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논술 이렇게 준비하자 1
- 08학년도 서울대 예시논제를 중심으로

글쓴이 : 박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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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학년도부터 대학입시전형과정에 새로운 변화가 주어졌다. 통합논술의 등장이 이런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그동안 논술문제는 현대사회의 다양한 삶의 문제에 대해서 철학적 쟁점이나 인식론적 관점을 중심으로 고전적 텍스트에 대한 정밀한 독해를 요구해왔던 논제였다. 질문 방식도 하나의 논제에 복합적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어서 정밀하고도 창의적인 사고를 해야 만 풀어낼 수 있는 것이었는데 비해 최근 각 대학에서 예시한 문제를 분석해 보면 이러한 출제형식에 변화가 주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다양한 분석자료를 제시하고 수리적· 과학적 요소를 결합하여 범교과적 형식의 논제를 출제하는 방식이 두드러져 보인다. 범교과적이라는 점은 언어, 역사, 사회, 지리, 예술, 문학, 경제, 수리 정치 등 모든 교과에서 텍스트를 발췌하여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고전적 텍스트에서 원론적인 문제의식을 바탕삼아 몇 갈래의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질문의 양이 절대적으로 증가하여 도반들에게 큰 부담을 주게 될 것 같다. 더구나 몇 몇 대학은 난해한 제시문의 요지를 요구하는 질문도 곁들이고 있어 기본적인 독해 능력을 알아보고자 하는 의도가 더 추가된 점도 눈에 띈다.
이러한 통합논술의 특성은 논술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에게 맥락적 사고와 통합적 사고를 어떻게 논리화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묻고 있으며, 텍스트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다양한 담론과 쟁점을 어떤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를 묻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학이 이런 방향으로 논술출제를 하기로 선회한 것은 그 만큼 논술시험에 대한 비중이 증대되었다는 점을 반증한다. 수능 등급제 실시와 내신 반영만으로는 수험생들의 변별력을 드러내는데 한계가 있다고 보고 결국 논술로 평가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최근 주요대학에서 발표한 통합논술 예시문항을 분석하여 보고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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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합논술은 무엇이며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 주요대별 개략적 접근과 이해

* 서울대 -기본교과 독해를 바탕으로 창의적 문제 해결안을 제시해야 한다.

인문계열은 지난해 사회 교과 중심으로 짜인 것과 달리 역사·예술·문학·사회문화 등 교과 제시문의 심층적 독해능력을 바탕으로 철학적 사고능력을 제시할 수 있는 통합교과적 질문을 하고 있다. 자연계열은 수학과 과학 원리를 통합해 현실에 적용하는 문제들이 주를 이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 교과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력이 바탕이 되어야 하므로 교과학습을 튼실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또한 서울대는 제시문 독해가 논술해결의 결정적 요인을 제공하므로 평소 깊은 독해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교과서 제시문이 함의하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것에서 벗어나 사회문화현상과 우리 삶에 투영하여 적용해 보고 해석하려는 의지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즉 다양한 이론이 가진 의미와 목적성을 이해하고 이러한 이론이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되어 풀릴 수 있는 가에 대한 폭넓은 응용력과 창의성이 길러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서울대 통합논술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자신의 눈으로 이 세계를 해석하고 문제를 발견해야 하며 문제 해결에 대한 창의적 견해를 제시할 수 있도록 다양한 독서와 토론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 연세대 - 수리적 연상능력을 바탕으로 사회현상을 해석해 내는 힘을 길러야 한다.

인문계열은 수리적 사고와 비판적 분석력, 사고력과 적응력을 종합적으로 측정하기 위한 다면적 사고형 논술문제가 출제된다. 수학 문제 유형은 수리적 연상을 통해 논리적으로 풀어내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현상을 분석해야 하는 데 학생들의 창의성과 유연한 사고능력이 요구된다.
연세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틀에 박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따라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환경 등 다양한 교과영역을 아우를 수 있는 통합적 사고능력이 길러져야 하고, 수리적 해법을 적용하는 논리적 사고능력이 배양되어야 한다.

* 고려대 - 수리적 해결능력을 바탕으로 사회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고려대는 언어논술과 수리논술을 따로 분리하지 않고 인문사회와 수리과학 영역을 기계적으로 결합하여 통합사고력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답안을 요구하는 형태의 논술문제가 출제된다. 언어.경제.사회.수리.과학의 기본 지식을 바탕으로 한 통합사고적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 인간과 환경에 관련된 윤리와 철학, 기본적 과학지식, 수리적 분석과 과학의 통합된 내용이 기본 골격이다.
따라서 고려대 논술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리적 능력을 튼튼히 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대사회가 당면한 과제를 꿰뚫을 수 있는 창의적인 사고능력을 길러야 한다.


