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

김동춘(성공회대학교 사회학 교수)


1. 머리말

한국자본주의가 외형적으로 팽창하고 이제 타민족과 타인종과의 교류와 접촉이 보다 활발해지기 시작한 1990년대 들어서 그 동안 독일, 일본, 등 파시즘의 경험을 거친 나라의 일인 양 간주했던 이 폐쇄적 배타적 민족주의 현상들이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이 일방적인 '피해자', 자본의 수입 국의 위치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우리의 심각한 이방인 차별주의 현상들이 이러한 상황의 변화 속에서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외국인 노동자, 재중교포나 탈북자들에 대한 냉혹한 처우와 멸시, 동남아 진출 한국기업들의 현지 노동자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 등이 전자에 속한다면 한국 내 화교 및 혼혈인들에 대한 냉대와 차별은 후자에 속한 것이다.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한국인들이 얼마나 '단일민족'의 신화에 집착하면서 혈통 중심주의 사고와 행동을 견지하고 있는지 새삼 확인하게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의 정치가, 언론인, 학자와 문인 등 엘리트층 역시 지독할 정도로 우리자신의 문제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국가차원의 제3세계 지원액은 형편없이 낮은 수준이며, 정치권에서 국제문제 전문가는 거의 없으며, 과거나 현재나 "한국 언론은 지나치게 자기나라 정부와 국민만 옹호하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이 일본을 우경화와 교과서 왜곡을 공격하면서도 일본을 잘 아는 전문가가 거의 없을뿐더러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수준은 거의 무지에 가까운 수준이고, 미국을 선망하면서도 미국 전문가가 없는 것은 물론, 미국사회에 대한 기초적인 인식도 거의 없는 상태이다. 그러다보니 우리보다 못사는 지역인 동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여러나라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 조선시대에 그러하였듯이 오늘의 한국의 지배층과 일반인들은 말로는 세계화다 정보화다 떠들고 있지만 기실은 자신들만의 소우주에 갇혀서 중국과 일본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미국이 탈냉전 이후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갖지 못한 채 미국에 기대고 북측을 적대시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일본 정부의 재일 교포에 대한 차별을 비판하지만, 이방인에 대한 차별에 관한 한 한국은 일본보다 훨씬 심하다. 한국 거주 외국인에 대한 지문등록도 그러하지만 한국은 지난 백년동안 이 땅에서 동고동락하며 살아왔던 화교의 생존하지 못하고 떠나간 거의 유일한 나라다. 이들은 거주, 재산소유, 경제활동과 직업선택에서 극심한 차별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해방 전 최고 8만 명에 달하던 화교가 현재 2만 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 이것은 중국 만주지방의 조선족이 중국 당국에 의해 하나의 소수민족으로서 나름대로 대접받으면서 살아온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편 한국에서 혼혈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형별보다도 가혹한 일이다. 화교가 그러하였듯이 전쟁의 유산인 이 혼혈인들도 이 혹독한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거의 다 떠났다. 공무원으로 취직한 혼혈인은 한명도 없으며 25세 이상 혼혈인 중 결혼한 사람은 30%에 불과할 정도로 정상적인 가정생활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들어 나타나고 있는 가장 심각한 외국인차별은 국내에 이주해온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학대이다. 이들은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이른바 3D업종에 종사하고 있는데, 노동시장 피라미드의 최하층에 자리잡고서 저임금, 산업재해, 인권탄압 등 인간이하의 조건을 감내하고 있다. 모든 한국인 사용자들이 비인간적인 학대를 자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1995년 이 문제가 크게 공론화되어 사회적 지탄을 받은 이후에도 이러한 관행은 계속되고 있다. 이 모든 외국인 차별의 관행은 내 핏줄만 소중히 여기고 나와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는 편협한 사고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와 언어와 혈통을 같이하고 있지만 우리보다 더 못살고 있으며 관습이나 사고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중국교포, 탈북자들에 대해서도 심각한 차별을 가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최근에는 중국 조선족을 동포로서 좀 따뜻하게 대해 줄 것과, 왕래를 좀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해 줄 것, 그리고 불법 입국자 추방조치를 좀 신중하게 해줄 것을 요구하는 시위도 발생한 바 있다. 한국에서 쓰라린 경험을 한 중국 교포는 "200만 중국 조선족도 용납 못하면서 2천만 이북동포들은 어떻게 용납할 것인가"라고 반문하고 있으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또 다시 전쟁이 난다면 이북 편에 서서 남측을 쳐부수겠다고 말하고 있으며 원자탄이라도 있으면 남에 터트리고 싶다고 극도의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무엇이 오늘의 한국정부 그리고 한국인들을 이렇게 극도로 자기중심적이며, 속 좁은 존재로 만들었는가? 과연 모든 한국인들이 그러한 태도를 갖고 있는가, 아니면 정부가 문제인가?


