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과 한미 FTA

무역의 자유를 비판한다고 해서 우리가 보호체계를 옹호하고자하는 의도가 있다고 추호도 상상하지 마십시오. 스스로를 앙시앙 레짐의 벗이라 선언하지 않고도 입헌 체제의 적이라 선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 시대의 보호주의체계는 보수적인 반면, 자유무역체계는 파괴적입니다. 자유무역체계는 낡은 내셔널리티들을 부수어버리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적대를 극단적인 지점까지 밀어붙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유무역체계는 사회 혁명을 재촉합니다. 여러분, 내가 자유무역에 찬성표를 던지는 것은 오로지 이러한 혁명적 의미에서만입니다.

Karl Marx, 「Speech to the Democratic Association of Brussels at its public meeting of January 9, 1848 : On the Question of Free Trade」


FTA 개괄
국민국가간 정치․경제통합에 있어 가장 낮은 단계라고 일컬어지는 FTA(Free Trade Agreement)는 미국 주도의 무역자유화 흐름을 견제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의 주도로 GATT 협약에 예외적 규정으로 등장하였다. WTO체제 출범 이후 다자간 협상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당시에 미국이 FTA 추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이유도 부분적으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WTO와 도하개발의제를 중심으로 한 다자간 자유무역 협상이 아래로부터 다중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쳐 진전을 이루지 못하자 미국은 GATT의 예외조항을 적극 활용하여 FTA로 하여금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지역 혹은 국민국가 단위로 폭력적으로 이식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지난 7월 2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WTO 일반이사회에서 도하개발의제(DDA)협상의 중단이 공식적으로 확정지었으나 이것은 WTO를 통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사후 사망신고에 불과할 뿐, 신자유주의 추진 세력들-초국적 기업, 금융자본, 초국적․집합적 자본의 명령 마디인 국민국가 군-은 FTA를 비롯한 양자 간 협상 및 국내 입법 등 다른 채널을 통해 위로부터의 세계화를 관철하고 있다.


FTA 분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주요한 전략으로 기능하고 있는 FTA는 크게 남-남형 FTA, 유럽형 FTA, 미국형 FTA로 나누어 그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① 남-남형 FTA의 경우 WTO 체제 이전 부터 체결되어 오던 전통적인 FTA의 성격을 가장 잘 가지고 있는 협상으로, 주로 특정 품목의 상품에 대한 관세 인하 혹은 철폐, 호혜적 무역장벽완화 등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FTA가 요구하는 정도의 무역 자유화는 WTO체제 하에서 이미 도달되었다. 따라서 남-남형 FTA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실현하고자 하는 자본의 유효한 전략이기를 멈추었다고 볼 수 있다.

② 유럽형 FTA는 좀 더 포괄적인 상품 품목들과 서비스에 대한 무역장벽완화를 추진하되 각 국민국가의 산업에 대한 보호를 상호 인정하고 개방되는 무역 분야에 대해서도 구제수단을 마련해 둔다. 자본 및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과 함께 노동력의 인력을 일정한 관리와 통제 하에서 허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로 옛 유럽 열강의 식민국가들과 EU의 양자간 협상으로 이루어지는 유럽형 FTA는 개발원조를 조건으로 유럽의 상품, 자본의 이동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협상 상대국 사회의 전면적 재구조화를 요구한다.

③ 미국형 FTA는 상품과 이보다 더 중요하게 서비스, 투자분야에 대한 전면적인 무역장벽철폐를 목표로 하고 국민국가의 산업을 보호할 일체의 조치들을 비관세장벽으로 규정하며, 경제와 관련된 각종의 국내 정책 및 제도, 사회정책들에 대한 재구조화를 요구한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미국의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초국적 기업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상품 분야에서는 강력한 무역구제조치들을 두고자 하며 상대 국민국가의 정책결정 영역에도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둔다. 다른 유형의 FTA와는 달리 노동력 이동의 자유는 원칙적으로 일체 보장해주지 않는다.


오늘날 FTA는 어떻게 기능하는가

FTA는 WTO/GATT 체제 하에서 합의된 상품 무역자유화 및 무역관련-교역자유화에 관한 협정들(TRIPs, TRIMs 등)을 실질적으로 기능하게 하거나 이보다 더 강화된 자유화 조치들을 요구하고 있다. FTA가 WTO를 보완하면서 넘어서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FTA가 WTO를 넘어서고 있는 지점에는 두 측면이 있다. 국민국가 위상의 약화가 더욱 가속화된 것이 그 하나이고 WTO, UN으로 상징되는 다자주의 노선의 쇠퇴와 미국 일방주의를 필두로 하는 다극화체제-지역화 움직임의 대두가 다른 하나이다.

