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 석 헌 - 평화사상과 씨알사상

씨알사상연구회

함석헌(1901∼1989)의 평화사상은 20세기를 살았던 그의 풍부한 역사적 경험과 철학, 그리고 깊은 종교사상이 피워낸 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간디로 불리우며 두 번이나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던 그의 삶과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평화는 핵심언어가 될 것이다. 필자는 함석헌의 평화사상을 다룬 논문에서 그의 평화사상의 특징을 평화주의 (Pacifism), 비폭력(Non-violence)와 민중 사상으로 분석했다. 이 가운데 본 글은 그 첫번째 부분인 함석헌의 평화주의에 초점을 맞춰 살펴본다. 평화 연구자들간에는 20세기 평화주의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으나 이 글에서는 그 논의들을 별도로 다루지 않으며 다만 함석헌의 평화주의를 반전, 반군사주의 사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함석헌의 평화주의 사상을 이해하는 방법으로서 나는 먼저 함석헌 평화사상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을 그의 전쟁 체험과 종교적 철학적 관점에서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함석헌 평화주의의 특징을 규명하고 끝으로 한국 상황 속에서 전개된 함석헌 평화주의 사상의 실천과 그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1. 함석헌의 평화 사상에서의 전쟁체험의 의미
20세기는 전반기에 두 번의 세계전쟁이 있었고 후반기는 미쏘를 중심으로 세계는 두 블록으로 갈라져 냉전으로 이어진 전쟁의 세기였다. 함석헌은 직간접적으로 여러 전쟁들을 체험했고 이것은 그의 반전평화사상의 주요한 경험적 배경이 되었다. 그의 사상 형성에서 중요한 시기였던 이십대 때 함석헌은 전쟁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결과로 일어나 1920년대를 풍미했던 인도주의 사상과 평화사상의 세례를 받았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영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함석헌 전집 4: 365). 이 당시 오산학교와 일본 유학을 했던 함석헌은 톨스토이, 간디, 웰즈 등을 읽었고 이러한 정신적 토양은 그 후로 그의 평화사상의 주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 후 30년대 일본의 만주 침략과 중일전쟁, 40년대에 본격화된 제국주의 전쟁을 위한 병참기지로서 물적, 인적, 정신적 수탈과 억압을 겪어야 했던 식민지 백성으로서 함석헌은 좀더 직접적으로 일본 군국주의의 탄압을 체험했다. 1938년 그 자신 일제 식민당국에 역사교사로 재직했던 오산학교에서 강제로 쫓겨났으며, 1940년과 1942년 두 차례에 걸쳐 1년씩 투옥당했다 (김성수 2001: 114-122). 이런 억압의 체험을 통해 그는 민중을 억압하는 국가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키워갔고 국가의 무력 앞에 무기력한 기독교의 자유로운 영적 갱신에 깊은 관심을 기우렸다 (함석헌 전집 9: 190-93; 19: 101-2). 함석헌의 평화사상에서 주요한 요소들인 국가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 국가교회에 대한 비판과 민중사상은 이 시기부터 형성되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제 식민지 시기 함석헌은 일본제국주의로부터의 민족해방을 자신의 삶과 기독교 신앙 실천의 주요 목표로 삼았고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민족해방은 곧 민족의 평화를 의미했다 (함석헌 전집 14: 314). 이것이 우치무라 간조의 평화주의와 다른 점이었다. 무교회운동의 선구자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의 전쟁에 대해 반전 평화주의의 태도를 표현할 수 있었고, 그의 제자 가운데 소수의 무교회 신자들이 중일전쟁 등 일본의 전쟁에 대해 반전평화주의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나 동시대 식민지 땅 조선에서 『성서조선』을 발간하며 무교회 신앙운동을 했던 함석헌은 전쟁에 대한 반전태도보다는 일제 식민지로부터의 민족해방에 더욱 큰 관심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식민지 기간동안 함석헌에게서는 반전 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찾아볼 수 없다.  
