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 기본 능력을 알아보기 위한 글쓰기


※ 문  제

다음 두 글에 제시된 삶의 방식을 비교하고, 그것이 오늘날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한 대안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하여 논술하시오. (여기서 ‘비교’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씀. / 두 글에 제시된 삶의 방식이 대안으로 부적합하다고 판단할 경우 그 이유를 밝히고 자신의 견해를 개진할 것)

<가>
지난 겨울부터 산 아래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기름 보일러를 장작이나 연탄 보일러로 개조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어려운 경제사정은 산촌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어제 장터에서 만난 김씨는 보일러를 고치고 나니 기름 값에 쫓기던 마음이 한결 놓인다고 하면서, 장작 타는 냄새에 옛 정취를 느끼게 되더라고 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시련은, 인과관계로 이어지는 전체적인 흐름으로 볼 때 고갈되고 탕진된 민족의 에너지를 재충전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어떤 고난도 그 뜻을 이해하면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지혜와 힘이 생긴다.
복진타락(福盡墮落). 복이 다하면 굴러 떨어진다는 옛말이 있듯이, 우리는 경제성장의 흐름을 타고 소중하고 귀한 것을 등진 채 함부로 버리면서 잘못 살아왔다. 가진 것이 늘어 편리해진 반면 인간의 정신과 덕성은 말할 수 없이 피폐되었다. 전통적인 우리들의 아름다운 인정과 풍습이 사라지고 민족의 기상도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졌다. 안으로 자율적인 능력을 잃으면 밖에서 타율적인 제재가 가해지는 것이 우주의 흐름이다. 이래서 재충전의 기회가 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자리를 잃으면 일거리를 찾아야 한다. 일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삶이 권태롭거나 무료하지 않다. 꿈과 희망의 자리에 한탄과 원망과 후회가 들어설 때 우리는 늙고 병든다. 체면이나 일의 대가를 따지지 않는다면 일거리는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보다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일자리가 있고 나서 일거리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과정에서 일거리를 찾아낸다면 바로 그것이 내 일자리 아니겠는가.
생각을 돌이켜보자.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으니 가난한들 무슨 손해가 있으며,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으니 부유한들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우리는 벌어들이는 수입 안에서 살면 된다. 할 수 있다면 얻는 것보다 덜 써야 한다. 절약하지 않으면 가득 차 있어도 반드시 고갈되고, 절약하면 텅 비어 있어도 언젠가는 차게 된다. 덜 갖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덜 갖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더 많이 존재할 수 있다.
오늘과 같은 경제난국에서 우리가 크게 각성할 일은 그 동안 소유와 소비 지향적인 삶의 방식에서 존재 지향적인 생활태도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직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이다.
우리들의 직위나 돈이나 재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따라 삶의 가치는 결정된다.
현실이 곧 우리의 스승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에게 오늘과 같은 시련이 없다면 우리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할 때, 우리 자신과 후손들의 건전한 삶을 위해서라도 마땅히 거쳐가야 할 관문이라고 여겨진다.
소욕지족(少欲知足).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크고 많은 것에서보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있다.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면 그 욕망을 채울 길이 없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스며 있다.
시작이 있는 것은 반드시 그 끝이 있다. 오늘의 어려움을 재충전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가 지닌 무한한 잠재력을 일깨울 수 있다.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는 법이고 낡은 문이 닫히면 새 문이 열리게 마련이다. 얼어붙은 대지에 봄이 움트듯이 좌절하지 말고 희망의 씨를 뿌리자.
                                                              - 법정, 「가난을 건너는 법」에서

