 정도로 성의 무방비상태에 있는 미성년자들이 위 소설과 같은 음란한 내용의 책을 본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보았는가요.

답 : 미성년자들이 저의 소설을 읽는다면 분명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굳이 저의 소설이 아니더라도…….
1심 재판의 최후진술과정에서도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법원을 멸시하거나 저항하는 것도 아니며, 법원은 그럴 수밖에 없고, 그 또한 그럴 수밖에 없음의 병존적 상황이었다.
법정구속이 된 후에도 그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변호사를 선임하여 법률적인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주위의 설득이 필요하였다. 그는 법률적인 절차에 의하여 진행되는 과정이나 재판방식에 대하여서도 매우 예의바르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예술로서의 소설이 있는 위치를 한치의 흔들림 없이 장악하고 있되, 법률의 내부논리에서 법과 예술 사이의 간극을 메워나가야 하는 변호사의 위치와 역할 또한 개입하지 않고 잘 따라주었다. 증거조사를 위하여 문학평론가들을 찾아야 하였을 때, 다른 사건의 선례와 비교검토가 필요하였을 때에도 그 사람들에게 어떠한 불편함이나 피해가 없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보호하려는 마음씀을 보여주었다.

어느 날 항소심 재판을 마치고 법정 밖으로 막 나왔을 때, 대학생들로 보이는 청년들이 모여들었고, 그에게 싸인을 부탁하였다. 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거절하였다. 이 짧은 장면의 체험이 내게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사회전체가 주목하는 사건의 당사자인 작가로서 좀 어깨에 힘을 주거나, 자신이 당하고 있는 부당함에 대하여 큰 목소리로 항변하는 것이 보통의 사례들일터인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싸인을 거절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작품으로 말하는 작가이고, 세계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그의 기본태도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6. 장정일을 위하여

사람의 사회는 그침 없이 변화하고 무엇 하나 고정된 것 없다는 점에서 원천적으로 불안하고, 그러나 모여살기 위하여는 안정과 정착이 필요하므로 일정한 질서와 통제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그래서 불안과 안정성의 지향이 항상 2중적으로 존재하고 충돌하는 고통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다. 이 세계에서는 언제나 통제의 집중과 과도함으로 탄생한 국가권력의 억압성이 문제되어 왔다. 권력통제의 가장 직접적이고 근원적인 대상은 개인의 몸이다. 개인의 몸을 길들여야 순종하는 정신이 따라오고 질서는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권력과 개인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며 충돌하는 전장은 바로 개인의 육체 그 자체가 된다. 고문·학살·의문사와 같은 언어군은 이러한 육체에 가하여지는 국가권력의 부당한 통제를 표현하는 상징들이다.
육체는 권력에 길들여져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성의 관계망과 육체의 자유를 표현하는 쾌감은 철저히 통제될 필요가 있는지 모른다. 따라서 사회가 도덕의 이름으로 용인하는 범위를 넘어 육체의 이면으로 들어가 성관계를 헤집어놓거나, 쾌감을 확장시키는 어떠한 실험적 시도도 통제의 뇌관을 건드리는 가장 위험한 행위가 될 것이다. 장정일은 이 세계의 정체를 들여다보는 깨어있는 정신으로 바로 그 뇌관을 건드린 우리 시대의 유일한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육체와 성의 표현으로서의 언어는 가장 은폐된 하층의 수위에 있고, 점잖음·고상함과 천박함·불경함이라는 언어문화의 계급을 형성하고 반영한다. 성표현이 외설이냐 여부가 문제되었을 때 사람들이 선뜻 그 다툼에 뛰어들어 통제의 본질을 공격하고 드러내기보다는 뒷걸음치게 되는 것도 이러한 사람들에게 체화되고 입력된 성문화와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 자신이 장정일을 만나기 전에, 장정일을 만나서, 재판이 끝난 후에 성과 권력통제라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대립구조의 실체를 서서히 깨달아 왔듯이.
나는 모든 사물과 사람을 그의 이름으로 부르고-우리 사회 호칭의 복잡한 권위적 구조, 性器를 공개적으로 그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는 은폐성을 생각해 보라-, 가능한 한 육체가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놓여 원하고 충족하고 사랑하며, 서로가 타인의 육체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다. 아마도 이것은 나만의 꿈이 아니며, 삶에 지친 몸을 달래는 모든 사람이 밤마다 혼자 잠들면서 꿈꾸는 사회일 것이다.
앞선 사람인 작가로서 그와 같은 꿈에 도전한 장정일을 위하여, 이 사회의 모든 장정일을 위하여 나는 변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