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문강형준 (서울대 영문학 박사과정. 계간‘모색’편집위원)
제  목 - 세계화, 자본, 문화의 성 삼위일체 2007/01/16
출전 http://blog.naver.com/caujun/60033233636

세계화, 자본, 문화의 성 삼위일체


신자유주의 담론으로서의 세계화
한국 사람들이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말을 이곳저곳에서 처음 들은 것은 1994년 11월경이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이 동남아 순방 길에 호주를 방문하던 중 ‘시드니 구상’이라는 것을 발표하면서 향후 국정 기조를 ‘세계화’로 삼겠다고 선언하였고, 이에 따라 갑자기 한국에 ‘세계화’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정부를 비롯해서 신문들은 연일 ‘세계화’ 기획을 내보내기 시작했고, 교수들은 학회를 열어 세계화가 맞는지 국제화가 맞는지 논의를 했으며, 급기야 텔레비전에서는 한 농부가 나와 “제 경쟁상대는 덴마크 농부입니다”라고 다부지게 말하는 공익광고까지 나왔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지금, 세계화는 ‘반세계화’라는 단어와 함께 우리 사회와 세계가 처한 형국을 설명하는 자연스러운 표현이 되었다.
세계화가 유달리 선언하기를 좋아하는 한 대통령으로부터 형성된 ‘위로부터의’ 담론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혀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일상을 잠시만 되돌아봐도 알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 ‘캘리포니아 휘트니스’에서 헬스를 하고, ‘스타벅스’나 ‘커피빈’에 들러 커피 한 잔과 빵 한 조각을 먹고, ‘던힐’ 담배 한 대를 피운 후, 초국적 기업에서 일을 하고, 퇴근 후에는 영어나 일어회화반 수업을 하고, 잠시 백화점에 들러 ‘나이키’나 ‘리바이스’ 옷을 산 후, 집에서 ‘CSI: 마이애미’나 ‘섹스 & 더 시티’를 보다가 잠이 드는 것은 아주 특별할 일 없는 일상이 아닌가. 단지 외국 브랜드의 상품을 소비하는 것 뿐 아니라, 우리 주위에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조기 외국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이나 토익, 토플을 보는 대학생들, 여름 휴가를 사이판에서 보내거나 뉴욕에 출장을 다녀오는 직장인들로 넘쳐난다. 우리가 먹는 삼겹살은 대부분 남미산이고, 우리가 입은 옷들은 주로 중국이나 동남아 제조품이고, 우리가 쓰는 전자제품 역시 제조국은 한국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국의 9/11 테러를 보면서 섬뜩함을 느끼고,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을 보면서 분노를 느끼고, 동남아의 지진에 죽은 사람들을 도우려고 만원 짜리 한 장을 보내는 게 우리의 일상이다.

