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거나 말거나 한국 국가 /  한상희 건국대 교수·법학

  

군사정권 아래서 그 위세당당하던 ‘한국 국가’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가족애를 앞세워 국가의 부재를 조롱한 영화는 대박을 누린 반면, 양심의 자유와 평화적 생존이라는 국가적 가치를 가르치던 교사는 국민의례 거부죄로 중징계에 처해졌다. 성인용 게임의 사행성 여부도 제대로 판단 못해 온나라를 도박과 패가망신과 자살로 물들여 놓고도 정책 실패라는 변명으로 미봉하는 정부에 대해 한국 국가는 그저 무기력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 역사만큼 끈질긴 한국 국가는 항상 되살아난다. 그것은 영화에서도 뚜렷이 음각되어 줄거리를 활보한다. 포르말린을 방류하라는 미군의 영어에 대비되는 한글자막에서, 혹은 바이러스를 핑계로 전세계를 위생처리하는 패권국가에 대응되는 희생자 구도에서 한국 국가는 미국의 부정태로 가공되고 또 이용된다.

‘애국가는 생략’이 당연한 국민의례 속에 있는 한국 국가는 극우적 선동을 숙주로 할 때만 생존이 가능한 무능력자로 변태하고 있다. 이제 그 위력은 한계에 이르러 지난 시절의 공안정국은 커녕 ‘고작’ 징계의 액션을 취해 놓고도 뒷감당을 걱정할 정도이다. 그럼에도 이를 비아냥거리며 새로이 등장하는 한국 국가 또한 기표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을 다할’ 조국이 아니기에 서울광장에서의 구국 기도회가 필요 없는 국가라는 자위만이 실재할 뿐이다.

공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나 미군기지 이전 등 국가적 명운이 걸린 결정들이 관료의 편의와 권위에 휘둘리고 있지만, 이 서글픈 한국 국가는 그에 분노할 힘도 갖지 못한다. 오히려 한국 국가는 관료주의의 폐쇄회로 속에서 장밋빛 환상으로 재생되어 국가홍보의 헤드라인으로만 맴돌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부정태로서만 살아남게 되는 한국 국가는 어디에나 편재하면서도 언제나 부재한다. 자본과 권력이 호출할 때는 언제나 응하지만, 정작 사람들이 필요로 할 때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한국 국가는 가시적인 실체도, 통합된 이념도, 공유된 가치도 없이 상업적 아이콘으로 전락하거나 선전전의 표피를 충당하거나 관료권력의 정당화 도구로만 부유할 뿐이다. 혹은 국민들이 여의도나 대추리, 포항에서 경찰에 맞아 ‘죽거나 나쁘거나’의 상황에 빠져도 그저 운명이려니 하며 체념할 것을 권유할 뿐이다.

하여 국가를 상실당한 우리는 늘 불안하다. 람보나 슈퍼맨이 없는 우리 영화의 현실에서 괴물을 처단하는 것은 으레 가족이다. 하지만 가족조차 폭력으로 변신하기가 다반사인 현실에서 거저 영화적 상상력에만 안주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혹은 상업주의와 자본 제일주의가 가족까지 볼모로 잡아 흔들어대는 이 물신의 시대에서는 그 상상력조차도 불신되기 십상이다.

그뿐이랴. 행동이 역선전에 함몰되며 조직이 구획의 경계에서 맴돌게 되면 비겁한 우리들로서는 한 치 앞서간 이념조차도 버거운 짐이 된다. 법치보다 재량이 앞서며 참여보다 밀실이 증식되는 이 권력의 시대에는 대집행 영장 하나로도 우리는 왜소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새삼 한국 국가의 안부를 묻는다. 힘이 없고 돈도 없는 왜소한 몸으로라도 우리에게 닥친 위험을 가로막고 피하라 손짓할 수 있는 한국 국가의 존재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혹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여도 우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이를 올곧게 되새길 수 있는 국가를 찾는 것이다.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도 말이다.

출전 : 한겨레 신문 2006년 8월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