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급진적’ 동화작가의 죽음 / 권수현 / 한국여성민우회 편집위원

한겨레 신문 2007년 5월 28일

내가 권정생의 <몽실언니>를 처음 읽은 것은 대학원 시절이었다.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하면서 난해한 이론들을 공부하느라 몸도 마음도 몹시 지쳐있을 무렵, 이 책을 접했더랬다. 뭔가 응어리져 있던 것이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이 책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우리 세대라면 누구나 당위로 학습했던 반공의식의 핵심은 동족끼리 서로 미워하고 싸우게 만드는 ‘증오의 이데올로기’라는 것, 분단과 전쟁,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연민과 나눔의 정신이라는 것이었다. 6·25 이후 가난과 폭력, 미움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작가가 주인공 여자아이를 통해 보여준 인간과 삶에 대한 태도는 단지 선량함이라는 단어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아름다움이었다. 그가 써낸 동화책들은 한결같이 가슴 속 깊이 자리잡고 있던 분노와 증오를 녹여내어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된 존재들에 대한 존중과 사랑으로 바꾸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내 몫 이상을 쓰는 것은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야. 내가 두 그릇의 물을 차지하면 누군가 나 때문에 목이 말라 고통을 겪는다는 걸 깨달아야 해. 그래야 올바른 세상이 되지.” 그 분은 자신이 말하는 것과 일상이 정확히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평생 병마와 싸우면서도, 몇 평 남짓의 토담집, 식기 몇 개, 이부자리와 책더미 이상의 것을 결코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권정생의 삶과 책들은 더 많이 움켜쥐려는 욕구, 더 편안하게 살려는 욕구를 버리지 못하는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의 거울에 비춰본 내 모습은 남들보다 더 잘 살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초라한 경쟁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책들은 중년이 된 나의 책장에 여전히 꽂혀 있다. 가공할 만한 경쟁 속에서 내 마음을 돌아보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언어로,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말한다. 그는 맞서 싸우라고 하기보다는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고, 욕심을 버리라고 말한다. 더 큰 것을 욕망하는 마음을 부끄럽게 만들고, 작고 여린 존재들, 하찮게 취급되는 것들에서 희망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 그리고 그런 존재들이 보여주는 희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그것이 권정생 문학이 가진 힘이다. 나는 이보다 더 급진적인 실천의 힘을 가진 사상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그가 무욕과 무소유, 절제와 가난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탐욕을 내려놓게 만들고,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 가진 힘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 때 많은 사람들이 ‘현실성 없는 급진성’에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며 ‘온건한 개혁’을 표방한 세력에 표를 던졌다. 그러나 5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중도개혁’에 대한 믿음은 무참해졌고, 심지어 사기를 당한 기분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점점 더 소수의 가진 자들을 위해 다수가 희생되어야 하는 현실 속에서, 사람들의 탐욕을 원동력으로 발전해가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물결 속에서 과연 개혁이란 어떤 성격의 것이어야 하며, 무엇이 이 물결을 되돌려놓을 근본적인 변화의 힘일까? 권정생의 삶과 죽음은 그것을 돌아보게 한다. 혁명이 사라진 시대, 변화를 이끌어낼 신념과 이데올로기가 흩어진 이 시대, 그의 삶과 문학은 부분적 개혁이 아닌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한다. 물질을 신처럼 떠받드는 이 사회에서 가장 현실적인 개혁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