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피노체트와 박정희, 두 독재자의 판박이 인생살이

[데스크 칼럼] 그러나 그들에겐 아주 다른 한 가지가 있었으니

                                                      이석원 편집위원 (galamoi@dailyseop.com)


유엔이 정한 국제인권의 날인 10일 산티아고의 국군통합병원에서 심장질환 등으로 사망한 20세기 최악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전 칠레 대통령.

그는 칠레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의 요직을 두루 거친 엘리트 군인 출신이다. 1973년 육ㆍ해ㆍ공군은 물론 경찰군까지 통솔하는 총사령관이 된 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가 쿠데타로 전복시킨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정부는 당시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선거를 통해 수립된 최초의 사회주의 민주정부였다.

1973년 9월 11일 각 지역의 방송국을 장악하며 쿠데타를 시작해 대통령궁이었던 모네다궁을 탱크와 장갑차, 그리고 공군 전폭기를 동원해 공격을 가했던 피노체트는 잔인하게 아옌데 대통령을 살해하고(물론 당시 피노체트 군사정부에서는 아옌데 대통령이 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스스로 군사평의회 의장이 됐고, 그 다음 해인 1974년 민간에게 정권을 이양하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한다.

쿠데타에 이어 대통령으로 취임한 피노체트는 아옌데 사회주의 정부가 칠레의 경제를 심각할 만큼 궁핍하게 만들었고, 공산주의 사상으로 자유 경제는 사망했으며 미국과의 교역도 어렵게 만들었다며 경제 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는 미국 시카고 대학교를 졸업한 기술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시카고 보이스(Chicago Boys)'들이 제기한 미국식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적극 받아들였다. 기간산업인 도로 건설, 농촌 개발, 수출 주도형 산업의 육성 등으로 칠레의 경제를 부흥시키는 듯 했다.

특히 피노체트의 적극적인 지지자인 미국은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왔고, 또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때 엄청난 도움을 받았던 영국 정부도 피노체트의 경제 개혁을 힘껏 도왔다. 그리하여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자본주의 진영에서는 피노체트를 칠레 경제의 부흥을 이끈 선구자로 칭송했고, 또 미국의 보수적 경제학자인 밀튼 프리드먼은 그 같은 피노체트의 노력에 대한 결과물을 세계 경제의 기적이라고 부르는데 목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은 피노체트가 집권한 동안 칠레 경제는 이전 아옌데 정부에 비해 300배 성장했다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하지만 이는 지표일 뿐, 정작 칠레에서는 각종 국영 기업들의 민영화로 인해 심각한 실업 사태가 초래됐고, 외형상으로 비약적인 경제 발전이 이뤄진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치유 불가능한 빈부 격차가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미국의 지원으로 도로와 건물, 그리고 공장 등이 급격히 늘었으나 이를 소유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였고, 대부분의 민중들은 극빈자 신세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가해진 엄청난 인권탄압은 칠레를 전 세계에서 가장 인권상황이 엉망인 국가라는 불명예를 주었고, 피노체트에 저항하다 잡혀간 사람들 중 1000여명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정치적 실종자가 돼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가 결국 피노체트는 정권에서 밀려나게 된다. 칠레 민중들에게 있어서 1988년은 일종의 해방이요, 자유를 되찾은 해였던 셈이다.

느닷없이 피노체트에 대한 길고 지루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눈치 빠른 이들은 파악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피노체트와 너무도 똑같은 통치자가 있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도(?) 피노체트는 바로 대한민국의 그 통치자를 그대로 본떠 쿠데타를 일으켰고, 또 경제개발을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4·19 민주혁명으로 세워진 민주당 장면 정부를 탱크와 총칼로 짓밟고 더럽고 긴 군사 정권의 시작을 연 박정희. 시작에서 진행과정까지 피노체트와 박정희는 너무도 닮았다. 그도 그럴 것이 1973년 쿠데타를 일으킨 피노체트는 바로 12년 전 박정희가 했던 그 ‘짓’을 표본으로 삼았고, 또 그 박정희와 똑같은 방식과 시기에 대통령이 됐으며, 박정희와 같은 방법으로 개발독재를 해온 것이다.

경제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인권을 볼모로 참혹한 탄압을 자행했던 것과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권력을 유지했던 것도 너무 똑같다. 특히 3선 개헌과 유신으로 영구집권을 꿈꿨던 박정희와 너무 똑같은 방식으로 피노체트도 영구집권을 획책했다.

오죽했으면 피노체트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심복이었던 김재규의 총에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깊은 슬픔에 잠겨 식음을 전폐했을 뿐 아니라 칠레 국민들에게 조기를 계양하게 했다고 하니... 하긴 피노체트는 공공연히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박정희를 꼽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미국 대통령들이 섭섭한 나머지 경제 지원을 중단할까 하는 고민을 했다는 웃지못할 소문도 돌았었다.

그런데 피노체트가 자신이 가장 존경하던 박정희를 그대로 따라하지 못한 게 있었다. 바로 종말이다. 심복에 의해 죽임을 당해 불과 62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던 것과는 달리 피노체트는 실권을 한 후에도 영국 등을 돌아다니며 부를 누리다가 91세, 장수를 하고 병으로 죽었다. 물론 피노체트도 재임 중 암살을 당할 뻔했다. 1986년 9월 7일 산티아고 근처의 산악도로 좌파계열의 반정부 조직에게 피습을 당했지만 경호원 5명만 잃고 자신의 목숨은 건졌다. 물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시민들에게 발포를 해 수 백 명을 죽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피노체트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박정희의 종말은 따라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기 전까지도 칠레 국민들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20세기 최악의 독재자로 불리기도 했고, 칠레 정부와 스페인 정부 등으로부터 기소를 당하기도 했다. 자신의 가족들과 영국으로 도망쳐 숨어살다시피 하다 타국 땅에서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해다. 다시 말해 박정희에 비해 비교적 오랜 시간동안 그의 독재 행위에 대한 평가들을 받은 셈이다. 차라리 박정희처럼 재임 기간 중 암살을 당했거나 그 때 병사를 했더라면 독재에 대한 평가도 덜 받았을 것이고, 또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기도 했을 것이며, 혹시 그의 자손 중 누군가는 향후 칠레 정치에 뛰어들어 또 다른 존경(?)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지구 반대편 가본 적도 없는 나라의 몰락한 독재자에게 느낄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의미에서 보면 피노체트는 박정희 보다 훨씬 불행한 독재자였는지도 모르겠다. 저승에서라도 ‘가장 존경하던’ 박정희와 만나 생에서 못다한 정이나 나누시길.

ⓒ 데일리서프라이즈 / 2006-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