함석헌이 직접 전쟁의 참상을 겪은 것은 한국전쟁이다. 3년여 동안 전 국토를 황폐화시키고 6백여만명의 사상자를 낸 이 전쟁은 함석헌의 삶과 사상에 커다란 충격을 남겼고 특히 그의 반전 평화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함석헌 전집 14: 109-120). 그러나 한국전쟁기간동안 함석헌이 반전 평화주의자로서 행동하거나 그런 입장을 표명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뒤에 좀더 자세히 다뤄지겠지만 함석헌은 1948년 퀘이커 평화주의에 크게 감명을 받았고 또 같은 해 그가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오던 간디의 갑작스런 죽음에 자극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상황 속에서 간디의 사상을 실천적으로 적용하고자 노력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특히 전쟁의 와중에서도 바가바드기타를 읽으며 간디 사상을 좀더 깊게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모습이 나타난다. 전쟁직전에 그가 이런 일련의 평화주의 사상들에 의해 각성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한국전쟁과  같은 구체적인 전쟁 상황 속에서 반전 평화주의자로서 실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함석헌이 반전 평화주의자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전쟁 이후의 일이다. 이 점은 함석헌의 반전 평화주의의 사상적 발전과 배경을 이해하는데 있어 주목할 만한 점이다. 다시 말하면, 함석헌은 한국 전쟁 이전까지는 비록 그가 평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앞서 살펴 본대로 평화주의 사상의 싹을 안에 키우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반전 평화주의자로서 평가될 정도는 아니었다고 보여지며 그가 반전 평화주의자로서 면모를 분명히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의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한국전쟁의 체험은 함석헌의 평화주의 사상의 발전에 있어 주요한 전환점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2. 함석헌의 반전 평화 사상의 종교, 철학적 배경
함석헌의 평화사상은 동서양 종교와 철학 사상들의 영향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 가운데 기독교와 노장 사상이 주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여지며, 근대 사상가로는 톨스토이와 간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① 기독교와 노장의 평화주의
함석헌 반전 평화주의 사상은 성서적 평화주의 (Biblical pacifism)에 기반한다. 그는 산상수훈과 예언자 이사야의 평화 사상을 통해 평화가 성서의 핵심 진리임을 강조했다 (함석헌 전집 14: 126). 함석헌에게 예수는 평화주의자였다. 그러므로 어떤 이유에서건 전쟁을 지지하는 교회는 잘못이라고 역설했다 (함석헌 1983: 4).
함석헌이 기독교 평화주의(Christian Pacifism)에 처음 눈을 뜬 것은 퀘이커 평화주의(QuakerPacifism)에 의해서였다 (함석헌 전집 14: 371). 1947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YMCA 현동완 총무로부터 2차 세계전쟁속에서 양심적 병역거부(Quaker Conscientious Objection)과 이로인해 감옥에 들어간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퀘이커들의 집단적인 평화운동(Quaker Peace Testimony) 이야기를 듣고 함석헌은 크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즉,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전쟁을 용납할 수 없다는 기독교 평화주의 사상이 실제로 역사속에서 실천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각성이었던 것이다. 1930년대와 40년대 초 무교회 신앙을 신봉하던 시절, 영적 평화에 근거한 기독교 평화주의 신앙의 일단을 드러내고는 있었지만, 함석헌 스스로 고백하듯이 그때까지도 기독교 신앙이 전쟁을 거부해야한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자신의 이런 고백을 통해 우리는 함석헌의 기독교 신앙에 기반한 평화주의 사상이 퀘이커 평화증언과 운동을 통해 비로서 각성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 직후 한국에 들어와 평화운동의 일환으로 구호와 봉사활동을 펼친 영국과 미국의 퀘이커들을 만나게 되면서  함석헌은 퀘이커를 평화의 종교로 인식했으며 이는 그가 퀘이커 운동에 가입하는 주요 이유가 되었다 (함석헌 전집 3: 151; 안병무 2001: 386; 김영호 1991: 286). 1960년대부터 퀘이커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함석헌은 특히 그들의 평화운동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으며 이런 점에서 필자는 함석헌 평화사상에 있어서 퀘이커 평화사상이 갖는 의미가 크다고 본다.

