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맞으면서 보호받기 / 2006.06.02 08:00    
  
3년 전 브라질의 상파울루에서 열린 인권회의에 참석할 일이 있었다. 직항이 없어 미국의 댈러스를 경유했다. 댈러스에서 5시간가량 다음 비행기를 기다려야 했는데, 공항쪽은 미국 비자가 없는 여행객이 공항을 빠져나가 불법 체류할 가능성이 있다며 나를 억류했다(그들 표현은 ‘보호’). 게다가, 자기들이 나를 감시하는 비용, 50달러를 내라는 것이다. 비자 없는 사람들을 범죄자 취급하면서 경찰 한명이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자기들 맘대로 나를 불법 체류 혐의자로 상정해놓고, 5시간 붙잡혀 있는 것도 기가 막혔는데, 나를 억압하는 비용을 내가 지불해야 하다니!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처럼 비자 없이 미국 공항을 경유하는 여행객이 많을 텐데, 왜 이런 일이 한번도 공론화된 적이 없을까. 우리사회의 ‘여론 주도층 인사’들은 모두 미국 비자가 있나보다.

보호는 강자가 하는 것이지, 약자가 강자를 보호한다고 말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호라는 말은 이미 위계와 권력 관계를 전제한다. 원래, 보호는 사회 구조적으로 구성된 일종의 협박 행위다. 협박범은, 존재하지도 않는 위협이 있다고 우기면서 위험을 해소하기 위해 돈을 내라며 보호자 역할을 자처한다(실제로는 이런 사람들이 제일 위험하다). 구역세를 걷는 조폭 아저씨들이 ‘좋은’ 사례다. 조폭과 비교해서 안 됐지만, 대개 국가와 남성은 보호자로 간주된다. 외부의 ‘적’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고, 결혼 제도는 남성이 여성을 다른 남성으로부터 보호하는 장치라고 여겨진다. 사실, 보호자는 지배자, 폭력 행위자의 별칭이기도 하다. 아니라고 부정하면 여러모로 우스꽝스런 모순이 발생한다. 만일, 국가가 국민의 보호자라면, 보호자는 많을수록 좋으므로 이중, 삼중 국적이 허용되어야 한다. 남자가 여자의 ‘울타리’라면, 울타리는 겹겹이 많을수록 좋으므로 일처다부가 자연스럽다. 가정폭력은, 남성은 때리면서 지키고 여성은 맞으면서 보호받는 이상한 현상이 아닌가. 아내에 대한 폭력은, “보호자 남성, 안식처 가정”이라는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평택 대추리 ‘사태’는 ‘적’으로부터 국민을 지켜야 할 국가가, 오히려 외부(미국)를 ‘보호’하려고 국민에 폭력을 행사하는 형국이다.

“기지촌은 여성이 성폭력당할 위험이 높은 지역”이라는 인식은, “한국을 지키기 위해 미군이 주둔한다”는 말이 허구이거나, 아니면 한국인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와 일부 수구 세력은 ‘적’에 대한 막연한 공포에다 미군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맹목적인 신념을 바탕으로, 주한미군의 기지 무상사용, 훈련사고, 환경 파괴, 살인, 강간 범죄와 같은 ‘보호자의 폭력’을 참으라고 주장한다. 북한의 ‘몰락’으로 남북한 세력 균형이 깨진 상태에서 북한이 과연 ‘적’으로서 힘이 있는지도 의문이려니와, 당사자는 원하지도 않는데 대대로 농사지어온 남의 논밭을 갈아 엎어가며 보호해주겠다니, 이건 보호가 아니라 점령이다.

한-미동맹은 ‘동맹’(同盟)이라는 말과 달리, 평등하지 않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근거로 미군이 한국을 지키기 위해 주둔한다는데, 진정한 ‘상호방위’가 되려면 한국군도 미국 곳곳에 주둔해야 하지 않을까? 대추리를 계엄 상태로 몰아넣은 그들은 혈맹(血盟)이란 말도 좋아하는 것 같다. 혈맹의 의미는 ‘서로 피를 나눌 정도의 굳은 맹세’지만, 실제로 지금 한-미 우호를 위해 피 흘리는 사람은 약자인 한국이지 미국이 아니며, 한국에서도 ‘강남’이나 ‘여의도’가 아니라 ‘매향리’나 ‘대추리’ 사람들이다.

‘참여 정부’가 한 일은 ‘전쟁 참여’밖에 없다는 세간의 평가대로, 정부는 미국의 요구대로 평택에 미군기지 확장을 위해 자국 농민을 내쫓고 있다. 부시 대통령 임기 막바지에 미국의 국방 예산은 4천억 달러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같은 미국의 군사비 지출 규모는 군비 지출 2위국인 러시아의 5∼6배, 중국의 8∼9배이고, 미국이 ‘악의 축’으로 지목한 북한, 이란, 이라크, 쿠바, 시리아, 리비아, 수단 등 7개국의 전체 국방비를 합친 비용의 23∼25배에 달한다. 부시 행정부의 어법대로라면, 약자의 폭력은 테러이고 강자의 폭력은 전쟁이다.

2001년 10월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며, 크루즈미사일, 스텔스폭격기, 토마호크미사일 등을 앞세워 파괴할 건물조차 남아 있지 않은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했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미국은 평화적인 국가”라고 했고, 블레어 영국 총리는 “우리는 평화적인 국민들”이라고 말했다. 이쯤 되면, 아룬다티 로이의 말대로, 돼지는 말이고, 소녀는 소년이고, 전쟁은 평화가 된다. 누가 인류의 보호자이고 누가 ‘적’인가?(이 글은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고유경 사무국장과 평화학 연구자 정유진, 서재정의 글에서 도움받았다)
  
글: 정희진 서강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