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석유 한 방울까지 사라진 뒤…

현재 ‘석유의 정치학’대로라면 탱크 움직일 석유가 없어도 전쟁이 벌어질 것

                                    김재명 성공회대 겸임교수·정치학 박사kimsphoto@hanmail.net

미국은 인구가 3억 명으로 전세계 인구의 5%를 이루고, 세계 석유소비량에서 4분의 1을 차지하는 석유 과소비 국가다. 그래서 석유에 중독된 나라라는 소리를 들어왔다. 문제는 세계 최대 석유 수요처인 미국의 사정에 따라 국제유가가 널뛰기를 거듭하고,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마저도 그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국제유가, 최악의 시나리오대로
지난 8월 말 미국의 원유 및 휘발유 재고량이 줄어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국제유가가 큰 폭으로 올랐다. 뉴욕상업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서부 텍사스산 원유나 런던 국제석유거래소의 북해산 브렌트유는 배럴당 70달러를 넘는다. 우리나라 원유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동산 원유의 기준이 되는 두바이유도 65달러를 넘는 수준이다.

△ 미국의 이라크 침공 전인 2002년까지만 해도 국제유가는 배럴당 20달러 선이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뒤 국제유가는 불과 4년 사이에 3배 넘게 뛰었다(사진/ 로이터연합)

유가와 관련해 더 근본적으로 지구촌 서민들에게 속상한 사실은 무엇일까? 석유를 노린 미국의 이라크 침공(2003년 3월) 뒤 국제유가가 불과 4년 사이에 3배 넘게 뛰었다는 것이다. 2002년까지만 해도 국제유가는 배럴당 20달러 선이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거의 기정사실처럼 여겨지던 2002년 말, 워싱턴의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한 연구보고서를 내놓았다. 보고서는 “미군이 이라크를 침공, 점령한 뒤 치안을 바로잡지 못하고 혼란이 이어질 경우 중동의 원유 생산량을 떨어뜨려, 배럴당 20달러 선이라는 장기적 균형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불행히도 현실은 보고서가 짚은 최악의 시나리오대로 펼쳐지고 있다. 일부 석유전문가들은 중동 지역의 정치적 불안이 깊어지면 배럴당 100달러가 가능하다고 전망한다. 문제는 중동이 안정을 찾는다 해도 유가는 곧 치솟을 것이란 사실이다. 앞으로 40~50년만 지나면 석유가 고갈될 것이란 전망에서다.
18세기 말 영국의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는 <인구론>에서 암울한 예언을 남겼다. “식량 공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데 비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결국 인류는 전쟁과 굶주림과 질병에 휩싸여 고통받게 될 것이다.” 인류에겐 다행스럽게도 맬서스의 예언은 들어맞지 않았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60억 명을 넘어섰지만, 맬서스의 예상과는 달리 식량생산 증가율이 인구 증가율을 앞질렀다. 식량 생산 기술이 발전한 덕분이다. 이를테면 1950년에 비해 지금의 세계 인구는 2배로 늘었지만, 식량 생산은 3배가 늘었다. 그래서 맬서스가 걱정한 대로 전 지구적인 규모의 기아 사태가 일어나진 않았다.
그런데 석유는 식량과 다르다. 석탄, 가스,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들은 한 번 쓰면 더 이상 재생산되지 않고 사라지고 만다. 우리 인간이 생산 활동을 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으려면 계속 페달을 밟아줘야 하듯, 산업시설들을 돌리려면 연료를 때야 한다. 그러나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가 무진장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산업기술의 발달로 열효율을 혁신적으로 늘릴 수도 있겠지만, 석유는 언젠가는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점은 언제쯤일까. 석유지질학자들은 2008년에서 2010년부터 석유 생산량이 해마다 줄어들다가 앞으로 40, 50년만 지나면 석유시대는 종말을 고할 것이란 전망을 내놓는다. 매출액 세계 1위의 영국 석유회사인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은 한 연구보고서에서 2010년부터 석유 생산량이 줄어들기 시작해 2030년 무렵이면 지구상의 석유가 상당 부분 고갈될 것으로 내다봤다. 우리에게는 우울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지금껏 ‘오일 달러’의 단맛을 누려온 중동 사람들도 언젠가는 석유가 바닥날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세계 최대의 석유 산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람들 사이에 이런 얘기가 나돈다. “내 아버지는 낙타를 타고 다녔고, 나는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내 아들은 전용기를 타고 다니겠지만, 내 손자는 다시 낙타를 타게 될 것이다.” 그저 웃고 넘길 얘기는 아니다. 세계 제2위의 석유자원을 지닌 이란이 핵발전소 건설에 열을 올리는 것도 미국이 의심하듯 핵무기 개발이 아니라 “멀지 않은 시점에 다가올 석유고갈 시대를 대비해서 핵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장기적인 국가에너지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란 주장이다.
이란이 핵에 열 올리는 이유
대체에너지를 찾지 못한 채로 지구상에서 석유가 바닥난다면 어찌될까? 유전지대가 고갈된다면 석유를 에너지로 사용하는 대부분의 경제활동은 마비될 것이다. 석유의 효용성이 드러난 20세기 초부터 모든 국가들이 값싸고 안정적인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비롯한 모든 수단을 써온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석유안보’(Oil Security)라는 용어는 석유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석유가 없다면 병력을 수송할 군용차량이나 탱크, 전투기를 움직일 수도 없으니 전쟁다운 전쟁을 치를 수도 없다. 그렇다고 전쟁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기뻐하긴 이르다. 석유고갈 시대엔 저마다 석유를 확보하려고 전쟁을 더 벌이게 될 것이다. 마지막 석유 한 방울이 소비된 뒤엔? 핵에너지나 다른 대체에너지로 전쟁은 끊임없이 벌어질 게 틀림없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정글의 법칙이 작용하는 국제체제 아래선 유엔이 아니라 그 무엇도 전쟁을 막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