함석헌의 평화주의 사상은 노장 사상을 통해 더욱 깊어지고 풍부해 졌다. 1940년대초 함석헌은 노장 사상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이는 2차 세계전쟁이후 도래 할 새로운 문명은 서구적인 것에서가 아닌 동양적인 것에서 찾아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였다 (함석헌 전집 20: 13-23). 그는 기독교 서양문명을 대체할 수 있는 사상으로 노장 철학뿐만 아니라 불교등 동양경전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동양경전의 독서를 통해 그가 도달한 것은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종교적 깨달음이었다. 이는 당시 함석헌의 주된 관심이 사회적인 것보다는 종교적인 것에 모아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일례로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전쟁 전후 시기까지만 해도 함석헌의 주된 관심은 세계와 사회의 평화문제라기보다는 종교였다. 한국전쟁이 끝나던 해인 1953년, 함석헌은 대선언을 발표하면서 노장사상과 불교등 동양종교와 기독교를 모두 아우르는 보편적 신앙, 무교회주의와의 공식적인 결별, 기독교 신자에서 종교 사상가로 전환하는 면모를 보였다. 함석헌의 반전 평화주의 사상이 근본적으로 종교 사상의 토대위에 서는 것이지만 그것이 역사적 상황 속에서 표현되고 실천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부터였음을 알 수 있다.

함석헌의 노장사상 공부가 그의 반전평화주의 사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한국전쟁이후 쓰여진 그의 글들 속에서이다. 함석헌은 '전쟁에서 사람을 죽인 후에는 비통한 마음을 가지고 죽은 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한다'는 노자의 말을 빌려 한국전쟁 후 공적을 자랑하고 군인을 영웅시하는 남한의 군사주의적 사회분위기를 비판하고 있다 (함석헌 전집 14: 118). 또 1970년대 쓴 글에서 그는 노자 장자를 절대 평화주의자들로서 칭송했다 (함석헌 전집 20: 31). 함석헌의 비폭력사상도 노장 사상을 통해 더욱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82년 전두환 군사쿠데타와 광주 대학살을 경험한 이후 함석헌은 정치에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즉, 노장 사상의 초월적이고 우주적인 점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당시 경직된 정치현실로부터 현실도피주의처럼 보여졌다. 그러나 함석헌은 노자 장자가 정치로부터 초연한 태도를 지켰던 것은 진정한 힘의 근원인 진리와 지혜를 구하고자 했기 때문이라면서 자신의 입장을 노장 사상에 견주어 설명했다 (함석헌 전집 17: 409). 전두환 군사정권이 폭력적 탄압을 하던 1983년에도 그는 다시 폭력에 대한 가장 좋은 대응은 무저항이라는 노자의 사상을 역설하고 있다 (함석헌 전집 12: 62). 비폭력 사상은 다음 기회에 소개할 것이지만 노장 사상은 함석헌의 평화사상에 깊이와 풍요로움을 더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와 노장의 평화주의 사상을 통해 역사 속에서의 평화문제에 깊은 관심을 드러냈던 함석헌은 평화를 궁극적으로 종교적 진리의 빛에서 구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새 종교의 출현을 갈망했다.