2. 통합논술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 심층적 토론과 깊이 있는 독해가 핵심이다.
- 토론을 통해서 다양한 견해를 수용할 수 있는 태도가 길러져야 하고, 평소 어려운 글을 능수능란하게 해독할 수 있는 독해력을 길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하면서도 깊이 있는 독서행위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 더구나 제시문들이 다양한 통계자료를 담은 도표나 그림, 지도, 시, 고전 등이 나오고 있으므로 문자텍스트 독해 중심에서 벗어나 폭넓은 기호와 상징에 대한 해석 능력도 갖춰야 한다. 이러한 제시문의 변화는 교과서를 반영하는 경향에 의거해 나타나는 것이므로 교과과목을 공부할 때 소유적 독해에서 벗어나 존재적 독서를 해야함을 유념해야 한다. 존재적 독서라 함은 글 속에 담긴 의미를 내 삶의 문제로 치환해서 생각해 보는 방식이 우선되어야 하고 실제로도 글 내용이 나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을 지를 더 생각해 보는 것이다.
따라서 글 독해에서는 우리 사회 문제를 다양하게 내 삶의 문제로 적용해서 생각을 펼치려는 태도가 텍스트 읽기에서 반영해야 할 과제이다. 신문이나 시사잡지에 나오는 사회적 통계를 읽어내려는 태도가 있어야 하고 한 편의 문학 작품, 한 편의 그림이나 음악을 감상하더라도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망을 읽어내려는 태도가 일상화 되는 것이 독해력을 기르는데 있어 필요한 태도이다.

* 원리를 이해하자
- 기본교과 과목을 튼튼하게 익혀 원리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력을 길러야 한다. 통합논술은 교과적 기본 지식을 배경으로 우리사회문화 현실에 대한 해석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교과를 통한 원리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라는 것을 기억해 두자.
- 하나의 지식을 낱개로 분리해서 이해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모든 지식을 서로 연관시켜서 맥락화 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역사적 사건을 현상적으로 제시한 글을 읽을 때에도 이 현상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하며,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는 구조적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성찰하려는 태도가 문제 해결력을 심화시켜 줄 것이다.
- 특히 수리적 개념이 포함된 제시문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왜 수리적 개념이 수식으로 정립되어야 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어떤 문제인식에 이르러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숲을 이루는 나무 하나에 얽매이는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게 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숲을 이루는 요소를 하나씩 확보하여 숲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하는 힘을 기르게 하므로 원리를 튼튼하게 이해하는 것이 굳이 애돌아 가서 늦되어 보이지만 가장 빠른 길이라 생각한다.

* 나 만의 세계관을 오롯하게 세워야 한다
- 통합논술은 기본교과적 원리를 우리 사회문제에 적용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사회를 해석할 수 있는 자신만의 가치관이 우뚝 서야 하며 우리 삶을 따뜻하게 보되 냉철하게 분석할 수 있는 자신만의 철학이 필요하다. 이러한 철학을 가지기 위해서는 논술을 공부함에 있어 논술문제를 풀어내기 위한 내공쌓기라는 일차적 목표에 얽매이지 않고 이 공부가 내 삶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에 대해 늘 고민하는 자세가 있다면 내 눈으로 보는 세계가 명료하면서도 확연하게 해석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질 것이다.
- 통합논술은 겉으로 보기엔 교과 통합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공부하는 이들의 세계관과 세계를 해석하는 힘을 키우기 위한 목적이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의 주제에 대해 나 만의 생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늘 고민하고 정립하려는 일상이 내 안에서 키워져야 하며,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가 어떤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지 늘 현실인식의 날카로운 눈빛을 형형하게 쏟아내려는 의지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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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2008학년도 논술고사 2차 예시문제 및 분석

※ 다음 제시문을 읽고 논제에 답하시오. (제한시간 4시간)

<제시문>
(가)
매화 또한 초목의 일종이나 가장 그려내기 어렵다. 대개 그 가지와 줄기가 굴곡져 용과 뱀이 뒤엉킨 모습처럼 된 것은 매화의 참 모습이 아니다. 풍기는 분위기가 왕성하고 향기롭게 흘러넘침이 마치 달빛이 밝게 비치고 눈발이 흩날리는 것 같음을 헤아려 깨닫고 마음으로 터득하는 것이 매화의 참 모습이므로 가지나 잎의 처리는 논할 게 못 된다.
옛날에 내 친구 이자야(李子野)가 등불 아래 벽에 비치어 나타난 매화 그림자를 그린 적이 있는데, 그 형상이 부은 듯 부풀어 오르고 울퉁불퉁한 모습이어서 매화인 줄 알지 못하겠으나, 풍기는 분위기만은 제법 옮겨내었으므로 매화가 범상치 않은 화훼임을 알았다. 내가 손뼉을 치면서 껄껄 웃자, 자야가 달가워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것이 소동파(蘇東坡)가 등불을 마주하고 말의 그림자를 그린 것보다 낫지 아니한가?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펼쳐내어 자연스런 분위기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라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렇겠다. 나는 그림 그릴 줄 모르니 매화의 운치[趣]를 어찌 알겠는가? 운치도 알지 못하거늘 매화의 본성[神]을 어찌 알겠는가?”라 하였다.
본질적인 특성[神]은 매화에 있는 것이지만 운치를 느끼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단순히 대상물로서 대상을 바라본다면, 매화와 나는 아닌 게 아니라 과연 서로 다르다. 그러나 상리(常理)로서 대상을 바라본다면 나와 매화는 같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나는 그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줄만 알았지, 그 운치 있는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온통 티끌과 먼지로 뒤덮인 세상에서 그 마음속은 더럽혀지지 않도록 한다면, 상쾌한 정신과 빼어난 맑음으로 충만한 매화에게서 나의 운치를 북돋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운치를 이미 터득했다면 그것은 본질적 이해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본질적 이해에 도달한 자는 매화에 대해서 붓을 잡는 일을 기다리지 아니하고도 바로 해 낼 수 있는 것이거늘, 하물며 그 가지와 잎을 따지겠는가?
(권헌權憲, 『묵매기墨梅記』)

