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 논술 자료함
논제 : 사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를 논술하시오.
(2005학년도 서울대정시전형 기출문제)
※ 아래의 내용을 반드시 논술문에 포함시킬 것.
1.【제시문 1】에 드러나 있는 사물의 인식 방법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이에 근거하여【제시문 2】의 내용을 논할 것.
2. 다음 문장들을 논술에 활용하되, 그 가운데 한 문장을 반드시 직접 인용할 것.
① 큰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큰 깨달음이 없다. 의심나는 것을 쌓아놓고 모호하게 두는 것은 캐묻고 따지는 것만 못하다. (홍대용, 담헌집)
②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 (공자, 논어)
③ 사실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해석뿐이다. (F. W. 니체, 권력에의 의지)
④ 진리를 발견하는 것보다도 오류를 인식하는 편이 훨씬 쉽다. 오류는 표면에 나타나 있으므로 쉽게 정리할 수 있지만, 진리는 깊은 곳에 숨겨져 있으므로 그것을 탐구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J. W. 괴테, 잠언과 성찰)
⑤ 어떠한 사람의 지식도 그 사람의 경험을 초월하는 것은 아니다. (J. 로크, 인간 오성론)
제시문 1
강물은 두 산 사이에서 흘러 나와 돌에 부딪혀 싸우는 듯 뒤틀린다. 그 성난 물결, 노한 물줄기, 구슬픈 듯 굼실거리는 물갈래와 굽이쳐 돌며 뒤말리며 고함치는, 원망하는 듯한 여울은 장성을 뒤흔들어 쳐부술 氣勢가 있다. 수만의 전차와 수만의 군사와 수만의 포대와 큰 북으로도 그 퉁탕거리며 무너져 쓰러지는 소리를 충분히 形容할 수 없을 것이다. 모래 위엔 엄청난 큰 돌이 우뚝 솟아 있고, 강 언덕엔 버드나무가 어둡고 컴컴한 가운데 서 있어서, 마치 물귀신들이 서로 다투어 사람을 엄포하는 듯한데, 좌우의 이무기들이 솜씨를 試驗하여 사람을 붙들고 할퀴려고 애를 쓰는 듯하다.
어느 누구는 이 곳이 전쟁터였기 때문에 강물이 그렇게 운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때문이 아니다. 강물 소리란,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나의 居處는 산중에 있었는데, 바로 문 앞에 큰 시내가 있었다. 해마다 여름철이 되어 큰 비가 한 번 지나가면, 시냇물이 갑자기 불어서 마냥 전차와 기마, 대포와 북소리를 듣게 되어, 그것이 이미 귀에 젖어 버렸다. 나는 옛날에, 문을 닫고 누운 채 그 소리를 區分해 본 적이 있었다. 깊은 소나무에서 나오는 바람 같은 소리, 이것은 듣는 사람이 淸雅한 까닭이며,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 이것은 듣는 사람이 흥분한 까닭이며, 뭇 개구리들이 다투어 우는 듯한 소리, 이것은 듣는 사람이 교만한 까닭이며, 수많은 축(筑)*의 격한 가락인 듯한 소리, 이것은 듣는 사람이 노한 까닭이다. 그리고 우르릉 쾅쾅 하는 천둥과 벼락같은 소리는 듣는 사람이 놀란 까닭이고, 찻물이 보글보글 끓는 듯한 소리는 듣는 사람이 韻致 있는 性格인 까닭이고, 거문고가 궁우(宮羽)**에 맞는 듯한 소리는 듣는 사람이 슬픈 까닭이고, 종이창에 바람이 우는 듯한 소리는 듣는 사람이 疑心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소리는, 올바른 소리가 아니라 다만 자기 흉중에 품고 있는 뜻대로 귀에 들리는 소리를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어제 하룻밤 사이에 한 강을 아홉 번이나 건넜다. 강은 새외(塞外)로부터 나와서 장성을 뚫고 유하, 조하, 황화, 진천 등의 여러 줄기와 어울려 밀운성 밑을 지나 백하가 되었다. 내가 어제 두 번째 배로 백하를 건넜는데, 이것은 바로 이 강의 下流였다. 내가 아직 요동 땅에 들어오지 못했을 무렵, 바야흐로 한여름의 뙤약볕 밑을 지척지척 걸었는데, 홀연히 큰 강이 앞을 가로막아 붉은 물결이 산같이 일어나서 끝을 볼 수 없었다. 아마 천리 밖에서 暴雨로 洪水가 났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을 건널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들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기에, 나는 그들이 모두 하늘을 향하여 묵도를 올리고 있으려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랜 뒤에야 비로소 알았지만, 그 때 내 생각은 틀린 생각이었다.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힘차게 돌아 흐르는 물을 보면, 굼실거리고 으르렁거리는 물결에 몸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아서 갑자기 현기증이 일면서 물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그 얼굴을 젖힌 것은 하늘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숫제 물을 피하여 보지 않기 위함이었다. 사실, 어느 겨를에 그 잠깐 동안의 목숨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으랴!
그건 그렇고, 그 危險이 이와 같은데도, 이상스럽게 물이 성내어 울어 대진 않았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요동의 들이 넓고 평평해서 물이 크게 성내어 울어 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물을 잘 알지 못하는 까닭에서 나온 誤解인 것이다. 요하가 어찌하여 울지 않았을 것인가? 그건 밤에 건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낮에는 눈으로 물을 볼 수 있으므로 그 위험한 곳을 보고 있는 눈에만 온 정신이 팔려 오히려 눈이 있는 것을 걱정해야만 할 판에, 무슨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젠 전과는 반대로 밤중에 물을 건너니, 눈엔 위험한 光景이 보이지 않고, 오직 귀로만 위험한 느낌이 쏠려, 귀로 듣는 것이 무서워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아, 나는 이제야 道를 알았도다. 마음을 잠잠하게 하는 자는 귀와 눈이 누(累)가 되지 않는데,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아져서 큰 병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까지 나를 시중해 주던 마부가 말한테 발을 밟혔기 때문에, 그를 뒷수레에 실어 놓고, 내가 손수 고삐를 붙들고 강 위에 떠 안장 위에 무릎을 구부리고 발을 모아 앉았는데, 한번 말에서 떨어지면 곧 물인 것이다. 거기로 떨어지는 경우에는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고, 물로 몸을 삼고, 물로 性情을 삼을 것이라. 이러한 마음의 判斷이 한번 내려지자, 내 귓속에선 강물 소리가 마침내 그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무려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도 두려움이 없고 태연할 수 있어, 마치 방 안에서 편안히 앉아있는 것과 같았다.
옛적에 우(禹)가 강을 건너는데, 누런 용이 배를 등으로 져서 지극히 危險했다 한다. 그러나 生死의 判斷이 일단 마음속에 정해지자, 용이거나 지렁이거나, 혹은 그것이 크거나 작거나 간에 아무런 關係도 될 바가 없었다 한다. 소리와 빛은 모두 外物이다. 이 외물이 항상 사람의 耳目에 누(累)가 되어, 보고 듣는 機能을 마비시켜 버린다. 그것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강물보다 훨씬 더 험하고 위태한 人生의 길을 건너갈 적에 보고 듣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致命的인 병이 될 것인가? 나는 또 나의 산중으로 돌아가 앞내의 물 소리를 다시 들으면서 이것을 經驗해 볼 것이려니와, 몸 가지는데 교묘하고, 스스로 총명한 것을 自信하는 자에게 이를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다.
* 축(筑) : 거문고 비슷한 현악기.
** 궁우(宮羽) : ‘宮’과 ‘羽’는 옛날의 음계 이름.
제시문 2
어느 산골에 작고 깊은 우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우물은 흔히 볼 수 있는 우물과는 다른 모습이었어요. 우물 벽에는 구멍이 숭덩숭덩 나 있고 돌이 여기저기 삐져나와 있었습니다. 깊은 바닥 한가운데에는 진흙 웅덩이도 있었습니다. 밑바닥 쪽은 언제나 어둑하였지요. 이 우물 안에 페페, 필라, 페트라, 푸투라고 하는 개구리 네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좁고 어두운 곳이었지만 네 마리의 개구리가 살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개구리들은 이 우물 안에서 아무런 불만도, 걱정도, 다툼도 없이 아주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개구리들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편하고 단순했습니다. 우물 밑바닥에서 개구리들이 고개를 들고 위를 쳐다보면, 가끔씩 가마득히 하늘이 보였습니다. 하늘은 밝고 푸르렀으며, 작고 동그랬습니다. 개구리들의 먹이는 여기저기 널려 있었습니다. 우물 안으로 날아든 맛 좋은 파리와 날벌레, 벽을 기어 다니는 벌레들은 모두 개구리들의 재빠른 혓바닥의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개구리들은 배불리 벌레들을 잡아먹고는 저희들끼리 즐겁게 놀았습니다. 우물 안 진흙 웅덩이에서 팔짝팔짝 뛰어다니기도 했고, 우물 벽을 타고 오르다가 뛰어내리기도 하였습니다. 제 자리에서 발 구르기를 하며 놀다가 싫증이 나면 솟구쳐 뛰어올라 보기도 하였지요. 우물 안으로 빗방울이 내리칠 때면 ‘개굴개굴’ 노래도 부르며 춤을 추기도 했답니다. 그러면서 개구리들은 좁고 어두운 우물과 가마득하게 올려다 보이는 하늘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페페가 친구들과 떨어져서 혼자 우물 벽을 기어올랐습니다. 개구리들은 항상 우물 안에서 놀다가 가끔 벽을 타고 위로 올라가 보기도 하였지만, 캄캄한 구멍이나 불쑥 솟아나온 돌멩이를 중간에서 마주치면 오싹 겁이 나서 더 이상 위로 오르지 못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 내려오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페페는 늘 우물 꼭대기로 작게 보이는 하늘이 궁금하였답니다. 그래서 꼭 한번 우물 꼭대기까지 올라가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페페는 우물 안의 벽에 붙어 후미진 곳에서 쉬기도 하며 돌 틈을 비집고 벽을 기어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물 꼭대기 바로 아래에 튀어 나온 돌멩이에까지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페페는 크게 한 번 도약을 해서 위로 뛰어올랐습니다.
그런데 페페는 깜짝 놀랐어요. 예전에 보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너무도 밝아서 페페의 눈을 아프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태양이었습니다. 페페는 놀라서 바로 우물 안으로 황급하게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친구들에게로 되돌아가 소리쳤습니다.
“이봐 필라, 페트라, 푸투! 이리 좀 와 봐.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어.”