함석헌에게 새 종교의 특징은 핵 시대에 전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함석헌 전집 3: 224-25; 김영호 1991: 283). 1955년 '새 시대의 종교'란 강좌에서 함석헌은 역사를 형성하고 사회를 이끌어가는 종교의 힘을 강조했고 새 종교란 국가권력, 교리, 제도와 피안주의 신앙으로부터의 벗어나 영적으로 갱신되고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종교임을 강조했다 (함석헌 전집 3: 218-22). 함석헌은 이러한 새 종교의 가능성을 간디의 삶과 현실에서 발견했다 (함석헌 전집 7: 9-16). 정치와 국가권력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국가권력에 얽매여 노예 노릇하는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도덕적 권위를 갖고 정치와 국가를 이끌어 가는 종교를 새 종교의 모습으로 보았다. 평화는 새 종교의 핵심적인 요소로 간주되었다. 이 점에서 간디와 퀘이커 평화주의는 함석헌에게 새 종교의 영감을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함석헌은 퀘이커 평화주의에 자극을 받아 간디를 평화주의 관점에서 다시 읽기 시작하기도 했다 (함석헌 전집 14: 371). 그가 민족주의와 교파주의를 초월하여 오직 '진리'를 따라 살고자 했던 것은 그의 새 종교에 대한 이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함석헌 전집 4: 354). 함석헌은 평화주의를 축으로 기성 제도종교 (함석헌은 종종 이를 역사적 종교라고 부르기도 함)의 한계를 직시했고 또 진리의 종교로서의 새종교를 갈망했다. 이 점에서 함석헌의 기독교 비판은 통렬하며 이는 뒤로 좀더 자세히 다뤄진다.

② 톨스토이와 간디
함석헌의 평화주의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 주목할만한 사상가는 톨스토이(1828∼1910)와 간디(1859∼1948)이다. 함석헌의 삶과 사상에 있어 영향을 미친 많은 사상가들 중에 이 둘을 주목하는 것은 함석헌 평화주의를 이해함에 있어 이 두 사상가의 평화 사상간의 유사점과 차이가 도움이 되기때문이다. 함석헌이 이 두 사상가들을 처음 접한 것은 그의 나이 20대 때부터이며 이후 이들에 대한 함석헌의 관심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톨스토이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선성(善性)을 믿었고 산상수훈을 '완전을 향한 인간진보의 이정표'로 신봉했다 (Tolstoy 1960: 120-21). 그는 기독교(카토릭, 개신교, 정교회)가 제도화 정치화되면서 자신의 본질적 사명인 사랑의 법을 배반해왔다고 비판했다 ( Tolstoy 1960: 4; Brock 1981: 72). 톨스토이의 무정부주의는 '모든 강압에 대한 철저한 거부'에 근거했다 (Hershberger 1953: 188). 평화 역사가인 브록 (Peter Brock)은 톨스토이의 무정부주의와 평화주의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국가는 사람의 대적이다. 다른 무정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톨스토이는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협력과 동의위에 사회가 이뤄지길 원했다. 전쟁이란 인간을 가장 참혹하게 만드는 무력 행사이므로 전쟁 반대는 톨스토이의 실천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Brock 1981: 73).
톨스토이가 무정부적이고 정치에 거리를 두는 비폭력주의를 표방했다면 간디는 정부의 역할을 인정하고 정치문제에 참여하는 비폭력 운동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간디가 톨스토이의 비폭력정신과 무저항주의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사실이며 이러한 평화주의 사상이 둘 모두 산상수훈에 기초를 두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Hershberger 1953: 187-88). 톨스토이와 간디는 서신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사상을 교류했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을 자신의 비폭력주의 이상의 역사적 실천으로서 주목했던 톨스토이는 간디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랑의 법을 고백하고 믿는 기독교인들이 현실 생활 속에서는 폭력을 인정하고 필수적인 것처럼 찬양하는 것을 모순된 현실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Tolstoy 1944: 303). 브록과 영 (Nigel Young)은 톨스토이와 간디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설명하는데 이는 이들의 영향을 받고 있는 함석헌의 평화주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유용하다.  
간디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서구사상은 의심할 여지없이 톨스토이의 사상이었다. …그러나 톨스토의 사상의 날카로운 면들은 간디에게서 부드러워졌다. 간디는 현존하는 사회는 증오심으로 거부되기보다는 사랑의 정신으로 변혁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간디에게 정치적 영역과 비정치적이지 않은 사회는 비폭력적 세계에 도달할 가장 직접적인 길이다. 톨스토이는 사해동포주의자이며 간디는 충실한 인도민족주의자였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둘간의 기본적인 영적 유사성을 인식했다 (Brock and Young 1999: 73).

