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지식인의 역할(서강대 기출논제)

※ 글 A는 시인과 역사가의 역할에 대한 견해를 밝힌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이다. 이 글의 주장이 타당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글 B와 C 를 활용하여 논술하라.

A. 시인의 임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성이나 필연성에 따라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 역사가와 시인의 차이는 산문으로 이야기하느냐 운문으로 이야기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왜냐 하면 헤로도토스의 작품은 운문으로 고쳐 쓸 수도 있을 것이나, 운율이 있든 없든 간에 역시 일종의 역사임에는 변 함이 없기 때문에) 전자는 실제로 일어난 것을 이야기하고, 후자는 일어 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 적이고 더 진지하다. 왜냐 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좀더 이야기하고, 역 사는 개별적인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을 이야기한다 함 은 (비록 시가 등장 인물들에게 어떤 특정한 이름을 부여한다고 하더라 도) 이런 또는 저런 유형의 인간이 개연적으로, 또는 필연적으로 말하거 나 행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함을 의미한다. 개별적인 것을 이야기한다 함은 이를테면 알키비아데스가 무엇을 행하였으며 무엇을 경험하였는가를 이야기함을 말한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에서

B.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 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소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 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C. 일본은 소위 토지 조사 사업을 한국에 있어서의 토지 소유의 근대화 작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의 토지 강탈이었다. 이로 인하여 일본인 대지주가 증가하였고, 한편 지난날의 양반들 중에서 지주가 되어 과거의 특권을 물려받은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경작자인 많은 농민은 영세 소작농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제 계약에 의한 소작인이 되었기 때문에 점차 토지 소유권으로 성장해 가던 경작권을 빼앗기는 보다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또 자작농이라 할지라도 지극히 적은 농토밖에 소유하지 못하는 영세농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러므로 소작을 겸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지주의 수는 물론 자작농이 차지하는 비중도 지극히 적었던 것이다. 즉, 다음 표에 나타난 1916년의 통계에 의하면 전 농가 호수 약`264만 중에서 지주가 불과 2.5%인 6.6만 가량, 자작농이 약 20%인 53만 가량인데 대하여, 자작 겸 소작농은 40.6%인 107만 가량, 순소작농은 36.8%인 97만 가량이었다. 후 양자의 합계는 204만으로 전 농가의 77.4%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대부분, 즉 전 농가 호수의 약 60%인 150 만 가량이 1`정보 미만의 적은 토지를 경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전락한 영세 농민들의 생활은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1924년의 총 독부 통계에 의하더라도 전 농가 2,728,921호 중에서 1`년의 수지가 적자인 호수는 1,273,326호로서 백분비로 하면 약 44.6%였던 것이다. 즉, 한국 농가의 약 반은 매년 빚을 져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이 공식 통계 이상으로 그 수가 많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가난한 농민들은 식량이 부족하면 풀뿌리나 나무껍질을 벗겨 먹어야 했다. 그 수는 총독부 자신의 언명에 의하더라도 전 농가의 반을 넘었다.
일제의 식민 정책 밑에서 이러한 추세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자작농과 자작 겸 소작농은 소작농으로 몰락하여 그 수가 부쩍 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인 지주가 늘어갔다. 우리는 이를 다음과 같은 통계 숫자에 의하여 알 수가 있다. 즉, 1919년에 지주는 전농가의 3.4%이던 것이 1930년에는 3.6%로 증가하였는데, 이것은 일본인 지주의 증가에 의한 것이었다. 자작농은 같은 기간에 19.7%로부터 17.6%로, 자작 겸 소작농은 39.3%로부터 31%로 각각 상당히 감소되었고, 반면에 소작농은 37.6%로 터 46.5%로 격증하였던 것이다.
소작농이 지주에게 내는 소작료는 생산량의 2`분의 1`이 평균으로 되어 있었다. 게다가 소작농들은 비료대, 수리 조합세, 곡물 운반비, 지세 등을 부담하였고, 또 지주에게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농민의 생활이 점점 곤란하여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리하여 화전민이 격증하여 갔다. 즉, 1916년에 화전민 수가 245,626이었는데, 1927년에는 697,088로 3배 가까이나 증가하였다. 또 만주나 일본으로 이주하는 사람의 수도 해를 따라 증가하였다. 1927년에는 56만 가량이던 만주의 이민 수는 1936년에는 무려 89만으로 증가하였던 것이다. 또 1910년에는 250명에 지나지 않던 일본에 이민한 한국인 수는 1930년에는 30만으로, 1939년에는 96만으로 증가하였던 것이다. 만주에 가서 농업을 하거나 일본에 가서 노동을 하거나 간에 그들의 생활은 한결같이 비참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원주민들과의 알력으로 인하여 만주에서는 만보산 사건 같은 불행한 일이 벌어졌고, 이러 한 사건은 일본의 중국 침략에 악용되었다.
─ 이기백의 『한국사 신론』 중에서