2. 20세기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

그 동안 잠복되어 있었으나 1990년대 들어서 두드러진 한국사회의 이방인차별주의는 일종의 자민족중심주의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자민족중심주의란 무엇인가? 자기 민족의 생존의 권리를 배타적으로 집착하거나 민족적 우월감에 도취되어 근거 없이 타민족이나 인종을 무시 억압하고, 지구상에서 상이한 문화적 전통이나 인종적 특색을 가진 여러 민족이나 인종이 각자의 권리를 갖고서 동등한 존재로서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보편적 공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의미할 것이다. 파시즘과 극우민족주의, 다양한 형태의 인종주의는 자민족중심주의의 전형이며, 20세기 들어서 그것은 제국주의 침략, 공산주의 붕괴 이후 유고지역에서 나타난 타 인종 강제 이주, 혹은 인종청소(ethnic cleansing), 독일. 오스트리아에서의 극우민족주의 발흥, 일본의 전쟁범죄 부인과 과거 왜곡 작업등으로 나타난 바 있으며, 20세기 인류문명을 야만 상태로 몰아간 주범이다. 민족이 국민국가의 형태로 존재하는 오늘날 자민족중심주의란 곧 자국가중심주의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근대사회의 모든 국가나 민족은 자민족중심주의 혹은 자국가중심주의적이다. 지구온난화와 환경파괴가 눈에 보이는데도 교토 기후협정을 탈퇴하려 하고, 미사일 방어계획(MD) 수립하여 무기 판매를 노리며, 자유무역을 내세우면서도 한국의 철강에 덤핑 과세를 부과한 미 부시 행정부의 파렴치한 패권주의도 자국가중심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자본이 국가의 경계를 허물고, 산업주의(industrialism)가 보다 철저하게 인간 간의 관계를 지배하게 될 경우 이러한 국가이기주의 혹은 민족적, 인종적 차이에 의한 편견과 차별은 자본의 노동에 대한 차별로 대치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전개된 지금까지 역사는 자본의 노동에 대한 차별과 민족적 인종적 차별이 공존, 하거나 결합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대체로 그것은 국가간의 침략과 억압, 갈등 혹은 전쟁 상황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자민족중심주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특히 배타적인 자민족중심주의는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의 피해 국가, 민족, 종족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외적으로는 그 피해가 상당한 민족적 종족적 자존심의 훼손과 열등감 형성을 수반하였으며, 내적으로 특정 정치세력이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강한 종족적 동질성과 배타성 등의 사회심리적 자원들을 적절히 이용할 경우 정치적으로 자민족중심주의가 발휘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자본주의 세계체제 하에서 제국주의 침략이나 타 국가의 억압을 받은 종족, 민족(ethnic group, nation)이 하나의 국가(nation-state)로 성장하는 과정은 사람의 성장과 마찬가지로 욕구의 억압이 수반된다. 민족과 그 구성원은 심각한 좌절을 겪게되고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 안전한 표적을 찾는 경향이 있다. 즉 좌절을 겪은 민족이 단순한 저항의 주체에서 이제 국가 권력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 만약 그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내부의 민주주의가 없다면 내부의 약자와 주변의 힘없는 민족은 이들의 희생양이 될 위험성이 있다.
  따라서 민족주의 일반이 그러하듯이 이러한 자민족중심주의를 발흥케 하는 원료는 특정 민족이나 종족이 간직한 고유의 역사와 전통, 공유된 기억 등 문화적 요소이지만, 그것을 작동하게 하는 기관차는 근대 국가와 그 내부의 지배세력이며 그것이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타민족, 국가의 대립 특히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 혹은 국가나 정치공동체의 존립이 위협을 받는 상황이다. 전쟁의 상황에서 적과 나는 이분법적으로 분리되고, 나를 규정하는 요소로서 민족 혹은 인종적 동질성이라는 상징이 주로 동원된다. 이 경우 열등감으로 상처받는 민족은 자신의 공격성을 주변의 소수자와 약자들에게 두배로 갚은 경향이 있다. 이것은 주인에게 빰맞은 마름이 약한 종을 향해 더욱 심하게 발길질하는 것과 같다.
  근대민족국가는 정도는 차이는 있지만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상부구조로서 대체로 발전국가의 이념을 지향한다. 후발국 독일이 전형적으로 그러하였듯이 근대 민족국가는 부의 무한정한 확대를 꾀하면서 생존과 번영을 도모한다. 이 국가는 민족 구성원에게 실제 생활에서 요구되는 물질적 혜택을 부여하면서 존립의 근거를 강화해 왔다. 이 경우 어떤 민족에 소속되어 있다는 의식, 그리고 그 민족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결심, 자기민족의 존립을 위협하는 타민족을 누르거나 없애겠다는 마음이 국가 혹은 지배계급에 의해 조장되고, 선전되며, 또 건드릴 수 없는 공식으로 정형화되기도 한다. 여기서 개인이 설자리는 거의 없고, 개인의 자유는 오직 민족, 혹은 국가의 자유의 실현의 결과로서만 예상될 수 있다. 초기 해방의 이념으로 출발했던 민족주의는 곧 국가 내 개인의 해방을 억제하는 이데올로기, 혹은 타민족과 인종을 말살하자는 폭력적 담론, 심지어는 병균(virus)과 같은 것으로 변질될 수 있다. 개인이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집단주의에 대해 자신의 위기를 내세울 수 없는 조건에서 자민족중심주의는 가장 공격적으로 발휘될 수 있다.