(나)
소동파의 시에 “그림을 그리되 겉모습만 같게 하면 된다고 하니, 이런 소견들은 어린 아이와 다를 것이 없다. 시를 짓는 데 앞에 보이는 경치만 읊는 것도, 시의 본뜻을 알고 짓는 이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후세에 화가들이 이 시를 종지(宗旨)로 삼고 진하지 않은 먹물로 그림을 거칠게 그리니, 이는 물체의 본질과 어긋나게 된 것이다.
지금 만약 “그림을 그리되 겉모습은 같지 않게 해도 되고, 시를 짓되 앞에 보이는 경치를 읊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면, 이치에 맞는 말이라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집에 동파가 그린 묵죽이 한 폭이 있는데, 가지와 잎이 모두 산 대나무와 꼭 같으니, 이것이 소위 틀림없는 사진(寫眞)이란 것이다. 정신이란 모습 속에 있는 것인데, 모습이 이미 같게 되지 않는다면 정신을 제대로 전해낼 수 있겠는가?
동파가 이렇게 시를 읊은 것은 대개 “겉모습은 비슷하게 되어도 정신이 나타나지 않으면 비록 이 물체가 있다 할지라도 광채가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나도 말하기를 “그림이란 정신이 나타나야 하는데, 겉모습부터 같지 않게 되었다면 어찌 같다 할 수 있겠으며 또 광채가 있어야 하는데 딴 물건처럼 되었다면 어찌 이 물건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이익李翼, 『논화형사論畵形似』, 『성호사설星湖僿說』 권5)


논제 1. 제시문 (가)와 (나)는 조선시대 문인들의 그림에 대한 견해를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이 그림을 창작하고 감상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요소가 무엇인지 서술하시오.

논제 2. 다음 두 산수화(그림1, 2)는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와, 정선(鄭敾)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이다. 논제 1의 논의를 바탕으로 두 그림을 비교 감상하시오.

그림 1. 안견, <몽유도원도>, 1447년

그림 2. 정선, <인왕제색도>, 1751년




논제1 해제

논제1 : 제시문 (가)와 (나)는 조선시대 문인들의 그림에 대한 견해를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이 그림을 창작하고 감상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요소가 무엇인지 서술하시오.

이 논제는 권헌의 『묵매기(墨梅記)』와 이익의 『논화형사(論畵形似)』를 통해 그림을 바라보는 두 견해의 차이를 서술할 것을 요구했다. 기교를 통해 사물의 겉모습을 묘사하는 데 그치기보다는 대상과의 합일을 통해 대상의 본질적 특성을 그려야 한다는 권헌의 견해와, 반면에 대상의 사실적 묘사를 강조하는 이익의 견해 차이를 중심으로 서술할 수 있다. 이는 각각의 견해와 관련지어 비현실적인 세계를 묘사한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원근법을 통해 자연의 사실적 묘사를 중시하는 진경산수화의 하나인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비교 감상하라는 [논제 2]의 해결에도 유용하다.  

논점 설정하기

이 논제에서 요구하는 있는 것은 조선시대 문인들이 그림을 창작하고 감상하는 데 있어 중요하게 생각했던 요소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 논제를 풀기 위해서는 전제된 조건인 ‘제시문 (가)와 (나) 그림이 조선시대 문인들의 그림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세계관’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하다.
따라서 조선시대 문인들의 세계관과 그림의 상관성을 제시해야 하고, 창작과 감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를 제시해야 한다. 이 점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제시문에 나타난 견해를 정확하게 독해하여 이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해 나가야 한다.

