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가 좋다.

이렇게 하염없이 내리는 비는 처절하면서도 아릿한 느낌을 주어 마냥 그 속에 잠기게 한다.

한 때의 낭만이 살아있을 즈음엔

비를 맞으며 오랫동안 산 길을 걸었다.

나뭇잎을 두들기며 흩뿌리대는 빗소리를 들으며

바닥을 차고 올라오는 빗방울의 교교한 합창을 들으며

내 발걸음 사이로 파묻히는 빗줄기는 곧 나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렇게 몇 날을 두고 쏟아져 내리는 비를 사랑한다.

언제 그만두어야 할지를 예고하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는 나그네처럼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는 그런 비라서 더욱 좋다.


비는 세상의 빛을 바꾸는 힘이 있다.

교묘한 프리즘을 갖다 대지 않더라도

비는 이 세상의 온갖 빛깔들을 뒤집어 놓는다.

눈부시게 하얀 햇살을 주눅들게 만들고

시퍼렇게 살아오르는 녹음들을 되살아나게 하는 비는

빛의 마술사인 것이다.


비는 세상을 고요하게 만든다.

비는 땅에 부딪혀 자신의 몸을 만갈래로 찢어 버리지만

그 갈래 속에 작은 씨앗을 숨겨

온 세상에 고요의 싹을 틔운다.

혈압을 높여가며

핏대를 세워가며 목청 높이는 수 많은 말들을 잠재우고

그들의 거친 숨소리도 잠재우고

핏발 선 눈빛도 잠재우는 고요를 만들어낸다.


비에 젖어들면

나는 비만큼 처연한 모습으로 젖는다.

젖어드는 몸은 솜처럼 풀어지지만

마음 속에는 새로운 샘을 생성하여 가득 고이게 하는

그래서 다시 맑음으로 이 세상 길을 나선다.


아,

그래서 이 비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