결국 자민족중심주의는 분명히 지배계급의 정치적 의도의 산물이지만 그것은 일사분란한 교육과 선전, 선동, 대중들의 보상 심리 자극 등을 통해 사회 전 구성원의 것이 될 수 있고,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자민족중심주의는 바로 민족성과 유사한 것이 된다.
  오늘날 탈냉전 후기공산주의(post-communism) 세계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는 대체로 저항적 성격을 갖기보다는 우익민족주의 정치세력 주도의 자민족중심주의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보편이념이 무너진 공간 위에 새로운 정치적 동원 자원으로 대중들의 역사적 기억과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민족 감정이 적절히 활용된 것이다. 최근 헤이그 전범 재판소에 소환된 세르비아의 지도자 밀로세비치(Milosevic)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유고를 내전 상태로 몰아 넣었고, 세르비아 인들이 갖고 있는 피해의식을 활용하여 보스니아인들에 대한 잔인한 인종청소와 세르비아 내부에서의 독재와 부패, 언론탄압을 자행하였다. 이렇듯 오늘날의 자민족중심주의는 세계화 혹은 탈냉전 세계 정세 속에 구 공산권 국가 등에서 주로 나타난 후기민족주의(post-nationalism)의 한 양상이라 볼 수 있다.


3. 자'민족'(ethnic group)중심이 아닌 자'국민'(nation)중심

그런데 문제는 한국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자민족중심주의가 과연 독일, 일본, 미국 등지의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타민족, 타인종에 대한 차별 혹은 동구 사회주의 붕괴이후 유고반도에서 나타나는 종족간의 갈등과 전쟁의 동력이 되고 있는 극우민족주의 등과 내용적으로 동일한 성질의 것인가 하는 점이다. 즉 한국인이 한국 내 거주하는 이방인에 대한 푸대접과 차별은 한 핏줄인 우리민족 구성원에 대한 집착과 애정, 그리고 모든 이방인에 대한 배타심 혹은 차별과 같은 의미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인들은 같은 핏줄이지만 우리보다 못사는 중국 동포나 탈북자에 대해서는 심각한 차별을 가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러나 이방인이지만 우리보다 잘사는 미국, 일본 등 선진자본주의 국민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한국인들은 과거에는 공산주의를 피해서 넘어온 귀순자들을 크게 칭찬하고 후하게 대접했지만, 최근 들어서 빈곤탈피를 위해 대량의 탈북자들이 생겨나자 이제 그들에 대한 후한 대접을 철회하고 있다. 이제는 북측에서 넘어온 가난한 동포들을 의심하거나 멸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남측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탈북자들은 북한사람으로 차별대우 받는 것, 무시당하는 것을 힘겨워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중국 동포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동포는 불법체류자를 포함하여 6만 명을 상회하고 있는데 이들은 폭행, 사기, 성적 학대 등 갖가지 유형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중국 동포를 지원하는 서울의 교회의 상담창구에는 1년간 300여건의 피해사례가 접수될 정도로 이들에 대한 차별과 학대는 외국인 노동자와 다를 바 없다.
  즉 한국인들은 단순히 핏줄만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잘사는 국민과 못사는 국민을 구분하여 잘사는 사람들에게는 우호적이거나 심지어는 굴종적인 태도를 취하는가 하면 같은 동포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못하는 국민에 속해 있을 경우 사실상 경제적으로 못사는 외국인과 같이 취급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중국교포의 입국과 국내 재산권 행사, 기업활동에는 큰 제약을 가하면서도 재미교포들에게는 IMF 경제위기를 극복한다는 명분하게 대단히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같은 재외교포라고 하더라도 경제력 여하에 따라 법적 대우가 달라지는 것이다.
  흑인 혹은 못사는 인종에 대한 무시는 미국에서도 나타난다. 미국에서도 한인들은 흑인지역에 들어올 때 백인의식을 갖고 들어간다. 그리하여 한국인들은 백인들에게 차별당하면서도 흑인에 대해서는 우월 의식을 갖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주로 히스패닉(라틴계) 계 사람들을 고용하여 하인취급하고 있는데, 한인이 경영하는 업종에서 이들과 잦은 충돌과 노사분규가 발생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미국에서 한국인들은 흑인사회에 들어갈 때 돈만 벌어갈 생각을 할뿐이기 때문에 그들을 더불어 살 동료로 인정하지 않으며, 흑인경제에 거의 이바지하는 바가 없다. 이것이 1992년 흑인폭동의 배경이다. 중국에 가서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한국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동포들은 중국의 현황을 거리낌없이 비방하거나 비웃기만 하는 경향이 있으며, 가난한 중국 동포에 대해 지배자 의식을 과시하고 있다. 