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법, 바른 삶의 세계

 

김 중 배 (언론인)

 

나는 ‘치’라는 짐승을 사랑한다. 물론 그 실체는 커녕 그림 한 장도 본 일이 없다. 그러나 죄지은 자를 소스라치게 흔들면서, 스스로는 흔들리지 않는 그 의연함에 아래로 쏠리는 에로스의 사랑이 아닌, 위로 솟아나는 아가페의 사랑이 쏠린다.

중궁의 <왕충논형(王充論衡)>에 따르면 ‘치’는 외뿔을 지닌 신령스러운 짐승의 이름이다. 말하자면 일각신수(一角神獸)인 셈이다. 그 일각신수는 애당초 법의 뜻을 지탱하는 큰 기둥이었다. 오늘날 법의 한자는 그저 ‘법(法)’으로 통용된다. 따라서 재기에 넘치는 식자들은 법이란 수(水)와 거(去)라는 두 글자가 어울려 이루어졌다고 풀이한다.

물처럼 유연하게 흘러가는 것, 그것이 법이라는 설명을 하고 싶어서다. 그럴 법한 말이다. 사실 법은 억지일 수만은 없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야 한다. 고체의 딱딱함보다는 액체의 부드러움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공기처럼 눈에 잘 보이지는 않으나, 대지와 그것이 키워내는 모든 생명체 속에 충만해야 한다. 그러나 물처럼 흐르는게 모두 법일 수는 없다. 고랑을 이리 파면 이리 따라 흐르고, 저리 파면 저리 따라 흐르는 그 물길까지를 법이라고 우겨대기는 어렵다. 그것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과도 비슷하다.

더구나 논밭의 곡식과 삶의 보금자리인 집, 그리고 마침내는 인명마저 앗아가는 탁류의 광란까지를 법이라고 고집할 수는 없다. 그 흙탕물의 소용돌이도 물의 흐름임엔 분명하다. 그러나 그 탁류의 법도 법이라고 준수할 것을 강요한다면 난 차라리 그따위 법이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그 법의 혼돈 속에서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것이 ‘치’라는 일각신수다. 그는 인류가 재판소를 창설하기 이전의 재판관이었다. 그의 외뿔 위에 죄짓지 않은 자가 손을 얹으면 아무런 반응도 없다. 때문에 법의 옛 글자는 오늘처럼 ‘법’으로 쓰지 않았다. 법(治法)이라고 썼던 것이다. 물이 흐르듯 유연하고 두루 누리를 적시되 어길 수 없는 줄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뜻에서다. 참으로 유수한 법철학자들도 혀를 내두를 만한 발상이다.

나는 ‘치’라는 짐승 못지 않게 법의 옛 글자를 사랑한다. 괴이한 법들이 법의 탈을 쓰고 난무하는 풍진 세상을 살아갈수록 그 법의 옛 글자에 쏠리는 사랑은 깊어간다. 흠모의 정도 뜨거워만 간다.

 

코와 안경

프랑스의 문학자이며 철학자인 볼테르는 「캉디드」라는 그의 소설 속에 유명한 대사 한마디를 남겨놓았다.

“코는 안경을 걸기 위해서 생긴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의 뒤죽박죽, 일상(日常)의 물구나무 선 풍경을 더할 수 없이 통렬하게 찔러댄 한마디가 아니던가.

비비꼬인 듯한 그의 독설이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 땅에도 법과 그 운용을 ‘귀에 걸며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비양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온 지는 오래다. 그 마당에선 이미 ‘치’라는 일각신수의 정신은 무색하다. 우선 법다운 법을 생산해야 할 입법부, 의회 그 자체가 언제부터인지 ‘정부 제출 법안의 등기소’ 꼴이 되어 버렸다(M.뒤베르제). 등기소까지는 아니더라도 입법부 아닌 ‘통법부(通法府)’의 몰골로 떨어지고 말았다.(문홍주)