“페페, 왜 그래? 무슨 일인데?”
“페페, 너 어디 갔다가 오니? 뭐가 문젠데?”
필라와 페트라와 푸투가 뛰어오면서 물었습니다.
“내가 저 꼭대기까지 올라갔었어. 간신히……”
“무슨 소리야? 네가 혼자 어떻게?”
“그런데 저기서 아주 크고 눈부신 빛을 보았어!”
“정말로?”
필라와 페트라가 놀란 눈으로 다가섰습니다.
“그래. 그 빛나는 것을 보는 순간 나는 겁이 나서 눈을 감고 우물 안으로 뛰어 들어온 거야.”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믿기 어려운 걸?”
페트라가 말했습니다. 필라도 눈을 치켜뜨고는 손을 내둘렀습니다.
“페페, 그건 아니야. 네가 무얼 잘못 본 거지. 우린 여기서 한평생을 살았어. 여기서 우리는 저 꼭대기의 작고 둥그스름한 푸른 하늘만을 보아 왔어. 저것이 우리들 세계의 크기이자 진실이야. 너는 정말로 눈이 멀었구나.”
“그렇지만 내 말은 사실이야.”
페페는 계속 주장했습니다.
푸투는 아무 생각도 없다는 듯이 눈만 두리번거렸습니다. 페트라는 흥미가 없다는 듯이 진흙 웅덩이로 뛰어가 버렸고, 필라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페페는 친구들을 설득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친구들이 그 크고 환한 빛을 스스로 직접 보기 전에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필라, 너도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니? 제발 내 말을 믿어줘. 네가 직접 한번 저 꼭대기 위로 올라가보지 않을래? 저쪽 오른편 구석으로 돌아가서 돌 틈으로 기어오르면 불쑥 튀어 나온 돌멩이에 도달하게 될 거야. 그 돌멩이까지 오르는 것도 굉장한 힘이 들어. 그러나 그 돌멩이 위에 오르기만 하면 바깥세상을 보기가 쉽지. 거기서 펄쩍 한번 뛰어오르면 우물 바깥으로 나갈 수 있어. 만일 바깥으로 뛰어 나가지 못하고 우물 턱에 걸리면 너는 이 바닥으로 처박히게 될 거고. 자, 봐! 그런데 네가 그 곳에 도달하면 넌 내가 보았던 그 크고 환한 빛을 보게 될 거야! 참, 그 빛을 너무 오랫동안 쳐다보지 마. 네 눈이 상할 걸.”
페페는 흥분된 목소리로 설명했습니다.
“필라, 네가 그걸 보고 오면 페트라도 쉽게 내 말을 믿겠지.”
“그래, 좋아.”
필라가 대답했습니다.
“페페, 그건 너무 위험해. 제발 그만 둬.”
푸투는 겁을 잔뜩 먹고 있었습니다.
그날 오후, 필라는 페페의 말대로 하여도 해로울 게 없다고 결정했습니다. 팔다리 운동을 하고 목을 돌리고 무릎 운동을 하며 몸을 푼 후에, 필라는 벽을 기어올랐습니다. 우물 벽에는 여기저기 어둑한 구멍이 있고 미끈거렸지만, 그럭저럭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필라는 튀어 나온 돌멩이 위에 올라서서 크게 한 번 숨을 쉰 후, 힘껏 돌바닥을 박차고 위로 뛰어올랐어요. 그러나 우물 턱에 머리를 부딪치고는 돌멩이 위로 내리박히고 말았습니다. 필라는 머리통이 아팠지만 다시 한번 도전했습니다. ‘얏’ 하고 뛰어 올라 우물 턱을 간신히 손으로 잡았지만 몸이 다시 미끄러져 내렸습니다.
필라의 도전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 과정이한 시간이나 되풀이되었고, 필라는 상처투성이가 되었답니다. 어느덧 저녁이 되었습니다. 사방이 어둑해지면서 앞뒤를 분간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필라는 거의 자포자기의 상태였습니다. 정확한 거리를 가늠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무엇보다도 몹시 피곤했습니다. 필라는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곧 잠에 빠져버렸습니다.
필라가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습니다. 그런데 필라는 주위가 훤하게 밝아졌음을 알고 의아해 했습니다. 우물 위로 하늘이 훤하게 트여 있었습니다. 필라는 용기를 얻어 자세를 고쳐 앉고는 다시 몸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거리를 가늠하고, 약간 뒤로 움츠렸다가, 셋을 센 후에 뒷다리에 있는 힘을 다 주고 솟구쳐 뛰어 올랐습니다. 그리고 멋지게 우물 턱 위에 올라섰습니다.
“페페가 말했던 크고 빛나는 것이 뭐지?”
필라는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부드러우면서도 밝고 둥그런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필라는 몹시도 혼란스러워졌습니다.
“페페가 말한 것이 저건가? 눈이 멀 정도로 밝은 빛이랬는데. 저 빛은 너무도 부드럽고 곱잖아?”
필라는 달을 지긋이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둥그런 달빛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고 말았습니다. 한참 뒤에 필라는 사방을 두리번대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우물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필라가 돌아오자, 페페와 페트라와 푸투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필라에게 달려왔습니다.
“그래, 필라야. 너도 그 환하고 강렬한 빛을 봤지?”
페페가 흥분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아니야. 강렬하다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것은 부드러운 느낌이었어. 난 그 빛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니까.”
“뭐? 2초 이상 빛을 보면 눈이 멀고 만다구.”
“아냐. 그건 크고 둥글고 곱고 부드러웠어.”
“그래? 네가 뭔가 잘못 봤나보다. 그게 아닌데……”
페페가 필라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는 내가 알아.”
필라도 지지 않고 페페에게 말했습니다.
이때 페트라가 끼어들었습니다.
“그만들 해. 너희들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난 누구 이야기를 믿어야할지 모르겠어.”
페페는 머뭇거리고 있는 페트라에게 다가섰습니다. 페트라를 설득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페트라, 넌 내 말을 믿지? 내가 제일 먼저 저 꼭대기 위로 나가 보았잖니? 내가 개척자야. 필라는 저기까지 올라가는데 지쳐 쓰러졌었다고 하지 않았니?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하늘을 쳐다보아서 뭔가 혼동하고 있는 거야.”
페페의 말을 들은 페트라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곁에서 보고 있던 필라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냐, 페트라. 그렇지 않아. 내가 분명히 두 눈으로 보았어. 은은하게 빛을 내는 하늘의 둥근 것을 보았다니까. 넌 내 말을 믿어야 돼. 내가 페페보다 뒤에 올라가 보았으니, 내 생생한 경험이 맞지.”
필라가 힘주어 하는 말에 페트라는 둘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 페페와 필라는 서로 자기 말이 맞다고 야단이었습니다. 둘의 논쟁은 페트라가 질릴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페트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발 둘 다 이젠 그만해! 너희 둘 다 옳다.”
“아……”
“음……”
페페와 필라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을 더듬었습니다.
“아니면, 둘 다 잘못 생각하고 있을지 몰라.”
페트라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어. 우리 모두가 가서 확인해 보는 거. 우리 모두.”
페트라의 뜻밖의 제안에 둘은 손뼉을 쳤습니다.
“그래, 우리 모두 가보자. 우리 모두.”
“난 필라가 다칠까봐 내내 걱정만 했다. 나는 안 갈래. 너희들이 무얼 보았든지 그게 우리들의 삶과 무슨 상관이니?”
푸투는 그냥 진흙 웅덩이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페페가 약간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습니다.
“페트라, 너 정말 저기까지 가 보겠니? 너무 힘들어서 너는 못 올라 갈 거야.”
“난 할 수 있어.”
“좋아. 내 생각도 페트라는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봐. 푸투는 언제나 저런 식으로 빠지니까 그냥 내버려 둬. 페페, 우리 둘이서 페트라를 도우면 돼.”
필라가 페트라의 손을 잡았습니다.
개구리 세 마리는 다음날 푸투가 채 일어나기도 전에 이른 새벽부터 우물 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 예상했던 대로 페트라가 자꾸 뒤쳐졌습니다. 어려운 등반이었습니다. 방향을 잘못 잡기도 했으며, 이끼에 미끄러지기도 했습니다. 뱀이 옆을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되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페트라가 몇 번이나 돌 틈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바람에 필라와 페페가 페트라를 붙잡아 끌어 올려야 했습니다. 우물 꼭대기 바로 아래의 돌멩이 위에 이르기까지 거의 한나절을 보냈고, 돌멩이 위에서 우물 턱으로 뛰어 오르는 데에 힘을 다 쏟았습니다. 개구리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페트라가 마지막으로 우물 턱으로 뛰어 오르는 순간, 페페와 필라는 뛰어오르는 페트라의 손을 위에서 꽉 잡아 이끌었습니다. 드디어 페트라가 우물 턱 위로 올라왔습니다. 세 마리의 개구리들은 서로 힘을 합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때는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해가 서쪽 지평선 위로 넘어가면서 붉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개구리들은 이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았습니다. 페페와 필라는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페페는 이것이 자신이 전에 보았던, 따가운 빛이 눈부시게 비치던 물체와 똑같은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필라 역시 자신이 밤하늘에서 보았던 것보다 이 물체가 확실하게 더 밝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기 저게 너희들이 말한 것이니?”
페트라가 물었습니다.
“……”
페페와 필라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좀 더 기다려보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페트라가 제안했습니다. “좋은 생각이야.”
필라가 대답했습니다.
개구리 세 마리는 처음으로 일몰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광경은 정말로 장관이었습니다. 이 경험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하늘에 달과 별들이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개구리들은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개구리들은 밤을 꼬박 새우며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새벽이 되자, 빛나는 아침 해가 떠올랐습니다. 사방이 눈부시게 환해지고 나뭇잎들도 반짝거렸습니다. 필라, 페트라, 페페는 실눈을 뜨고 이 빛을 보았고, 점차로 빛에 익숙해지게 되었습니다. 개구리들은 점차로 서서히 새로 발견한 놀라움에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사방에 나무들과 풀이 우거져 있고, 꽃 위로 나비들이 날고 있었습니다. 페트라가 말했습니다.