함석헌은 그의 글에서 톨스토이의 이름을 빈번히 거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함석헌의 평화주의 사상에서 나타나는 무저항주의, 기독교 비판과 무정부주의에 기반한 반 국가주의, 인도주의 사상등은 톨스토이의 영향을 반영한다 (김성수 2001: 120; 안병욱 1991: 35).톨스토이와 간디처럼 함석헌의 평화주의도 성서의 산상수훈에 기반하고 있다. 함석헌의 평화주의 사상에 나타나는 무저항, 무정부주의적 요소가 톨스토이와 유사한 점이라면 평화주의를 남북 통일문제에 적용하고 또 정치적 행동을 통한 사회변혁을 구했던 참여적 실천적 면모는 간디의 영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함석헌은 세계 평화운동의 중심에 간디가 있다고 할 정도로 간디를 흠모했으며 간디를 배움으로 인류는 어떠한 차별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함석헌 전집 7: 14). 함석헌의 반전 평화 사상은 톨스토이와 간디의 유사성과 차이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철저한 무저항주의적 태도, 국가주의 비판과 비정치적 태도를 보이는 다른 한편에 정치적 사회적 불의에 대한 저항과 민주주의 평화통일론 등 정치적 행동은 함석헌의 반전 반군사주의 평화사상에서 보이는 두 가지 면모이다. 이 점을 다음 장에서 좀더 살펴보기로 한다.
3. 함석헌 반전 평화 사상의 이해
함석헌은 전쟁을 인간의 고질병이긴하나 피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만약 싸운다해도 평화로운 수단으로 싸우는 길을 찾아야 하며, 무기를 갖고 싸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함석헌 전집 2: 255). 함석헌은 기본적으로 전쟁은 인간의 본능적인 충동, 즉 탐욕 때문에 일어난다고 보았으며 이런 인식 때문에 그는 평화를 위한 종교의 역할을 중시했다(함석헌 전집 2: 231-32).

1958년 한국전쟁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담은 글에서 함석헌은 그의 반전 평화주의 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함석헌 전집 14: 109-20). 함석헌은 말하길, 한국전쟁이란 남북의 동포, 즉 아버지 아들, 형제들이 서로를 적으로 알고 싸운 것인데, 지금와서 반성되기는 설령 상대방에게 죽임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방을 얼싸 안으려 하진 못하고 왜 서로 죽이기에만 혈안이 되었느냐는 것이다 (함석헌 전집 14: 117). 이런 생각은 무저항 평화주의 사상의 핵심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신념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함석헌은 무저항 사상과 행동은 종교적 진리 체험을 통한 영적 힘으로부터 나온다고 보았다 (함석헌 전집 14: 117). 그는 말하길, 평화주의는 총을 포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혼이 각성되어야하며, 물질적 얽매임으로부터 해방된 혼일때만이 죽거나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 길 외에 어떤 다른 길이 없다고 단언했다 (함석헌 전집 14: 127).
함석헌의 이런 주장은 당시 이승만 정권의 무력 통일론을 뿌리로부터 비판하는 것이 됐다. 그러나 당시 북한이 평화통일론을 내세우고 있던 상황 속에서 함석헌의 무저항 평화주의사상은 남한당국에 의해 이념적으로 전복적이고 친북한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함석헌은 경찰에서 풀려 나온 뒤 다시 쓴 자신의 기본입장을 해명한 글에서 그의 무저항 평화주의 사상의 종교적 근거를 재삼 설명하고, 현실 속에서 패배주의나 군대의 폐지를 선동하는 것은 아님을 강조했다. 오히려 적의 공격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위해 도망하거나 항복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고 역설했다 (함석헌 전집 14: 126). 이런 태도는 1976년 다시한번 표현되었는데, 남북이 대치된 분단상황에서 평화주의를 주장하는 함석헌은 북한 공산주의가 공격해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검사의 비판에 대해 함석헌은 대답하길, 그것은 오해이며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공격해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한다면 그 자신 총을 들고 싸울 것이라고 했다. 덧붙이길 영적 체험이 없이 평화주의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함석헌 전집 14: 384).