이렇듯 잘사는 사람들에게 굽신거리고 못 사는 사람들에게 막대하는 것은 전형적인 마름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억압받던 마름이 복수하겠다고 돈을 좀 벌어 옛날 주인이상으로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거들먹거리는 것과 유사하다. 한국을 방문했던 어느 중국교포 학자가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세계가 한국중심으로 돌아가는 듯 바람먹은 콘돔처럼 잔뜩 부푼 자랑은 실제로 그런 곳에 사는 자기가 얼마나 대단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연기에 불과하다. 한국사람들은 달변이지만 연장자나 상급자 앞에서는 꿀먹은 벙어리이다. 한국 땅에서 언권을 읽은 사람들이 중국 땅에서 어른으로 부각되는 경우가 많다. 대국에 와서는 설설기던 사신들이 일본에 가서는 뒷짐을 지고 허세를 부리던 그런 꼴이라 하겠다.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자민족중심주의, 이방인에 대한 배타주의가 단순한 핏줄 중심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한국인들의 친소관계 설정에서 같은 핏줄보다 더 중요한 단위는 국가, 혹은 국민 단위라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재외 교포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이웃 중국의 경우 중국을 다녀가는 화교가 근 350만이 잇고 곳곳에 화교를 접대하는 기관과 단체가 있고 그들을 뜨겁게 포용해 준다. 그리고 이러한 네트웍을 기초로 화교경제권을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는 제외교포를 맞이하고 교육하고, 적극적인 교류를 맺는 작업을 하는 기관이 없다. 최근에 들어서 조금 좋아지기는 했지만, 한국은 재외 교포들을 거의 버린 자식 취급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국민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국민들은 재러시아, 재중, 재미, 재일 교포들이 왜 그곳에서 살게되었는지, 그들이 겪은 고통이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 이 지역에 가장 빨리 진출한 교회나 종교기관의 경우는 오직 선교 혹은 지원의 대상으로만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한국 정부는 그들이 한국 편을 드는가, 북 편을 드는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들을 의심하고 그들이 한국에 충성을 바친다는 소리를 듣기를 즐기고 있다. 그리고 보통 한국인들은 이들이 우리 민족에 속해있기는 하나 현실적으로 중국, 러시아 국민으로 살고 있으며 또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종합해 볼 때 현재 한국에서 나타나는 국가의 공식적 태도, 혹은 민간 차원의 집단적 태도는 자'민족'(ethnic group)중심주의라기 보다는 자'국민'(nation)중심주의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의 배타주의는 단순한 이방인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열등한 국가의 '국민'에 대한 차별과 잘사는 나라의 국민에 대한 선망, 즉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의심,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그리고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외국 그 자체에 대한 무관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자의 다른 표현이 후자라 볼 수도 있다. 잘사는 외세에 대한 일방적인 추종과 열등감, 못사는 외국에 대한 무시와 차별은 이들 모든 나라의 실체에 대한 정확인 인식과 객관적 고찰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그들과 우리의 차이, 더 나아가 우리자신에 대한 객관화 작업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든다. 이점에서 한국의 자국민중심주의는 헤겔이 말한 바 자유의 정신의 인도를 받지 못한 '정신적인 유아기' 상태라 부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식 자국민중심주의는 첫째는 반공주의체제 하의 국가지상주의의 연장선에 있으며 둘째는 경제주의 가치관에 기초하고 있다. 즉 그것은 국가간의 경제력 차이를 비교한데서 출발한 것이고, 단순한 민족적, 인종적 편견이라기보다는 계급차별주의와 통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한국인 특유의 단일민족의 신화, 혈통주의, 가족주의 가치관과 연관되어 있다. 결국 오늘날 한국의 자국민중심주의는 분단체제 하에서 지속되어온 극우반공주의와 국가주의, 노동자와 약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 및 천민적 자본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물질주의, 그리고 가족이기주의가 뒤섞여있다고 볼 수 있다.