오늘날 FTA는 미국, 유럽, 호주 등 선진자본주의 국가가 주도하고 후발자본주의국가들을 협정 대상국으로 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것은 WTO체제 하에서 소위 제3세계 국가들의 반발로 타결되지 못한 농업 분야의 무역 자유화,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TRIPs), 무역관련투자조치협정(TRIMs) 등 강도 높은 자유화 조치 이행을 요구하는데, 상대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체제 개편이 미진한 후발자본주의국가는 이에 따라 FTA체결로 인해󰡐경제󰡑분야 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정책, 제도, 법률, 관습을 총체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오늘날 FTA가 규율하고 있는 내용이 사회의 물질적 기반 총체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국민국가의 배타적 결정영역으로 간주되어 오던 정책입안, 입법, 공공부문 등에 대한 국민국가의 결정권(혹은 주권)은 이제 허울만 남게 되었다. 각종 사회정책들을 잘못 입안하면 조약 위반으로 조약에 근거한 중재재판에 회부되어 초국적 기업 혹은 협정 상대국에게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야 할 수도 있고, 자국 산업을 보호해오던 법률들은 신법우선의 원칙에 의해 폐기되거나 슬그머니 개정되어야 할 수도 있다. ‘경제’ 부문에서는 어떠한가. 국민국가는 초국적 자본의 이윤 획득과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사회 곳곳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지만 이는 자본의 운동을 조절하고 그것의 균형적 발전을 보장해 주었던 기존의 국민국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독립적으로 자본의 움직임을 조절하거나 그 안에서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다. 국민국가의 주권은 탈구되고 변형되어 오늘날 전지구적 생산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네트워크적으로 배치된 제국주권의 마디로 절합된다. 국민국가는 해소되고 초월된다. FTA는 이러한 경향을 한걸음 더 밀어부친다.

다른 한편 FTA를 통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 세계화는 내적으로 중국, 유럽, 러시아, 미국 간의 실력 견제가 있기는 하였으나 하나의 기구, 체제 안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던 다자주의 노선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는 WTO 자체의 역할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미국의 경우 FTA에 WTO규정을 무색하게 하는 사실상의 무역전환효과를 가져올 만한 조치들을 삽입하고, 무역구제조치 분과에서는 보다 신속하고 구속력있는 중재재판이 가능한 ICSID(국제투자분쟁조정센터)를 협정국은 물론 협정국의 기업들이 이용할 수 있는 규정을 두어 WTO의 중재 기능을 사실상 형해화시키고 있다. FTA를 통한 자본주의적 세계화는 다자주의 노선을-적어도 외관상-약화시키면서 미국, 유럽, 중국을 각각 그 중심으로 하는 폐쇄적 블록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두고 양차 세계대전으로 귀결된 1930년대 지역화로의 회귀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미FTA

한미FTA는 한편으로 위로부터의 세계화를 완결지으려는 전지구적 자본의 명령의 일환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 주권의 위계제 안에서 중국과 유럽, 아시아 지역 통합체를 견제하여 군주국으로서의 지위를 고수하고자 하는 미일방주의의 전략적 기획이기도 하다. 한국 또한 이 협정을, 한국의 다중들의 삶과 그것을 초월적으로 매개하는 주권 형태를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에 적합한 형태로 재구조화하는 계기로 기능하게 함으로써 그 자신이 다중의 삶에 기생하는 주권의 전지구적 네트워크의 폭력적, 통제적 마디로 온전히 기능하는 한편(그래서 FTA 반대 입장으로부터 나라를 말아먹으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을 정도로 국민국가의 해소에 복무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동아시아 지역의 정치 경제적 허브 국가로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기회로 삼고자 한다. 한미FTA의 두 가지 측면 중 어느 하나를 간과하지 않는 것은 다중의 투쟁의 관점에서 FTA를 바라볼 때, 위로부터의 세계화 전략에 반대하면서 투쟁의 국지화로 가지 않을 수 있는 방식으로 FTA를 사유할 수 있게 할 것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보다 구체적인 협상 진행에 있어서는 한미 FTA가 미국이 협상을 개시하며 이야기 한 대로 여느 FTA보다도 강도 높고 미국에게 편향적으로 유리한 무역 자유화를, 일방적인 방식으로 일체의 정당화 과정을 무시한 채 관철되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명목상으로나마 보장되던 협정 상대국가의 기반 산업에 대한 무역 구제조치나 노동력 이동의 자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지구 곳곳의 FTA 반대투쟁

