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고 논란을 보며 평준화를 다시금 생각하다  

강태중 / 중앙대 교육학과 교수

외고가 끊임없이 뉴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명문 사립고와 대등하게 졸업생들을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시켰다는 뉴스가 있는가 하면, 국내대학 진학희망자를 위한 논술강좌를 학원에 맡기고 있다는 소식도 있다. 외고에 진학하기 위한 사교육 열기가 초등학교 단계에서 이미 도를 지나쳤다는 것이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지만, 사례가 드러날 때마다 거듭 뉴스가 된다. 김포외고에서 입학시험문제가 유출된 사건은 파장이 커서 한달이 지난 지금도 속보가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외고 뉴스가 많은 것은 그곳에 '탈'이 많아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외고에 대한 '말'이 많아서일 것이다. 탈로 치면 외고 못지않게 다른 학교에도 많을 것이다. 이를테면 많은 교육자나 연구자 들은 실업계 고등학교 교육을 걱정한다. 이제 '전문계'고등학교로 브랜드를 바꾸었지만, 새로운 브랜드 효과로 해결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고질적인 교육문제(교육 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문제)가 '실업계' 학교에 있다고들 말한다. 이 문제는 사실 외고의 것보다 규모도 크고 뿌리도 깊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업계 학교 얘기는 뉴스가 되지 못한다. 뉴스는 말이 많은 곳(큰 소리 나는 곳)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외고에 대한 피상적 논점

이렇듯 뉴스로 종종 조명받는다고 해서 그 문제가 '객관적으로' 심각하고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뉴스를 생산하고 또한 뉴스로 인해 생산되는 사회적 관심 자체가 그 문제를 실제 이상으로 비중있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사회적 관심으로부터 생겨난 담론의 틀 안에서 교육문제를 바라보고 논의하기 때문이다. 외고 문제에 대한 논란 역시 이런 맥락에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외고에 대한 뉴스는 그 내용이나 그에 대한 반응에서 두 편으로 갈린다.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이긴 하지만, 외고 '흔들기'와 '추켜세우기'(달리 보면 '평준화 흔들기')로 나뉜다고 하겠다. 외고가 낳은 문제를 두고는 학교 존폐를 들먹이고, 기릴 만한 성과를 두고는 '평준화' 존폐를 들먹이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식의 논점은 어느 방향이든 너무 피상적이다. 학교는 교육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많은 요인에 얽혀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마치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듯 여기는 것은, 즉 그 학교의 공과를 마치 학교만의 산물로 보는 것은 너무 유아적이다. 학교를 주체로 보는 데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면의 요인들을 함께 보지 않고는 사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김포외고의 입시문제 유출사건을 보자. 이는 과열된 경쟁이 낳은 문제이고, 그런 경쟁구조가 조장한 학교(또는 교사)와 학원의 유착문제라고 한다. 어떻게 보건, 이 사건에 대한 논란은 바로 외고 존폐논란으로 번졌다. 좁게는 해당 학교인 김포외고의 외고 지위를 박탈할 것인지 하는 문제로, 넓게는 앞으로 특목고 체제를 어떻게 수술할 것인지 하는 문제로 번졌다. 문제를 안고 있는 학교 하나하나가 교육적 암덩어리여서 그 덩어리를 도려내면 마치 우리의 교육이 건강해질 것처럼 논의가 돌아간다. 그러나 그런 학교를 없앤다고 해서 그런 학교를 형성시킨 우리 교육의 특질(인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인자는 우리의 교육인식이나 행위 안에 완고하게 살아남아서, 언젠가 다른 학교, 다른 제도를 통하여 또다른 문제로 부상할 것이다.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은 학교라는 표피 아래 숨은 원인을 찾는 데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평준화정책에 대한 신화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평준화정책에 대한 우리의 통념에 있다. 우리는 평준화정책을 학교별 학생구성에 관한 것으로 여긴다. 모든 학교 입학생이 성적에서 서로 비슷한 분포를 보이도록 배정하는 정책으로 보는 것이다. "왜 그렇게 배정하려고 하는가?"라는 근본취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의 통념은 아마도 학교 서열화를 막기 위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서열화는 사회적으로나 교육적으로 많은 부작용을 낳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교육정책이 서열화를 막는 데 우선적인 관심을 둔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교육정책의 기조는 모름지기 새로운 정책을 통하여 어떤 교육을 할 수 있을까와 관련되어야 할 것이다. 외양적인 학교 간판의 효과(서열화 효과)를 제거하는 데 일차적인 목표를 둔다는 것은 교육정책의 본연에서 벗어난 설정이다.

