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 세도가의 범죄 / 이상수

세종 때 형조판서 서선의 아우이자 좌의정 황희의 사위이던 서달은 신창현을 지나다 고을 아전의 대접이 소홀하다는 이유로 잉질종 등 종 3명을 시켜 그 아전을 잡아오도록 했다. 잉질종 등은 길에서 아전 하나를 잡아 그 아전의 집을 대라고 족쳤다. 이를 본 아전 표운평이 말리자 잉질종 등은 표운평을 두들겨 패 서달에게 끌고 왔다. 서달은 영문을 모르는 표운평이 일부러 모르쇠한다고 여겨 죽도록 팼다. 그 이튿날 표운평은 죽었다.

표운평의 가족은 서달 등을 고소했다. 서달의 장인 좌의정 황희는 마침 고향이 신창이던 우의정 맹사성에게 ‘선처’를 부탁했다. 맹사성은 표운평의 형을 불러 합의를 종용했다. 최고 권력자들이 나서자 수사 책임자들은 주범 서달을 빼돌리고 종범 잉질종에 모든 죄를 뒤집어씌웠다. 사건을 뒤집은 건 세종이다. 조사 보고서를 읽던 세종은 앞뒤가 안맞아 의금부에 재수사를 명했다. 결국 사건을 은폐하려 한 황희 맹사성 두 정승이 파면당했고 형조판서 서선은 직위해제당했으며, 사건 은폐에 동조한 형조참판 신개, 형조좌랑 안숭선, 대사간 조계생은 귀양을 떠났다. 세도가의 파렴치 범죄를 은폐하려다 한 나라의 사법 수뇌부가 줄줄이 날라간 이 사건은 <조선왕조실록> 세종9년 6월21일 기사에 실려 있다.

정약용은 <흠흠신서>에 ‘권세가의 범죄’ 사례를 따로 모아두고 있다. 여기서도 권력을 이용한 범죄 은폐 기도가 늘 문제다. 권세가들의 이런 속성은 오늘날도 조선시대와 달라진 게 없다. 김승연 한화 회장의 폭행 사건을 알고서도 최기문 전 경찰청장의 청탁 전화 한마디에 ‘봐주기 수사’로 일관한 경찰 수뇌부가 25일 줄줄이 옷을 벗었다. 경찰만의 불명예가 아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수사를 밀어붙일 수 있는 강직한 소신파가 경찰 수뇌부에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 대한민국 전체를 우울하게 만든다.

이상수 기자 lee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