세계화가 “사상과 이데올로기, 사람과 상품, 이미지와 메시지, 기술과 기교 등 모든 것들이 이동하는 유동적 세계”1)로의 전환을 의미하거나 혹은 세계 각 지역들 사이의 상호 연관성이 증가하는 경향을 일컫는다면, 이미 그런 세계화의 경향은 길게는 15세기 유럽의 비유럽 세계 탐험 이후로, 짧게는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묘사하듯 부르주아가 전 세계로 뻗어가는 자본주의적 근대화 이후로 지속되어 오고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오늘날 통용되는 세계화라는 말은 이런 통역사적인 일반적 경향성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가 한국의 구체적인 방향설정, 특히 전세계적 자유경쟁에서의 생존과 승리로 의미화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세계화라는 개념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전세계적 경쟁의 일반화라는 담론 구조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 세계화라는 말이 “제 경쟁상대는 덴마크 농부입니다”라고 말하는 공익광고 문구를 통해서 국민들에게 친숙해졌음을 기억한다면, 세계화 개념이 ‘연결’, ‘유동’, ‘다양성’과 같은 기술(記述)적 의미보다 ‘초국적 경쟁’, ‘생존과 승리’와 같은 자본주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로서 작동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세계화가 이런 식으로 의미화되는 역사적 배경에는 1970년대 말 이후 미국과 영국에 의한 세계경제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정부예산 삭감, 자본시장 자유화, 외환시장 개방, 관세 인하, 국가 기간산업 민영화, 외국 자본에 의한 국내 기업 합병 및 매수 허용, 정부 규제 축소, 재산권 보호 등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경제운용 방향이 IMF, 세계은행 등을 통해 전세계에, 특히 제3세계 국가들에 강제되었고, 한국에서는 OECD에 가입했던 김영삼 정권, IMF 관리과정에서 김대중 정권, 그리고 한-미 FTA 추진에 힘을 쏟는 노무현 정권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2) 개념은 언제나 입장을 가진 체계적 담론 속에서 작동한다는 푸코의 통찰이 보여주듯, 세계화 개념 역시 신자유주의라는 담론 구조 속에서 분석함으로써만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문화적 세계화의 허상과 진실: 다양성 담론 비판
그렇다면, 세계화의 문화적 측면 혹은 문화적 세계화라는 차원은 어떨까? 위에서 우리 일상 속의 세계화를 묘사했던 것에서 보이듯, 문화가 점점 세계적 연결망 속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고, 대부분의 우파 지식인들은 물론 비판적 지식인들 역시 문화적 세계화를 긍정적 현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예컨대, 피터 버거와 새뮤얼 헌팅턴 등은 대표적으로 우파적 기능주의 시각에서 세계화 현상을 예찬하고 있다. 중국, 대만, 일본, 인도, 독일, 헝가리, 칠레, 터키, 남아공 등의 연구자들이 해당 나라들의 문화적 세계화 현상을 민속지학 방식으로 분석한 베스트셀러인 『진화하는 세계화』라는 책에서, 이들은 세계화가 미국화도, 문화적 제국주의화도 아니며, 오히려 역동적인 상호과정으로, 서구가 비서구에 영향을 주면서 동시에 비서구도 서구에 영향을 주고 받는 과정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하고 있다.3) 세계화 양상을 점검하는 피터 버거의 네 가지 틀, 즉 ‘다보스 문화’(경제 엘리트), ‘교수 클럽 문화’(지식인), ‘맥월드’(대중문화), ‘복음주의’(기독교)를 바탕으로 이들이 연구한 결과는, 이 네 요소들이 각 나라마다 양적인 차이는 있지만 세계화를 진전시키는데 공히 적극적인 요인으로 기능하고 있고, 그 진전의 결과는 주로 ‘다양성’, ‘이질화’, ‘다극성’, ‘문화적 공존’, ‘화합’, ‘융합’ 등의 긍정적 명사들로 설명된다.

비판적 문화 인류학자로서 세계화를 적극적으로 담론화시켜 유명해진 아르준 아파두라이 역시 세계화를 ‘장밋빛 미래’로만 보는 것은 마찬가지다. 버거나 헌팅턴이 세계화가 미국화가 아니라면서도 “어쨌든 당분간은 이 세계가 아마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미국(또는 서구)을 닮아갈 것”4)이라고 분명히 보는데 비해, 아파두라이가 새로운 전 지구적 문화를 중심-주변 모델이 아닌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며 탈구적인 질서로 간주”하고,5) 미국을 세계화의 중심이 아닌 단지 하나의 고리 정도로 파악한다는 점은 새롭긴 하지만 현실을 제대로 분석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또, 그는 우파들과는 달리 세계화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고는 있지만, 이들의 현실을 개선하는 일을 추상적인 지식생산 영역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우를 범하고 있다. 사회적 복지의 문제를 양산하는 세계화의 탈구적 흐름들을 극복하기 위해 ‘해방적 정치학’으로서 기획한다는 것이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상상력”6)인데, 이것은 기껏해야 지역연구의 연구방법을 혁신하자든가 비정부 단체(NGO) 등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세력들이 전지구적으로 결합해야 한다는 등의 ‘지당한’ 결론뿐이다.7)

