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남주 / 성공회대 교수, 정치학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부터 20년이 경과한 현재 한국사회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과거로의 회귀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선국면이 본격화되기 이전에 진보개혁진영 내에서 실패한 정부에 대한 정권교체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에 부합한다는 주장이 확산되었던 배경에도 이같은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번 대선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총선, 지방자치단체선거 등의 정치과정은 일정에 따라 진행될 것이고, 이번에 패배한 세력도 다음 선거에서 재기의 기회를 노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현정부의 실책을 인정하고 차별화된 정책과 노선으로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한다는 주장은 형식논리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최근 BBK사건의 처리과정은 이러한 믿음이 지나치게 순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BBK라는 경제 사기사건에 대선의 운명이 좌우되는 듯 보이는 것이 비극이기는 하지만, 그와 관련한 여러 의혹들이 어떻게 처리되는가는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의미를 가질 수 있기 위해서나 실질적 민주주의를 확보하기 위해서나 검찰과 사법부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한데, BBK사건의 처리과정은 이러한 믿음에 커다란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BBK사건과 검찰의 편파수사

검찰은 BBK와의 관계에 대한 이명박 후보의 말바꾸기를 뒷받침하는 각종 증언과 증거자료, 검찰도 확인한 도곡동 땅 판매대금이 다스로 유입된 것 등과 관련한 각종 의혹을 전혀 건드리지 않고 김경준 공략에만 전력을 기울인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몇년 전 프린터 기종까지 확인하며 이명박 후보에게 면죄부를 주려 한 노력(이에 대해 김경준은 실제 계약서가 작성되었던 때는 새로운 프린터가 있었다고 해명했다)에 비해, 이명박 후보 측과 관련된 의혹을 파헤치기 위하여 노력했다는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수사의 편파성은 검찰의 발표에 대해 대다수 국민들이 불신을 표명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여전히 이러한 불신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에리카 김에 대한 범죄인 인도요청을 시사하는 등 김경준 측에 대한 공격에 전념하고 있다.

현재 검찰수사의 잘잘못과 관련하여 시민사회와 정치세력들이 많은 문제제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구체적인 내용을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의 이러한 행위가 그동안 어렵게 진전되어온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전조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은 반드시 강조될 필요가 있다.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고 여러 의혹이 구체적으로 제기되어온 사안에 대하여 검찰이 독단적 행위를 한다면, 앞으로 어떤 다른 문제들에 대해 검찰의 공정하고 객관적인 조사가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누가 한국 민주주의의 불가역성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현정부 심판론이 간과하고 있는 문제들

더욱 우려가 되는 것은 이러 변화가 개별적이고 우연한 사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보수언론에서는 민주주의의 성과에 대한 지속적 공격을 가해왔으며, 최근 삼성 비자금 관련 논란이 보여주는 것처럼 시장경제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위해 최소한의 투명성을 재벌에 요구하는 목소리를 길들이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해왔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해방후 40여년 동안 민주주의를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보장을 완벽하게 거부해온 세력이 여전히 강력하게 존재하며, 이들이 불과 20년을 갓 넘은, 그것도 힘겨운 발걸음을 거듭해온 민주주의를 무화할 가능성은 매우 현실적인 것이다. 즉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수구동맹을 만들어내기 위한 조건들은 곳곳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번 대선을 맞이하여 본격적 가동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은 이번 대선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절차적 민주주의가 제도화되고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다른 나라의 경우와는 분명히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번 대선은 정부의 업적에 대한 국민들의 심판이며 실패한 정치세력은 새로운 노선으로 다음 선거에 임하면 된다고 자위하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이다. 단적으로 앞으로 수구적 정치·경제·언론권력 사이의 공고한 공조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선거가 과연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가 문제로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는 그동안 노무현정부와의 관계 혹은 이념적 경향의 차이 등을 불문하고 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이를 정책화할 수 있는 정치세력으로서 진보개혁세력이 국민들에게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정치국면에서 핵심적 문제는 어떻게 현재 위협받고 있는 우리 민주주의의 성과와 가치를 지키고 이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나갈 것인가에 있다.

2007 대선, 민주주의의 전진이냐 후퇴냐

일주일도 남지 않은 이번 대선에서 극적인 역전의 가능성을 운운하는 것이 점차 비현실적으로 되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관전평의 정확성을 과시할 상황도 아니다. 역사현장에 서 있는 사람들로서는 한줄기 희망이 있더라도 이를 위해 애쓰고 국민들의 판단을 기다리는 것이 정도(正道)일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도 여권후보의 단일화는 여전히 중요한 과제이다. 현재 단일화와 관련하여 가치의 차이 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되기도 했으나 가치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의 성과를 지켜나갈 수 있는가 여부이다. 이러한 기대에서 벗어나는 그리고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후퇴를 용인하게 만드는 그 어떤 가치도 대선은 물론이고 그후의 국면에서도 국민의 지지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출전 / 창비주간논평. 2007-12-11 오후 6:23:05 Comments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