미국과의 FTA를 중심으로 놓고 보면 현재 미국과 FTA협상을 진행 중인 나라는 파나마, 콜롬비아, 에콰도르, 태국, 한국, 아랍 에미리트 등이 있다. 최근 미국과의 FTA 반대투쟁은 남아메리카와 아시아의 국가들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남아메리카의 경우 협상이 종료된 CAFTA(중미자유무역협정) 체결국에서도 국회 비준과 발효를 놓고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니카라과의 다중들이 현재 협상을 진행 중인 중남미 국가의 다중들과 결합하여 거센 저항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개별 국민국가 내에서의 투쟁에 머무르지 않고 연대하여 지난 4월 4-5일 아르헨티나 마르델플라타에서 열린 전미자유무역지대(FTAA) 미주정상회담을 결렬시켜 아메리카 대륙을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블록으로 재편하려던 부시의 계획을 좌초시켰다. 󰡐부시 반대󰡑, 󰡐미국 반대󰡑, 󰡐다른 아메리카는 가능하다󰡑는 슬로건을 내거는 중남미 다중들의 자유무역협정 반대 투쟁은 민중협정인 아메리카볼리바르대안(ALBA)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대안으로 내놓음으로써 대항세계화운동의 새로운 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또한 대항세계화운동이 북구 NGO 활동가들과 엘리트층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한계점을 안고 있는 반면 남미에서의 투쟁은 오늘날 자본의 착취 관계 안에 있는 수많은 다중들의 압도적인 지지와 행동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대항세계화운동의 한계를 돌파하는 사례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중남미 다중들의 투쟁이 그 안에서 싸우고 있는 다중들의 욕망과 일정 정도 빗겨나서 반미․반제국주의 투쟁의 맥락으로 환원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는 점, 볼리바르대안이 소수의 좌파 정치 지도자로 대표/대의되는 국민국가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내용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에 대한 발본적인 파기를 함의하고 있지 않다는 점(볼리바르 대안은 자국 산업 기반을 침식하지 않는 한에서 서로에게 유리한 󰡐자유무역󰡑과 󰡐원조󰡑를 내용으로 담고 있다)은 이 투쟁이 국민국가 주도의 국가 자본주의 혹은 국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도움으로써 혁명적이기를 중단할, 오히려 제국 주권 재생산에 기여할 가능성을 남긴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태국, 말레이시아, 한국의 다중들이 미국과의 FTA에 반대하는 투쟁을 펼쳐나가고 있다. 이 지역에서의 투쟁은 공통적으로 NGO활동가들과 교수학술단체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국민국가 내에서의 투쟁에 머무르고 있는 경향이 있고 주장의 내용들도 국민국가의 주권, 국가산업기반 보호 등 국지성을 지키는 것을 주로 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태국의 경우 FTA반대투쟁이 제3세계국가들의 신자유주의 반대투쟁과 연대하고 있다는 점은 특징적이다. 이들은 웹상에서 “Third World Network", "Focus on the Global South" 등을 통해 투쟁을 소통하고 있다. 도하개발의제협상 중단이 선언 된 지난 7월 27일에는 태국 방콕에서 태국 FTA 반대투쟁단체인 FTA Watch Group과 Bilateral.org가 주최한 FTA투쟁국제워크숍(Fighting FTAs: The international Strategy Workshop)이 3일간에 걸쳐 진행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투쟁은 당면한 미국과의 FTA가 국내 산업에 미칠 엄청난 파괴력과 국가 주권의 약화에 대한 우려로 추동되고 있다. 그러나 태국의 FTA투쟁에서 NGO 활동가, 연구자, 농민, 노동자 외에 HIV 바이러스 감염 환자들이 의약품분야의 미국 측의 지재권 강화 요구에 맞서 적극적으로 투쟁을 벌여나가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점이다. 또한 한국과 마찬가지로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협상 절차에 대해 문제를 제기함에 있어, 협상 절차의 반민주성을 지적하는 것과 더불어 협상의 과정과 협정문 작성에 사용되는 언어가 ‘영어’라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FTA의 반민주주의적 성격의 새로운 측면을 밝혀 공격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되었다. 다중의 삶에 직접적으로 퍼부어지는 결정들이 전통적인 계급, 성, 인종 등의 분할선 뿐만 아니라 질병, 보다 직접적으로는 몸, 그리고 언어에 이르기까지 새롭고 미시적인 분할선들을 수없이 구획짓고 있음에 대한 다중의 결정적인 저항의 양태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FTA반대투쟁은 한미FTA반대범국민운동본부를 중심으로 각 산업분야별로 나뉜 부문별 공대위체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농민, 영화인, 공공부문 및 의료분야 노동자들의 움직임이 주도적으로 보이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입장에서 FTA를 규정하고, 투쟁해나가고 있다. 첫째, 한미FTA는 전략적유연성합의와 더불어 한국의 주권을 침탈하고 미제국의 식민지로 종속시키는 경제적, 사회적 통합협정이다. 둘째, 한미FTA는 한국의 농업, 영화산업, 의료산업, 금융 등 한국산업의 기반을 무너뜨릴 것이다. 셋째, 통신, 에너지 부문, 의료보험, 노동정책, 사회복지정책 등 국가가 나서서 보호해야 할 공공분야가 형해화되어 초국적 자본 혹은 한국의 독점적 자본의 이윤 수탈의 장이 되고 따라서 국민의 양극화가 심화되어 대다수 국민들의 삶의 질이 형편없이 떨어질 것이다. 넷째, 한미FTA는 물론, 좋은 FTA와 나쁜 FTA를 구분하지 말고 모든 종류의 FTA에 반대하며 나아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흐름에 반대해야 한다.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FTA반대 세력 내에서도 비판적 견해들이 나오고 있는데, 이들을 아울러 현재 FTA반대투쟁의 문제점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이에 앞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왜 우리-다중들의 투쟁이라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이 우선되어야 하는가? 맑스는 전선을 제대로 긋는 것만으로 투쟁의 절반은 이긴 것이라 하였다. 지금의 주장들은 제국주권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다중의 힘들을 감당하고 있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다중의 힘을 놓치고 있다. 우리 삶의 맥락을 읽지 못하는 현재 투쟁의 관점들은 자본, 국가와 마찬가지로 현실의 물질적 조건을 초월하고 따라서 FTA투쟁으로 표현되는 다중의 욕망과 힘을 혁명적으로 조직하지 못한다. 그것은 투쟁의 주체들이 다중으로서의 공통성을 획득하고 조직해나가는 것을 다중 내부에서 분열하고 계급전선을 흐려, 폐기해야 할 (심지어 자본조차도 더 이상 자본의 운동과 갈등을 통제할 수 없어 기꺼이 해소시키고자하는) 국민국가, 민족,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강화하는 데 복무한다. 아래에서 논의해 보고자하는 문제적 관점들은 다중의 혁명적 힘을 자본과는 다른 방식으로-그러나-초월한다. 이러한 양상으로 투쟁이 지속된다면 목표하는 ‘승리’를 쟁취해 FTA를 저지하더라도 그 이후의 투쟁은 더욱 많은 어려움들을 떠안은 상태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FTA반대투쟁은 오늘날 자본의 주요한 전략인 자본주의적 세계화에 대항하는 저항의 중요한 계기를 구성한다. FTA반대투쟁전선에 결집한 욕망과 힘들이 낡고, 자본의 것인 옷을 입고 표현된다면 당면한 FTA 협상 저지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투쟁의 지평 자체에 파괴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네그리는 스테판 맨다드와의 인터뷰에서 오늘날 ‘신좌파는 반자유주의 운동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전지구적 수준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를 구축하는 것’이 ‘대항제국의 구축에서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투쟁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 비판의 목적인가? 아니다. 투쟁을 추동하고 있는 욕망과 힘의 새로움을 읽어내고 그것을 혁명적으로 조직하는 것 그것이 목적이다. 한국에서의 FTA반대투쟁에는 채만수의 지적대로 광범한 계급, 계층이 결합하고 있다. 채만수는 이를 두고 그만큼 다양한 계급과 계층의 사회 이데올로기가 반영되면서 그것이 자칫 역사적 진보성을 상실 혹은 망각한 운동과 투쟁으로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계급성이 탈각되어 투쟁이 보수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는 점에서 일견 동의할 수 있는 견해이다. 그러나 광범한 계급, 계층이 결합하였다는 것이 곧바로 투쟁의 반진보성을 의미하진 않는다. 한미FTA투쟁은 오늘날 새롭게 재구성된 프롤레타리아트인 다중이 기존의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를 중심으로 한 계급 전선을 보다 확대되고 성숙해진 적대로 재구성하고 다중의 전지구적 협력과 자유에 대한 욕망을 표출하고 있는 장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야 현재 투쟁에서의 주장에 대한 비판이 투쟁의 폐기가 아닌, 투쟁의 구성적 조직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우선, 다중의 힘이 혁명적으로 조직되고 표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낡은 부르주아적 범주들을 걷어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투쟁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필요한 이유이다.