제시문 분석하기

(가) 제시문은 (권헌權憲, 『묵매기墨梅記』)에서 발췌한 글이다. 먼저 첫 단락에는 매화를 그려내기가 가장 어렵다는 점을 말한다. 풍기는 분위기가 왕성하고 향기롭게 흘러넘침이 마치 달빛이 밝게 비치고 눈발이 흩날리는 것 같음을 헤아려 깨닫고 마음으로 터득하는 것이 매화의 참 모습이므로 가지와 줄기가 용과 뱀이 뒤엉킨 모습처럼 매화의 외양을 그려내는 것은 매화의 참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권헌의 친구인 이자야(李子野)가 등불 아래 벽에 비친 매화 그림자를 보고 자연스러운 매화분위기를 그림에 담아내었는데 이것을 보고 매화가 범상치 않은 화훼임을 알았다고 했다. 따라서 매화의 본질적인 특성은 그 외양에 있지만 그 운치를 느끼는 것은 감상자의 몫이므로 그 운치를 터득했다면 본질적 이해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지와 잎에 얽매이는 것보다는 본질적 이해에 도달하는 이가 표현해낸 그림이 참된 매화의 본질을 담았다고 보는 것이다. 즉 사물의 형상을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형상에 내재된 본성을 이해한다면 붓을 잡지 않고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말한다.
따라서 (가)제시문은 권헌의 이러한 관점이 그림을 대하는 중심에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림을 사물이 지닌 실물세계의 표현양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에 담긴 심미적이고 철학적인 본성이 그림으로 형상화 하는 것이 의미 있다는 점을 읽어내어야 한다.
이에 비해 (나) 제시문은 이익의 성호사설에 실린 ‘논화형사(論畵形似’)에서 발췌한 글인데 권헌의 논리에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다. 이 글의 요지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이다. 사물이 지닌 외양과 그 사물에 내재한 본성이 이원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내적인 가치체계는 형상화되기 마련이며 그 형상을 통해서 우리는 사물이 지닌 본성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소동파의 시에서 “그림을 그리되 겉모습만 같게 하면 된다고 하니, 이런 소견들은 어린 아이와 다를 것이 없다”고 한 의미를 잘못 곡해한 이들이 사물의 특성을 겉모습과 내면을 다르게 담아내려는 태도를 보였다.이에 대해 이익은 “우리 집에 동파가 그린 묵죽이 한 폭 있는데 가지와 잎이 모두 산 대나무와 꼭 같으니 이것이 소위 틀림없는 사진(寫眞)이란 것이다”라 하며, 정신은 모습 속에 있고 모습이 다르게 나타난다면 정신이 왜곡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더구나 그림 속에는 사물이 지닌 본성을 드러내는 광채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형사(形似) 즉, 사물이 지닌 형상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사물의 형상도 본질의 중요한 요소이며 형상이 없이는 본질도 추구할 수 없는 것으로 경험과 실체에 대한 이치를 궁구할 것을 창작의 요체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논점 정리

따라서 (가)에서는 그림 창작과 감상에 있어 대상을 외양보다는 그 외양이 내포한 의미와 본성을 꿰뚫어야 함을, (나)에서는 정신은 형상을 통해 드러나므로 그림을 창작하는 것과 감상에 있어서 사물이 지닌 광채 즉 사물이 지닌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통해 추구해야 함을 서술해야 한다.
또한 글쓴이 권헌은 조선 전기 사대부의 가치관에 깃든 이상론적 세계관과 관념을 중시한 삶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으며, 이에 비해 이익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체계화한 학자로서 실사구시의 세계관을 보이고 있음을 대비적으로 서술할 수 있다.


예시 글

제시문 (가)는 그림에 있어 대상의 본질을 중요시하고 있다. 본질은 때로 형상을 떠나 분위기와 운치 등으로 나타나며 또한 그것을 깨닫고 마음으로 터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더 나아가 운치를 터득했다면 이미 본질적 이해에 도달했으며 붓으로 그리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이러한 창작에 대한 견해는 지극히 심미적인 것으로 본질은 ‘깨침’이라는 경지로 창작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는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창작론은 될 수 없으며 경지에 이른 자나 그 경지를 파악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 사람에게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나’와 대상의 합일의 경지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제시문 (나)는 실물 대상에 대한 일차적인 접근 없이는 대상의 본질도 나타낼 수 없다고 한다. 즉, (가)와 비교했을 때, (나)는 대상의 본질은 형상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며, 겉모습이 같지 않고 경치를 읊지 않는다면 정신조차 어디에도 깃들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그리하여 본질에 이르는 가장 기본적인 요건으로 사진(寫眞), 형사(形似)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창작론은 사물의 형상도 본질의 중요한 요소이며 형상이 없이는 본질도 추구할 수 없는 것으로 경험과 실체에 대한 이치를 궁구할 것을 창작의 요체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권헌과 이익은 그들이 살아간 시대가 다르다. 권헌의 시대가 관념이 실질보다 우위에 있었다면 실학의 시대를 살아간 이익은 실질 또한 결코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실사구시의 실학 정신을 주장한 이익의 세계관이 예술 작품의 감상에 반영되면서 사물의 외양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학문을 하는 목적이 단지 자신의 내면을 가꾸는 데에만 있지 않고 현실 세계에 이를 적용하여 백성을 구제하는데 쓰고자 한 유학의 이념과도 일맥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논제 2 해제

논제2 :  다음 두 산수화(그림1, 2)는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와, 정선(鄭敾)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이다. 논제 1의 논의를 바탕으로 두 그림을 비교 감상하시오.

이 논제는 논제1의 논의를 바탕으로 두 그림을 비교 감상하라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논제1에서 권헌과 이익의 관점이 어떠했는가에 대한 쟁점을 감상의 화두로 삼아 비교해 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반들은 논제1의 논점을 적용하는데 있어 권헌-안견, 이익-정선의 짝짓기를 통해 감상의 폭과 깊이를 보여 주어야 한다.