4. 자국민중심주의의 토양

일본의 민족주의는 국가주의로서 보수적, 침략적, 아시아 인종 우월주의의 내용을 지니고 있었지만, 한국의 민족주의는 출발당시에는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내용상 타민족 일반을 적대시, 배타시하는 태도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으며, 오히려 아시아 피억압 여러 민족과의 연대 혹은 제국주의 침략의 최대의 희생자인 민중의 해방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분단,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제 저항적 민족주의가 남한에서 설자리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전쟁의 와중에서 과거의 저항민족주의를 통일국가 건설의 이념으로서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거나 국제주의적 민족주의로 발전시키려는 중도파의 노력도 무산되었다. 이후 한국에서 정치적 민족주의는 사실상 사라졌거나 국가주의의 내용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한국이 정치, 군사적으로 주권을 미국에 의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의 레토릭 상의 반일주의, 박정희 정권 중. 후반기의 미국과의 긴장과 마찰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역대 정권은 정치적으로 통일지향의 민족주의를 탄압하고 국가지상주의를 내세우면서 오직 문화적으로만 민족의 정체성과 동질성을 강조하였지, 정치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 때문에 분단 이후 오늘까지 저항민족주의는 오직 반체제세력 혹은 통일운동세력의 투쟁의 담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런데 89년 소련. 동구 사회주의 붕괴, 8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 한국사회 내부의 계급분화와 독자적인 부르주와층의 형성과 더불어 이제 반공 국가 = 민족의 실질적 대표자라는 인식이 약간씩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의 경제성장 드라이브가 어떤 점에서 저항적 민족주의에 콤플렉스에서 진행되었던 만큼, 이제 '국가'의 성공을 자랑하면서 성공하지 못한 북측과 동아시아 민족을 향해 '물질적 성공'을 과시하게 된 것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남벌> 신드롬이 발생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그것은 중국, 북측에 대한 경제적 우월감과 동남아 여러 국가에 대한 우월감을 통해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미국 콤플렉스, 일본에 대한 식민지 콤플렉스를 해소시켜 주고 있다.
  우선 오늘날 한국인들의 집단심리 속에서 드러나는 배타주의, 편협한 자기애, 못사는 동포에 대한 멸시 현상 등은 단순히 한반도의 역사적 정치지리학적 조건의 산물만은 아니며 일제 식민지 지배의 피해의식, 미국에 대한 일방적 종속에서 온 열등감, 분단 하에서의 극우반공 획일주의 등이 혼합 착종되어 마련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르비아의 보스니아 인종학살에서 나타났듯이 피해자 의식과 전체주의 하에서의 획일주의 문화는 타민족, 타인종에 대한 멸시로 타나나는 경향이 있다. 홍세화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사회에서 지금까지 극우가 아닌 자는 모두 좌익이 될 수 있고, 좌익의 공포감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그리고 정치적 반대세력이나 말을 잘 안 듣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공격하거나 심지어는 간첩으로 몰기도 한다. 국가지상주의는 사회 내부의 이해관계의 충돌과 모순을 은폐하는 지배집단의 도구로 사용된다. 내부의 다양한 의견의 제시나 비판을 국론분열, 좌경용공으로 공격을 받은 일이 바로 어제인데, 이런 나라에서 이렇게 길들여진 국민들이 어떻게 타민족, 타민족,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가 생겨날 수 있을 것인가?
  한편 자국민중심주의는 바로 한국 내의 심각한 억압과 차별을 외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한국사회 내의 정의와 사회적 민주주의의 결여, 즉 특정 지역 출신자, 노동자, 여성, 장애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심각한 편견과 차별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적자생존', '약육강식' 등 자본주의적인 생존논리, 사회적 약자에 대한 멸시와 천대 등 사회 내적인 계급편향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물질주의적인 가치관과 성공관이 압도해왔고, 그 와중에서 공동체에 대한 배려는 거의 눈꼽만큼도 갖지 못하고 있지만, 성공을 위해 강자에는 굽신거리고, 약자에는 군림하는 비열한 인간 군상들을 양산해 왔다. 국내에서 민중이나 약자들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봉쇄되면서 그러한 상황이 국민들에게 신민(臣民) 의식을 갖도록 했고, 이 신민 의식이 외적으로 표현될 때, 마름과 같이 약자들에게 군림하고 강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노예적인 퍼스넬리티를 낳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국민중심주의는 한국 특유의 혈연주의, 가족주의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자국민중심주의는 가까운 사람 챙겨주기, 비슷한 사람 끼고 돌기 식의 패거리 민족주의의 양상을 지니고 있는데 패거리 민족주의는 한국 사회 내부에서의 시민사회의 결여, 즉 가족주의와 그것의 사회적 발현형태인 연고주의, 지역주의를 외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고향사람 봐주기, 출신학교 같은 사람 봐주기 식의 패거리주의와 배타주의가 다소 이질적 습관을 가진 중국 교포, 탈북자 등에 대한 배타심 무관심과 직결되어 있는 셈이다. 단일민족, 단일혈통의 신화는 이러한 패거리 민족주의를 뒷받침해주는 정서적 기반이다.