이러한 함석헌의 무저항 평화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사상이 산상수훈의 사랑의 법을 그대로 따르려는데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함석헌 전집 17: 25-6). 이것은 '진정한 기독교인이란 적일지라도 그를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그에게 죽임을 당하기를 선택할 것' (Brock 1981: 73)이라고 주장하는 톨스토이의 입장과 유사하며 또한 노자의 사상과 유사하기도 하다. 이점에서 함석헌은 평화주의의 가장 긴요한 요소로서 종교적 진리 체험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종교적 신앙과 이성을 똑같이 존중하며 추구하는 종교인이었으며 그러므로 그는 정치적 영역과 종교적 진리 사이에 있는 현실적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했다. 즉, 산상수훈과 적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따르는 기독교 평화주의자였던 함석헌은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평화주의 이상의 완전한 실현을 고집하는 공상적 이상주의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함석헌은 약자와 희생자를 위해서는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평화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사랑의 법에 충실하려는 평화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의미에서 함석헌은 절대적 평화주의를 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교조적이거나 순진한 것이라기보다는 영적 경험의 신앙과 이성적인 현실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함석헌은 핵무기와 생화학 무기가 전 창조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에 절대적으로 전쟁을 반대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함석헌은 역사적 현실에 예민했다. 그의 평화주의가 북한의 현실적 위협 앞에 망상일 뿐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도 함석헌은 이데올로기 때문에 전쟁을 하는 것이 더욱 망상이며, 오늘날 평화란 성자들이 갖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 요구하는 과학적 사실이라고 역설했다 (함석헌 전집 12: 283). 그는 평화의 현실적 정치적 방안으로서 제 3세계 민중들이 주축이 되는 세계평화기구의 구성을제안하기도 했다 (함석헌 전집 12: 283-84). 그는 교리나 원리원칙에 기초한 절대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남북한 분단 현실 속에서 평화적 통일의 정치적 방안을 제시했던 참여적 실천적 평화주의자였다.
이렇게 볼 때 함석헌의 평화주의는 다양한 모습을 갖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20세기 평화연구가들은 평화주의란 단일한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태도와 인식에 있어서 다양한 형태의 평화주의가 있다고 말한다 (Ceadel 1996: 21; Teichman 1986: 1-2). 평화주의 신학자 요더 (J.H. Yoder)는 평화주의 유형을 수십 개로 세분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그의 분류를 따른다면, 함석헌의 평화주의는 절대적 양심에 근거하면서 사안에 대한 정직한 연구와 비판적 현실인식에 기초하고 실용적인 정치적 대안에 관심하는 평화주의로 규정할 수 있다 (Yoder 1971: 18-25, 33, 86-9).

4. 한국 상황 속에서 전개된 함석헌 평화주의 사상의 실천과 의미
무엇보다 먼저 함석헌의 절대 평화주의는 남북한 분단 상황속에서 줄기찬 반전 반 군사주의적 평화 통일론으로 나타났다. 함석헌은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군사정권이 주장해 오던 무력통일론을 일관되게 반대했다. 통일이 아무리 중요한 과제라도 전쟁을 통해 통일을 이루려는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절대적 반대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한국전쟁의 가장 큰 교훈은 군사적 통일의 무용성이라고 역설했다 (함석헌 전집 14: 118). 전후 남북한 간에는 여러 차례 전쟁위기가 있었다. 일례로, 1968년 북한 게릴라들이 청와대를 공격했을 때 박정희 정권은 통일전쟁의 불가피성을 선전하며 무력증강책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때도 함석헌은 절대 반전, 반군사 평화주의에 입각해 민중은 결코 전쟁을 원치 않으나, 오직 소수의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전쟁을 기도할 뿐이라며 군사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함석헌 전집 10: 25).