‘짐(朕)이 곧 국가’라는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이제 없다. ‘짐의 뜻이 곧 법’이라는 말에 동조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무슨 ‘힘’전(展)이라던가, 거기에 그림을 내걸었던 화가들이 경범죄 처벌법으로 즉결심판에 넘겨졌다는 것은 최근의 소식이다. 예술이라는 그림의 창작이 어떤 연유로 경범죄의 대상이 되었는지 좀처럼 헤아리기 어렵다. 옛 글자 아닌, 오늘의 글자인 법의 힘 앞에 ‘힘’전의 화가들은 힘이 없다. 발을 깎아 신에 맞추고, 머리를 깎아 모자를 맞추는 투의 법이나 그 운용은 법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그런 법이 없다.”는 말은 법의 참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한마디로 드러낸다. 신부이며 작가인 조나단 스위프트가 「걸리버 여행기」에서 썼던 것처럼 “흰 것은 검다.”고 하고 “검은 것은 희다.”고 하는 것이 법과 벌률가의 소임일 수는 없다.

법은 넓은 의미에서 현실의 본성 속에서 우러나오는 필연의 규칙이라야 한다. 그래야만 물처럼 흐르면서 또한 줄거리를 잃지 않는 자연의 법은 살아난다.

코는 안경을 걸기 위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귀는 귀걸이를 걸기 위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코가 있으므로, 그러고 귀가 있으므로, 우리는 거기에 안경과 귀걸이를 거는 것이 아닌가.

안경과 귀걸이는 달라져도 코와 귀는 달라질 수 없다. 그것이 몽테스키와가 말하는 ‘본성 속에서 우러나는 필연의 규칙’이라는 뜻이다. 흰 것은 흴 수밖에 없고, 검은 것은 검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성급하게 그것은 흑백(黑白)논리가 아니냐고 비양거리지는 말아주기 바란다. 그 흑백의 가름 위에서 유연한 흐름을 전개하는 그것이 법의 정신이라는 뜻이다.

단수형의 참극

‘악법도 법’이라는 이름 아래 유태인 학살에 동조했던 나치스 시대의 한 무리 독일인들은 이제 그 악몽을 씻고자 안간힘이다. 지나가 버린 악몽, 되새기고 싶지는 않으나 되풀이를 막기 위해서 되새겨야 하는 역사를 두고 그들은 고뇌한다.

그것은 진정 역사의 악몽이면서, 동시에 법의 악몽이었다.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악몽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다시는 되풀이될 수 없는 악몽이라고 나는 믿어왔다. 그러나 세계의 곳곳에서 그 악몽은 되풀이된다.

지난 4월, AFP통신은 비록 학살은 아니지만, 전율 속에서 들어야 하는 뉴스를 전해주었다. 참으로 듣고 싶지 않은 뉴스였다.

저 아프리카땅 수단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나라 사람들은 물론 이슬람교를 믿는다. ‘샤리아’라고 불리는 이슬람 형법전엔 이런 구절이 담겨 있다.

“절도는 그 손을 자르는 것이 좋으리라. 그것이야말로 각자의 행위에 대한 응분의 벌이며, 신이 내리는 형(刑)이다.”

그 구절의 액면만을 신봉했던 독재자 누메이리 정권은 절도범들의 손을 자르는 이른바 단수형(斷手刑 )을 서슴지 않았다. 1983년이래, 1년 남짓 동안에 36명이 그 단수형의 참화를 입었다는 것이다.

독재정권은 그 뒤에 이어지는 형법전의 구절을 외면한 채, ‘손의 학살’을 감행하고 말았다. 관용에 찬 다음 구절은 이렇게 이어진다.

나쁜 짓을 하고 난 뒤라도 회개하고 그 행동을 바로잡는 자는 신이 그를 용서한다. 신은 관용스럽고 자비롭다. 그 참혹한 정경을 되새길 때마다 나는 법의 옛 글자를 지탱했던 일각신수가 더욱 그리워진다. 사랑스러워진다. 이제 수단의 독재자 누메이리는 무너졌다. 그것은 “그런 법이 없다.”는 일각신수의 점지(點指)인지도 모른다. 이슬람의 교전(敎典 )에도 그런 법은 없었던 것이다.

트럭 한 대를 훔친 절도범이 1984년 8월, 두 사람의 간수에게 짓눌린 채 손이 잘리었다. 그들은 관절을 더듬더니 손목을 댕강 잘라버렸다. 솟아오르는 피, 피 …… 절도범은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했다.