1998년 서강대학교 인문계열 논제 예시 답안

(1) 타당한 경우
시인과 역사가의 역할은 그들이 쓴 시와 역사가 그 사회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시와 역사는 다같이 언어를 통해 어떤 진리를 드러내지만, 각각 다른 대상과 방식을 통해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 안에서 그 역할을 수행한다. 시는 보다 보편적인 것을 드러내고, 역사는 보다 개별적인 것을 드러내기 때문에 역사보다는 시를 통해 우리는 좀더 궁극적인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 한국인이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역사가는 이러한 개별적인 사실들을 역사로 기술한다. 일본의 토지 강탈로 인하여 일본인 대지주가 증가하고, 많은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과중한 소작료로 인해 생활이 곤궁해진 농민들이 일본이나 만주로 이주해 간 사실들은 분명히 그 당시의 상황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개별적인 사실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기록한 역사를 읽고 우리는 그것에 대한 통계적이거나 추상적인 지식을 얻을 수는 있지만, 당시 한국 농민의 고통이 어떠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화의 시󰡐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읽을 때, 우리는 그 시대의 개별적인 역사적 사실은 알지 못하더라도, 그 시대의 한국 농민이 겪었던 고통을 절실하게 체험할 수 있다. 시에 드러난 고통은 시인의 고통만이 아니라, 땅을 빼앗긴 한국인의 고통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무엇인가에 대한 상실의 아픔을󰡐땅󰡑이라는 상징을 통해 형상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일어 날 수 있는 개연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역사에 기록된 사실에서는 얻을 수 없는 감동이나 느낌을 준다. 이는 인간의 정서 깊은 곳에 호소하는 예술 본연의 특성으로서, 시대와 지역을 넘어선 보편성을 갖는다. 우리는 문학 혹은 예술 작품이 갖는 보편성의 예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스페인 내란을 형상화한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그 사건에 대한 단 순한 지식이 아닌 그것의 고통과 아픔에 대한 보편적인 느낌을 우리에게 주며, 이념의 갈등을 그린 조정래의 󰡐태백 산맥󰡑은 이러한 갈등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하고 그로 인해 보편적인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이들은 모두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예술가로서의 시인은 이와 같이 어떤 개별적 사실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형상화시킴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감동할 수 있는 보편적인 세계를 그린다. 따라서 실제로 일어난 개별적인 사건들을 기록하는 역사가와는 달리, 그는 보다 철학적이고 진지한 진리의 탐구에 봉사하는 자라 말할 수 있다.

(2) 타당하지 않은 경우
시는 소설이나 희곡과 더불어 문학 예술의 한 분야이다. 역사에 대한 기술은 인문학의 일부이지만, 사회 과학과 마찬가지로 사실 과학에 속하기도 한다. 따라서 시와 역사는 기본적으로 사실에 기반하는가의 여부에 따라서도 구분될 수 있다. 필자는 글 A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를 넓은 의미로 해석한 데 반해 역사를 지극히 좁은 의미로 축소해서 본 것이라 생각한다. 시인이 상상력과 통찰력을 발휘하여 쓴 시가 모든 가능한 현상을 그려내는 장점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모든 시가 보편적인 현상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느 한 사람의 행적을 기리는 시도 수없이 많이 볼 수 있다. 또 어떤 한 시점에서 자연 현상의 일부를 노래한 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더구나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현상의 기술은 작가의 환상이나 허구에 불과할 수도 있으므로, 이것을 가지고 과거나 현재를 설명하고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역사의 경우 흔히 개별적인 현상을 다루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역사라 해서 개별적인 현상의 기술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는 개별적인 현상을 종합하여 보편화하는 것을 그 중요 임무 중의 하나로 삼는다. 또한 역사는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되풀이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시하거나 암시함으로써 보편성을 추구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역사가는 어떤 역사적 현상의 원인을 구명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개연성과 필연성을 드러낸다. 글 B에서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이상화의 시는 지금은 남의 땅이 된 󰡐빼앗긴 들󰡑이라는 현상을 통해, 이기백의 글은 󰡐소작인의 증가󰡑라는 사실을 통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착취 현상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시나 역사 모두가 당시의 특수한 상황을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기백의 글은 조선 개별 농가의 변화 과정을 그린 것이 아니고 조선 전체의 농가를 지주, 자작, 소작이라는 분류된 개념을 이용하여 여러 시점에서의 소작화 과정을 보편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시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해 주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해석상의 오류를 유발할 수도 있다. 이상화의 시를 읽고 우리는 농민 착취를 연상할 수도 있으나 독자에 따라서는 이민족의 착취보다는 땅을 잃은 어느 몰락한 지 주의 회한과 지극한 농토 사랑을 읊은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반면에 이기백의 글을 읽고 일제의 농민 착취를 연상하지 않을 독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와 역사의 차이는 상상력에서 어느 쪽이 더 강하냐의 차이와 사실에 기반한 정확성 유무의 차이에 있지 보편성과 개별성의 차이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우수 학생글