다중의 관점에서 한미FTA반대투쟁 다시 보기

첫째, 한미FTA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식민화 정책인가


반대투쟁의 주된 견해는 미국이 미제국 확장정책의 일환으로 ‘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양자간 협정을 통해 경제적, 정치적, 군사안보적 관점에서 전략적 중요성을 지닌 국가들의 경제를 미국경제에 완전히 통합시키고, 이를 토대로 이들 국가들과 그에 상응하는 확고한 정치군사적 동맹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주장한다. 이해영 교수도 한미FTA를 자유’무역‘협정이 아닌 경제통합협정으로 보는 것이 현실에 더 적합하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의견을 같이 한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는 한미FTA가 전략적유연성합의와 짝을 이루어 관세 및 비관세 장벽 철폐 뿐만 아니라 일국의 사회 제도, 정책적 결정의 영역까지도 재편하려고 한다는 점, 따라서 한국의 주권을 중대하게 침해하며 실질적으로 한일합방과 같은 국민국가간 합병의 효과를 낳을 것이라는 점이 지난날 제국주의적 식민화 정책과 흡사하다는 것을 든다. 따라서 투쟁은 한국 주권의 흡수합병을 막기 위한 반미, 반제투쟁이 되어야 하고 전선은 미제국과 일부 친미수구세력, 미국 자본에 종속된 일부 한국 독점자본과 나머지 국민 사이에 그어지게 된다.
그런데 한미FTA의 진행과정과 미국 측의 요구안을 살펴보면 제국주의 팽창 정책과는 상당부분 다른 점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이 의료보험제도의 재편, 환경, 노동 등 사회정책 전반에 대한 규제 완화, 금융투자자보호를 위한 각종 규제 철폐 등 사회제도적 법제적 차원들을 손질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EU국가들 간에 행해졌던 총체적 사회경제통합과 다르다. 우선 미국에서 한국으로의 생산 기반시설 혹은 기술의 이전을 철저히 축소하고자 하고 한국에서 미국으로의 노동력 이동의 자유를 원천봉쇄함으로써(소수 전문인력의 이동을 제외하고) 두 국가간의 생산에 있어서의 연동이 우선 단절되어 있다. 한국과 미국간의 화폐, 역내 관세, 대외무역정책의 합치가 이루어지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또한 한미FTA는 제국주의적 식민화 정책이 그러하였듯 국민국가의 주권을 흡수 통합하여 자신의 영토적 주권을 확장하려는 내용이 담겨있지도 않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차라리 더욱 전면적인 경제적 통합협정을 맺어 아예 미국의 경제 체제의 일부로 편입되는 것이 미국 내에서 가동되고 있는 일련의 산업 보호 조치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국익에 유리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가 기꺼이 담당했던 식민지 영토의 행정, 치안을 담당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하고자 하지 않는다. 협상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보여주는 ‘적극적’ 태도도 거기에 부과되는 온갖 음모론의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과거 억압적으로 행해졌던 식민화 과정과의 차이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과거 제국주의가 영토적 점령을 통한 일방적 수탈이라는 특징이 있었다면 한미FTA는 -다중의 삶에 일방적인 명령으로 떨어진다는 점을 간과하면-적어도 한국이라는 국민국가에게는 협상을 통해 이익을 배분할 여지가 있는, 사회구조 재편의 문제이자 국제적 질서 안에서 한국이라는 국가의 재배치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제국주의와 다른 면모는 각각의 전략을 추진하는 주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제국주의는 국민국가 경계 내에서 노동자들의 단결된 저항에 직면해 새로운 이윤 축적의 돌파구를 외부에서 찾고자 한 산업자본과 영토에 기초하여 주권을 확장하고자 한 국민국가에 의해 발전되었다면 오늘날 미국의 FTA 전략은 세계 경제에 대한 미국적 헤게모니를 지키고자 하는 초국적 자본에 의해 추동된다. 초국적 자본은 국민국가를 초월하였지만 미국적 헤게모니, 정확히는 미국 달러와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한 헤게모니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 근거인 이윤 축적을 위한 명령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지키고자 한다.
따라서 전선은 미국과 일부 한국의 독점자본( 및 친미수구세력), 한국 국민 사이가 아니라 초국적 자본, 제국과 다중 사이에 그어져야 한다. 반미반제투쟁은 자칫 미국의 다중-제국주권에 의해 통제받고 착취당하는-과의 분열을 가져올 수 있다. 네그리는 위에서 언급한 인터뷰에서 ‘미국정부를 유일한 적으로 만드는 잘못된 관점을 극복할 필요’가 있으며 반자유주의적 운동에서 ‘어떻게 해서든 미국 노동자들을 움직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투쟁’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둘째, 한미FTA, 주권의 문제?