AFP통신이 전하는 단수형의 처절한 모습은 더 이상 읽어갈 수가 없다. 눈을 뜰 수 없다. 그토록 법의 정신을 외면하는 법의 운영은 무섭다. 법을 만들고 또 그것을 집행하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꼭 읽어주고 싶은 정경이다. 그들의 눈에, 그들의 심장에 심어주고 싶은 참경이다.

그 단수형, ‘손의 학살’도 누메이리 정권이 무너지는 큰 원인의 하나였으리라고 짐작된다. 이제 수단엔 타하브 정권이 새로 들어섰다. 바른 법의 운영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타하브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도 단수형의 종식을 기구한다. 빌고 또 비는 것이다.

 

법이 법다운 세계

법을 만드는 입법자는 ‘먼저 바로 생각’해야 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런가. 형벌이 지나치지는 않는가, 모자라지는 않는가. 그리고 법으로 다스려야 할 일인가, 자율의 윤리에 맡겨야 할 일인가를. 그 법이 옳고, 또한 과부족이 없다고 할지라도 법이 규방(閨房)에까지 참견할 수는 없다. 정치가 풀어야 할 일마저 법률에 떠맡겨버릴 수도 없다. 법은 정치의 시녀도 아니며, 대타자도 아니다.

이 땅엔 요즘에도 정치가 빚어낸 문제를 법률로 풀겠다고 덤비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숙련된 목수는 숲에 들어가 그의 쓰임새에 맞는 나무를 찾는다. 쓰임새에 걸맞지 않는 나무는 베어오지 않는다. 숙련된 조각가도 동일하다. 그는 그의 조각에 걸맞는 돌을 찾는다. 걸맞지 않는 돌은 건드리지 않는다.

법의 집행자는 ‘먼저 바로 생각한 입법자’의 뜻을 ‘따라 생각’해야 한다. 이른바 입법의 뜻, 법의 정신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따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란다. 법도 세월이 흐르면 퇴색해진다. 현실과의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그 거리를 좁히는 생각이 필요하다. ‘끝까지 생각하는 것’이 집행자의 소임이다. 그 ‘끝’은 물론 집행의 결과까지 내다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법은 물처럼 도처에 스며 있게 마련이다. 공기처럼 눈에는 잘 보이지 않으나 곳곳의 공간에 충만한 삶의 기반이다. 그리고 수압과 중력이 있듯이 법은 공권력이라는 힘에 의해서 세워지고 집행된다.

그러나 법은 힘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없다. 힘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법은 이미 법이 아니다. 그것은 힘의 시녀이며, 권력의 대타자일 뿐이다. 힘의 절제 위에서만 참다운 법의 세계는 피어난다. 법은 사람들이 눈으로 보게 하고, 귀로 듣게 하고, 마음으로 믿게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법률저항이라는 갈등이 생기게 된다.

나는 이 땅의 어지러운 입법 풍경과, 짧은 머리론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집행의 혼란들을 지켜보면서, 다시 일각신수인 ‘치’를 생각한다.

법이 법다워야 인간도 인간다운 삶을 누리게 된다. 마음놓고 살 수 있게 된다. 법이 법다운 세계야말로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세계이다.

 

*김중배 : 언론인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민은 졸인가』, 『민초여 새벽이 열린다』 등의 저서가 있다.

 

1. 법(法)을 水와 去가 합쳐진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했다. 왜 그런지 본문에서 찾아 정리해 보자.

2. ‘정부 제출 법안의 등기소’와 ‘통법부’의 의미가 무엇인지 말하고 그 구체적인 사례를 찾아서 정리해 보자.

3. “안경과 귀걸이는 달라져도 코와 귀는 달라질 수 없다.”는 말에 함축된 의미를 법과 연관지어 설명해 보자.

4. 윗 글에서 단수형은 왜 법다운 법이 될 수 없다고 했는가?

5. “법의 정신을 외면하는 법의 운영은 무섭다.”는 말에서 법의 정신은 구체적으로 어떤 법을 말하는가?

6. “코는 안경을 걸기 위해서 생긴 것이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이 왜 통렬하게 현실 세계를 풍자하는 말이라고 했는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설명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