“봤지? 너희들 둘이 한 말이 모두 맞네. 우리가 서로 도와 여기까지 올라오기를 잘했어. 이렇게 많은 것을 다 보게 되었으니. 푸투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개구리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우물보다 더 넓고 복잡한 새로운 세계가 무한하게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포고3 황상원
예로부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또는 누구에게나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인식의 내용’이라는 뜻을 지닌 진리 또는 그 것의 유사어인 진실을 추구해왔다. 조선의 철학자들은 이기와 심성을 논하는 ‘사단칠정논쟁’을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약 300년간이나 벌였으며 서양에서는 브루노를 비롯한 많은 철학ㆍ과학자들은 교회의 세계관을 부정하여 화형에 처해지면서도 과학적 진리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최근 다시 붉어지고 있는, 양국의 이해관계로만 비치는 한국과 일본 양국 간의 독도 영유권 분쟁을 지켜보면서 과연 진실이란 존재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워 한다. 또, 현대 물리학에 있어 위대한 업적으로 꼽히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발표 된지 100주년을 맞는 올해에도 ‘법칙’이 아닌 ‘이론’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과연 인간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하며 가치관의 혼란을 겪게 된다. 이런 혼란을 줄이고 진리를 추구했던 인류의 역사를 이해하고 그 가치를 깨닫기 위해서는 그것에 어떻게 도달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제시문 1>은 자신이 생각한 바에 따라 시냇물의 소리를 다르게 인식한 경험과 거친 물결이 이는 강을 밤에 건너면서 마음가짐을 다르게 하자 두려움 없이 건널 수 있었다는 경험이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작가는 사물의 인식은 주관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인식이 생활에서 부분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곳에 적용되어선 곤란하다. 이는 진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다수를 통제할 수 있는 강자의 자의적인 해석이 진리가 되고 그 진리는 그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에 그치는 현실을 긍정하는 꼴이 된다. 올바름이란 정의의 실현과 보편성을 전제로 하는 사회 통념상 모든 사물을 주관적으로만 인식하려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제시문 2>는 작은 우물에 살고 있는 개구리가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작은 우물은 개구리의 생활공간이자 인식의 한계이다. 페페는 남들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하늘에 의구심을 갖으며 성찰적 태도로 진리 탐구에 첫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그는 하늘에 떠 태양을 보게 되고 그 것을 태양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착각하고 부분적으로만 그치는 인식을 드러낸다. 그의 이야기는 태양을 직접 보지 못한 다른 개구리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다. 필라는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보기 위해 직접 태양을 보기 위해 떠나고 그 과정에선 많은 고통이 따른다. 이는 진리를 탐구하려 할 때 맞닥뜨리게 되는 사회적 편견 혹은 부정적인 선입견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이곳을 통과했던 페페는 필라에게 돌멩이까지 오르는 것은 힘들지만 일단 돌멩이 위에 오르기만 하면 바깥세상이 보기 쉽다고 충고해주는데, 이는 편견이나, 선입견을 잘 극복해 내면 진리에의 탐구가 수월해 질 수 있음을 말해준다. 뒤이은, 우물 턱에 걸리면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충고는 탐구자의 강한 도전 의식이 요구되며 진리를 추구 했던 이 도전자들이 사회적인 압력에 목숨까지 잃었던 역사적 사실을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고난을 모두 극복해 내고 필라는 달을 보게 되는데, 필라는 자기가 본 물체만이 진실이라고 여기며 그 역시 부분적으로만 인식하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필라와 페페는 진실로 상징되는 하늘에 떠있는 것의 실체에 대해 다툼을 버리고 상호 배타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도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올바른 인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남의 의견과 경험을 존중하는 개방성이 요구된다. 이들을 어리석다 여기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푸투는 결코 사물의 인식을 스스로 한정짓는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필라, 페페 그리고 페트라는 이번에 동시에 셋이 올라가 꾸준히 관찰한 결과 해가 뜬 관경, 해가 지는 관경, 달이 뜬 모습을 모두 지켜봄으로써 새로운 세계로의 인식을 넓히게 된다. 여기서 사물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이 필요하며 이는 경험을 통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물을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모습이 아닌 총체적으로 바로보아야만 그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J.로크는 그의 저서 인간 오성론에서 ‘어떠한 사람의 지식도 그 사람의 경험을 초월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경험이 동반되었을 때만 인식의 범위를 넓힐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결국 인간은 사물에 대한 의문을 갖는 것을 시작으로 그 사물에 대한 경험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게 된다. 그 경험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극복하고 그 경험 간의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경험이 개인의 것이 아닌 사회적인 것으로 보편성을 띠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비로써 진리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개포고3 김세환
현대 사회는 과거에 비해 거대해졌다. 개인의 기본권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다양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양한 삶은 곧 다양한 가치관의 존재를 의미한다. 좀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각 개인의 욕구는 집단, 개인간의 갈등을 유발한다. 다양한 삶이 존재하는 현대사회에서 그 갈등은 더욱 빈번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물론 갈등은 더 나은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필수적이며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갈등이 격화되어 동등한 위치에서 상호간의 의견을 존중하기보다는 단순히 우위적 위치를 차지하려는 독선적인 태도가 만연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정치적 우위를 점하려는 우리 나라의 정치계에서도 잘 나타난다.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고 상호보완적인 사회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인식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고 능력이 가능한 인간이지만 인식의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모든 감각을 통해 얻어진 경험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형성한다. 인간은 유아기부터 자신만의 세계와 가치관을 형성하게 된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미숙한 유아기에 그의 세계는 규모가 작고 자신이 태어난 환경과 비슷한 모습을 띠게 된다. 예를 들어 어부의 아들에게 '바다'란 존재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농부의 아들에게 '바다'의 존재는 뚜렷하지 않을뿐더러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처럼 제한적이고 소극적인 경험을 통해 형성된 초기의 세계는 성장과정에서 확대되기 시작한다. 인식의 도달범위가 확장되면서 이후의 수많은 경험들이 초기의 세계에 누적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삶이 전적으로 초기에 형성된 세계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은 아니다. 이후에 겪는 경험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확대함과 동시에 그 안에 존재하는 특정한 경험과 가치관의 중요도를 증가, 감소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확대시키는 원동력은 경험이다. 그리고 경험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은 인간의 감각이다. 헌데 경험을 인식하는 감각기관은 위에서 언급한 자신만의 세계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 기존의 자신만의 세계에 새로운 사물을 개입시키기 위해 인간은 사물 전체를 바라보기보다는 자신의 세계와의 동질성이나 차이점등을 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인간들 간의 인식 차이가 나타난다. 곧 두 사람이 같은 감각을 사용하여 같은 사물을 관찰한다 하여도 기존에 축적된 각자의 경험과 가치관에 의해 영향받기 때문에 똑같은 경험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외부적인 측면에서 인간은 인식 과정에서 시간적, 공간적으로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아 사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방해받을 수 있다. 사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해 사물을 충분히 경험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현대사회처럼 수많은 사물이 존재하고 급변하는 세상에서 위의 문제점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인식의 한계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위험한 독선적이고 개인주의적 태도를 유발하고 그 결과 현대사회의 혼란을 가져온 것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 구성원들의 더 많은 자발적인 경험을 통한 인식의 범위의 확대가 필수 적이다. 특정한 사물의 정확하고 다양한 속성을 인식함으로써 상대방과의 인식 차이를 줄이고 상호작용 해야 한다. 제시문의 이야기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야기 속에서 네 마리의 개구리가 사는 우물 안은 인간들이 개별적으로 창조해내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물 안의 벽은 인식의 한계를 의미한다. 푸투를 제외한 세 마리의 개구리는 자신들만의 세계를 확대시키려는 의지를 가지고 끝내 우물 안의 벽을 오른다. 여기서 푸투는 우물 안의 세계 이외에는 자신과 상관없다고 합리화시키는 소극적 인물이다. 자신만의 세계에 안주한 체 새로운 경험을 피하는 푸투에게 우물 안의 벽은 결코 오를 수 없는 장애물이 아닌 오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경험획득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발적인 경험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인식 때문에 페페와 필라 는 갈등을 형성한다. 실제로 서로 다른 사물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사물을 보았다는 인식의 오류 때문이다. 로크의 "어떠한 사람의 지식도 그 사람의 경험을 초월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주장했듯이 이야기 속에서 페페와 필라의 불완전한 인식은 인식 과정에서 사용된 감각 기관의 오류가 아닌 사물의 경험부족으로 인한 대상의 정보 결핍이 원인이다. 페트라와 함께 다시 바깥세상으로 올라가기 전까지 페페와 필라의 바깥 세상에 대한 정보는 각자가 유일하게 경험한 해와 달이 전부였고 때문에 서로 다른 광채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시 바깥 세상에 나와 그들은 하늘에 떠있는 광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하게 된다. 그 이유는 이전의 경험보다 더 많은 시간에 걸려 일정한 사물을 관찰하여 사물과의 접촉 빈도를 증가시킴으로써 풍부한 정보를 획득하여 사물의 단편적인 속성을 전체로 인식하는 오류에서 벗어 날수 있었다.