평준화정책이 단순히 학교 서열구도를 깨는 데만 의의를 지니는 것은 아니었다. 평준화정책은 물론 특정한 성향의 학생들이 특정 학교에 편중되지 않게 학생을 구성하려고 한 정책이었다. 이 점에서 분명히 입학성적이 기준이 되었던 당시의 학교서열을 깨는 정책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평준화정책의 의미는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학교서열을 깨면서 학생을 재구성함으로써 추구할 수 있는 더 근본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아니면,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 목적은 분리가 아닌 통합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평준화정책은 다양한 배경과 속성의 학생들이 서로 교유하고 이해하며 사회적 연대를 구축해갈 수 있도록 진보적인 교육환경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성취도나 잠재력이 좀 다르다고 캠퍼스를 갈라 수용하던 분파적 교육양식을 지양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교육지향은 우리나라에만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계층과 인종을 불문하고 국민적 공분모를 내면화시키기 위하여 '보통학교'(common school)의 이상을 추구해온 미국이나, 복선적 교육체제를 버리고 통합학교(comprehensive school)체제를 구축해온 영국도 모두 그런 이상을 추구했다.

이런 교육이상을 전제한다면 한 학교 한 학급의 학생구성을 다양하게 하는 것은 학교교육에서 기본적인 조건이 된다. 학교교육에서 다양한 문제들을 만나더라도 이 조건을 양보하지 않는 한도에서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평준화정책 도입 후 우리나라에서 제기된 문제들, 예컨대 이질적인 학생구성이 수업의 비효율성을 야기한다는 문제에 대해서도 학생구성의 다양성을 포기하지 않는 전제 안에서 대안을 찾아야 마땅하다. 학교별로 비슷한 학생을 모아놓는 방향으로 회귀하는 방안은 고려 밖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이런 원칙적 기대는 바로 무너졌다. 평준화정책은 그것이 수월성을 추구하는 데 장애가 되고 '특수목적'의 인재(또는 영재)를 키우는 데 장애가 된다는 상식적인 반론에 쉽게 무너졌다. 평준화정책을 보완한다는 취지로 채택한 방안은 다름아닌 우수한 학생들을 별도로 모집하는 학교를 세우는 것이었다. 외고도 이런 보완책의 연장에서 생겨났다.

'분류'가 아닌 '통합'이 교육의 이상이다

우리 사회에서 평준화정책의 근본은 왜 그리 쉽게 유실되었는가? 아니면 그 근본이 아예 서 있질 않았던 것인가? 학생구성이 다양한 통합적인(평준화된)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어째서 그리 쉽게 받아들여졌는가? 평준화정책을 보완한다는 대안이 평준화된 학교를 전제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준화 노력을 되돌려버리는(평준화되지 않은 학교를 다시 만드는) 방식으로 구성되는 사태가 왜 그리 자연스럽게 일어났는가?

이 질문들은 아직도 유효하다. 지금도 우리는 평준화문제를 특목고 설립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또는 특목고를 없애는 것이 평준화정책의 복원이라는) 식의 통념을 가지고 있다. 평준화정책에 함축되어 마땅히 구현되었어야 할 교육이상(다양한 개인들을 조화롭게 성장시키려는 교육이상)은 이런 통념의 안중에 없다. 이 상태에서 외고 논란은 어느 쪽으로 기울건 무의미하다. 그 통념이 유지되는 한, 외고를 없애고 말고는 우리 교육의 본질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특목고' 간판을 가진 학교라면 더 나은 교육을 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고 달려드는 맹목성은 그 통념을 자양으로 삼아 굳건하게 버틸 것이다. 특목고 간판을 부숴버린다고 해서 그 맹목성이 함께 사라질 리 만무하다. 이렇게 완고한 우리 사회적 인자는 새로운 '간판'을 건 학교를 다시 만들어낼 것이다.

실제로 유력 대선후보들의 공약에는 이미 이런 조짐이 들어 있다. 그들은 자립형이니 특성화니 하는 말로 포장하며 '특별한' 학교를 많이 세우겠다고 그 인자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국가는 학교가 사람을 분류하기보다 통합해줄 수 있을 때 바로 설 수 있다. 보통교육(평준화)의 이상은 지금도 수호해야 할 가치이다.

출전 / 창비주간논평. 2007-12-11 오후 6:21:14 Comments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