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샘 나눔터
- 이라크 추가파병결정 철회를 요구하는 인권단체 호소문
이라크에 우리가 보내야 할 것은 군대가 아니라 평화입니다.
어제의 우리는 이 비극의 방관자였으나 오늘은 공범이 되었습니다 !!!
파병에 대한 찬반을 떠나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무사귀환을 염원했던 김선일씨의 충격적인 피살소식이 전해진 후 일주일이 흘렀습니다. 비단 유족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그 기간은 무척이나 길고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광화문에서는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파병철회를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이어지고, 일부 언론은 ‘응징’과 ‘척결’, ‘보복’과 같은 날선 단어들로 파병방침불변과 강경대응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이라크 사태는 비정규전 형태로 악화되어가고 테러의 표적이 이제 미국에서 우리에게로, 일본과 스페인에서 터키 등으로,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라크 내부의 거센 저항으로 주권이양이 며칠 앞당겼다지만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에는 역부족임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입장을 표명하고 주장하기에 앞서, 어느 새 이 전쟁의 피해자가 되어버린 고인의 유족들앞에, 학살과 인권유린이 일상화된 현장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이라크 국민들 앞에 뼈아픈 뉘우침으로 머리를 숙입니다.
아무리 부인한다고 해도, 우리는 김선일씨 피살의 방관자였으며 이라크 침략 전쟁에 가담한 국가의 일원인 까닭입니다. 우리는 어느 덧 전범국의 국민이 되고 말았습니다.
평화와 인권은 이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단지 저들의 바람일 뿐입니다
김선일씨 피랍사건이 전해지자마자 나온 정부의 단호한 ‘파병방침 불가’ 입장에서 야만의 시대, 국가주의와 전체주의의 그림자를 엿보게 됩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국제사회의 약속’ 앞에 한 개인의 위기에 처한 생명은 어떤 변수도, 고려의 대상조차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외치는 평화와 인권이 그들에게는 한낱 휴지조각에 다름이 아님을 절감했습니다.
그러나 자고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는 은폐의혹들에 분노하면서, 이 사건의 진상규명이 정부 몇몇 부처의 책임소재를 밝히고 그 경중을 따지는 것으로 봉합될 때 고인의 희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지며 제2, 제3의 불행이 초래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우리는 다시금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통해 인류가 인권의 가치가 확인하였듯, 우리는 근현대사의 질곡속에서 이름도 없이 숨져간 죽음을 통해 이 땅에 민주주의가 도래했고 인권의 가치가 확립되었음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배워왔던 역사이며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철학과 윤리인 것입니다. 혹여 지난해 미선이 효순이 추모 촛불집회는 단지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민족감정에 지나지 않았다면, 탄핵 사태 이후 우리가 지키고자 목이 쉬게 외쳤던 민주주의가 선거용 구호에 불과했다면 우리는 과연 이제 무엇에 분노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까.
어떤 이들은 평화니 인권이니 하는 것은 이상에 불과할 뿐이요, 선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앵무새처럼 ‘국익’과 ‘현실’을 되풀이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지금도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라크의 현실 앞에서 전혀 변화할 줄 모르는 국익론과 현실론이 바로 허위의식이자 관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테러가 일어나면 그 근본원인은 도외시한 채 이 기회에 테러방지법이나 만들겠다는 그들의 탁상공론에 우리는 할 말을 잊게 됩니다.
용기로 포장된 비겁함과 지혜로운 듯 보이는 기회주의는 결코 해답을 주지 못 합니다
누구는 명분과 실리를 논하고 있습니다. 모든 전쟁에 명분이란 없었다며 파병 철회를 철부지의 주장으로 치부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미관계의 불이익을 거론하며, 제2의 IMF를 각오해야 한다며 들이대는 저들의 ‘실리론’에서 병자호란 전후 명나라 보은을 내세웠던 사대주의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들이 말하는 ‘국익’이 일제말기 ‘내선일체’만이 조선의 이익이라 주장하던 이들의 논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에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과거 민주주의를 요구하면 분단의 특수성을 들이밀고, 평화를 이야기하면 북한의 위협을 들먹이며, 반인륜적 인권탄압을 자행하던 독재정권을 우리는 온 국민적 저항을 통해 종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익’과 ‘현실’을 주장하며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시기상조다, 이상론이다 몰아붙이는 이들의 그림자에서 독재자의 모습을 너무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리 그럴 듯한 논거를 댄대도 비겁함은 용기가 될 수 없습니다. 테러에 굴복하면 안 된다며 ‘보복’과 '응징‘을 주장하다가도 파병철회는 곧 한미관계의 불이익이라 단정하면서 추가파병을 주장하는 저들의 행태는 강한 자에게 한없이 약하고 약한 자에게 한없이 강한, 거짓과 기만을 일삼는 권력 비겁한 속성입니다. 기회주의는 결코 지혜가 아닙니다. ‘현실론’을 내세우며 파병방침 불변을 주장하는 것은 변화무쌍한 국제관계에서 비현실의 세계, 자기모순의 악순환에 들어서는 첫걸음입니다.
당신의 양심에 목소리에 귀 기우리길 호소합니다
더 이상의 침묵은 이 부당한 전쟁범죄에 공범이 되고, 더 깊이 연루되어 감을 의미합니다. 오직 양심에 귀 기울이는 것만이 평화를 담보합니다. 우리가 이라크에 보내야 할 것은 군대가 아니라 평화의 염원과 인권의 회복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 만들어가고 있는 세상은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사는 세상, 차별을 하지도 당하지도 않으며, 커다란 이익에 목매지 않더라도 하루하루를 평화롭게 살며,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은 더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가 실현 가능한 세상인 까닭입니다.
