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칼럼 / 국익 / 김규항(출판인)


결국 놈들은 전투병 파병을 요구해왔다. 놈들이 순수한 장사 놀음으로 시작한 침략전쟁에 우리 죄없는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보내라는 요구다. 워낙 더러운 요구다보니 광화문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영감들과 미국을 하느님이 축복한 나라라 믿는 목사들 정도를 빼고는 다들 전투병 파병을 반대하는 분위기다. 심지어 함부로 말하는 버릇 때문에 늘 욕을 얻어먹는 노무현씨조차 이번엔 꽤나 신중해 보인다. “먼저 보내는 것도 국익이 아니고 먼저 거부하는 것도 국익이 아니다.”

그러나 매우 신중한 태도를 드러내는 것으로만 보이는 그 말 속엔 실은 매우 강한 파병 의지가 들어 있다. 바로 ‘국익’이라는 말 속에 말이다. 한국에서 ‘국익’이라는 말은 주술에 가깝다. 노동자들의 싸움이든 농민의 싸움이든 전쟁을 반대하는 싸움이든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당한 싸움들은 언제나 국익이라는 주술 앞에 힘을 잃는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노동자는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아야 하고 농민은 모두 배를 가르거나 몸을 불살라도 어쩔 수 없으며 청년들은 기꺼이 더러운 전쟁에 총알받이로 나가야 한다.

우리가 그 주술에 대적하는 무기는 이른바 ‘명분’이었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 ‘농민을 죽이는 개방’, ‘명분없는 전쟁’. 그러나 사랑이나 존경 같은 고상한 가치마저 돈으로 사고팔리는 세상에서 명분으로 실리를 이기는 건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오늘 한국에서 명분으로 실리를 이기려는 노력은 한국에도 명분을 좇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외에는 의미가 없어 보인다.

‘국익’이란 주술과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그 주술 자체를 부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명분’이 옳지만 어딘가 국익에는 배치되는 데가 있다는 노예의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정색을 하고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런데 그놈의 국익은 대체 누구의 국익이지?’

국익이란 ‘나라의 이익’이란 말이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나라에도 ‘나라의 (단일한) 이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는 층층한 여러 계급들로 이루어진다. 계급들의 이익은 몹시 다르거나 심지어 적대적이다(이경해씨 추모집회에서 제 몸을 불사른 박동호씨와 제 아비의 막대한 재산을 모조리 물려받는 이재용씨는 서른넷 동갑내기 한국인이다).

‘국익’이란 실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속여 이르는 말이다. 지배계급은 언제나 자기들의 이익을 국익이라 주장한다(그게 자기들만의 이익이라는 게 밝혀지는 순간 더이상 지배할 수 없다). 노동자의 정당한 싸움도 농민들이 제 배를 가르고 제 몸을 불사르는 일도 죄없는 청년들이 더러운 침략 전쟁에 총알받이로 가는 일도 단지 자기들의 이익을 보전하기 위한 일이지만 국익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그걸 거스르는 사람은 애국심이 부족한 사람이거나 반역자라는 오명을 들씌운다.

주술을 깨트려야 한다. 진정한 국익은 한줌도 안 되는 지배계급의 이익이 아니라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모든 뒤엉킨 것들을 바르게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싸움을 존중하는 게 국익이며 농민의 아픔을 함께하는 게 국익이며 더러운 침략전쟁에 절대 전투병을 보내지 않는 게 바로 국익이라면 누군들 애국자가 되려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