FTA반대 근거들 중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 FTA가 한국의 안보주권, 산업주권 등을 침탈한다는 주장이 있다. 전략적 유연성 합의로 인해 군사 주권과 안보 주권이 실질적으로 미국의 손아귀에 넘어갔으며 미국의 강도 높은 경쟁체제에 길들여지지 않은 한국의 중소기업, 각종 산업들이 FTA가 체결될 경우 힘없이 무너지고 산업구조전반이 미국의 입맛대로 조정될 것이며 정부에 대한 미국 기업의 제소권 인정, 노동, 환경, 식품안전, 보건 정책에 대한 재편 요구 등등 국민국가주권을 위협한다는 등등. 여기서 한미FTA투쟁은 국민국가의 주권을 지키는 것으로 초점이 모아진다.
한미FTA는 주권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국민국가의 주권을 수호하는 문제가 아니라 다중의 삶에 대한 다중의 주권을 전유하는 문제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채만수가 지적한 바대로 국민국가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집행위원회이며 계급지배의 도구’로 기능해왔다. 그것은 다중이 생산한 부와 사회적 관계들을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로 조직하고 가치법칙의 척도로 환원하는 과정을 매개하고 보증하였으며, 이 과정이 다중의 투쟁으로 인해 끊임없이 탈균형화되고 위기에 처하자 조절자의 역할을 버리고 그 자신 사회적 자본의 명령적 계기가 되어 기능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폭력적, 억압적 명령을 분쇄하는 조직적 저항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사회의 생산력이 국민국가의 울타리를 비좁게 여길 정도로 발전하여 일상적인 삶 곳곳에서 국민국가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소통과 생산이 일반화되자, 국민국가의 주권은 아래로부터 다중에 의해 넘어서졌다. 또한 더 이상 자본의 운동을 보증하고 자본주의 내의 갈등과 모순을 조절할 수 없는 한에서 전지구적 자본과 제국 주권은 국민국가를 초월하였다. 미국의 요구들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국민국가의 위상을 약화하고 해소하는 경향이 있는 이러한 흐름의 한 단면이다. FTA에 의해 위협받는다는 안보주권, 산업주권, 문화주권은 누구의 주권이었는가? 그것이 우리의 삶을 우리 스스로 조직해나가는 우리-다중의 주권인가? 국민국가의 주권은 우리 삶을 초월적으로 매개하고, 통제하며 결정해왔다. 그 초월적 주권이 미국의 것이 아니라 한국의 것일 때 다중의 삶에 과연 더 유익한가? 국민국가, 국민국가의 주권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 반동적이다.
위 문단에서 잠시 언급하였던 것을 상술해보자. 각주 12)의 뒷부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FTA를 통해 가속화되고 심화될 수도 있는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은 다중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결정들을 외부에서 부과할 것이다. 그리고 이 결정들은 FTA반대입장의 우려처럼 우리의 삶을 더욱 곤궁하게 하고 불안정하게 만들며 우리의 삶을 자율적으로 조직할 가능성을 축소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그 양상과 정도에 있어서 차이는 있으나 자본주의체제 하에서 언제나 존재해왔다. 스크린쿼터가 축소되기 이전에도 주류상업영화와 다른 목소리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영화적 욕구들은 영화제작으로 현실화되기 어려웠고 공공 의료보험이 실시되어온 지금까지도 돈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치료 비용이나 약값도 허덕이며 지불하기 일쑤였다. 투쟁은 외부적 결정들을 삶에 타율적으로 부과하는 제국주권의 질서를 공격하는 것으로, 그리하여 다중에게 내재적인 대항-권력을 구성 는 것으로 정향되어야 한다.
이러한 다중의 대항-권력 구성은 절대적 민주주의의 구축으로서만 가능한데, 한미FTA는 협상의 과정이 양국간 합의에 의해 3년간 비밀에 부쳐지고, 국회차원에서의 대의적 접근마저도 대단히 제한적이며 다중은 협상 내용의 구성과 협정문 전반에 대해 일체의 접근이 차단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중의 절대적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한다. 이는 단순히 절차상의 오류로 축소하여 공격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삶을 결정할 권리가 박탈되었음에 대한 저항과 이를 재전유하기 위한 투쟁은 대항-권력을 내재적으로 구축해 나가는 구체적이고 구성적인 실천이다. 여기에서부터 출발한 투쟁은 FTA와 마찬가지로 우리 삶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한 외부적 결정들을 쏟아내는 일체의 억압-국민국가, 자본주의적 관계, 인종주의, 성차별 등등-에 대한 저항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게 되면 FTA 반대 투쟁이 다중의 삶을 초월한 관점에서 진행되면서 간과되었던 다른 투쟁들과 만나 각 투쟁들의 힘이 커지고 혁명적이 되는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공공성을 사수하라?