그는 평화적 통일의 길을 세 단계 방향으로 제시했다. 첫째는 남북한 간의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며, 둘째는 상호군축이며 셋째는 평화를 국가 정책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은 당시 남북한의 정치 군사적 대결 상황과 매우 경직된 남한의 군사정권아래서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주장이었다 (이명현 1991: 276). 그러나 함석헌의 평화주의 통일론은 후에 7.4 남북 공동성명의 평화적 원칙으로 나타났고 기독교 에큐메니칼 진영의 민주화 통일운동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으며 통일신학의 평화론에 영향을 미쳤다.

두번째, 함석헌의 평화주의는 군사주의에 대한 철저한 거부와 비판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60년대 이후 그의 신념에 찬 반군사정권 투쟁에서 잘 드러났다. 함석헌이 박정희 군사쿠데타를 비판하고 그후 줄기찬 반군사정권 투쟁을 벌인 것은 군인정신 갖고는 결코 참다운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 (함석헌 전집 10: 43). 함석헌의 예언대로 박정희 군사정권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재를 하려했고, 특히 1970년대 초 국가안보 이데올로기를 권력유지의 도구로 이용하고 무력증강책등 공포정치를 조장할 때 함석헌은 단호하게 군대란 폭력의 노예일 뿐이며 영웅주의를 부추기면서 독재를 정당화하려 한다고 저항했다 (함석헌 전집 12: 36). 이는 함석헌의 일관된 반군사주의적 평화주의에 근거한 정치적 행동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점에서 함석헌의 반군사독재 민주화 투쟁은 그의 평화주의 사상과 사상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양심적 병역거부를 듣고 나서 크게 감동했고 한국전쟁이후 남한에서 병역거부가 확산되기를 바라면서 이를 주창하기 시작했다 (함석헌 전집 4: 73). 간디의 아쉬람을 본 딴 '씨알 농장'을 설립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양심적 병역거부를 설파했는데 그 결과 당시 징집 연령에 있던 홍명순이 영향을 받아 병역거부를 실천했다 (홍명순 1993: 3; 김성수 2001: 163). 함석헌 스스로도 자신이 젊었다면 병역거부를 했을거라고 말하곤 했다 (함석헌 전집 9: 394).

남한에서 종교적 병역거부를 실천해온 집단은 여호와의 증인이다. 이들의 병역거부는 병역이 자신들이 신봉하는 교리와 어긋나기 때문에 하는 어떤 의미에서 종교적 신앙을 위한 병역거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종말론적 신앙을 신봉하면서 세상과 자신들을 엄격하게 분리하고 세속사에 초연한 신앙적 삶을 강조한다 (Cross and Livingstone 1997: 865). 이런 의미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병역거부는 비록 나타나는 결과는 같다할지라도 동기에 있어서는 세상안에서의 평화운동의 일환으로 하는 퀘이커의 양심적 병역거부와는 차이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Brock 1991: 270). 함석헌은 여호와의 증인의 병역거부를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비사회적인 종말론적 신앙에 근거한 여호와의 증인의 입장보다는 사회적으로 참여적인 신앙에 근거한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현재화된 종말론의 신앙적 태도를 갖는 퀘이커 입장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퀘이커처럼 함석헌은 개인의 양심을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의 핵심요소로 보았다.