결국 자국민족중심주의는 단순히 외국인, 이방인들을 대할 때 나타나는 태도만은 아니며, 사실상 우리 국가 내에서 사상적으로 극우반공주의를 비판하는 집단이나 개인에 대한 적대시, 그리고 경제적 약자, 소수자들에 대한 억압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단히 강력한 힘을 가진 한국의 저항적 민족주의가 사라지고 나서, 그 집단주의의 문화적 자원만이 살아남아 이제 외세 추종적 극우보수세력에 지배되는 한국의 국민국가와 자본의 영향력 증대와 더불어 그 부정적 요소들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결국 세계화의 구호 속에서 진행되는 90년대 한국의 자민족, 자국민중심주의는 분명히 가족자본주의 하의 한국사회의 정치사회의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민족주의 정서에는 경쟁에서의 승리, 정복, 착취의 의미가 착종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물질에의 집착, 과도한 자기과시는 40년의 일제 식민지 지배, 50년 동안의 미국 영향권 하에서 얻은 '상처받은 자존심'에 대한 심리적 보상 행동이라고도 볼 수 있다. 중국에 진출한 상당수의 한국 졸부들, 일부 중소기업가들에게서 이러한 태도가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그들은 출세와 성공의 신화, 물질주의 가치관, 사고에서의 보수성과 편협함, 종업원을 하인시 하고 출신지역사람을 끼고 도는 성공한 한국인의 전형이다.