풍부한 경험을 통해 얻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사물의 다양한 측면을 인식하기에 힘쓴다면 서로를 존중하는 사회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올바른 인식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필수적이다. 확대된 세계 속에서 인간은 폭넓은 자아성찰, 자아실현의 방법과 여러 가지 감정 등을 획득하여 그의 세계는 더욱 풍요로워 지기 때문이다. 행복만이 존재하는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인간에게 현실은 너무나도 가혹할 것이고 철저하게 불행한 세계를 지닌 인간에게 현실은 고통의 연속일 뿐이다. 행복과 불행이 공존하는 세계에서만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그것은 현실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화외고3 강슬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로부터 합리주의 철학자인 데카르트는 모든 존재인식을 이끌어 내려고 하였다. 그는, 학문에서 확실한 기초를 세우려고 하면 적어도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것은 모두 의심해 보아야 하는데, 세계의 모든 것의 존재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치더라도 이런 생각(의심)을 하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 할 수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명제에서 말하는 사유와 존재는 물질적이고 유기적인 신체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영혼적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아직 어떠한 방법으로 작용하는지도 모르는 미지의 메커니즘을 ‘사유’로 지칭하고, 이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은 지극히 추상적이고 모순적인 일이 아닐까. 지식이나 진리를 습득하는 논리 혹은 방법론, 그것을 우리는 인식론이라고 한다. 인간은 수용하는 지식의 크기와 중요도와는 상관 없이 모든 지식을, 그의 사고를 최대한으로 확장한 범위 안에서 받아들인다. 즉, 이것은 결코 일면적인 고찰이 아닌, 다각적이고도 고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종합적인 수용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인식 면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보다 올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인식에의 과정에서 인간은 크게 세 가지 방법에 의존한다. 첫째, 자신의 현실적 바탕인 경험을 중시하여 사물을 인식하는 것으로 경험론이 있다. 경험론을 대표하는 사상가로서 J. 로크는 <인간 오성론>에서 <i>‘어떠한 사람의 지식도 그 사람의 경험을 초월하는 것은 아니다.’</i>라고 언급하여 경험이 인간의 인식 안에서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이에 대한 뒷받침으로, <i>제시문 1</i>에서처럼 박지원은 하루 밤 사이에 강을 아홉 번 건넌 이야기(일야구도하기)에서 인간의 눈과 귀와 같은 경험적 감각 기능이 인식의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 지 잘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경험적 측면에서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을 이성 기타의 초경험적 계기에서 구하는 이성론의 방향으로 몰고 갔다. 즉, 모든 것은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른 것이라고 하며 이성적인 측면에서 개인의 경험과 그 경험적 감각 기능이 외부 환경에 대해 객관성과 가치 중립성을 갖도록 한 것이다. 이를 통틀어 보았을 때, 박지원은 경험만을 중시한 것도 아니고 이성만을 내세운 것도 아닌, 이성을 바탕으로 경험을 객관화하여 외부 사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도모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보다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경험과 이성을 넘어 그 인식에 대한 의지가 필요하다. 그 의지란 바로 자신이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며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한 의심이며 그것을 밝혀내는 힘이다. 우리는 흔히 자기 자신만의 인식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우물 안 개구리’라고 칭한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그 틀 외부에 대한 의심과 그 틀을 넘고자 하는 의지이다. <i>제시문 2</i>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4마리의 개구리를 통해 인식에 도달하는 또 하나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새로운 인식(외부 세계)을 찾아가는 과정을 간추려 보자면, 현실에 대한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작용함으로써 수많은 도전과 고난을 거쳐 인식에 도달한다. 그 과정에서, 비록 직접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알고자 하는 의지를 지니고 도전하는 자는 인식에 도달하는 데에 반해, 현실에 안주하여 아무런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 자는 인식에 실패하게 된다. 홍대용은 <담헌집>에서 이런 말을 했다. ‘큰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큰 깨달음이 없다. 의심 나는 것을 쌓아놓고 모호하게 두는 것은 캐 묻고 따지는 것만 못하다.’이를 통하여 우리는 그 만큼 어떤 사물이나 지식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가 인간의 올바른 인식에의 도달에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올바른 인식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크게 세가지로 구분되는 방법(경험과 이성과 의지)을 수용하여 인식에 도달한다. 그러나 경험론은 개인마다의 상대성으로 인해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로 흐르기 쉬우며, 논리나 수학 등의 필연성 마저 심리주의로 오해하기 쉽다. 그와 반대로, 이성론은 검증 불가능한 영역의 사고나 가정으로 변하기 쉽다. 인간의 의지 역시 같은 맥락에서 구체적이고 특수한 목적성을 띠지 않는 이상 추상적이고 상대성이 보다 짙은 개념이다. 칸트는 경험을 인식의 발생과 성립의 근거라고 인정하면서도 직관이나 오성 등의 선천적 형식에서 학문적 인식의 보편타당성의 근거를 구하며 경험론과 이성론의 종합을 시도하였다. 주어진 다양성은 외적인 경험으로부터 부여되지만 그것은 주관의 형식에 의해 통일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 요구되는 능력은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이 세 가지 과정(경험, 이성, 의지)의 통합적인 조화이다.
선일여고3 최고은
천만리에 고은님 여희옵고 냇가에 앉았더니 져물도 내마음과 같아서 울며 밤길 가는 구나'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않는가 우리도 그치지 말고 만고상청 하리라'
라는 두편의 시조가 있다. 첫 번째 시조에서 화자가 바라보는 물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닌 화자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내면의 정서를 더욱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반면에 두 번째 시조에서의 물은 그 자체의 속성을 통해 교훈을 주는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이 두편의 시조에서 볼수 있듯이 그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있고 어떠한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서 동일한 사물이 다르게 인식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제시문 1에서 강물소리를 자신의 마음상태에 따라 다르게 인식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세계를 얼마나 주관적으로 바라보느냐와 연결된다.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해석뿐이다.'라는 니체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사물의 인식은 정해져 있는 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의 주관적 해석에 결부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느 정도의 이성을 부여 받기 때문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처음에 인식의 바탕이 되는 것은 감각적 지각능력이다. 하지만 감각적 지각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인식의 방법은 인식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어서 필연적으로 인식의 한계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갓난아이가 누워서보는 방안의 사물들을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듯이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 그 이상을 뛰어 넘지 못하는 것이다. 제시문 2의 개구리들도 우물에서 보이는 좁은 하늘을 전부라 여기며 살아 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단조로웠으며 많은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페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의심들을 모호하게 쌓아두지 않고 우물이라는 인식의 장애물을 뛰어넘어 새로운 인식의 경험을 하게 된다. 만약 페페가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에 안주해서 인식의 확장에 대한 의지 없이 살았다면 평생 우물안 개구리 신세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결국, 새로운 세계를 인식하는 데는 항상 자신의 인식의 범위를 뛰어넘어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자 하는 자발적 의지와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한 노력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한걸음 더 도약하기 위한 인식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사물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오로지 하나의 진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세계에서는 인식의 관점에 대한 끊임없는 논의가 이루어진다. 그러한 논의들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지금 현재 많은 문화나 사상의 토대를 이루웠고, 논의들을 좁혀나가는 가운데 다원성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제시문 2에서 세 마리의 개구리들은 하늘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관찰하고 있는 세계의 특성에 있다. 그들이 보는 하늘은 언제 어느 때나 볼 수 있는 동일한 형태와 모습이 아니라 관찰자의 위치와 관찰하는 시간에 따라 변화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세계도 변화와 모순을 함께 포함하는 총체적인 것이다. '진리를 발견하는 것보다도 오류를 인식하는 편이 훨씬 쉽다. 진리를 깊은 곳에 숨겨져 있으므로 그것을 탐구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처럼 변화무쌍한 사회속에서 하나의 진리를 도출해 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3명의 개구리가 노력과 경험을 통해 비교적 근접한 진리를 찾아 냈듯이, 실재세계에 존재하는 인간도 많은 경험을 통해 사물의 올바른 인식에 도달 할 수 있을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도 인식의 범위를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노력들이 필요하다. '어떠한 사람의 지식도 그 사람의 경험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로크의 말처럼 그 사물에 대한 많은 경험을 통해 그 본질이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며 그속에서 비교적 올바른 진리를 찾아내기 위해 많은 의견조율을 거쳐야만 한다. 하지만 그 과정속에서 전적으로 주관적인 관점, 객관적인 관점이 요구되어서는 안된다. 주관적인 관점만 고집하다 보면 전반적인 진리를 파악하지 못한 채 편협한 자기의 논리에 빠질 수가 있고, 객관적인 관점만 강조하다 보면 사물의 인식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막을 수 있다. 부분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들을 하나의 체계로 구성하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주관적인 사물의 인식방법을 완성해 나가는 일이 우리가 도달해야할 진정한 목표일 것이다.
인식론 개포고3 이상목
‘물어보는 것은 잠깐의 부끄러움이지만 모르는 것은 평생의 부끄러움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인간에게 무엇을 안다는 것은 중요하다는 뜻이다. 인간은 왜 알려고 하는가? 앎이란 인간이 세상을 보는 시각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넓으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설계할 수 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제시문 1에서 주인공은 외물에 휘둘리는 것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사물의 본질은 결국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 제시문에서 사람들은 물이 보이는 낮에는 건널 엄두를 내지 못하다 정작 밤이 되어서는 어렵지 않게 강을 건넌다. 위협적으로 보이는 강물과 소리는 강의 겉모습일 뿐 본질은 결코 아니다. 강물을 건너는 주체인 사람이 두렵게 생각하면 강이 험해 보이는 것이고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면 강 역시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주인공이 말하는 바를 확장시키면 결국 중요한 것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판단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올바른 판단력을 갖자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우선이다. 자신을 알지 못하고 내린 판단이 과연 얼마나 가치가 있을 것인가. 먼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안 뒤에 사물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래야만이 외물에 현혹되지 않는 정확한 판단력을 얻을 수 있다.
주인공의 의견은 여러 측면에서 타당한 의견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처럼 인식하는 주체가 마음먹기에 따라 전혀 상반되는 방향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잘 알려진 예로 원효 스님이 해골에 든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잠결에 물을 맛있게 마셨는데 다음날 알고 보니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는 것이다. 비단 원효 스님 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이와 같은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예컨대 실직을 당한다고 하면 누군가에게는 인생이 끝난 것과 같은 절망적인 사건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제 2의 인생을 설계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세상이란 인식하기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다가온다. 일어난 현상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겠지만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제시문 2는 말 그대로 우물 안 개구리의 인식을 말하고 있다. 대상의 본질을 가려내는 것은 사람의 판단이지만 여기에는 반드시 한 가지 전제가 따라온다. 본질을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보고 경험해야 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지 않던가. 아무리 듣고 생각해봐야 올바른 인식에는 다가갈 수가 없다. 제시문에서도 페페와 필라는 페트라에게 우물 바깥의 세상을 열심히 설명하지만 페트라는 알아듣지 못한다. 그리고는 우물 위로 직접 올라가서야 세상을 깨닫는다. 세상을 좁게 보는 사람에게는 세상 자체가 좁아 보인다. 하늘이 우물 크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개구리들처럼 말이다.
한 편 페페와 필라는 사물의 외면만을 보고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경우이다. 페페가 본 태양이나 필라가 본 달 둘 다 우물 밖의 세상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들은 그때까지 우물 바깥의 세상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에 본질을 파악할 수 없었다. 마지막에 세 개구리들이 본 석양과 달과 태양은 의미상으로는 좀 더 본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역시 사물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경험이 필요하다. 경험을 통한 이 인식을 바탕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얻을 수 있다.
두 개의 제시문을 결합하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인식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답을 얻을 수 있다. 인식의 가장 처음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자신이 구하고자 하는 진리가 어떤 것인지, 자신이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직접적인 경험이다. 세상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물 밖으로 나가야 하고,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강에 가야 하듯 말이다. 그리고 알고자하는 대상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해야 한다.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도 경험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본질이란 인식하는 주체의 판단으로 바뀔 수도 있다. 한 가지 현상에 절대적인 본질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로크는 ‘어떠한 사람의 지식도 그 사람의 경험을 초월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알기 위해서는 먼저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인식을 위한 첫걸음이 풍부한 경험에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05학년도 서울대정시전형 기출문제)
※ 아래의 내용을 반드시 논술문에 포함시킬 것.
