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인종주의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학업 성적의 차이가 사회적 차별을 낳는 것을 ‘지적 인종주의’라면서 강하게 비판한 사람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였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지적 인종주의자’들이다. 인종주의자들이 인종에 따른 차별을 당연히 여기듯이, 우리는 학교 성적이 사회적 차별을 가져오는 것을 아주 당연히 받아들인다. 우리에게 내면화된 ‘지적 인종주의’는 미성년자들에게 ‘너는 1등급’이고 ‘너는 9등급’이라고 등급을 매기는 행위도 마다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했다. 야만의 교육은 야만의 사회를 낳는다.
‘지적 인종주의’ 사회에서 쌍둥이 자매 여고생이 나란히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은 일단짜리 기삿거리도 되기 어렵다. 불감증도 이미 중증에 이른 것이다. 부모 자식 관계가 부모가 가진 재산과 비례한다는 뉴스도 이젠 놀랍지 않다. 철저히 서열화된 대학 졸업장의 효용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는 전적으로 부모 능력에 따른다. 주택 보유 능력처럼 교육자본도 부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에서 자식은 부모 재산이 가진 힘에 민감히 반응하도록 일찍부터 학습된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자식과 부모 사이의 생명에 관한 그 무궁한 의미와 찬가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부모와 자식으로 맺어져 인생의 여정을 함께하며 인간과 자연을 알아가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우쳐 나가는 관계는 돈의 위력 앞에서 왜곡되었고, 일그러진 교육제도가 주는 불안과 공포 앞에서 한낱 초라한 시 구절에 불과한 것이 돼 버린 지 오래기 때문이다.

‘지적 인종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오로지 등급과 등수를 매기는 데서만 의미가 있고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진다. 가령 한국의 교육현장에서 80/100점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점수가 몇 등이고 몇 등급인가만 중요하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교육이 교육이 아님을 알아야 하지만 지적 인종주의자들의 눈에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학교 교실과 학원 강의실이라는 좁은 공간에 갇혀 있을 뿐만 아니라 학습 영역도 지극히 좁다. 주어진 영역, 닫힌 영역에서 등수와 등급 경쟁을 하기에 끊임없이 선행 학습, 반복 학습을 거듭하면서 그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도록 학습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고전 한 권 제대로 읽지 못하게 되는 배경이다.

더욱이 인문사회과학은 본디 정답이 없다. 정답이 없는 학문임에도 등급과 등수를 매겨야 하므로 학습 내용은 단답형, 객관식으로 평가할 수 있는 영역에 머문다.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갖추게 하지 않는 대신, 단순 암기와 문제풀이 능력만 묻고 그 결과에 따른 사회적 차별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지배자든 피지배자든 인간을 이해하는 눈이나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뜨지 못한 채 지배하고 지배당한다. 사회적 책임이 없는 지배와 그에 대한 자발적 복종이 관철된다. 한국노총 조합원들이 반노동자적인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단순 암기와 문제풀이로 등급, 등수를 매기는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학력 차별과 지적 인종주의를 어느 시대에나 있는 보편적 사회현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누군가 지적했듯이, 주어진 사회공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은 지배계급이 우리에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보다도 훨씬 넓고 다양하다. 등급제 문제로 말이 많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안의 절망과 체념을 내던지는 일이다. 대학 평준화에 대한 적극적 상상력은 지적 인종주의에서 벗어나게 하는 촉매제가 될 것이다.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한겨레 신문 2007년 12월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