  결국 한국의 자민족, 자국민 중심주의는 여타의 민족주의가 그러하듯이 한국 지배엘리트의 일반적인 태도이지만, 그들이 이끄는 국가의 정치권력을 통해 국민적인 것, 민족적인 것으로 일반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


5. 맺음말

  일찍이 다산 정약용(丁若用) 선생은 '반도성격'이라는 글에서 "안타깝다. 우리나라 사람들이여. 좁은 우리 속에서 갇혀 있구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였고 산이 주름잡아 사지를 꼬부리고 있으니 큰 뜻인들 어찌 채울 수 있으랴"하고 반도의 틀에 갇히어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는 조선인들을 개탄한 적이 있다. 그는 중화주의(中華主義)하중 사고에 갖혀 일본을 '왜놈'이라고 열등시했던 조선의 지배적인 일본 인식에 반기를 들고 "일본은 중국의 여러지역과 빈번히 교류하여 물자를 수입하는데 그치지 않고 제반 기술을 도입하여 멀리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 땅인데도 지금은 기술수준이 중국과 대항할 수 있게 되었고 민유병강(民裕兵强)의 실효를 거두고 있다"고 경탄한 바 있다. 그는 청조 학자들의 견해와 더불어 일본 학자들의 견해를 두루 포괄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또 비판을 가했다. 그의 이러한 인식은 청조(淸朝)를 오랑캐의 나라로 보고, 중화의 입장에 서서 변방 일본의 기술문명의 발전을 무시, 폄하했던 조선왕조의 공식화된 인식과 달리 변화되는 동아시아 질서를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읽었던 실학자들의 선구적인 시대인식은 '주체'의 여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여타의 조선의 지배층의 세상 인식이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았던 것은 바로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인식 즉 임진왜란 당시 망해가던 나라를 다시 일으켜 준 은인이라는 명조에 대한 일방적 숭앙의 분위기가 공식화되었고, 그러한 공식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활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명에 대한 일방적 충성심은 명이 사라지고 청이 등장한 이후에도 청을 멸시하는 허황된 반청(反淸), 북벌(北伐)을 거의 국시(國是)로 내세워 오랬동안 여론조작을 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북벌론은 대내적으로는 지배층의 사상탄압의 유리한 수단이었으며, 대외적으로 세계인식을 방해하고 국제활동이나 교역을 차단하는 역기능을 한 셈이다. 청의 선진기술을 배우려는 자세를 '오랑캐의 습속을 쫓는 일'이라고 배격하였던 조선의 지배층에 대해 실학파들이 반기를 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연암 박지원과 다산이 이처럼 주체적이고 객관적인 시대인식과 국제관계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썩은 조선왕조 하에서의 세속적 출세의 길을 포기하거나, 또 탄압을 받았던 자신들의 정치적 처지 위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천하가 중화의 사상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사고는 임진왜란 이후 거세게 등장한 국내의 정치적 반대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의 산물이었으며, 그러한 인식이 도전할 수 없는 도그마로 변했을 때, 모든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러한 도그마를 암송하면서 세계사적 격변의 외딴 섬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으며 백성들은 그저 지배층이 가르쳐준 대로 살아가다가 격변의 풍파를 한 몸에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근대 국민국가 수립 후, 세계체제와 열국체제(inter-state system) 가 수립된 이후, 그리고 백성들이 국민 혹은 개인으로 등장한 이후 성립된 세계인식, 국제관계 인식이 전근대 시절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오늘 한국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자민족중심주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과거의 사실들이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식의 외교적 태도 혹은 국제정치 인식에서 동일한 양상의 출현이 정치지리학 이론에서는 일반화되어 있는지는 잘 알 수는 없지만, 오늘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자국민중심주의의 제반 현상들은 그것이 단순히 반도에서 단일민족으로 살아오면서 형성된 사회심리, 집단적 멘탈리티, 혹은 민족성이라기보다는 분명히 특정한 정치적 맥락에서 발생한 정치적 사실이며, 또한 지난 근대 백년 간의 식민지 침략과 대미종속의 정치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조선왕조 말기의 시대착오적인 배타주의, 자기중심주의와 통하는 바 있다고 하겠다.
  결국 오늘날 한국에서 나타나는 자국민중심주의는 사대(事大)의 세계관에 안주했던 전통사회 이래의 편협한 소국주의적 자기중심주의에다 식민지 체험으로 인한 피해의식, 분단과 주권의 이양의 경험에서 나온 열등감과 외세추종주의, 그리고 탈냉전 이후 보수화의 물결과 한국자본주의의 상대적 성장을 반영한 후기민족주의 등이 착종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민족, 자국민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 지상주의와 획일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남북한 평화체제 구축 혹은 통일된 정치 공동체의 건설과 친미일변도의 외교관계의 청산이 선결되어야 하며, 내적으로는 천민적 자본주의의 극복과 정치사회의 민주화를 통한 성숙한 시민의식의 형성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실천문학>, 2001. 겨울,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