중산고3 홍석원

우리는 시를 배울 때 그 속에 심오한 의미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봐서, 일종의 신비감을 가지고 시를 감상한다. 그래서 우리 눈에 비춰진 시인도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인간으로 느껴진다. 그에 비해 역사는 인간 사회에서 벌어진 단순한 사건들의 집합 정도로 여기고, 과거 인류의 생활상을 탐구하는 데 이용될 뿐 시를 대하는 것처럼 숨겨진 메시지를 찾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즉 사람들은 시문학을 현실을 초월한 형이상학적인 학문으로 보는 반면 역사는 과거의 단편적이고 특수한 결과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에 대해 시와 역사의 본질을 규정함으로써 시인과 역사가의 역할을 구분짓고 있다. 시가 보편화된 인류가 마땅히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데 그 역할이 있는 것에 비해 역사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인간이 실제로 행한 사실들을 기록하는 것이 본질적인 기능이라고 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구분이 운율과 같이 형식상으로는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좀 더 넓은 측면에서 볼 때 이렇게 두 분야를 내용상으로 규정하는 것도 또다른 제약이 될 가능성이 있다. 어떤 대상을 규정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대상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B의 경우처럼 시인은 자신이 시인이기 전에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의 성향이나 사회의식에 따라 얼마든지 사회현실의 행적을 표현할 수 있다. B에서 시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보편적 인류의 지향점, 즉 이사적인 사회 모습을 꿈꾸고 그 속에서 땀흘리며 살아보고 싶었지만, 참혹한 일제 식민지하의 조선 국토의 현실을 깨닫고 이에 대한 좌절과 탄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 외에도 우리나라의 사회 현실을 반영한 수많은 저항시, 참여시가 창작되었다. 그런데 구체적인 사회 현실을 노래했다는 이유로 이 작품의 작가들을 시인의 본분을 망각하고 쓸데없는 일을 했다고 비난 할 수 있을 것인가.


역사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C에서는 일제 시대의 토지조사사업과 농촌상황의 변화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c는 '누가 언제 무엇을 했다'라는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일제시대 농촌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과 변화상을 종합하여 궁극적으로 이런 총체적인 변화가 일본의 토지강탈 때문이라는 결론, 즉 하나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때 역사가는 단순한 사실만을 기술하는 데 그 역할이 한정된 것이 아니라, 사실들을 하나 또는 몇 개의 의미로 묶어서 도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은 사실 정보를 왜곡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 자체로도 역사안에 포함 될 수 있다.

B와 C의 경우를 보더라도, 시인과 역사가의 역할을 구분해 놓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위험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에 따르자면 B같은 시나 C같은 역사서는 각각 시와 역사의 테두리를 벗어나게 되어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작가든지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에는 현실과 이상이 공존하여 전제되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특정 분야의 글을 다룬다고 해서 서로 보조를 맞춰야 할 사회 현실과 보편적 인류의 지향중 하나를 묶어 두게 되면 올바른 생각이 표현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회 현실을 고발 할 뿐 대안이 부재하거나, 방향만을 제시할 뿐 정작 구체적인 현실 상황과는 동떨어진, 이른 바 사이비지식인의 주장만이 수용되는 상황에 이를 것이다.


신채호 선생은 [독사신론]을 통한 역사 저술로 민족의식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열단의 행동강령인 [조선혁명선언]을 쓰고 그 밖에도 여러 분야에서 직접 민족해방 운동에 앞장섰다. 그리고 이육사 시인은 우리민족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짖을 날이 올 수 있도록 의열단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우리에게 이들 두 역사가와 시인이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에게서 자신의 분야에만 머물지 않는,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나아가 실질적으로 일제라는 지배계급의 허구적 선동과 이면의 착취에 저항하였던 참된 지식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1949자


경기고3 유민석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에서 무기력한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늙은 당나귀 벤자민은 돼지들이 부패하고 다른 동물들을 착취하고 홀대하는 것을 안다. 농장의 부조리를 알고서도 자기 혼자 알고 역겨워 하지만 그것을 모르고 고통 속에 죽어가는 동지들에게 알리지 못한다. 적당히 사회와 타협하고 잠잠히 지내는 무기력한 지식인의모습이다. 지식인이 벤자민의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고 그것을 고발하지 못하면 민중은 계속 고통 받을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틀은 시인과 역사가의 역할을 구분 지었다. 역사가의 할 일은 실제로 일어난 일, 즉 특정한 인물의 행위를 기술하는 것이라 했다. 반면, 시인에게는 비교적 더 철학적이고 진지한 일을 기대한다. 역사가와는 달리 있는 일을 그대로 서술하는 것 이 아니라 개연적으로 있을 법한 인물의 행동으로 사회의 보편적인 모습을 그려야 한다 했다. 이런 식의 규명은 시인과 역사가의 임무의 부분적인 면모만을 보여준다.