1.【제시문 1】에 드러나 있는 사물의 인식 방법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이에 근거하여【제시문 2】의 내용을 논할 것.
2. 다음 문장들을 논술에 활용하되, 그 가운데 한 문장을 반드시 직접 인용할 것.
① 큰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큰 깨달음이 없다. 의심나는 것을 쌓아놓고 모호하게 두는 것은 캐묻고 따지는 것만 못하다. (홍대용, 담헌집)
②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 (공자, 논어)
③ 사실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해석뿐이다. (F. W. 니체, 권력에의 의지)
④ 진리를 발견하는 것보다도 오류를 인식하는 편이 훨씬 쉽다. 오류는 표면에 나타나 있으므로 쉽게 정리할 수 있지만, 진리는 깊은 곳에 숨겨져 있으므로 그것을 탐구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J. W. 괴테, 잠언과 성찰)
⑤ 어떠한 사람의 지식도 그 사람의 경험을 초월하는 것은 아니다. (J. 로크, 인간 오성론)
제시문 1
강물은 두 산 사이에서 흘러 나와 돌에 부딪혀 싸우는 듯 뒤틀린다. 그 성난 물결, 노한 물줄기, 구슬픈 듯 굼실거리는 물갈래와 굽이쳐 돌며 뒤말리며 고함치는, 원망하는 듯한 여울은 장성을 뒤흔들어 쳐부술 氣勢가 있다. 수만의 전차와 수만의 군사와 수만의 포대와 큰 북으로도 그 퉁탕거리며 무너져 쓰러지는 소리를 충분히 形容할 수 없을 것이다. 모래 위엔 엄청난 큰 돌이 우뚝 솟아 있고, 강 언덕엔 버드나무가 어둡고 컴컴한 가운데 서 있어서, 마치 물귀신들이 서로 다투어 사람을 엄포하는 듯한데, 좌우의 이무기들이 솜씨를 試驗하여 사람을 붙들고 할퀴려고 애를 쓰는 듯하다.
어느 누구는 이 곳이 전쟁터였기 때문에 강물이 그렇게 운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때문이 아니다. 강물 소리란,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나의 居處는 산중에 있었는데, 바로 문 앞에 큰 시내가 있었다. 해마다 여름철이 되어 큰 비가 한 번 지나가면, 시냇물이 갑자기 불어서 마냥 전차와 기마, 대포와 북소리를 듣게 되어, 그것이 이미 귀에 젖어 버렸다. 나는 옛날에, 문을 닫고 누운 채 그 소리를 區分해 본 적이 있었다. 깊은 소나무에서 나오는 바람 같은 소리, 이것은 듣는 사람이 淸雅한 까닭이며,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 이것은 듣는 사람이 흥분한 까닭이며, 뭇 개구리들이 다투어 우는 듯한 소리, 이것은 듣는 사람이 교만한 까닭이며, 수많은 축(筑)*의 격한 가락인 듯한 소리, 이것은 듣는 사람이 노한 까닭이다. 그리고 우르릉 쾅쾅 하는 천둥과 벼락같은 소리는 듣는 사람이 놀란 까닭이고, 찻물이 보글보글 끓는 듯한 소리는 듣는 사람이 韻致 있는 性格인 까닭이고, 거문고가 궁우(宮羽)**에 맞는 듯한 소리는 듣는 사람이 슬픈 까닭이고, 종이창에 바람이 우는 듯한 소리는 듣는 사람이 疑心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소리는, 올바른 소리가 아니라 다만 자기 흉중에 품고 있는 뜻대로 귀에 들리는 소리를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어제 하룻밤 사이에 한 강을 아홉 번이나 건넜다. 강은 새외(塞外)로부터 나와서 장성을 뚫고 유하, 조하, 황화, 진천 등의 여러 줄기와 어울려 밀운성 밑을 지나 백하가 되었다. 내가 어제 두 번째 배로 백하를 건넜는데, 이것은 바로 이 강의 下流였다. 내가 아직 요동 땅에 들어오지 못했을 무렵, 바야흐로 한여름의 뙤약볕 밑을 지척지척 걸었는데, 홀연히 큰 강이 앞을 가로막아 붉은 물결이 산같이 일어나서 끝을 볼 수 없었다. 아마 천리 밖에서 暴雨로 洪水가 났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을 건널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들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기에, 나는 그들이 모두 하늘을 향하여 묵도를 올리고 있으려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랜 뒤에야 비로소 알았지만, 그 때 내 생각은 틀린 생각이었다.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힘차게 돌아 흐르는 물을 보면, 굼실거리고 으르렁거리는 물결에 몸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아서 갑자기 현기증이 일면서 물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그 얼굴을 젖힌 것은 하늘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숫제 물을 피하여 보지 않기 위함이었다. 사실, 어느 겨를에 그 잠깐 동안의 목숨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으랴!
그건 그렇고, 그 危險이 이와 같은데도, 이상스럽게 물이 성내어 울어 대진 않았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요동의 들이 넓고 평평해서 물이 크게 성내어 울어 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물을 잘 알지 못하는 까닭에서 나온 誤解인 것이다. 요하가 어찌하여 울지 않았을 것인가? 그건 밤에 건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낮에는 눈으로 물을 볼 수 있으므로 그 위험한 곳을 보고 있는 눈에만 온 정신이 팔려 오히려 눈이 있는 것을 걱정해야만 할 판에, 무슨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젠 전과는 반대로 밤중에 물을 건너니, 눈엔 위험한 光景이 보이지 않고, 오직 귀로만 위험한 느낌이 쏠려, 귀로 듣는 것이 무서워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아, 나는 이제야 道를 알았도다. 마음을 잠잠하게 하는 자는 귀와 눈이 누(累)가 되지 않는데,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아져서 큰 병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까지 나를 시중해 주던 마부가 말한테 발을 밟혔기 때문에, 그를 뒷수레에 실어 놓고, 내가 손수 고삐를 붙들고 강 위에 떠 안장 위에 무릎을 구부리고 발을 모아 앉았는데, 한번 말에서 떨어지면 곧 물인 것이다. 거기로 떨어지는 경우에는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고, 물로 몸을 삼고, 물로 性情을 삼을 것이라. 이러한 마음의 判斷이 한번 내려지자, 내 귓속에선 강물 소리가 마침내 그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무려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도 두려움이 없고 태연할 수 있어, 마치 방 안에서 편안히 앉아있는 것과 같았다.
옛적에 우(禹)가 강을 건너는데, 누런 용이 배를 등으로 져서 지극히 危險했다 한다. 그러나 生死의 判斷이 일단 마음속에 정해지자, 용이거나 지렁이거나, 혹은 그것이 크거나 작거나 간에 아무런 關係도 될 바가 없었다 한다. 소리와 빛은 모두 外物이다. 이 외물이 항상 사람의 耳目에 누(累)가 되어, 보고 듣는 機能을 마비시켜 버린다. 그것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강물보다 훨씬 더 험하고 위태한 人生의 길을 건너갈 적에 보고 듣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致命的인 병이 될 것인가? 나는 또 나의 산중으로 돌아가 앞내의 물 소리를 다시 들으면서 이것을 經驗해 볼 것이려니와, 몸 가지는데 교묘하고, 스스로 총명한 것을 自信하는 자에게 이를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다.
* 축(筑) : 거문고 비슷한 현악기.
** 궁우(宮羽) : ‘宮’과 ‘羽’는 옛날의 음계 이름.
제시문 2
어느 산골에 작고 깊은 우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우물은 흔히 볼 수 있는 우물과는 다른 모습이었어요. 우물 벽에는 구멍이 숭덩숭덩 나 있고 돌이 여기저기 삐져나와 있었습니다. 깊은 바닥 한가운데에는 진흙 웅덩이도 있었습니다. 밑바닥 쪽은 언제나 어둑하였지요. 이 우물 안에 페페, 필라, 페트라, 푸투라고 하는 개구리 네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좁고 어두운 곳이었지만 네 마리의 개구리가 살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개구리들은 이 우물 안에서 아무런 불만도, 걱정도, 다툼도 없이 아주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개구리들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편하고 단순했습니다. 우물 밑바닥에서 개구리들이 고개를 들고 위를 쳐다보면, 가끔씩 가마득히 하늘이 보였습니다. 하늘은 밝고 푸르렀으며, 작고 동그랬습니다. 개구리들의 먹이는 여기저기 널려 있었습니다. 우물 안으로 날아든 맛 좋은 파리와 날벌레, 벽을 기어 다니는 벌레들은 모두 개구리들의 재빠른 혓바닥의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개구리들은 배불리 벌레들을 잡아먹고는 저희들끼리 즐겁게 놀았습니다. 우물 안 진흙 웅덩이에서 팔짝팔짝 뛰어다니기도 했고, 우물 벽을 타고 오르다가 뛰어내리기도 하였습니다. 제 자리에서 발 구르기를 하며 놀다가 싫증이 나면 솟구쳐 뛰어올라 보기도 하였지요. 우물 안으로 빗방울이 내리칠 때면 ‘개굴개굴’ 노래도 부르며 춤을 추기도 했답니다. 그러면서 개구리들은 좁고 어두운 우물과 가마득하게 올려다 보이는 하늘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페페가 친구들과 떨어져서 혼자 우물 벽을 기어올랐습니다. 개구리들은 항상 우물 안에서 놀다가 가끔 벽을 타고 위로 올라가 보기도 하였지만, 캄캄한 구멍이나 불쑥 솟아나온 돌멩이를 중간에서 마주치면 오싹 겁이 나서 더 이상 위로 오르지 못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 내려오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페페는 늘 우물 꼭대기로 작게 보이는 하늘이 궁금하였답니다. 그래서 꼭 한번 우물 꼭대기까지 올라가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페페는 우물 안의 벽에 붙어 후미진 곳에서 쉬기도 하며 돌 틈을 비집고 벽을 기어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물 꼭대기 바로 아래에 튀어 나온 돌멩이에까지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페페는 크게 한 번 도약을 해서 위로 뛰어올랐습니다.
그런데 페페는 깜짝 놀랐어요. 예전에 보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너무도 밝아서 페페의 눈을 아프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태양이었습니다. 페페는 놀라서 바로 우물 안으로 황급하게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친구들에게로 되돌아가 소리쳤습니다.
“이봐 필라, 페트라, 푸투! 이리 좀 와 봐.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어.”
