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권 들어 남북평화 실낱 희망도 사라진 것 같다”

 

황석영 소설가

 

지난 5월 내가 이명박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순방에 동행한 이후 그야말로 수많은 사건들이 숨가쁘게 지나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북의 핵실험, 남의 대량파괴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전면 참여 등으로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잠 못 이루는 번민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욕먹을 각오를 했다지만 그 반응은 지나치게 거칠었다. 특히 ‘변절’ 논란은 극단으로 양분된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확인시켜 주었다. 언론은 아예 몇몇 적대적 의견을 빌려 ‘변절’이라 규정한 뒤 상업적으로 재생산하는 데 열을 올렸다.

연이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급작스런 죽음이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고 언론은 다시 그쪽으로 일제히 몰려갔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 모두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물론 현 정권의 공안당국과 언론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가 여과 없이 정보를 폭식하고 무책임한 소문들을 배설해내어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나는 대중들의 깊고 광범위한 애도가 작고한 대통령에 대한 후회와 연민의 감정이면서 또한 현재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실망의 표출이라고 본다.

 

 

금강산 사고 이후 대북관계 개선에 대한 강박증

‘알타이 연합’은 ‘과도적 연방제’를

보수층에 설득할 우회로라 여겼고

‘평화열차’는 남북 철도 연결을

세계 속에서 기정사실화하자는 생각이었다

 

내가 비난을 무릅쓰고 중앙아시아 순방에 동행하기까지는 현 정권이 들어선 이후 점점 악화되고 있는 남북관계에 대한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올해는 내가 1989년에 방북을 결행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다. 차츰 남북의 갈등이 결정적으로 표면화되던 금강산 사고 이후부터 뭔가 관계 개선을 위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렸던 것이 사실이다.

내가 망명하고 있던 1993년에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고 잘 알 만한 사람이 뉴욕으로 나를 찾아왔다.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북의 의향을 타진해 달라는 부탁이었고, 나는 남북 정부 사이에서 메시지를 받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것이 내가 귀국을 감행하게 된 몇 가지 이유 중의 하나였는데 김 주석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남북 정상회담은 좌절되고 나는 오랫동안 갇혀 있어야만 했다.

 

1998년 2월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나는 대통령 특사로 5년 만에 석방되었다. 석방 후 3개월쯤 되었을 무렵이니 꼭 이맘때이다. 당시의 정부 당국자가 나를 찾아와 대북 접촉을 제안했다. 정상회담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의견을 받아다 달라고 했다.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실로 십여년의 간난고초가 지긋지긋했고 하루라도 빨리 작가로서 문학에 복귀하고 싶던 때였다. 그러나 주위의 벗들은 내가 겪은 우여곡절도 경륜이니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고 맞춤한 아이디어를 거론했다. 나중에 밝혀지면 부담스러울 테니 장길산 남북 영화 합작을 위한 접촉으로 언론에 흘리자는 얘기였다. 나는 일단 응낙하고 베이징으로 가서 북쪽에 통보했다. 그런데 마침 꽃게잡이 철이라 서해교전이 터지는 바람에 일주일을 기다려서야 간신히 북의 책임부서 요원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후 김대중 정권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많은 위기를 극복하면서 역사적인 6·15 정상회담이 실행되던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남북관계는 차츰 갈등이 고조되었고 과거의 모든 공개·비공개 접촉선이 끊어지게 되었다. 나는 지난 시절 민주화 통일운동을 하던 벗들과 만난 자리에서 현 정권이 비록 국민들과 소통하려는 노력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하더라도 남북관계 개선과 국내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한 시민사회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화 창구가 여러 방면에서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내 나이 정도의 인사라면 이전부터 친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보수·진보 쪽 인사들을 두루 알고 지낸다. 한국사회가 다종다양한 인맥으로 얽혀 있는데다 그동안 정치 사회적 지형이 몇 번이나 변화해왔기 때문이다.