<나>
우리는 모든 일들에서 원칙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썼다. 우리가 처음에 십 년 계획을 세우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우리 삶의 중심 원칙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하나, 우리가 먹고사는 데 필요한 것을 절반쯤은 자급 자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이윤 추구의 경제에서 할 수 있는 한은 벗어나기를 희망한다.
대공황은 몇백만이 넘는 가장들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사실 이것은 시장에서 생필품을 사다 쓰는 사람들을 늘 위협하고 있는 문제였다. 일당이나 월급을 받는 직장인들은 스스로의 일을 갖고 있지 못하다. 자기들과 상관없이 경제 정책이 결정되고, 정책을 수행하는 사람을 자기 손으로 뽑지도 못한다. 다시 말해 이 때의 수많은 실업자들은 자기 잘못으로 일자리를 잃은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모든 생필품과 살림살이들을 돈 주고 사야만 하는 경제 구조 속에서 그이들은 직장을 잃은 것이다. 수입은 끊겼지만 먹고 입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다 보니 모아놓은 돈은 바닥났고, 결국 그이들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이렇듯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 구조 속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그 두려운 일들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실현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내야만 했다. 우리가 생각해 낸 대안은 절반쯤은 자급 자족하는 생활이었다.
둘, 우리는 돈을 벌 생각이 없다. 또한 남이 주는 월급을 받거나 무언가를 팔아 이윤을 남기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바람은 필요한 것들을 될 수 있는 대로 손수 생산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는 것이 일차 목적이다. 한 해를 살기에 충분할 만큼 노동을 하고 양식을 모았다면 그 다음 수확기까지 돈 버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돈을 번다’거나 ‘부자가 된다’는 생각은 사람들에게 매우 그릇된 경제관을 심어 주었다. 우리가 경제 활동을 하는 목적은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라 먹고살기 위한 것이다. 돈을 먹고 살 수는 없으며, 돈을 입을 수도 없고, 돈을 덮고 잘 수도 없다. 돈은 어디까지나 교환 수단일 뿐이다. 식의주(食衣住)에 필요한 물건을 얻는 매개체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이지 그것과 맞바꿀 수 있는 돈이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필요한 현금에 맞추어 돈을 벌려고 했다. 필요한 것이 마련되었다고 판단되면, 그 해의 남은 시간 동안에는 더 이상 농사를 짓지도 않았고 돈을 더 벌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먹고사는 것만 해결하고자 했으며, 이렇게 일단 기본 생활 수단이 마련되면 다른 일들에 관심을 돌려 열중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진 것은 사회 활동, 그리고 독서와 글쓰기와 작곡 같은 취미 생활이었다.
셋, 우리는 모든 일에 들어가는 비용을 우리가 가진 돈만으로 치를 것이다. 은행에서는 절대로 돈을 빌리지 않을 것이다. 땅이나 집을 담보로 넣어 융자를 얻은 뒤 이자를 갚느라 허덕이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경제 구조에서도 돈을 빌려주는 사람들은 배를 두드리며 편히 산다. 개인이든 은행 같은 기관이든, 돈을 빌려주고 담보를 잡으며, 이자와 경매 처분으로 얻는 수익금으로 살을 찌운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들은 무엇을 생산하는 일에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으면서 안락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길 수 있다. 한편 돈을 빌려다 쓰는 생산자들은 이자를 꼬박꼬박 내야 하며, 그렇게 하지 못하면 자기의 모든 재산을 잃는다. 대공황 때 몇천 명에 이르는 농부들과 가장들이 자기들이 가진 모든 것을 잃었다.

우리는 어느 순간이나, 어느 날이나, 어느 달이나, 어느 해나 잘 쓰고 잘 보냈다. 우리가 할 일을 했고, 그 일을 즐겼다. 충분한 자유시간을 가졌으며, 그 시간을 누리고 즐겼다. 먹고살기 위한 노동을 할 때는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결코 죽기 살기로 일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더 많이 일했다고 기뻐하지도 않았다. 사람에게 노동은 뜻 있는 행위이며,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일이고, 무엇을 건설하는 것이고, 따라서 매우 기쁨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요일이 되면 평소와는 달리 먹고살기 위한 아무 노동도 하지 않고 아무 계획도 없이 하루를 보냈다. 일요일 아침에는 대개 음악을 감상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종종 함께 모여 토론을 벌였다. 누군가 소리내어 책을 읽기도 했는데 그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나무 열매를 쪼개거나 콩 껍질을 벗겼으며, 바느질이나 뜨개질 같은 자질구레한 자기 일을 하기도 했다.
                                      - 헬렌 니어링, 스코트 니어링, 󰡔조화로운 삶󰡕에서 (발췌 수록)

출제 의도 및 문제 해설

이 논제는 논리적 글읽기 능력과 글쓰기 능력, 합리적 문제해결능력을 종합적으로 점검하기 위한 방향으로 출제하였다. 유사한 현실상황에 대하여 일견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글을 비교 평가하도록 함으로써, 주체적 독해력과 현실 정합적 판단력을 측정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그에 대한 글쓰는 이 자신의 대안을 논술하게 함으로써 문제에 대한 주체적․합리적인 해결능력을 점검하고자 하였다. 그 해결의 방향과 관련하여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둠으로써 글쓰는 이의 창의적 사고력이 발현될 수 있도록 한 것도 이번 문제에서 주목하고 있는 점이다. 글쓴이 개개인의 고유한 가치관이 어떤가 하는 것은 특별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제시문 (가)는 법정 스님의 수필 「가난을 건너는 법」('오두막 편지', 이레, 1999)이고, (나)는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 부부가 함께 쓴 '조화로운 삶'(류시화 역, 보리, 2000)의 일부분을 발췌하여 편집한 것이다. 둘 다 대중성과 함께 사상적 깊이를 갖추고 있는 글이다.
두 글은 현대 산업사회 또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생한 사회․경제적 상황을 배경으로 삼아 대안적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위기 상황을 배경으로 삼은 (가)는 마음(소유욕)을 다스리는 것을 문제에 대한 대처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개개인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지는가 하는 데 따라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시각이다. 그 대신 이 글에서는 사회․경제적 체제 자체에 대해서는 특별히 문제삼고 있지는 않다. 이에 비하여 미국의 경제 대공황을 배경으로 삼은 글(나)에서는 자본주의적인 이윤 추구 및 잉여자본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으면서 다분히 자본주의 체제에 반하는 삶의 방식을 대안으로서 내걸고 있다. 특히, 단순한 방안 제시에 그치지 않고 직접적 실천을 통해 그 현실적 가능성을 확인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 주목되는 점이다. 이와 같은 차이점과 함께 두 글은 현대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하여 현대인의 지나친 욕망(특히 부(富)에 대한)을 경계하면서 근검과 절제의 삶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공통점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두 제시문에 담긴 이러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바르게 파악하고(이와 다른 방식의 해석도 가능하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주체적․비판적으로 소화해내는 가운데 나름의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글을 작성하였다면 높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반면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거나, 자기 자신의 견해를 근거에 입각하여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한 글은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모범 글1 >