“페페, 왜 그래? 무슨 일인데?”
“페페, 너 어디 갔다가 오니? 뭐가 문젠데?”
필라와 페트라와 푸투가 뛰어오면서 물었습니다.
“내가 저 꼭대기까지 올라갔었어. 간신히……”
“무슨 소리야? 네가 혼자 어떻게?”
“그런데 저기서 아주 크고 눈부신 빛을 보았어!”
“정말로?”
필라와 페트라가 놀란 눈으로 다가섰습니다.
“그래. 그 빛나는 것을 보는 순간 나는 겁이 나서 눈을 감고 우물 안으로 뛰어 들어온 거야.”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믿기 어려운 걸?”
페트라가 말했습니다. 필라도 눈을 치켜뜨고는 손을 내둘렀습니다.
“페페, 그건 아니야. 네가 무얼 잘못 본 거지. 우린 여기서 한평생을 살았어. 여기서 우리는 저 꼭대기의 작고 둥그스름한 푸른 하늘만을 보아 왔어. 저것이 우리들 세계의 크기이자 진실이야. 너는 정말로 눈이 멀었구나.”
“그렇지만 내 말은 사실이야.”
페페는 계속 주장했습니다.
푸투는 아무 생각도 없다는 듯이 눈만 두리번거렸습니다. 페트라는 흥미가 없다는 듯이 진흙 웅덩이로 뛰어가 버렸고, 필라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페페는 친구들을 설득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친구들이 그 크고 환한 빛을 스스로 직접 보기 전에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필라, 너도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니? 제발 내 말을 믿어줘. 네가 직접 한번 저 꼭대기 위로 올라가보지 않을래? 저쪽 오른편 구석으로 돌아가서 돌 틈으로 기어오르면 불쑥 튀어 나온 돌멩이에 도달하게 될 거야. 그 돌멩이까지 오르는 것도 굉장한 힘이 들어. 그러나 그 돌멩이 위에 오르기만 하면 바깥세상을 보기가 쉽지. 거기서 펄쩍 한번 뛰어오르면 우물 바깥으로 나갈 수 있어. 만일 바깥으로 뛰어 나가지 못하고 우물 턱에 걸리면 너는 이 바닥으로 처박히게 될 거고. 자, 봐! 그런데 네가 그 곳에 도달하면 넌 내가 보았던 그 크고 환한 빛을 보게 될 거야! 참, 그 빛을 너무 오랫동안 쳐다보지 마. 네 눈이 상할 걸.”
페페는 흥분된 목소리로 설명했습니다.
“필라, 네가 그걸 보고 오면 페트라도 쉽게 내 말을 믿겠지.”
“그래, 좋아.”
필라가 대답했습니다.
“페페, 그건 너무 위험해. 제발 그만 둬.”
푸투는 겁을 잔뜩 먹고 있었습니다.
그날 오후, 필라는 페페의 말대로 하여도 해로울 게 없다고 결정했습니다. 팔다리 운동을 하고 목을 돌리고 무릎 운동을 하며 몸을 푼 후에, 필라는 벽을 기어올랐습니다. 우물 벽에는 여기저기 어둑한 구멍이 있고 미끈거렸지만, 그럭저럭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필라는 튀어 나온 돌멩이 위에 올라서서 크게 한 번 숨을 쉰 후, 힘껏 돌바닥을 박차고 위로 뛰어올랐어요. 그러나 우물 턱에 머리를 부딪치고는 돌멩이 위로 내리박히고 말았습니다. 필라는 머리통이 아팠지만 다시 한번 도전했습니다. ‘얏’ 하고 뛰어 올라 우물 턱을 간신히 손으로 잡았지만 몸이 다시 미끄러져 내렸습니다.
필라의 도전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 과정이한 시간이나 되풀이되었고, 필라는 상처투성이가 되었답니다. 어느덧 저녁이 되었습니다. 사방이 어둑해지면서 앞뒤를 분간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필라는 거의 자포자기의 상태였습니다. 정확한 거리를 가늠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무엇보다도 몹시 피곤했습니다. 필라는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곧 잠에 빠져버렸습니다.
필라가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습니다. 그런데 필라는 주위가 훤하게 밝아졌음을 알고 의아해 했습니다. 우물 위로 하늘이 훤하게 트여 있었습니다. 필라는 용기를 얻어 자세를 고쳐 앉고는 다시 몸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거리를 가늠하고, 약간 뒤로 움츠렸다가, 셋을 센 후에 뒷다리에 있는 힘을 다 주고 솟구쳐 뛰어 올랐습니다. 그리고 멋지게 우물 턱 위에 올라섰습니다.
“페페가 말했던 크고 빛나는 것이 뭐지?”
필라는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부드러우면서도 밝고 둥그런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필라는 몹시도 혼란스러워졌습니다.
“페페가 말한 것이 저건가? 눈이 멀 정도로 밝은 빛이랬는데. 저 빛은 너무도 부드럽고 곱잖아?”
필라는 달을 지긋이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둥그런 달빛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고 말았습니다. 한참 뒤에 필라는 사방을 두리번대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우물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필라가 돌아오자, 페페와 페트라와 푸투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필라에게 달려왔습니다.
“그래, 필라야. 너도 그 환하고 강렬한 빛을 봤지?”
페페가 흥분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아니야. 강렬하다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것은 부드러운 느낌이었어. 난 그 빛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니까.”
“뭐? 2초 이상 빛을 보면 눈이 멀고 만다구.”
“아냐. 그건 크고 둥글고 곱고 부드러웠어.”
“그래? 네가 뭔가 잘못 봤나보다. 그게 아닌데……”
페페가 필라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는 내가 알아.”
필라도 지지 않고 페페에게 말했습니다.
이때 페트라가 끼어들었습니다.
“그만들 해. 너희들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난 누구 이야기를 믿어야할지 모르겠어.”
페페는 머뭇거리고 있는 페트라에게 다가섰습니다. 페트라를 설득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페트라, 넌 내 말을 믿지? 내가 제일 먼저 저 꼭대기 위로 나가 보았잖니? 내가 개척자야. 필라는 저기까지 올라가는데 지쳐 쓰러졌었다고 하지 않았니?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하늘을 쳐다보아서 뭔가 혼동하고 있는 거야.”
페페의 말을 들은 페트라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곁에서 보고 있던 필라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냐, 페트라. 그렇지 않아. 내가 분명히 두 눈으로 보았어. 은은하게 빛을 내는 하늘의 둥근 것을 보았다니까. 넌 내 말을 믿어야 돼. 내가 페페보다 뒤에 올라가 보았으니, 내 생생한 경험이 맞지.”
필라가 힘주어 하는 말에 페트라는 둘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 페페와 필라는 서로 자기 말이 맞다고 야단이었습니다. 둘의 논쟁은 페트라가 질릴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페트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발 둘 다 이젠 그만해! 너희 둘 다 옳다.”
“아……”
“음……”
페페와 필라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을 더듬었습니다.
“아니면, 둘 다 잘못 생각하고 있을지 몰라.”
페트라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어. 우리 모두가 가서 확인해 보는 거. 우리 모두.”
페트라의 뜻밖의 제안에 둘은 손뼉을 쳤습니다.
“그래, 우리 모두 가보자. 우리 모두.”
“난 필라가 다칠까봐 내내 걱정만 했다. 나는 안 갈래. 너희들이 무얼 보았든지 그게 우리들의 삶과 무슨 상관이니?”
푸투는 그냥 진흙 웅덩이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페페가 약간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습니다.
“페트라, 너 정말 저기까지 가 보겠니? 너무 힘들어서 너는 못 올라 갈 거야.”
“난 할 수 있어.”
“좋아. 내 생각도 페트라는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봐. 푸투는 언제나 저런 식으로 빠지니까 그냥 내버려 둬. 페페, 우리 둘이서 페트라를 도우면 돼.”
필라가 페트라의 손을 잡았습니다.
개구리 세 마리는 다음날 푸투가 채 일어나기도 전에 이른 새벽부터 우물 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 예상했던 대로 페트라가 자꾸 뒤쳐졌습니다. 어려운 등반이었습니다. 방향을 잘못 잡기도 했으며, 이끼에 미끄러지기도 했습니다. 뱀이 옆을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되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페트라가 몇 번이나 돌 틈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바람에 필라와 페페가 페트라를 붙잡아 끌어 올려야 했습니다. 우물 꼭대기 바로 아래의 돌멩이 위에 이르기까지 거의 한나절을 보냈고, 돌멩이 위에서 우물 턱으로 뛰어 오르는 데에 힘을 다 쏟았습니다. 개구리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페트라가 마지막으로 우물 턱으로 뛰어 오르는 순간, 페페와 필라는 뛰어오르는 페트라의 손을 위에서 꽉 잡아 이끌었습니다. 드디어 페트라가 우물 턱 위로 올라왔습니다. 세 마리의 개구리들은 서로 힘을 합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때는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해가 서쪽 지평선 위로 넘어가면서 붉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개구리들은 이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았습니다. 페페와 필라는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페페는 이것이 자신이 전에 보았던, 따가운 빛이 눈부시게 비치던 물체와 똑같은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필라 역시 자신이 밤하늘에서 보았던 것보다 이 물체가 확실하게 더 밝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기 저게 너희들이 말한 것이니?”
페트라가 물었습니다.
“……”
페페와 필라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좀 더 기다려보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페트라가 제안했습니다. “좋은 생각이야.”
필라가 대답했습니다.
개구리 세 마리는 처음으로 일몰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광경은 정말로 장관이었습니다. 이 경험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하늘에 달과 별들이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개구리들은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개구리들은 밤을 꼬박 새우며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새벽이 되자, 빛나는 아침 해가 떠올랐습니다. 사방이 눈부시게 환해지고 나뭇잎들도 반짝거렸습니다. 필라, 페트라, 페페는 실눈을 뜨고 이 빛을 보았고, 점차로 빛에 익숙해지게 되었습니다. 개구리들은 점차로 서서히 새로 발견한 놀라움에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사방에 나무들과 풀이 우거져 있고, 꽃 위로 나비들이 날고 있었습니다. 페트라가 말했습니다.
