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과 소변의 정치학 / 정희진 (서강대 강사)

2006.11.17    씨네21 칼럼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남자화장실 소변기 앞에 붙은 한국관광공사와 한국화장실문화협의회가 제작한 홍보 문구다.

며칠 전 나는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www.peacemuseum.or.kr) 소식지에서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대표가 쓴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 글쓴이는 냄새와 불결의 주범인 “소변기 밖의 소변 방울”을 방지하자는 이 카피가, 섬뜩한 가위그림이나 “정조준”, “한발 앞으로” 같은 표현보다는 낫지만, 배뇨 자세 교정보다는 남성주의를 조장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눈물은 가시나들이나 흘리는 것… 남자는 평생 세번 운다”는 식의 남성의 눈물을 금기하는 문화는 그들이 줄담배와 폭음, 폭력을 자기방어 기제로 삼게 했다고 말한다. 그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남자의 눈물은 권장되어야 하며, “남자의 눈물은 평화의 바다를 만들지만, 지금 흘린 노란 물방울은 짜증나는 세상을 만듭니다”라고 대안을 제시한다.

주변 여성들에게 물어보니, 파트너든 아들이든 간에 남자와 한집 살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걔네들은 아무 데나 오줌을 갈기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감하는 여성들이 많을 것 같다(어떤 남성 페미니스트는 앉아서 소변을 본다고 한다). 여성들의 성화와 관광공사의 ‘국가적’ 노력에도 집에서나 밖에서나 남자의 배뇨 습관은 왜 고치기 힘든 것일까? 청소의 고충을 몰라서? 학원영화에 화장실 청소 장면이 빠지지 않는 걸 보면, 이 이유는 아닌 것 같다. 남성의 성장의례 중 하나인 ‘오줌 멀리 누기 시합’이 보여주듯, 소변의 투사 범주를 영토 확장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방으로 튀긴 소변 방울은 일종의 몸, 세력 확장이다. 남성성으로 인한 사회문제를 남성 중심주의로 대처한 위 화장실 포스터는 실패작인 셈이다.

남성의 눈물과 소변 문화에 대한 글쓴이의 남성성에 대한 성찰은, 중요한 국제정치학 의제이다. 몇년 전 유명 남자 목사가 설교 도중 여성의 목사직 안수를 반대하며, “기저귀 찬 여자가 어떻게 목사가 될 수 있냐”고 한 적이 있다. 몸의 정치학에 대해 이보다 더 적나라한 언어가 있을까. “육체가 정신을 괴롭히지 않을 때 인간은 가장 잘 사유할 수 있다”는 플라톤의 말처럼, 서구 남성의 철학적 전통에서 몸은 초월을 방해하는 유한성의 상징이자, 성욕을 유발하는 골치 덩어리였다.

오랜 세월 동안 남성 문화는 육체를 이성의 적대자로 인식해왔다. 그래서 ‘술, 담배, 여자’는 득도, 혁명, 고시 합격 등 남성이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문제였다(이 언설은 여성을 술/담배와 동격으로 보고 있다). 정신이 육체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정상이고, 합리적이며, 우월하기 때문에 이로 인한 시민권의 위계와 차별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스스로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간주되는 노인, 유아, 임신부, 다친 사람, 여자, 환자, 장애인(모두 기저귀를 찬다)에 대한 비하와 혐오는 이 때문이다. 이들은 눈물, 침, 혈액, 월경혈, 양수, 대소변 등의 체액을 통제하지 못하고 몸 밖으로 ‘줄줄 흘리고 다니는’ 사람들이다. 모든 가부장제 사회에서 시민권 획득 기준이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멀쩡한’ 사람”(여성, 장애인, 노인은 아닌)인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잘난’ 남자도 생로병사에서 예외일 수 없고, 그 누구도 육체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생명이 지속되는 한 체액은 우리 몸 안팎을 넘나든다. 체액은 타인과 사회에 상호 의존적인, 관계적 자아- 인간의 존재 양식이다. 그러나 체액에도 위계가 있어서, 남성 문화는 ‘기저귀 찬 사람’을 경멸하면서도, (권력의 상징인 페니스에서 나오는) 소변, 정액 같은 자기들 체액은 불결하거나 창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소변 방울이 남에게 피해를 줄까 봐 배변기 앞에서 조심스러워하는 남성은 드물다. 영역 표시를 상징하는 남성의 소변을 성찰하고, 취약한 몸의 구체적 고통에 슬퍼하면서 우는 남성이 많아진다면, 전쟁을 정치의 연장으로 사고하는 힘의 원리는 재고될 수밖에 없다. 육체의 불완전성은 인간의 한계인 동시에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다. ‘기저귀 찬 사람들’의 목소리와 관계 맺기, 이것이야말로 평화정치학의 핵심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