정치적 입장이 다른 대표적 지식인들이 세계화를 ‘다양성’으로만 본다거나 ‘복합성’, ‘상상력’으로만 봄으로써 결정적으로 놓치는 것은 현실에서의 세계화가 자본의 운동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세계화 분석에서 공히 나타나는 ‘다양성’ 혹은 ‘이질성의 결합’이라는 긍정적 개념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개념이라는 점은 몇 가지 사례 분석만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가령, 한국에서 까르푸나 월마트, 그리고 (토종기업이지만 점차 아시아 지역으로 확장하고 있는) 이마트 등이 지역 유통망을 장악하면서 도대체 어떤 다양성과 화합이 일어났는가? 다양성이라고 한다면 찬란하게 진열된 상품의 종류와 양이 확실히 늘어났다는 점일 것이다. 상품의 다양성은 분명 소비자의 선택지를 늘이기도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월마트나 이마트에서 상품을 고름으로써 우리는 그곳에 진열되지 못한 다른 물건들을 놓치고 있기도 하다. 자신이 밭에서 직접 재배한 야채와 채소를 가지고 시장에 나와 파는 할머니에게서 살 수 있었던 것을 이마트에서는 살 수 없다. 이마트에 나와 있는 야채와 채소는 지구 반대쪽 어딘가에서 무척 값싸게 들어온 것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흥정하면서 값이 깎인다거나, 혹은 덤으로 얹어주는 식의 상거래는 이마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이 야채의 양에 따라 정확히 측정된 가격으로 가져갈 수만 있을 뿐이다. 대형 할인 마트라는 초국적 유통자본이 유통과정을 장악함으로 인해 인간과의 직접 대면이라는 상거래 문화와 거기서 파생되는 다양한 소통들이 합리적, 계산적, 기계와의 대면이라는 문화로 변해간 것이다. 만약 대형 할인 마트가 우리 유통을 모두 장악한다면, 그때부터 소비자는 마트가 책정한 가격, 마트가 선택한 물건만을 살 ‘자유’가 있을 뿐이다. 요컨대, 세계화의 결과로 드러나는 표면적인 다양함은 그 아래의 또 다른 차원의 다양함을 죽인 다양함이고, 언제든 독점상황에서 획일화로 변할 수 있는 다양함이다.
‘다양하고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세계화 과정에서 상거래 문화 뿐 아니라, 세계의 풍경들 역시 획일화되어 가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여행자들(초국적 경제 엘리트들)이 지구를 돌아다니면서 접하는 세계는 그들이 사는 곳과 대단히 비슷하다. 온천과 운동시설, 이메일과 팩스 같은 기업 경영자의 업무를 위한 서비스, 위성TV, 훌륭한 식당, 서구식 침실 등 모든 편의시설과 서비스가 그들의 고향과 거의 똑같다.8)
각 나라마다 다른 특색이 분명히 있지만 경제 엘리트들의 행동반경 내에서의 세상은 사실 동일한 모습으로 변해있다. 서울과 뉴욕, 홍콩과 런던의 비즈니스, 쇼핑 구역들은 정말로 비슷비슷하지 않은가. 해외에 한 번도 나가보지 않은 필자에게 세계 곳곳을 여행했던 한 친구가 내게 “뉴욕 JFK 공항에 내려서 시내로 들어가니 마치 서울에 온 것처럼 금방 적응되더라”고 한 말 역시 이런 맥락에 위치시킬 수 있을 듯하다. 그렇다면 다양함이란 도대체 뭘 말하는 걸까? 세계화가 진전되지 않은 곳들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생기는 다양함? 그렇다면 그것은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사라지는 다양함이 아닌가? 세계화 과정에서 멕시코 시티의 변화에 대한 캉클리니의 분석에 따르면, 멕시코 시티는 제국주의 시대에는 스페인과 연결된 지역 수도(regional capital) 역할을 하다가 세계화 과정을 거치면서 대형 쇼핑몰, 초국적 호텔, 멀티플렉스 등이 밀집하고 빈부격차가 완연히 드러난 세계도시(global city)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지역 기반 산업들이 대부분 도산하면서 초국적 자본에 의해 도시 풍경이 재편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의 멕시코 시티의 모습에서 국가가 보였다면 이제는 초국적 자본의 모습만이 보인다. 그렇다면, 멕시코 시티에 대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파리, 마드리드, 또는 런던이 다른 시대에 기호화했던 것이 오늘날에는 뉴욕의 엘리트들과 마이애미나 로스 엔젤리스의 중산층 소비자들에 의해 재현되고 있다.”9) 세계화로 인한 각국의 도시풍경은 이제 미국 도시풍경으로의 획일화 경향을 띠고 있다.