논점에 들어가기 위한 배경지식

1. 안견의 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조선초기 화단의 최대 거장으로 알려져 있는 안견(安堅)이 남긴 유일한 진작(眞作)으로, 제작연대가 알려진 현존하는 조선시대 산수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현재 일본의 天理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있는데, 어떤 경로로 일본으로 건너갔는지 확실치 않다.

안견은 자(字)를 가도(可度), 득수(得守)라 하고 호(號)를 현동자(玄洞子), 또는 주경(朱耕)이라 하였으며, 정확한 생졸년(生卒年)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기록에 의하면 세종년간(1419∼1450)에 가장 활발히 활동하였고, 성종년간(1469∼1494) 초기까지도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견은 '몽유도원도'를 그릴 당시 이미 정4품(正四品)의 호군(護軍)벼슬을 하였는데 6품이 한계였던 화원(畵員)의 신분으로 정4품까지 올라간 것은 매우 파격적인 경우로서 조선건국 이래 최초의 일이었다.
안견이 이렇듯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천부적인 재능 뿐만 아니라 '몽유도원도'의 제작을 의뢰했던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의 후원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1445년(세종 27)까지 수집된 안평대군의 소장품 222점 중 중국의 역대 서화를 제외한 나머지 30점이 모두 안견의 작품이었던 사실만으로도 안평대군과 안견과의 밀접한 관계는 충분히 짐작된다. 즉, 안견은 서화에 뛰어났던 안평대군의 이론적 지도를 받으며 그의 방대한 소장품을 접하면서 화가로서의 실력과 안목을 더욱 키워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몽유도원도'에 나타난 곽희파(郭熙派) 화풍의 영향 또한 안평대군의 소장품 가운데 곽희파 화풍의 작품이 대다수를 차지했던 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몽유도원도'가 탄생하게 된 배경은 그림뒤에 붙어있는 안평대군의 발문(跋文)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1447년(세종 29) 음력 4월 20일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박팽년(朴彭年, 1417∼1456) 등과 함께 노닐었던 도원(桃源)의 광경을 안견에게 그리게 하였는데 안견은 3일만에 그림을 완성하였다.
발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안평대군이 꾼 꿈은 중국 동진(東晉)때 시인인 도잠(陶潛, 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몽유도원도'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곽희파 화풍을 토대로 하고 있다.
붓의 흔적을 감춘 운두준법(雲頭 法)이나 바위 밑을 비추는조광(照光) 효과, 해조묘(蟹爪描)의 수지법(樹枝法) 등 기법적인 측면은 북송대(北宋代)의 곽희파 화풍을 수용한 것이며, 전체 화면구도와 다소 과장되어 형식화된 산의 형태, 산의 윤곽선에 나타나는 이상한 돌기의 모습 등은 북송대(北宋代) 이후 매너리즘에 빠진 원(元), 금대(金代)의 곽희파 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있다. 그러나 안견은 이러한 중국 화풍의 영향을 바탕으로 하여 독자적인 자신만의 화풍을 형성하여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몽유도원도'에서 두드러지는 안견의 독창적인 면모를 살펴보면 먼저 일반적인 두루말이 그림과는 반대로 그림의 왼쪽으로부터 오른쪽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가는 독특한 화면구성을 들 수 있는데, 화면의 좌측 아래쪽에서 우측 위로 대각선을 따라 현실세계와 꿈속의 세계를 효율적이고도 치밀하게 배치하였다.
또한 평원(平遠)과 고원(高遠)의 대조를 통해 산세(山勢)의 웅장함과 환상적인 느낌을 더욱 고조시키고, 넓게 펼쳐진 도원(桃源)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부분과는 달리 이곳만 조감도법(鳥瞰圖法)을 사용하여 묘사하였다.
세부 표현도 매우 뛰어나 선묘는 세밀하여 일획의 실수도 없이 정갈하며, 박락되어 흔적만 살펴볼 수 있는 복사꽃 꽃술의 금채(金彩)를 제외하고는 정교하게 채색된 부분 역시 아직도 화려함과 영롱함을 잃지 않고 있다. 화면 오른쪽 아래 구석에 "지곡가도(池谷可度)"라는 안견의 관지(款識)가 있고 이어서 주문방인(朱文方印) [가도(可度)]가 찍혀있다.
현재 '몽유도원도'는 상, 하 2개의 두루말이로 표구되어 있는데, 상권의 첫머리에 "몽유도원도"라는 안평대군의 제첨(題簽)과 '몽유도원도'가완성된 지 3년 후에 지은 안평대군의 칠언절구(七言絶句)가 주서(朱書)로 쓰여있으며 이 시문에 이어서 몽유도원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이 그림 뒤에 안평대군의 발문이 붙어있으며, 그 뒤를 이어 세종 조의 대표적 인물 21명의 찬시(贊詩)가 실려있다. 상권에는 안평대군의 발문에 이어서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이개(李愷, 1417∼1456), 하연(河演, 1376∼1453), 송처관(宋處寬, 1410∼1477), 김담(金淡, 1416∼1464),고득종(高得宗), 강석덕(姜碩德, 1395∼1459), 정인지(鄭麟趾, 1396∼1478), 박연(朴堧, 1378∼1458)의 찬시가있으며, 하권에는 김종서(金宗瑞, 1390∼1453), 이적(李迹), 최항(崔恒, 1409∼1474), 박팽년, 윤자운(尹子雲,1416∼1478), 이예(李芮, 1419∼1480), 이현로(李賢老, ?∼1453), 서거정(徐居正, 1420∼1488), 성삼문(成三問, 1418∼1456), 김수온(金守溫, 1409∼1481), 만우(卍雨, 1357∼?), 최수(崔脩)의 찬시가 실려있다.
이처럼'몽유도원도'권(卷)은 시(詩), 서(書), 화(畵) 삼절(三絶)의 수준 높은 경지를 구현함과 동시에 세종조의 빼어난 문화적 역량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어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예술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2. 정선의 인왕제색도 감상