   시인은 철학적인 진지함을 갖고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사회 부조리를 들추어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 즉, 특정한 상황에 개연적으로 있을 법한 인물을 제시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순적인 현실과 그에 대한 바람직한 자세와 인간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일제 시대에 시인은 대중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 직종이다. 현대사회의 빠른 변화에 적응 못하여 허덕이는 현대인에게 문학은 거리가 먼 이야기 일수 있지만, 텔레비전과 인터넷 이전의 엔터테인먼트는 문학이었다. 민중은 시인의 문학을 통해 감동 받고 그들을 존경하고 따른다. 또한 시인은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서 사회를 똑바로 볼 능력이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착취당하면서도 그 사실에 대한 문제를 느끼지 않은 백성들에게 도움을 줄 의무가 있는 지식인 계층에 속한다. 시인의 지대한 영향력으로 인해 백성을 계몽하는데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에서 화자는 조국을 잃은 상황에서 민족적인 의식을 고취하려 한다. 봄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들을 빼앗겼기에 봄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답답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봄이 와서 감상적으로 즐기는 일반적 유형의 인간을 넘어선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로써 독자에게 문제인식을 환기 시키고 현실에 대한 불만을 갖게 하는 것이 시인의 의무인 것이다.


역사가가 사실만을 기술하는 것은 아니다. 현상을 분석하고 거기서 드러나지 않은 숨은 의미와 의의를 밝히는 것이 진정한 역사가의 의무이다. 아리스토틀의 시대의 역사는 한나라의 왕이나 위대한 장군, 유명한 철학자 중심으로 기술 되었다. 하지만 현대에서는 그러한 정치사나 사건사의 중요성은 줄어들었다. 오히려 민중의 생활이 깃든 진실된 역사가 담긴 생활사나 사회경제사가 중요시 되고 있다. 그러기에 역사가들 또한 사회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철학적 진지함을 갖고 민중 중심의 이야기를 필요성이 있다. 이기백은 [한국사 신론]에서일제의 경제적 착취로 고통 받는 우리 백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통계적인 수치와 백성의 빈곤한 생활상을 제시하여 일본의 토지 강탈로 인한 우리 민족의 피해를 보여주었다. 역사가들 또한 지식인 계층으로서 그들의 전문적인 시각으로 현실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임무는 그러한 사실을 책이나 기사에 실어서 대중들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 역사가들은 또 하나의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된다. 그것은 역사 왜곡을 방지하는 것이다. 역사 왜곡 문제는 국내외적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제국주의의 식민지와 전쟁 그리고 독재 정권이란 기형적인 상황에서 발달한 폐해이다. 전국민적으로 잘못된 인식이 퍼져 있고 전근대적인 사상이 지배적이다. 역사가들은 바른 역사관에 입각하여 이러한 잘못을 알리고 계몽해야 할 책임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이 유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유교를 깊이 연구하면 이 시대의 합리주의가 해결하지 못하는 여러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렇기에 서양에서도 유교에 대한 관심이 깊어가고 있다. 그러나 식민지 상황에서 우리 기존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도록 세뇌 당하고 급속한 경제 발전을 하면서 서양화가 곧 근대화라는 그릇된 시각을 교육 받았다. 역사학자의 임무는 이런 식으로 왜곡된 우리 고유의 가치를 국민들로 하여금 소중히 여겨서 간직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한쪽에서 일본이 독도 문제로 족족 시비를 걸고 제국주의 시대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중국이 동북공정이랍시고 우리 나라의 역사를 훔쳐가려고 하고 있다. 민족의 역사를 지키기 위한 그들의 역할이 부각되고 있다.


현대사회는 많은 모순과 부조리가 만연하다. 경제적으로 양극화 문제가 심화되고 있고, 사회 곳곳에서 인권 침해와 착취가 있다. 시인과 역사가 같은 지식인은 사회를 위해 문제점을 지적하고 고발하는 존재이다. 모든 지위와 권력에는 책임이 따른다. 엘리트층으로서 선망과 존경을 받으면 그에 상응하는 일들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광수처럼 자신의 영향력을 남용하여 우리 나라의 젊은이들을 설득해서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독립 투사와 애국 계몽가와 책임감을 갖고 자기 기득권을 포기하고서라도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 아리스토틀의 시대의 시인과 역사가들은 그러한 역할만하더라도 잘 살았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 그 정도 수준에서 머무른다면, 그들은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소시민으로 전락하게 된다.  2679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