‘다양함의 허상’은 언어에서도 발견된다. 세계 각 지역의 언어들이 일 년에 몇 백 개씩 사라지고 있는 반면 영어는 세계 공용어(lingua franca)가 되어 간다.
그들은 대부분 영어 외에 다른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 현상은 언어적으로도 더욱 강화된다. 소수의 엘리트들을 제외하고 우리가 인터뷰한 대다수의 엘리트들은 영어 외에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 어느 곳을 가든 영어만 사용해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10)
이런 현상은 한국 대학의 인문계 학과들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영문과는 정원이 넘쳐 나고 계속 증가되는 데 반해서 독문과, 불문과, 일문과, 노문과, 서문과 등은 학교에 따라 합병되고 폐지되고 있는 현상은 세계화 시대의 ‘다양성’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가? 오늘날 ‘외국어 학원’을 다닌다고 할 때 그것이 ‘영어 학원’을 의미하는 것과 동일하게 쓰이는 현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세계화가 다양화일 뿐 아니라 획일화이기도 하다는 것이고,11) 세계화가 곧 서구화, 특히 미국화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이들은 세계화를 신자유주의 담론 차원에서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세계화의 문화적 측면을 지나치게 긍정적인 측면으로만 부풀려 놓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경제적으로는 전세계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재편, 정치적으로는 그러한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 ‘불량국가’의 제거를 위한 미국의 국지적 전쟁 수행과 이로 인한 미국 헤게모니의 공고화, 문화적으로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치 재편의 결과로 인한 미국식 획일화와 경쟁 지상주의화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앞에서 예로 든 대형마트는 미국식 상거래 문화의 확산을, 도시의 획일화된 풍경은 미국식 도시문화의 확산을, 언어와 어문계열의 획일화는 미국식 언어문화의 확산을 보여준다. 요컨대, 세계화는 신자유주의화 담론의 핵심개념이고, 세계화의 문화적 실체는 미국화이자 미국적 신자유주의화인 것이다.

스타벅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문화-자본 아이콘
스타벅스 커피체인은 세계화의 이 핵심 측면들을 일거에 보여주는 아이콘이다.12) 스타벅스는 커피로서가 아니라 우리 시대 도시 생활자들의 문화적 기호로 소비된다. 그것은 <섹스 & 더 시티>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들이 중독처럼 들고 다니며 마시는 뉴요커의 기호다. 내가 아침에 마시는 한 잔의 스타벅스 커피는 통상 300원 가량의 원가에 제작되지만 4,000원 가까운 값에 팔린다. 남미와 아프리카의 원두 생산 노동자들에게 헐값에 사온 고급원두에 ‘스타벅스’라는 기호값이 덧붙여지고 매장 아르바이트생의 노동을 시급 3,500원 정도로 짜게 지급함으로써 그 값이 약 15배 정도로 부풀려지는 것이다. 그렇게 한국내 127개(2005년 현재) 매장에서 벌어들인 매출액 912억원 중 45억이 로열티로 미국에 나간다. 이 스타벅스 커피에 담긴 로열티가 미국 시애틀의 스타벅스 본사로 들어가면 그 중 일부가 스타벅스의 유대 시온주의자 소유주에 의해 이스라엘의 무기 구입비로 헌금되기도 한다. 즉 내가 마시는 스타벅스가 아랍의 민간인을 죽이는 데 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경제적으로, 스타벅스는 제3세계 노동자와 매장내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거대한 수익을 벌어들이는 초국적 자본을 상징한다. 문화적으로, 스타벅스는 멜빌의 『모비 딕』의 일등항해사 ‘스타벅’으로부터 고급스럽고 도시적인 <섹스 & 더 시티>의 뉴요커까지 미국의 일상문화를 상징한다. 또한 그것은 도시의 커피 풍경이 초국적 브랜드 일색으로, 카페 풍경이 스타벅스식으로 바뀌는 문화적 획일화를 상징한다. 정치적으로, 스타벅스는 미국-이스라엘 연합의 중동지배를 상징한다. 세계화는 이렇게 우리에게 온다. 스타벅스 커피처럼 달콤하면서, 쓰게.