인왕(仁王)은 서울에 있는 인왕산을 말하는 것이고 제색(霽色)이란 큰 비가 온 뒤 맑게 갠 모습을 뜻한다. 한마디로 비 개인 인왕산 그림인데 인왕산은 산 전체가 백색화강암으로 되어 있는 바위산이 특징이다. 그런데 백색화강암을 그리려면 흰색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온통 진한 묵으로 그렸는데 이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다.
붓으로 저렇게 그리려면 붓을 옆으로 뉘어 빗자루를 쓸어내리듯 그려야 하는데 그것을 묵찰법(묵색 쇄찰법)이라고 하는데 깎아지른 절벽 등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부벽준과 비슷하지만 그려놓고 보면 전혀 다른 느낌이 든다. 그런 묵찰법을 한번이 아닌 몇 번을 반복하여 그렸기에 바위의 묵중한 중량감이 더욱 살아났다.
또 백색암석을 진한 묵으로 그려도 원래 색은 백색임을 느낄 수 있으니 만년의 겸재의 묵법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올랐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인왕산을 직접 가까이에서 보면 백색바위가 백색으로만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바위가 비에 젖으면 그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솟구친 백색 화강암봉들의 독특한 색감은 이런 묵색 쇄찰법으로 쓸어내려야만 그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겸재는 인왕산 밑 인곡정사에서 살면서 수백 번, 수천 번의 연습과 실험에서 터득한 진경산수의 백미로 꼽힐만한 표현이다. 이래서 그렇게 그렸구나 하며 무릎을 탁 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버드나무, 소나무 등 갖가지 나무의 표현도 기교와 세밀한 표현을 배재한 채 속도감 있게 그려내 거친듯하면서도 기품 있고 장대한 우리나라 수목의 특징을 살려 진경산수의 맛을 보여주고 있고, 또 양 옆과 특히 인왕산 정상의 윗부분을 의도적으로 과감하게 잘라 산의 웅장함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좁은 종이에서 벗어나 더 높게 뻗어나갈 수 있는 상상의 여지를 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구도는 처음부터 의도된 건 아니었다. 원래 이 그림의 상단에는 순조 때 영의정까지 지낸 만포 심환지(1730~1802)의 칠언절구 제시가 있었다. 겸재 그림을 좋아하여 그림을 소장하면서 제시를 적어두었는데 워낙 검소해서 그런지 죽어서 초상화 하나 마련하지 못하여 심환지 후손들이 초상화 대신 조상의 글씨를 대신하여 제사를 지냈다. 그런 소문이 나서 그런지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팔려 이리저리 주인이 바뀔 때 제시는 없어졌고 그때 그림의 상단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이 그림을 보다보면 감상자의 시선이 어느덧 자연스럽게 우측 앞에 있는 조그마한 집으로 모아지게 된다. 그림 감상에서 시선이 모아진다면 그건 절대 우연이 아니라 분명 화가가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그림의 주제이자 목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 집은 과연 누구의 집일까? 그 의문을 풀어 가는데 단초를 마련한 분은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인 최완수 선생이다. 최완수 선생은 그림을 그린 때가 작품관지에서 신미윤월하완(辛未閏月下浣) 즉 ‘신미년윤달 5월 하순'에 그렸는데 정선의 60년 지기인 사천 이 병연(李秉淵1671~1751)이 5월 29일에 죽었다는 걸 밝혀냈다.
그 후 오주석교수가 [승정원일기]에서 이 병연 사망 전후의 날씨를 확인했는데 19일부터 25일 아침까지 줄 곳 비가 내렸고 25일 오후에 비로소 비가 완전히 개었다는 걸 밝혀내었다. 바로 <인왕제색도>는 이 병연이 죽기 4일전 5월25일, 비가 개인 오후에 그렸다는 걸 증명한 것이고 기와집은 육상궁 뒷담 쪽에 있던 사천 이병연의 집(취록헌)임을 고증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천 이병연이란 인물은 어떤 사람일까? 정선이 조선후기 진경산수의 거장이었다면 사천은 일만 삼천수가 넘는 시를 지은 대문장가이자 진경시인이었다. 사천과 겸재는 10대부터 스승인 김창흡 아래 동문수학한 벗이었는데, 각각 81세, 84세까지 장수하면서 한동네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의지하며 자란 형제 같은 사이였다. 두 사람의 사이가 얼마나 애틋했던지 겸재가 양천(지금의 서울 가양동) 현령으로 부임할 때 이병연의 전별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자네와 나를 합쳐놔야 왕망천이 될 터인데
그림날고 시 떨어지니 양편이 다 허둥대네
돌아가는 나귀 벌써 멀어졌지만 아직까진 보이누나
강서에 지는 저 노을을 원망스레 바라보네
* 왕망천(당나라 문인이자 서화가 왕유)

한양에서 멀지도 않는 코앞에 있는 양천으로 떠나는 것인데도 이렇게 애절한 시를 남겼고, 또 전별시와 더불어 둘은 시와 그림을 주고받길 굳게 약속한다.