한미 FTA는 공공영역에 대한 공격을 의미한다. 시장에서의 약자보호는 국가의 기본에 속한다. 그럼에도 한국 국가는 농업을 보호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한미FTA의 공공성에 대한 공격은 특히 에너지, 교육, 의료, 문화 등에 집중되어 있다. 금융은 공공성을 운운하기조차 힘든 수준으로 외자 지배 하에 넘어가 있고, 투자와 지적재산권은 미국형 FTA가 각별히 공을 들이는 부분이지만 한국에서는 제대로 공론화조차 힘겨운 실정이다…이 모든 것의 결과는 결국 국가 주권적 정책공간의 위축과 잠식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이해영, 『낯선식민지, 한미FTA』, 241쪽

한미FTA투쟁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사회운동들에서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되어지는 ‘공공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칠게 이야기하면 국가가 개입하여 시장논리로부터 약자를 보호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공공성은 어떻게 기능하는가. 국가의 권한이 확대되고 경쟁에서 도태된 사회적 약자에게 사회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혹은 도태의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판들이 마련된다. 그런데 이는 국가가 유지하길 원하는 체제의 질서 내로 편입되고 그것에 의해 통제받는 것에 동의함으로써 얻어진다. 공공성은 ‘질서’에서 벗어난 사회의 구성요소(개인일 수도 기업일 수도, 어떠한 집단일 수도 있다)가 국가의 질서에 위협이 되지 않게 체제내로 포섭하고 통제하는 조절 영역, 매개 영역의 기능을 해왔다. 다른 한편에서 공공성은 사유화할 수 없거나 사유화해서는 안된다고 여겨져서 ‘공적영역’이라 구획지어진 사회 부문들의 성격-사유화할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도 국가는 ‘공적영역’을 관리하고 통제하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갈등들을 조절하는 역할을 맡는다. ‘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으로 구획지을 수 없는 다중의 공통적인 것들이 국가를 통해 매개되고 조절되고 초월되어진 ‘죽은 공통성’이다. 국가의 통제 안에 갇힌 공통적인 것은 사적인 것의 맞짝이 되어 언제든 상호전환가능하게 된다. 97년 이래로 본격화된 공기업들의 민영화 행렬은 ‘공적인 것’이 사유화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것이 아니라 국가의 사유물이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공공성을 사수하는 것은 국민국가의 주권을 사수하는 것과 함께 투쟁의 목표일 수 없다. 그렇다면 현재 한미FTA반대투쟁에서 중점적인 투쟁전략이자 강력하게 주체들을 움직이고 있는 문제 중 하나인 사회 제 부문들에서의 공공성 확대 요구를 투쟁목표로서 일체 폐기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공공성을 지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 투쟁들을 움직여나가는 욕망과 욕망을 조직하는 실제적인 물질적 조건들을 보아야 한다. 공적인 것/사적인 것은 다중이 생산하는 공통적인 것에 기반한다. 공적인 것/사적인 것은 공통적인 것을 통제, 관리 가능한 것으로 포획하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을 완전히 억압할 수는 없다. 공통적인 것의 살아있는 힘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다중은 직접적인 협력에 의해 사유화의 선을 긋는 것이 불가능한 사회적 부를 생산한다. 생산과정과 생산물 그리고 그것의 소통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협력적인 지적생산물들을 ‘지적재산권’이라는 사적 소유권으로 구획짓고 생산물의 자유로운 소통을 막으려는 시도들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치고 기존의 법적 논리에도 잘 들어맞지 않는 합리성을 결여한 ‘명령’이 된다.
생산은 점점 더 직접적으로 협력적이고 공통적인 것이 되어가며 다중은 사회적 부를 공통적으로 조직하고 향유하기를 욕망한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은 다중의 삶에서 더 이상 무의미하다. 개인의 사적인 생활 영역과 구분되는 것으로 상정되던 ‘정치’ 공간은 사라졌다. 그러나 정치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일상의 삶이 곧 정치적인 것이 되고 정치가 곧 일상적인 삶의 지평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공적인 것, 사적인 것은 공통적인 것의 홍수 속에서 전복되고 있다. 공공성을 지키고 확대해야 한다는 슬로건은 다중의 이러한 점점 더 강력해지는 욕망과 물적 조건의 성숙을 왜곡된 방식이지만 표현한다.
자본은 공공성으로 공통적인 사회적 부를 관리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FTA는 '공공성'을 파괴한다. 그리고 사유화할 수 없는 협력적 생산물들을 직접적 명령의 형태로 더욱 폭력적으로 사유화하고자 한다. 이제 과제는 공통적인 것을 매개하는 공적인 것/사적인 것 사이의 관계와 범주 자체를 아래로부터 파괴하고 그것을 전유하여 다중에게 내재적으로 생산되고 소통될 수 있는 공통체로 조직하고 구성해나가는 것이다. 자본의 사유화 명령에 대항하면서도 공공성을 파괴하기. 이 지점에서 현재의 '공공성 강화'라는 주장은 극복되어야 한다.
  