현대의 사회 경제적 상황은 물신주의와 비인간화로 규정될 수 있다. 인간을 위한 하나의 유용한 도구일 뿐인 돈이 도리어 인간을 옭죄고 구속하는 배금주의는 현대인이 풀어야 할 난제의 하나이다. 크게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구조조정의 문제에서 작게는 사소한 인간적 배신, 사기, 협잡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돈의 질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돈의 질서에 대한 전면적 성찰을 강요하고 돈의 질서와 바람직한 삶의 구성이라는 문제가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해준다.
(가)와 (나)의 제시문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점은 정신적 가치를 물질적 가치에 대비시키고 전자를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바람직한 삶이 물질보다는 오히려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환기시키고 있다. 그 정신적 가치란 (가)에서는 소욕지족, 즉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존재지향적인 생활태도를 가져야한다는 것으로 나타나고 (나)에서는 필요한 만큼의 자급자족, 그를 통한 정신적 평화로 제시되고 있다. 이 두 가지 삶의 방식은 둘이지만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그것은 돈의 질서보다는 정신적 만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
반면에 두 제시문은 중요한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가)의 제시문이 시장경제원리의 틀 안에서 삶의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면 (나)의 제시문은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가)가, 돈의 질서가 아무리 인간을 배반한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정신적 가치를 지켜내고 펼쳐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적극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면, (나)는, 그 삶의 방식이 비록 완전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이 기존 체제 내에서의 변화를 꾀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도피적인 삶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가)가 절약과 절제를 통해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고 그리하여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는 적극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면, (나)는 비현실적이라고도 여겨질 수 있는 방식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극적인 삶을 표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보다는 (가)의 삶의 방식이 돈의 질서 앞에 선 우리가 소중하게 지켜내야 할 방향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돈의 질서에서 떠날 수도 없고 떠나서도 안 된다. 비바람 속에서 피는 꽃이 더욱 아름답고 더러운 진창에서 핀 연꽃이 더욱 화려한 법이다. 비온 뒤에 날이 개고 땅이 굳듯이 시련은 시련의 한복판에서 이겨내야 한다.    


<모범 글2 >

오늘날의 사회와 경제는 여러 측면에서 심대한 문제를 안고 있다. 자본과 이윤에 대한 끝없는 추구는 인간을 돈의 노예로 만들었고, 부의 불공평한 분배는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 문제를 증폭시키고 있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세계 경제는 호황과 불황 사이를 춤추면서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글 (가)와 (나)에는 현대의 사회 경제적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과 함께 나름의 해법이 제시돼 있다. 두 글은 공통적으로 부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경계하면서, 욕심을 다스리고 절제하는 방식의 삶을 천명하고 있다. 자아의 결단을 중시하는 관점이다. 그러면서도 두 글의 시각에는 차이가 있다. (가)에서 객관적인 조건에 대한 별다른 고려 없이 개개인의 ‘마음가짐’의 변화를 내건 데 비하여, (나)에서는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에서 찾으면서 그 객관적 조건을 변화시키는 방향의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이 둘 중에서 대안으로서 더욱 의미 있는 것은 (나)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각자의 마음가짐이 훌륭한 삶을 위한 중요한 조건임은 분명하지만, 객관적 조건에서 연유한 문제가 주관적 결단을 통해 해결될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그것은 상황에 대한 순응을 통하여 모순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이에 비하면 (나)는 개인의 결단과 더불어 객관적 조건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와 달리 문제의 본질에 훨씬 깊이 다가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의견의 제시에 그치지 않고 실천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도 높이 살 만한 사항이다.
(나)에 대하여 그러한 특수하고 일탈적인 차원의 저항이 이 거대한 세상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적 시각이 가능할 것이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문제를 바로 파악하고 거기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소중한 일이다. 그러한 도전을 통해 세상은 바뀔 수 있다. 만약 현 상황에서 이런 식의 도전이 다 멈춰 버린다면, 앞서 말한 사회․경제적 모순은 더더욱 심화될 것이다.
니어링 부부의 도전은 보나마나 실패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함부로 예단할 일이 아니다. 적어도 그 삶의 방식이 그들 자신에게 있어 의미있게 실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과연 그러한 삶의 방식이 전체 사회 차원의 대안이 될 수 있을지는 바로 우리가 검증해야 할 몫이다. 현실상황을 직시하는 가운데 그 선례를 소중히 돌아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