겸재와 더불어 시가 가면 그림이 온다는 약속이 있어서
기약대로 가고 옴을 시작한다.
내 시와 자네 그림 서로 바꿔 봄에
시는 간장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으로 휘둘러 대니
누가 쉽고 어려운지 모르겠구나.

-신유 봄에 사천

이렇게 주고받은 시와 그림을 묶어 놓은 서화첩이 바로 그 유명한 [경교명승첩]이다. [경교명승첩]은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님을 보여주는 조선 최고의 서화첩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곳에 서로 시와 그림을 주고받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 한 점 있는데 바로 이 그림이다.




사천과 겸재가 마주앉아 시와 그림을 주고받는 모습을 그린 그림.

서로 바라보는 표정이 오랫동안 함께했던 지기끼리만 나눌 수 있는 표정이다. 그렇게 겸재 자신의 피붙이와 다름없는 사천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이때 겸재는 60여년을 형제처럼 지내온 사람을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기가 막힌 심정이었을까. 아마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이며 하루빨리 병을 훌훌 털고 일어나길 손꼽아 빌고 빌었을 것이다.
바로 <인왕제색도>는 사천 이병연이 어두운 비구름이 개이듯 병이 나아 저 당당한 인왕산처럼 다시금 웅장하고 굳건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려낸 그림이다. 겸재가 사천의 집 주위를 수목들이 호위하듯이 빙 둘러 그려낸 것만 보아도 사천이 병을 이겨내고 당당한 소나무처럼 일어나길 바라는 겸재의 마음을 잘 알 수 있다. 속도감 있게 그린 수목이 마르기도 전에 또 다른 수목을 그려 물크러져 보이는데 이것이 물기가 촉촉한 수목을 그리는데 가장 효과적인 기법이다. 이처럼 겸재가 지극한 마음을 담아 그렸기에 <인왕제색도>를 보면 산수화 느낌을 넘어 절망 끝에서 피어나는 카타르시스의 분위기가 묻어나오는 것이다.
이처럼 <인왕제색도>는 지금의 궁정동 칠궁 담장 너머에 있던 사천의 집(취록헌) 쪽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며 그린 것이다. 그래서 백악산 아래에 있는 사천댁 취록헌만 있으면 되었고 그 건너 인왕산 아래에 있는 겸재 집 인곡정사 사이에 많은 집들은 큰 의미가 없기에 안개 밑으로 사라지게 한 것다. 앞 등성이에 육상궁 뒷담을 표현해 이쪽이 북악산록이란 것만 표시만 보더라도 궁정동 쪽에서 인왕산을 바라보고 그린 그림임이 분명하다.
겸재는 평생 동안 갈고 닦은 자신의 기량을 이 그림에 다 쏟아 부었다. 묵색쇄찰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웅장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는 사천 이 병연을 상징하듯 바위를 중량감 넘치게 그렸고 그러자니 토산과 먼 곳의 수목은 단조로운 피마준과 미점만으로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양성곽의 모습까지 세심하고 정성들여 그려 전체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한 점 흠잡을 데가 없는 진경산수화의 대표작으로 손색이 없다.