넷째, 모든 FTA에 대한 반대?

한미FTA를 반대하는 세력이 한미FTA반대범국민운동본부로 조직화된 초기에는 미국과의 FTA 이외의 FTA에 대한 견해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이에 대한 견해들이 형성되었는데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고 있다. 첫째, 한미FTA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FTA에 반대한다는 입장이 있다. 이들은 한미FTA를 포함한 모든 FTA가 이식시키려 하는 신자유주의적 자유무역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리고 그 무역으로 어느 나라 자본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이득을 보든 결국 노동자-민중에 대한 착취와 수탈을 강화하기 위한 자본프로젝트일 따름’이므로 ‘좋은 FTA’와 ‘나쁜 FTA’ 등을 구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특정 국가의 자본의 관점이지 노동자-민중의 관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한미FTA반대투쟁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자체에 반대하고 대항 세계화 운동과 결합하는 투쟁이 되어야 한다고 제언한다. 둘째, 한국이 감당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인 한미FTA를 최대한 지연시키고 그 이전에 일본, 중국, 동남아 국가 등 우리에게 좀 더 유리하게 우리 사회의 체질을 신자유주의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는 FTA를 먼저 체결하자는 입장이 있다. 결국 미국 이외의 국가와의 FTA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있고 미국과의 FTA도 한국이 미국과의 협상을 대등하게  체결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는 조건하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첫 번째 입장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모순은 차치하고라도(김세균 교수의 경우 한미 FTA 반대의 근거로 국익의 손실, 국가 주권의 침해, 국민경제기반의 잠식 등 ‘특정 국가의 자본의 관점󰡑에서의 문제점을 들면서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모순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모든 FTA에 대한 반대, 나아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는, FTA와 신자유주의가 다중의 전지구적 접속의 욕망에 기초한다는 것을 간과한다. 모든 FTA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는 다중의 욕망과 역량에 거스르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두 번째 입장은 그 모든 부르주아적인 관점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투쟁을 펼쳐나갈 현실의 조건들을 긍정하고 거기에 기초해 대안을 모색하였다는 점만은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를 비롯한 자본의 전략을 안에서부터 파괴하여 넘어설 수 있는 유토피아적이지 않은 대안은 다중이 발전시켜 온 물적 조건과 욕망의 한계 안에서만 실제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서술로 다음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심교수는 반민중적 성격의 FTA'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을 천명한다. FTA가 오늘날 자본의 협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이런 한에서 그것이 전 지구적 다중의 삶에 특정한 제한을 가하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FTA '자체'에 대한 초정세적이고 초전술적인 반대를 정당화하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FTA는 자본의 업무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이제는 삶과 겹쳐지고 있는 (물질적 비물질적) 노동의 이해관계와 분리된 것일 수 없다. 지난 세기에 걸친 식민주의, 제국주의의 발전과 지난 수 십년 간에 걸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그것이 자본의 행위로 나타났다고 해도 다중의 전 지구적 접속과 연합의 욕망에 기초한 것이며 또 그것을 가속시키는 것으로 작용했다. FTA는 이 전 지구적 접속의 욕망에 대한 위로부터의, 그리고 국지적인 포섭 시도이다. FTA 자체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는 현재의 지구화 과정에 대한 일면적 인식을 조장한다. 지구화는 자본의 행동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이미 다중의 욕망이다. 특히 비물질노동의 발전은 지구화를 그 조건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지구화의 이중성에 대한 동시적 고려 없이 그것을 자본의 행동으로만 간주한다면, 그리하여 FTA에 대한 초정세적 반대를 천명한다면 이는 다중의 욕망과는 상충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조정환, 「‘자본을 넘어 생태적 문화사회론’에 대한 논평」에서 인용. 『맑스꼬뮤날레1차워크숍 자료집』

