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퀴스트의 판결

출전 :  『한겨레21』제710호 2008년 5월15일 / 박용현 한겨레21 편집장 piao@hani.co.kr

*이 글은 근엄한 미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다루고 있지만, 일부 내용은 도덕감정상 혐오감을 일으킬 수도 있음을 미리 밝힌다.

미국의 외설잡지 <허슬러>가 맥주 광고를 실었다. 이런 잡지와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보수 성직자 제리 폴웰 목사를 가상 인터뷰한 형식의 광고였다.
폴웰 : 내 첫 경험은 교외의 한 옥외 화장실에서였습니다.
기자 : 좁아서 좀 불편하지 않았나요?
폴웰 : 그놈의 염소를 차서 쫓아낸 뒤엔 그렇지도 않았지요.
기자 : 음, 한번 자세히 얘기해주시죠.
폴웰 : 난 사실 엄마와 그 짓을 하리라곤 전혀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엄마가 마을의 모든 남자들과 놀아나는 걸 보고는 생각했지요. 까짓 거, 뭐.
기자 : 아무리 그래도 좀 역겨운데요.
폴웰 : 우리는 그때 OO맥주를 먹고 취해 있었거든요. 그 술 참 좋던데요.
인터뷰는 이어진다. 차마 더 옮기기 어려운 단어들로 뒤범벅인 채.

미국 사회에 난리가 났고, 광고는 당연히 법정으로 갔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잡지사가 문을 닫았어야 한다. 민사 소송은 제쳐두고라도, 형사처벌을 받게 될 것이고(검찰이 어떤 죄목이든 갖다붙이지 않겠는가), 신도들의 항의시위로 업무 마비 사태를 부를 게 뻔하다.
그 유명한 보수주의자 윌리엄 렌퀴스트 미 연방대법원장이 최종심 선고에 나서 대법관들의 만장일치로 쓰여진 ‘허슬러 대 폴웰 사건’(1988)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미국 시민의 특권 중 하나는 공적인 인물이나 정책을 비판할 권리다.”

판결문은 이런 비판이 그 대상에 대한 증오나 악의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허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판의 동기를 문제 삼아 불이익을 준다면 공적인 문제에 대한 토론이 위축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격분해서 한 말일지라도 그 또한 ‘생각의 교환’이며 진실을 찾아가는 데 기여한다고 판단했다.
그래도 표현이 너무 극악무도하지 않았느냐는 항변이 가능하다. 렌퀴스트 대법원장은 “표현의 영역에서 ‘극악무도함’은 너무 주관적인 잣대”라며 항변을 내쳤다. 무엇보다 이 패러디 광고는 누가 봐도 사실이 아닌 허구임을 알 수 있지 않느냐면서.

몇 해 전 이 판결문을 처음 읽어봤을 때의 전율이 생생하다. 전율의 여진 속에, 우리가 지금 누리는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누추한 것인지도 새삼 생각한다. 학교 앞에서 두발 규제에 항의하며 1인시위를 벌이던 고교생의 팻말을 교사가 빼앗아 내동댕이치고, 경찰은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을 막자는 뜻에서 학생들이 주고받은 문자메시지까지 수사하겠나고 나섰다. 급기야 임채진 검찰총장은 “국민이 출처도 불명한 괴담에 혼란을 겪거나 국가 미래가 조직적이고 악의적인 유언비어에 발목 잡히는 일이 없도록 사이버 폭력 척결에 검찰 역량을 집중해 서로 믿을 수 있는 신뢰 분위기를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뉴타운 공약(空約)으로 유권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신뢰 사회를 망친 국회의원 당선자들에 대해선 왜 강력한 처벌 의지를 밝히지 않는지 궁금하기도 하거니와, 교육자·법 집행자·법률가라는 이들이 다양한 형태의 ‘생각의 교환’을 통해 진리와 최상의 사회적 선택을 찾아가는 민주주의 작동원리를 이해조차 못하는 것 같아 안쓰럽다.
누구보다 표현의 자유를 지지해야 할 언론이 괴담이니 유언비어니 하며 시민들 입 막기에 핏대를 올리는 현상도 안쓰럽기는 마찬가지다. 시정의 악다구니부터 다중의 외침, 범죄자의 변명, 정치인의 겉만 번지르르한 장광설까지 모든 ‘생각의 표출’을 쓸어안으면서 ‘생각의 교환’에 진력하고 또 진력하는 게 언론의 사명 아니던가.
미국이 비록 광우병 위험이 있는 쇠고기를 남의 나라에 팔아넘기는 후안무치를 자랑하고 있지만, 연방 수정헌법 1조가 규정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 신념만큼은 수입할 만하다. 쇠고기 수입에 바치는 정성의 1%만이라도 들여서.
아직도 괴담과 유언비어 척결의 신념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은 교외의 한 옥외 화장실에라도 들어가 렌퀴스트의 판결문을 곱씹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