저들의 국익에는 바로 이 모든 것이 빠져있습니다.
이라크에 우리가 보내야 할 것은 군대가 아니라 평화입니다.
어제의 우리는 이 비극의 방관자였으나 오늘은 공범이 되었습니다 !!!
파병에 대한 찬반을 떠나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무사귀환을 염원했던 김선일씨의 충격적인 피살소식이 전해진 후 일주일이 흘렀습니다. 비단 유족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그 기간은 무척이나 길고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광화문에서는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파병철회를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이어지고, 일부 언론은 ‘응징’과 ‘척결’, ‘보복’과 같은 날선 단어들로 파병방침불변과 강경대응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이라크 사태는 비정규전 형태로 악화되어가고 테러의 표적이 이제 미국에서 우리에게로, 일본과 스페인에서 터키 등으로,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라크 내부의 거센 저항으로 주권이양이 며칠 앞당겼다지만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에는 역부족임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입장을 표명하고 주장하기에 앞서, 어느 새 이 전쟁의 피해자가 되어버린 고인의 유족들앞에, 학살과 인권유린이 일상화된 현장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이라크 국민들 앞에 뼈아픈 뉘우침으로 머리를 숙입니다.
아무리 부인한다고 해도, 우리는 김선일씨 피살의 방관자였으며 이라크 침략 전쟁에 가담한 국가의 일원인 까닭입니다. 우리는 어느 덧 전범국의 국민이 되고 말았습니다.
평화와 인권은 이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단지 저들의 바람일 뿐입니다
김선일씨 피랍사건이 전해지자마자 나온 정부의 단호한 ‘파병방침 불가’ 입장에서 야만의 시대, 국가주의와 전체주의의 그림자를 엿보게 됩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국제사회의 약속’ 앞에 한 개인의 위기에 처한 생명은 어떤 변수도, 고려의 대상조차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외치는 평화와 인권이 그들에게는 한낱 휴지조각에 다름이 아님을 절감했습니다.
그러나 자고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는 은폐의혹들에 분노하면서, 이 사건의 진상규명이 정부 몇몇 부처의 책임소재를 밝히고 그 경중을 따지는 것으로 봉합될 때 고인의 희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지며 제2, 제3의 불행이 초래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우리는 다시금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통해 인류가 인권의 가치가 확인하였듯, 우리는 근현대사의 질곡속에서 이름도 없이 숨져간 죽음을 통해 이 땅에 민주주의가 도래했고 인권의 가치가 확립되었음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배워왔던 역사이며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철학과 윤리인 것입니다. 혹여 지난해 미선이 효순이 추모 촛불집회는 단지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민족감정에 지나지 않았다면, 탄핵 사태 이후 우리가 지키고자 목이 쉬게 외쳤던 민주주의가 선거용 구호에 불과했다면 우리는 과연 이제 무엇에 분노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까.
어떤 이들은 평화니 인권이니 하는 것은 이상에 불과할 뿐이요, 선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앵무새처럼 ‘국익’과 ‘현실’을 되풀이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지금도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라크의 현실 앞에서 전혀 변화할 줄 모르는 국익론과 현실론이 바로 허위의식이자 관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테러가 일어나면 그 근본원인은 도외시한 채 이 기회에 테러방지법이나 만들겠다는 그들의 탁상공론에 우리는 할 말을 잊게 됩니다.
용기로 포장된 비겁함과 지혜로운 듯 보이는 기회주의는 결코 해답을 주지 못 합니다
누구는 명분과 실리를 논하고 있습니다. 모든 전쟁에 명분이란 없었다며 파병 철회를 철부지의 주장으로 치부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미관계의 불이익을 거론하며, 제2의 IMF를 각오해야 한다며 들이대는 저들의 ‘실리론’에서 병자호란 전후 명나라 보은을 내세웠던 사대주의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들이 말하는 ‘국익’이 일제말기 ‘내선일체’만이 조선의 이익이라 주장하던 이들의 논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에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과거 민주주의를 요구하면 분단의 특수성을 들이밀고, 평화를 이야기하면 북한의 위협을 들먹이며, 반인륜적 인권탄압을 자행하던 독재정권을 우리는 온 국민적 저항을 통해 종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익’과 ‘현실’을 주장하며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시기상조다, 이상론이다 몰아붙이는 이들의 그림자에서 독재자의 모습을 너무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리 그럴 듯한 논거를 댄대도 비겁함은 용기가 될 수 없습니다. 테러에 굴복하면 안 된다며 ‘보복’과 '응징‘을 주장하다가도 파병철회는 곧 한미관계의 불이익이라 단정하면서 추가파병을 주장하는 저들의 행태는 강한 자에게 한없이 약하고 약한 자에게 한없이 강한, 거짓과 기만을 일삼는 권력 비겁한 속성입니다. 기회주의는 결코 지혜가 아닙니다. ‘현실론’을 내세우며 파병방침 불변을 주장하는 것은 변화무쌍한 국제관계에서 비현실의 세계, 자기모순의 악순환에 들어서는 첫걸음입니다.
당신의 양심에 목소리에 귀 기우리길 호소합니다
더 이상의 침묵은 이 부당한 전쟁범죄에 공범이 되고, 더 깊이 연루되어 감을 의미합니다. 오직 양심에 귀 기울이는 것만이 평화를 담보합니다. 우리가 이라크에 보내야 할 것은 군대가 아니라 평화의 염원과 인권의 회복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 만들어가고 있는 세상은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사는 세상, 차별을 하지도 당하지도 않으며, 커다란 이익에 목매지 않더라도 하루하루를 평화롭게 살며,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은 더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가 실현 가능한 세상인 까닭입니다.
저들의 국익에는 바로 이 모든 것이 빠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