“봤지? 너희들 둘이 한 말이 모두 맞네. 우리가 서로 도와 여기까지 올라오기를 잘했어. 이렇게 많은 것을 다 보게 되었으니. 푸투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개구리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우물보다 더 넓고 복잡한 새로운 세계가 무한하게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포고3 황상원
예로부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또는 누구에게나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인식의 내용’이라는 뜻을 지닌 진리 또는 그 것의 유사어인 진실을 추구해왔다. 조선의 철학자들은 이기와 심성을 논하는 ‘사단칠정논쟁’을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약 300년간이나 벌였으며 서양에서는 브루노를 비롯한 많은 철학ㆍ과학자들은 교회의 세계관을 부정하여 화형에 처해지면서도 과학적 진리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최근 다시 붉어지고 있는, 양국의 이해관계로만 비치는 한국과 일본 양국 간의 독도 영유권 분쟁을 지켜보면서 과연 진실이란 존재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워 한다. 또, 현대 물리학에 있어 위대한 업적으로 꼽히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발표 된지 100주년을 맞는 올해에도 ‘법칙’이 아닌 ‘이론’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과연 인간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하며 가치관의 혼란을 겪게 된다. 이런 혼란을 줄이고 진리를 추구했던 인류의 역사를 이해하고 그 가치를 깨닫기 위해서는 그것에 어떻게 도달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제시문 1>은 자신이 생각한 바에 따라 시냇물의 소리를 다르게 인식한 경험과 거친 물결이 이는 강을 밤에 건너면서 마음가짐을 다르게 하자 두려움 없이 건널 수 있었다는 경험이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작가는 사물의 인식은 주관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인식이 생활에서 부분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곳에 적용되어선 곤란하다. 이는 진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다수를 통제할 수 있는 강자의 자의적인 해석이 진리가 되고 그 진리는 그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에 그치는 현실을 긍정하는 꼴이 된다. 올바름이란 정의의 실현과 보편성을 전제로 하는 사회 통념상 모든 사물을 주관적으로만 인식하려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제시문 2>는 작은 우물에 살고 있는 개구리가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작은 우물은 개구리의 생활공간이자 인식의 한계이다. 페페는 남들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하늘에 의구심을 갖으며 성찰적 태도로 진리 탐구에 첫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그는 하늘에 떠 태양을 보게 되고 그 것을 태양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착각하고 부분적으로만 그치는 인식을 드러낸다. 그의 이야기는 태양을 직접 보지 못한 다른 개구리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다. 필라는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보기 위해 직접 태양을 보기 위해 떠나고 그 과정에선 많은 고통이 따른다. 이는 진리를 탐구하려 할 때 맞닥뜨리게 되는 사회적 편견 혹은 부정적인 선입견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이곳을 통과했던 페페는 필라에게 돌멩이까지 오르는 것은 힘들지만 일단 돌멩이 위에 오르기만 하면 바깥세상이 보기 쉽다고 충고해주는데, 이는 편견이나, 선입견을 잘 극복해 내면 진리에의 탐구가 수월해 질 수 있음을 말해준다. 뒤이은, 우물 턱에 걸리면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충고는 탐구자의 강한 도전 의식이 요구되며 진리를 추구 했던 이 도전자들이 사회적인 압력에 목숨까지 잃었던 역사적 사실을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고난을 모두 극복해 내고 필라는 달을 보게 되는데, 필라는 자기가 본 물체만이 진실이라고 여기며 그 역시 부분적으로만 인식하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필라와 페페는 진실로 상징되는 하늘에 떠있는 것의 실체에 대해 다툼을 버리고 상호 배타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도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올바른 인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남의 의견과 경험을 존중하는 개방성이 요구된다. 이들을 어리석다 여기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푸투는 결코 사물의 인식을 스스로 한정짓는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필라, 페페 그리고 페트라는 이번에 동시에 셋이 올라가 꾸준히 관찰한 결과 해가 뜬 관경, 해가 지는 관경, 달이 뜬 모습을 모두 지켜봄으로써 새로운 세계로의 인식을 넓히게 된다. 여기서 사물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이 필요하며 이는 경험을 통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물을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모습이 아닌 총체적으로 바로보아야만 그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J.로크는 그의 저서 인간 오성론에서 ‘어떠한 사람의 지식도 그 사람의 경험을 초월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경험이 동반되었을 때만 인식의 범위를 넓힐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결국 인간은 사물에 대한 의문을 갖는 것을 시작으로 그 사물에 대한 경험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게 된다. 그 경험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극복하고 그 경험 간의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경험이 개인의 것이 아닌 사회적인 것으로 보편성을 띠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비로써 진리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개포고3 김세환
현대 사회는 과거에 비해 거대해졌다. 개인의 기본권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다양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양한 삶은 곧 다양한 가치관의 존재를 의미한다. 좀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각 개인의 욕구는 집단, 개인간의 갈등을 유발한다. 다양한 삶이 존재하는 현대사회에서 그 갈등은 더욱 빈번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물론 갈등은 더 나은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필수적이며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갈등이 격화되어 동등한 위치에서 상호간의 의견을 존중하기보다는 단순히 우위적 위치를 차지하려는 독선적인 태도가 만연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정치적 우위를 점하려는 우리 나라의 정치계에서도 잘 나타난다.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고 상호보완적인 사회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인식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고 능력이 가능한 인간이지만 인식의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모든 감각을 통해 얻어진 경험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형성한다. 인간은 유아기부터 자신만의 세계와 가치관을 형성하게 된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미숙한 유아기에 그의 세계는 규모가 작고 자신이 태어난 환경과 비슷한 모습을 띠게 된다. 예를 들어 어부의 아들에게 '바다'란 존재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농부의 아들에게 '바다'의 존재는 뚜렷하지 않을뿐더러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처럼 제한적이고 소극적인 경험을 통해 형성된 초기의 세계는 성장과정에서 확대되기 시작한다. 인식의 도달범위가 확장되면서 이후의 수많은 경험들이 초기의 세계에 누적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삶이 전적으로 초기에 형성된 세계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은 아니다. 이후에 겪는 경험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확대함과 동시에 그 안에 존재하는 특정한 경험과 가치관의 중요도를 증가, 감소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확대시키는 원동력은 경험이다. 그리고 경험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은 인간의 감각이다. 헌데 경험을 인식하는 감각기관은 위에서 언급한 자신만의 세계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 기존의 자신만의 세계에 새로운 사물을 개입시키기 위해 인간은 사물 전체를 바라보기보다는 자신의 세계와의 동질성이나 차이점등을 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인간들 간의 인식 차이가 나타난다. 곧 두 사람이 같은 감각을 사용하여 같은 사물을 관찰한다 하여도 기존에 축적된 각자의 경험과 가치관에 의해 영향받기 때문에 똑같은 경험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외부적인 측면에서 인간은 인식 과정에서 시간적, 공간적으로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아 사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방해받을 수 있다. 사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해 사물을 충분히 경험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현대사회처럼 수많은 사물이 존재하고 급변하는 세상에서 위의 문제점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인식의 한계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위험한 독선적이고 개인주의적 태도를 유발하고 그 결과 현대사회의 혼란을 가져온 것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 구성원들의 더 많은 자발적인 경험을 통한 인식의 범위의 확대가 필수 적이다. 특정한 사물의 정확하고 다양한 속성을 인식함으로써 상대방과의 인식 차이를 줄이고 상호작용 해야 한다. 제시문의 이야기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야기 속에서 네 마리의 개구리가 사는 우물 안은 인간들이 개별적으로 창조해내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물 안의 벽은 인식의 한계를 의미한다. 푸투를 제외한 세 마리의 개구리는 자신들만의 세계를 확대시키려는 의지를 가지고 끝내 우물 안의 벽을 오른다. 여기서 푸투는 우물 안의 세계 이외에는 자신과 상관없다고 합리화시키는 소극적 인물이다. 자신만의 세계에 안주한 체 새로운 경험을 피하는 푸투에게 우물 안의 벽은 결코 오를 수 없는 장애물이 아닌 오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경험획득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발적인 경험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인식 때문에 페페와 필라 는 갈등을 형성한다. 실제로 서로 다른 사물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사물을 보았다는 인식의 오류 때문이다. 로크의 "어떠한 사람의 지식도 그 사람의 경험을 초월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주장했듯이 이야기 속에서 페페와 필라의 불완전한 인식은 인식 과정에서 사용된 감각 기관의 오류가 아닌 사물의 경험부족으로 인한 대상의 정보 결핍이 원인이다. 페트라와 함께 다시 바깥세상으로 올라가기 전까지 페페와 필라의 바깥 세상에 대한 정보는 각자가 유일하게 경험한 해와 달이 전부였고 때문에 서로 다른 광채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시 바깥 세상에 나와 그들은 하늘에 떠있는 광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하게 된다. 그 이유는 이전의 경험보다 더 많은 시간에 걸려 일정한 사물을 관찰하여 사물과의 접촉 빈도를 증가시킴으로써 풍부한 정보를 획득하여 사물의 단편적인 속성을 전체로 인식하는 오류에서 벗어 날수 있었다.