함석헌은 군대의 필요성을 부정했다. 군인이란 사람을 죽이는 직업이므로 좋은 직업이 아니라고 말하곤 했다 (함석헌 전집 17: 139-40). 궁극적으로 군대란 폐지되어야 한다는 게 함석헌의 믿음이었다 (김조년 1991: 111).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함석헌이 군대의 즉각적인 폐지를 주창한 것은 아니며 이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종교적 사회적 변화를 추구했다. 즉, 그는 종교적 양심의 각성에 의해 군사주의가 거부하게 되길 희망했고 이런 목표를 갖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강조했다. 이런 시각에서 그는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을 통해 사회적 평화뿐만 아니라 교회의 영적 갱신이 일어나는 촉매가 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함석헌에게 평화주의 신앙은 종교적 진리, 즉 기독교 신앙의 본질의 회복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함석헌의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은 강제징집제를 유지해 온 남한에서는 별로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들어 이 운동은 사회 평화운동으로 사회적 관심을 얻어가고 있다. 한국에서의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은 이미 반세기전에 함석헌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점이 오늘의 시점에서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함석헌의 평화주의 사상은 그의 기독교 비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함석헌은 인간의 영적 삶의 왜곡, 본능과 충동에 이끌리는 물질주의적 삶이 전쟁의 근본 원인이라고 보았고 이런 점에서 함석헌은 종교의 역할을 중시했다 (함석헌 전집 2: 231).

함석헌의 눈에 비친 기독교는 국가주의와 물질주의의 노예이다. 그는 한국전쟁이후 전쟁구호 물자들을 그들의 교세 확장에 이용하고, 전쟁중에는 북한을 같은 형제 자매 동포로서가 아니라 적으로만 보고 오직 남한 군대의 승리와 미국 폭격기들의 성공적인 폭격을 위해 기도했던 남한교회 지도자들을 매섭게 비판하고 있다 (함석헌 전집 14: 118).
1959년 평화주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잘못을 조명한 글에서, 함석헌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전쟁의 주범 또는 국가의 전쟁을 정당화시키며 타협했던 카토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 모두를 통렬하게 비판하고있다 (함석헌 전집 2: 232-33). 초대 기독교는 세속권력에 맞서 싸우며 순교를 통해 신앙을 지켰으나 그 이후 기독교는 세상 권력에 무릅을 꿇었고 그 결과 군사주의가 종교를 이용했으며 종교는 새 문명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정신적 영적 힘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이런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전쟁참여와 군사주의에의 동조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는 1968년 한국정부가 베트남에 파병하기로 결정했을 때 단식을 하며 이를 저지하려고 맞섰다. 이 당시 한국 정부의 베트남 파병에 행동적으로 저항한 사람은 함석헌 혼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 지도자들도 침묵했다. 그는 한국정부의 베트남 파병을 민족의 도덕적 수치라고 보았고, 이런 민족의 잘못을 훈계하지 못하고 단지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는 한국군의 승리와 안전한 귀국을 기원해 주는데 그친 종교 지도자들을 비판했다 (함석헌 전집 14: 18). 이어서 1971년 함석헌은 남한교회가 전후 한국사회에서 평화운동에 무관심했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남한교회들은 잘 차려진 옷을 입고 예배를 드리는데는 관심을 기울였지만 군사정권을 비판하지 못했고 사회정의를 위해 일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또 강제 징집에 대한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에 대해서도 한마디 말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느 성직자도 전쟁이 악한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았으며 단지 교회 성장에만 신경을 썼을 뿐이라는 것이다 (함석헌 전집 3: 33). 그러므로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믿으면서 성서의 근본 정신이 전쟁을 부정하는 평화라는 점에 대해서는 무지하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함석헌 전집 14: 381-82). 함석헌은 그 근본 원인을 기독교의 국가교회 전통에서 찾았다. 즉 교회가 국가주의에 노예화되어 있기 때문에 평화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함석헌 전집 12: 381). 그러므로 함석헌은 국가주의로부터 교회의 해방, 즉 초대교회에서 보여졌던 자유로운 영적 힘의 회복을 오늘날 종교개혁의 핵심임을 강조했다. 기독교가 전쟁과 군사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평화의 종교가 되기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국가권력과 물질주의로부터 영적 각성을 통해 새로운 종교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함석헌 평화주의 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라 하겠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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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집 2: 인간혁명의 철학
    ―    전집 3: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    전집 4: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전집 9: 역사와 민족
    ―    전집 12: 육천만 민족 앞에 부르짖는 말씀
    ―    전집 14: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전집 17: 민족 통일의 길
    ―    전집 20: 씨알의 옛글 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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