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리더십

          2006.12.08  씨네21 칼럼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본 친구들은 각자 자기 상황에 적용하느라 분주했다.

악마는 폭탄주를 마신다, 악마는 데리다를 읽는 척한다, 악마는 이디피에스를 즐긴다…. 직장 상사, 선배, 지도교수, 부모….일상의 슈퍼바이저들이 총출동했다. 자기 상사와 메릴 스트립을 비교하면서, 우리 중 누가 가장 핍박받는 ‘뉴 에밀리’인지를 놓고 경쟁했다. “그래도 메릴 스트립은 추천서는 써주잖아, l년만 견디면 보상이 있잖아, 나중에 고마워는 하잖아, 사람은 알아보잖아, 능력이 뛰어나니까 후배를 경쟁자로 보지는 않잖아, 성희롱은 안 하잖아….” 내 악마만이 진정한 악마일 뿐 남의 악마에 대한 칭찬과 부러움이 끝이 없었다. 그렇다. 어느 조직이나 지도자를 지배자로 착각하는 사람, 권한과 역할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지만 최소한 이 영화의 악마는 지도력 없는 지도자는 아니다.

한마디로, “무능한 주제에 인간성도 바닥인 상사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성토장이었다. 뒤집어 말하면, 유능하면 참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유능한데다 품성도 훌륭한 리더는 거의 없기 때문에, 리더는 그냥 유능한 사람이면 족하다. 이 영화는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 리더십에 관한 매우 ‘현실적인’ 삽화이며, 특히 여성 리더십에 대해 수십편의 논문이 나올 만한 논쟁적인 텍스트다.

  영화에서 상사 자녀의 숙제를 비서가 대신 해준다. 이는 물론 부도덕한 일이지만, 대개 남자 CEO들은 아내(‘사적 영역의 비서’)가 알아서 하기 때문에 비서에게 이런 일을 덜 시킬 것이다. 주인공의 표현대로, 여성 리더의 악마성은 많은 경우 그녀가 남자라면 “카리스마”일 뿐이다. 여성 리더들은 ‘아내’가 없기 때문에(요구받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공적 영역의 비서가 아내 역할을 대신 수행한다. 여성이라면 결혼하지 않았어야 가능한 성공이, 남성은 결혼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왜 출세한 여자들은 출세한 남자보다 더 남성적이냐(악독하냐)는 ‘이상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이건 이상한 질문이다. 조건 좋은 남성도 성공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여성이 출세하려면 자신이 주류보다 더 주류에 적합한 사람임을 증명해야 한다. “80년대 영국에서 남자는 마거릿 대처 한 사람뿐이다”는 유명한 말처럼 게임의 법칙을 만들고 운영하는 세력이 압도적으로 남성화된 사회에서, 여성의 성공은 얼마나 남성성을 잘 재현하느냐와 직결된다. 여성으로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리더십은 철저히 성별화(gendered)된 가치였다. 리더가 되려는 여성들은 남자보다 더 남자다운 ‘명예 남성’이 되거나 ‘어머니 리더’여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최근 “여성(운동)이 권력화되었다”는 비판이 많은데, 이런 식의 비판은 성별 권력관계에 대한 무지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은 힘이 없기 때문에 (남성)권력화된다. 여성이 진짜 권력이 있다면, 반대로 권력이 여성화될 것이다. 과도기적 현상이겠지만, 지금 한국사회의 상황은 주류가 여성주의화된 것이 아니라, 여성이 주류 가치를 확장, 강화, 풍부하게 ‘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여성 리더십의 등장이 곧바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여성주의 리더십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긴 사족. 솔직히 나는 이 영화를 여성주의 시각으로 읽고 싶지 않았다. 리더가 여성이기 때문에 ‘용서’되는 부분이 없지 않으나, 기본적으로 이 영화가 전제 혹은 미화하는 양육강식과 물신숭배, 생산력 중심주의는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내가 이 영화에서 동일시한 인물은 나이젤(스탠리 투치)이었다. 그는 나의 낙오자 정서를 자극했다. 나이젤은 상사에게 헌신했지만, 아니, 헌신했기 때문에 배신당한다. 하지만 복수하기보다는 “뭐, 언젠가는 알아주겠지…” 식으로 꼬리를 내린다. 나는 영화의 스토리와 상관없이 그가 메릴 스트립에게 복수하길 바랐다.

그러나 그가 복수하기에는 기운도 시간도 담력도 없는 타입의 인간이라는 것을 안다. 남이 내게 했던 대로 상대방에게 고통과 원한을 되돌려주는 것은 무서운 일이기도 하지만, 나름 면밀한 계획과 성실성이 요구되는 상당히 귀찮은 일이다. 남을 짓밟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친구는 나의 이런 “무능과 자포자기 정신이야말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했지만, 위로였을 것이다.

글 : 정희진 (서강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