논점 설정하기

이 논제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안견’과 ‘정선’ 두 인물이 지닌 세계관을 그림 속에서 읽어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 해석의 실마리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먼저 그림의 시대적 배경을 유추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림 ‘몽유도원도’와 ‘인왕제색도’는 먼저 조선 전기와 후기 작품의 대표작이라는 점이다. 조선 전기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쟁투시기를 거쳐 세종에 이르러 조금씩 안정기에 접어들어 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대 엘리트들 특히 ‘안견’에게 그림을 그리게 한 ‘안평대군’의 사상과 이상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늘 현실과 거리두기를 하며 몸을 사리던 안평대군은 집현전 학자들과 왕성한 교류를 하면서도 시대적 이상을 비현실세계에서 찾으려 했고, 그 염원을 ‘안견’을 통해 그리게 하였다. 또한 ‘몽유도원도’에 담긴 세계는 중국 동진 때 도잠(陶潛, 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담긴 이상향이 조선 문인들의 세계관에 삼투압 되어 다시 나타났다고도 볼 수 있다. 즉 권력 엘리트가 현실세계에서 비껴나와 꿈꾸는 이상향이 관념화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며 실재하기를 바라는 관념의 틀일 수도 있다. 늘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유유자적하려 했던 안평대군의 삶이 절절하게 투영된 것을 읽어낼 수 있는데, 매화 향기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어 현실세계에서 자신을 부각시키려는 것보다는 은근하고 비유적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조응해 보려는 태도가 깃들어 있음을 (가)글 권헌의 생각과 연관지어 서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실재하는 세계를 더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감상의 핵심이 될 수 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꼽히는 겸재의 그림은 안견의 ‘몽유도원도’ 주제의식을 뛰어넘는다. 겸재가 그리려고 했던 것은 인왕산의 경치가 아니라 비온 뒤 처연하게 가라앉은 인왕산이 품은 분위기와 향기이며, 인왕산 속에 조용하게 웅크리고 있는 벗의 그림자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은 인왕산을 실물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왕산 진경을 작가 의도대로 조작해 내었다. 그러나 이 그림을 보고 인왕산 이외의 산을 떠 올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림 속에 담긴 인왕산은  웅장한 암벽과 노송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더 인왕산답기 때문이다.
정선은 ‘인왕제색도’를 통해 조선 후기 근대정신을 담아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근대정신이란 사물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그 사물이 가진 속성을 남김없이 이해함으로써 그 사물의 본성을 정확하게 형상화 한 것을 의미한다. 근대성은 대상에 대한 과학적 태도로부터 비롯된다. 민중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관찰함으로써 민중이 처한 현실이 얼마나 처참하면서도 비극적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관찰대상을 한 면의 분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과 다른 면을 폭넓게 살펴봄으로써 민중 속에 튼튼하게 자라고 있는 건강성도 발견할 수 있다. 정선은 이러한 세계를 그려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산을 그리되 산이 지향하는 정신을 담아내었으며, 정신을 담아내되 산의 형상을 비틀거나 왜곡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후기 빛을 발하기 시작한 실학정신과도 상통한다. 앞의 글(나)에서 이익이 강조한 것처럼 이 그림 속에서도 ‘광채’가 나고 있는 사물의 본성을 갈파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담고 있는 그릇이 분명하게 형사(形似)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그림을 단지 그림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 담긴 시대정신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조각들을 씨줄날줄로 엮어내어 읽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 논제는 이러한 점을 설파할 수 있는지를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논제 1에서 논의된 관념과 실재, 현상과 본질, 이원론과 일원론의 세계를 그림 감상에 투영하여 폭넓고 깊게 읽어낼 수 있는가를 논의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예시 글

그림은 대상의 외양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내재한 이치를 얼마나 잘 담아내느냐가 중요하다. 눈보다 마음으로 보고 사물의 외양보다 본질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옛 사람의 그림에 그려진 산수 자연은 대체로 우리 눈 앞에 펼쳐진 자연이 아니라 그들이 꿈꾼 이상 세계인 경우가 많다. 또 실재하는 산수도 그들의 관념 속에서 가공되어 자신의 정신 세계와 창작 의도를 반영하여 재창조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림 1의 <몽유도원도>와 그림 2의 <인왕제색도>는 여러 면에서 뚜렷이 대비되는 작품이다.
  그림 1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자신의 꿈을 그림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나 그림 속의 공간은 현실에 실재하는 곳이 아니다.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비롯된 무릉도원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때묻은 현실에서 벗어나 살고자 한 이상향이었으며, 안견의 <몽유도원도>의 도원 역시 그림을 그리게 한 안평 대군이 가고자 한 이상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곧 그림 1은 대상 자체보다 관념을 중시한 옛 사람들의 창작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둔 대군의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고, 조선 전기의 실질보다 관념이 우위에 있었던 시대 의식과도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니다.
  그림 2는 서울 인왕산에 비가 온 후 산 안개가 걷히는 장면을 사실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겸재 정선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알려진 화가이다. 실학 정신이 예술에 반영되어 대상의 모습을 그리되 우리의 관념 속 공간이 아닌 실재하는 공간을 대상으로 하여야 한다는 자각이 일고 나서 본격화된 화풍이 바로 진경산수화풍인데 그림 2는 그러한 시대 경향을 잘 반영한 것이다. 이 그림은 인왕산 주봉이 우뚝 솟아 보는 이를 압도하는 느낌이 들고, 솟구치고 쏟아내리고 유동하는 기세와 우측 하단의 유난히 정갈한 기와집이 마치 인왕산 앞에서 웅장한 그 산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러나 실제보다 작게 그려진 좌우의 봉우리와 실제와 다른 골짜기의 모습, 생략된 일부의 소재는 이것이 인왕산의 실제 모습과 흡사하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 그림을 보고 다른 산을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바로 대상의 특징-본질-을 잘 그려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단지 대상의 외양에만 충실한 것은 아니다. 이 그림은 그림 속의 집 주인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친구-사천 이병연-가 안개 속에 피어오르는 산 봉우리처럼 오랜 병을 훌훌 털고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원이 담겨 있는 것이다.
  곧 그림이란 단지 대상의 외양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 내재한 정신을 그려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 대상을 통하여 그 정신을 담아내야한다. 그러기 위해 대상의 외양을 사실과 다르게 그려서도 안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