또한 FTA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는 FTA를 투쟁의 새로운 공간이 구축되어질 수 있는 계기로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한다. 위에서 언급한 FTA 지연론을 견지하는 입장에서는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와의 FTA를 통해 아시아경제공동체를 우선 형성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주장은 '국익'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다중의 관점에서도 생각해볼만한 것이다. 이들 국가 혹은 EU와, 미국이 요구하는 내용과는 다른 FTA를 체결하였을 때 다중의 협력이 증가하고 이동이 더욱 자유로워지며 국민국가경계를 넘어선 공통체를 구성할 수 있는 장으로 전유할 가능성이 커지지 않을까? 혹은 미국의 일방주의에 맞서는 실질적으로 힘을 가진 극을 구성하고 나아가 대항-권력을 구성하는 데 FTA를 계기로서 활용할 수는 없을까? 이러한 질문들의 제기와 연구가 다중의 관점에서 더욱 시급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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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 인용한 글의 원문 중 한 구절에서 맑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노동자에게 가장 긍정적인 조건은 자본의 성장이다…만약 자본이 정체된 채로 남아 있다면 산업은 정체상태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쇠퇴할 것이고 이 경우 노동자는 가장 첫 번째 희생양이 될 것이다. 노동자는 자본가에 앞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것이다. 그리고 자본이 성장을 계속하는 경우, 우리가 앞서 노동자에게 가장 좋은 상황이라고 말했던 그 경우에 무엇이 노동자의 몫이 될 것인가? 그는 똑같이 막다른 골목에 이를 것이다.

FTA󰡐반대󰡑는 이것을 통해 우리의 삶이 더욱 곤궁해질 수 있다는 위협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일 수 있고 또 한편에서 FTA'찬성’은 삶이 좀 더 나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의 표현일 수 있다. 그런데 FTA가 체결되어도, 혹은 체결되지 않아도 포스트 FTA 전략 혹은 여타의 다른 수단을 다 동원해서 자본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추진시켜 현재 자신이 처한 위기를 넘어 살아남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더 많은 사람들을 빈곤하게 하고 삶의 위기를 심화시킬 것이다. FTA만으로 우리의 삶의 조건이 단번에 변화하고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이 아니다. 현재 한미FTA반대투쟁은 지금도 우리가 맞서 싸우고 있는 삶의 위기를 아직 오지 않은 것으로, 공포로 밀쳐두고 이것에 기초하여 추동되고 있다. 그러나 위기는 미래에 올, 회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너머로 가기 위해 살아내야 할 현재 삶의 조건이고 투쟁의 조건이다. 그것은 FTA를 통해서만 오거나 FTA를 통해 결정적으로 변화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FTA로 뭉뚱그려져 있는 자본의 전략을 매 순간 벌어지고 있는 투쟁의 구체적 맥락에서 한 가닥씩 풀어 분석하고 투쟁해나가야 한다. 지금의 FTA 반대 투쟁은 FTA를 결정적이고 중심적인 계기로 만듦으로써 오히려 이제껏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맞서 싸워온 수많은 투쟁들과 연대하지 못하고 있다.
한미FTA는 다중의 관점에서 반대되어야 한다. 그것은 다중의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공통적인 생산물들을 매개없이 직접적으로 수탈하고자 하며 다중의 안보를 위협하기 때문에 반대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FTA 전략으로 선회한 자본의 세계화 움직임에 대하여, 지역화 경향에 대하여 그리고 무엇보다도 투쟁하는 다중들의 욕망과 생산 조건에 대하여 과학적인 분석을 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기반을 둔 혁명적인 투쟁의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이 글은 그러한 ‘과학’이 시작되어야 하는 지점에서 멈추었다.  

+ FTA를 통한 자본주의적 세계화가 보이는 지역화 경향에 대한 분석 : 제국 질서 내에서 귀족국가군과 군주국 간의 위계다툼인가? 미국의 일방주의는 제국적 행위의 부패를 표현하는가? 등등
+ 이해영, 김세균, 배성인, 최형익 등이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미제국’이라는 말은 어떠한 주권질서를 의미하는가? ‘낯선 식민지’ 등, 이들은 한미FTA를 전통적인 제국주의적 기획으로 보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응 전략은 국민국가 주권을 방어하는 것으로 기획되고 있다. 어떤 새로움을 포착하였는가? 이들이 포착한 새로움은 오늘날 전세계적 주권질서의, 자본주의의 어떤 국면과 관계되는가? 등등

출전: 네이버 kingcayujin  블로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