스타벅스의 로고에 등장하는 여인은 ‘세이렌’이다. 『오딧세이아』에서 세이렌은 달콤한 노래로 항해하는 선원들을 난파시킨다. 마치 스타벅스가 상징하는 초국적/신자유주의적 문화-자본이 전세계를 난파시키고 있듯이. 꾀많은 오딧세우스는 선원들에게는 귀를 막게 하여 세이렌의 노래를 듣지 못하게 하고, 자신은 아름다운 노래는 듣되 돛대에 몸을 결박시킴으로써 세이렌을 향해 갈 수 없게 만들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문화와 자본이 결합하여 신자유주의라는 비수를 감추고는 다양성이라는 아름다운 노래에만 빠진다면, 우리는 영락없이 세이렌의 노래에 빠져 난파당하는 선원의 꼴이 될 것이다. 비수를 감춘 아름다움은 치명적인 법이다. (2006. 11)


1) Arjun Apadurai, "Grassroots Globalization and the Research Imagination," Arjun Apadurai Ed., Globalization (Durham & London: Duke UP, 2001) p. 5.
2) 강내희,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넘어 대안적 세계화로」, 『문화/과학』47호(2006년 가을) 44쪽.
3) 피터 L. 버거, 새뮤얼 헌팅턴 편, 『진화하는 세계화: 현대 세계의 문화적 다양성』, 김한영 역, 아이필드, 2005.
4)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 조슈아 예이츠, 「세계화의 선봉에서: 미국적 세계화주의자들의 세계」, 피터 L. 버거, 새뮤얼 헌팅턴 편, 같은 책, 529쪽.
5) 아르준 아파두라이, 『고삐 풀린 현대성』, 차원현 외 역, 현실문화연구, 2004, 60쪽.

6) 아르준 아파두라이, 같은 책, 58쪽.
7) Arjun Apadurai, op. cit., p. 7-18.
8) 피터 L. 버거, 새뮤얼 헌팅턴 편, 같은 책 498쪽.
9) Nestor Garcia Canclini, "Urban Change in Mexico City," Arjun Apadurai Ed., op. cit., p. 258.
10) 피터 L. 버거, 새뮤얼 헌팅턴 편, 같은 책, 501쪽.
11) 다양성(diversity)이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의 ‘디베르수스’(diversus)인데, 이 말의 원래 의미는 ‘대립되는’, ‘불일치하는’, ‘모순되는’ 등이었지 오늘날처럼 ‘다양한’이라거나 ‘여럿의’라는 의미는 더욱 아니었다고 한다(프랑수아 드 베르나르, 「‘문화다양성’ 개념의 재정립을 위하여」, 김창민 외 편역, 『세계화 시대의 문화 논리』, 한울아카데미, 2005, 17쪽). 즉, 다양성은 기본적으로 조화와 다원주의가 아닌 모순과 투쟁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조화와 다원주의라는 허상 속에서 모순을 드러내는 투쟁을 하지 않을 경우, 다양성은 쉽게 획일화가 되어 버린다.
12) 스타벅스 관련 각종 자료들은 스타벅스 코리아 홈페이지(http://www.istarbucks.co.kr/), 위키피디아 ‘스타벅스’ 항목(http://en.wikipedia.org/wiki/Starbucks), “커피값이 기막혀”(‘시사매거진 2580’ 2006년 7월 16일 방송), “스타벅스의 무한질주”(<한겨레> 2006년 10월 28일자 기사) 등을 참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