풍부한 경험을 통해 얻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사물의 다양한 측면을 인식하기에 힘쓴다면 서로를 존중하는 사회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올바른 인식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필수적이다. 확대된 세계 속에서 인간은 폭넓은 자아성찰, 자아실현의 방법과 여러 가지 감정 등을 획득하여 그의 세계는 더욱 풍요로워 지기 때문이다. 행복만이 존재하는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인간에게 현실은 너무나도 가혹할 것이고 철저하게 불행한 세계를 지닌 인간에게 현실은 고통의 연속일 뿐이다. 행복과 불행이 공존하는 세계에서만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그것은 현실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화외고3 강슬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로부터 합리주의 철학자인 데카르트는 모든 존재인식을 이끌어 내려고 하였다. 그는, 학문에서 확실한 기초를 세우려고 하면 적어도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것은 모두 의심해 보아야 하는데, 세계의 모든 것의 존재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치더라도 이런 생각(의심)을 하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 할 수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명제에서 말하는 사유와 존재는 물질적이고 유기적인 신체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영혼적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아직 어떠한 방법으로 작용하는지도 모르는 미지의 메커니즘을 ‘사유’로 지칭하고, 이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은 지극히 추상적이고 모순적인 일이 아닐까. 지식이나 진리를 습득하는 논리 혹은 방법론, 그것을 우리는 인식론이라고 한다. 인간은 수용하는 지식의 크기와 중요도와는 상관 없이 모든 지식을, 그의 사고를 최대한으로 확장한 범위 안에서 받아들인다. 즉, 이것은 결코 일면적인 고찰이 아닌, 다각적이고도 고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종합적인 수용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인식 면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보다 올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인식에의 과정에서 인간은 크게 세 가지 방법에 의존한다. 첫째, 자신의 현실적 바탕인 경험을 중시하여 사물을 인식하는 것으로 경험론이 있다. 경험론을 대표하는 사상가로서 J. 로크는 <인간 오성론>에서 <i>‘어떠한 사람의 지식도 그 사람의 경험을 초월하는 것은 아니다.’</i>라고 언급하여 경험이 인간의 인식 안에서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이에 대한 뒷받침으로, <i>제시문 1</i>에서처럼 박지원은 하루 밤 사이에 강을 아홉 번 건넌 이야기(일야구도하기)에서 인간의 눈과 귀와 같은 경험적 감각 기능이 인식의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 지 잘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경험적 측면에서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을 이성 기타의 초경험적 계기에서 구하는 이성론의 방향으로 몰고 갔다. 즉, 모든 것은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른 것이라고 하며 이성적인 측면에서 개인의 경험과 그 경험적 감각 기능이 외부 환경에 대해 객관성과 가치 중립성을 갖도록 한 것이다. 이를 통틀어 보았을 때, 박지원은 경험만을 중시한 것도 아니고 이성만을 내세운 것도 아닌, 이성을 바탕으로 경험을 객관화하여 외부 사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도모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보다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경험과 이성을 넘어 그 인식에 대한 의지가 필요하다. 그 의지란 바로 자신이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며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한 의심이며 그것을 밝혀내는 힘이다. 우리는 흔히 자기 자신만의 인식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우물 안 개구리’라고 칭한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그 틀 외부에 대한 의심과 그 틀을 넘고자 하는 의지이다. <i>제시문 2</i>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4마리의 개구리를 통해 인식에 도달하는 또 하나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새로운 인식(외부 세계)을 찾아가는 과정을 간추려 보자면, 현실에 대한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작용함으로써 수많은 도전과 고난을 거쳐 인식에 도달한다. 그 과정에서, 비록 직접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알고자 하는 의지를 지니고 도전하는 자는 인식에 도달하는 데에 반해, 현실에 안주하여 아무런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 자는 인식에 실패하게 된다. 홍대용은 <담헌집>에서 이런 말을 했다. ‘큰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큰 깨달음이 없다. 의심 나는 것을 쌓아놓고 모호하게 두는 것은 캐 묻고 따지는 것만 못하다.’이를 통하여 우리는 그 만큼 어떤 사물이나 지식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가 인간의 올바른 인식에의 도달에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올바른 인식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크게 세가지로 구분되는 방법(경험과 이성과 의지)을 수용하여 인식에 도달한다. 그러나 경험론은 개인마다의 상대성으로 인해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로 흐르기 쉬우며, 논리나 수학 등의 필연성 마저 심리주의로 오해하기 쉽다. 그와 반대로, 이성론은 검증 불가능한 영역의 사고나 가정으로 변하기 쉽다. 인간의 의지 역시 같은 맥락에서 구체적이고 특수한 목적성을 띠지 않는 이상 추상적이고 상대성이 보다 짙은 개념이다. 칸트는 경험을 인식의 발생과 성립의 근거라고 인정하면서도 직관이나 오성 등의 선천적 형식에서 학문적 인식의 보편타당성의 근거를 구하며 경험론과 이성론의 종합을 시도하였다. 주어진 다양성은 외적인 경험으로부터 부여되지만 그것은 주관의 형식에 의해 통일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 요구되는 능력은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이 세 가지 과정(경험, 이성, 의지)의 통합적인 조화이다.
선일여고3 최고은
천만리에 고은님 여희옵고 냇가에 앉았더니 져물도 내마음과 같아서 울며 밤길 가는 구나'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않는가 우리도 그치지 말고 만고상청 하리라'
라는 두편의 시조가 있다. 첫 번째 시조에서 화자가 바라보는 물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닌 화자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내면의 정서를 더욱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반면에 두 번째 시조에서의 물은 그 자체의 속성을 통해 교훈을 주는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이 두편의 시조에서 볼수 있듯이 그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있고 어떠한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서 동일한 사물이 다르게 인식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제시문 1에서 강물소리를 자신의 마음상태에 따라 다르게 인식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세계를 얼마나 주관적으로 바라보느냐와 연결된다.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해석뿐이다.'라는 니체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사물의 인식은 정해져 있는 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의 주관적 해석에 결부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느 정도의 이성을 부여 받기 때문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처음에 인식의 바탕이 되는 것은 감각적 지각능력이다. 하지만 감각적 지각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인식의 방법은 인식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어서 필연적으로 인식의 한계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갓난아이가 누워서보는 방안의 사물들을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듯이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 그 이상을 뛰어 넘지 못하는 것이다. 제시문 2의 개구리들도 우물에서 보이는 좁은 하늘을 전부라 여기며 살아 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단조로웠으며 많은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페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의심들을 모호하게 쌓아두지 않고 우물이라는 인식의 장애물을 뛰어넘어 새로운 인식의 경험을 하게 된다. 만약 페페가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에 안주해서 인식의 확장에 대한 의지 없이 살았다면 평생 우물안 개구리 신세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결국, 새로운 세계를 인식하는 데는 항상 자신의 인식의 범위를 뛰어넘어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자 하는 자발적 의지와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한 노력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한걸음 더 도약하기 위한 인식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사물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오로지 하나의 진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세계에서는 인식의 관점에 대한 끊임없는 논의가 이루어진다. 그러한 논의들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지금 현재 많은 문화나 사상의 토대를 이루웠고, 논의들을 좁혀나가는 가운데 다원성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제시문 2에서 세 마리의 개구리들은 하늘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관찰하고 있는 세계의 특성에 있다. 그들이 보는 하늘은 언제 어느 때나 볼 수 있는 동일한 형태와 모습이 아니라 관찰자의 위치와 관찰하는 시간에 따라 변화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세계도 변화와 모순을 함께 포함하는 총체적인 것이다. '진리를 발견하는 것보다도 오류를 인식하는 편이 훨씬 쉽다. 진리를 깊은 곳에 숨겨져 있으므로 그것을 탐구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처럼 변화무쌍한 사회속에서 하나의 진리를 도출해 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3명의 개구리가 노력과 경험을 통해 비교적 근접한 진리를 찾아 냈듯이, 실재세계에 존재하는 인간도 많은 경험을 통해 사물의 올바른 인식에 도달 할 수 있을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도 인식의 범위를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노력들이 필요하다. '어떠한 사람의 지식도 그 사람의 경험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로크의 말처럼 그 사물에 대한 많은 경험을 통해 그 본질이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며 그속에서 비교적 올바른 진리를 찾아내기 위해 많은 의견조율을 거쳐야만 한다. 하지만 그 과정속에서 전적으로 주관적인 관점, 객관적인 관점이 요구되어서는 안된다. 주관적인 관점만 고집하다 보면 전반적인 진리를 파악하지 못한 채 편협한 자기의 논리에 빠질 수가 있고, 객관적인 관점만 강조하다 보면 사물의 인식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막을 수 있다. 부분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들을 하나의 체계로 구성하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주관적인 사물의 인식방법을 완성해 나가는 일이 우리가 도달해야할 진정한 목표일 것이다.
인식론 개포고3 이상목
‘물어보는 것은 잠깐의 부끄러움이지만 모르는 것은 평생의 부끄러움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인간에게 무엇을 안다는 것은 중요하다는 뜻이다. 인간은 왜 알려고 하는가? 앎이란 인간이 세상을 보는 시각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넓으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설계할 수 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제시문 1에서 주인공은 외물에 휘둘리는 것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사물의 본질은 결국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 제시문에서 사람들은 물이 보이는 낮에는 건널 엄두를 내지 못하다 정작 밤이 되어서는 어렵지 않게 강을 건넌다. 위협적으로 보이는 강물과 소리는 강의 겉모습일 뿐 본질은 결코 아니다. 강물을 건너는 주체인 사람이 두렵게 생각하면 강이 험해 보이는 것이고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면 강 역시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주인공이 말하는 바를 확장시키면 결국 중요한 것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판단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올바른 판단력을 갖자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우선이다. 자신을 알지 못하고 내린 판단이 과연 얼마나 가치가 있을 것인가. 먼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안 뒤에 사물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래야만이 외물에 현혹되지 않는 정확한 판단력을 얻을 수 있다.
주인공의 의견은 여러 측면에서 타당한 의견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처럼 인식하는 주체가 마음먹기에 따라 전혀 상반되는 방향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잘 알려진 예로 원효 스님이 해골에 든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잠결에 물을 맛있게 마셨는데 다음날 알고 보니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는 것이다. 비단 원효 스님 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이와 같은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예컨대 실직을 당한다고 하면 누군가에게는 인생이 끝난 것과 같은 절망적인 사건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제 2의 인생을 설계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세상이란 인식하기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다가온다. 일어난 현상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겠지만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제시문 2는 말 그대로 우물 안 개구리의 인식을 말하고 있다. 대상의 본질을 가려내는 것은 사람의 판단이지만 여기에는 반드시 한 가지 전제가 따라온다. 본질을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보고 경험해야 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지 않던가. 아무리 듣고 생각해봐야 올바른 인식에는 다가갈 수가 없다. 제시문에서도 페페와 필라는 페트라에게 우물 바깥의 세상을 열심히 설명하지만 페트라는 알아듣지 못한다. 그리고는 우물 위로 직접 올라가서야 세상을 깨닫는다. 세상을 좁게 보는 사람에게는 세상 자체가 좁아 보인다. 하늘이 우물 크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개구리들처럼 말이다.
한 편 페페와 필라는 사물의 외면만을 보고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경우이다. 페페가 본 태양이나 필라가 본 달 둘 다 우물 밖의 세상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들은 그때까지 우물 바깥의 세상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에 본질을 파악할 수 없었다. 마지막에 세 개구리들이 본 석양과 달과 태양은 의미상으로는 좀 더 본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역시 사물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경험이 필요하다. 경험을 통한 이 인식을 바탕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얻을 수 있다.
두 개의 제시문을 결합하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인식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답을 얻을 수 있다. 인식의 가장 처음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자신이 구하고자 하는 진리가 어떤 것인지, 자신이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직접적인 경험이다. 세상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물 밖으로 나가야 하고,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강에 가야 하듯 말이다. 그리고 알고자하는 대상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해야 한다.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도 경험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본질이란 인식하는 주체의 판단으로 바뀔 수도 있다. 한 가지 현상에 절대적인 본질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로크는 ‘어떠한 사람의 지식도 그 사람의 경험을 초월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알기 위해서는 먼저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인식을 위한 첫걸음이 풍부한 경험에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