서먹한 상대와는 일감으로 대화가 시작되기 마련인데, 그것이 ‘평화 열차’와 ‘알타이 연합’과 관련된 기획이었다. 그것은 남과 북에 동시에 화두를 던지면서 대화를 틀 수 있는 빌미이기도 했다. 남북 몽골 중앙아시아 연합론은 동남아연합이나 유럽연합 등 각종 경제·문화 협력체들과 별로 차이가 없는 발상이다. 다만 여기서의 변수는 ‘북’이다. 북과의 관계 개선이라는 열쇠가 없이는 애초부터 출발이 불가능한 기획인 만큼 우선적으로 북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현 정부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던 것이다. ‘알타이 연합’론을 두고 황당하다거나 신제국주의 또는 파시즘적 발상이라고 지당도사 같은 말씀을 하는 이들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지난 정부 때에 동몽골 개발을 위한 합의문서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분단체제에서는 매우 어렵다는 점과 한반도 주변 정황, 그리고 공개적으로 정부가 나설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지지부진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나는 이 기획이 남북의 과도적 연방제에 대하여 보수층을 설득할 수 있는 우회로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6자회담이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한 현실적인 안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기득권을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는 측면이 있지 않은가. 한·중·일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 연합론은 바로 저러한 틀을 벗어나기가 힘든 생각으로 보인다. 우리도 이러한 질서를 현실로 받아들이되 무엇인가 다른 카드도 있었으면 하는 고심의 결과가 ‘알타이 연합’이다. ‘평화열차’ 역시 지난 십년간 남북이 이루어낸 금강산 관광지구와 개성공단에 이어서 제시했던 다른 기획들과 남북 철도의 연결을 세계 속에서 기정사실화하자는 안이었다.

 

이전 정권 때도 북핵 실험 강행 했지만 대화 지속 노력

현 정부는 PSI 전면 참여로 스스로 북과의 대화 봉쇄

공약 이었던 ‘중도실용’은 슬로건에 그쳐 버리고

노 전 대통령 상징적 죽음으로 민주 대 반민주 전선

남북은 전쟁 직전 상태로 진입했다

일을 시작하면서 숨가쁘게 고조된 남북의 갈등 사이에서 간간이 민간 교류가 지속되면서 물밑으로 오간 대화가 있었다. 비핵과 교류 협력이 서로 다른 차원에서 협상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잘 먹히지 않았고 상황 논리가 앞서갔다. 물론 나는 전쟁과 핵무기를 절대로 반대하며 북의 무모한 군사적 행동을 혐오한다. 그러나 십여년 동안 되풀이된 북핵 위기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북쪽에서는 일관되게 쌍방의 ‘한반도 비핵화’와 정전체제에서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끊임없이 대미협상 의제로 내세우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북은 노 대통령의 서거와 핵실험이 관계가 없다고 발표를 하면서 이제는 로켓을 아이시비엠(ICBM)으로 명명하여 그것이 대륙간횡단미사일임을 주장한다. 이는 미국과 일괄 타결식 직접 협상을 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의 재표현인 듯하다. 김대중 정부 때에는 양쪽의 인명이 살상되는 준전쟁 상황인 서해교전이 두 차례나 있었고 노무현 정부 때에도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이 강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정부의 북에 대한 교류 협력과 평화를 위한 각고의 노력은 지속되었다. 그런데 현 정부의 피에스아이 전면 참여는 그동안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며 스스로 북과의 대화를 봉쇄한 결과가 되었다. 이제 미국의 협상 결과만 추종하고 기다리는 것으로 그친다면 남쪽은 앞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견인해낼 수도 없거니와 당사자로서의 주도권도 행사할 수가 없게 된다. 비핵화는 국제적인 공조 속에서 추진하더라도 핵문제와는 분리하여 민간의 교류협력 사업을 재개하고 6·15선언을 실천하기 위한 남북 협상과 정상회담이 추진되어야 한다. 그것이 협상을 이끌어갈 주인다운 태도다. 평화를 위한 노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명분을 잃거나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 정부는 촛불시위 이후 용산참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정책을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의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역행한 것이 사실이다. 사회 전반에 걸친 우편향이 가속화하면서 민주주의의 위기가 심화되었다. 현 정권의 공약이었던 중도실용은 슬로건에 그쳐버리고 민주주의와 남북의 평화 협력은 실낱같던 희망조차도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상징적인 죽음으로 민주 대 반민주의 전선이 형성되고 있으며, 남북은 전쟁 직전 상태로 진입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자기반성과 변화가 없이는 현 정권의 모든 정치적 가능성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나야 온갖 야유와 비난 속에서 서재에 틀어박히면 그만이지만,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상실하게 될 귀중한 몇 년이다. 굳이 덧붙이자면 나는 평생에 작가로서의 내 삶이 그 어떤 정치권력보다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으며, 특정한 파당이나 패거리를 뛰어넘은 문학의 독립성을 스스로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출전 / 2009년 6월 8일 한겨레신문 “왜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