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읽어보시고 평가해주세요 ^--^


금강산에 다녀와서
양재고등학교 2학년 김수진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비하구나
철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금강산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때부터 부르던 노래였다. 우연히 정부 지원으로 주어진 기회로 꿈에서만 그려오던 금강산을 가게 되었을 때는 너무도 기쁜 마음에 노래가 절로 나왔다. 방학이 되고 나서도 금강산 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1월 30일 출발일 아침. 6시 반에 일어났다. 방학이라 늦잠을 생활화하고 있던 나에게는 무척이나 이른 시간이었다.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앞으로 며칠 간 강추위가 계속 될 것이라는 날씨 안내와 창밖에서 윙윙거리는 불청객은 간밤에도 잠을 설치게 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올라탄 버스에는 북한으로 간다는 긴장감과 기대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얼마 전, 신문에서 ‘민족 화해, 협력의 상징-개성 공단’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남쪽의 자본과 기술, 북쪽의 노동과 토지가 결합한 개성공단 사업으로 남북이 화해 협력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기사였다. 만약 개성 공단이 제대로 운영되어 우리나라의 기업들이 중국이나 동남아로 나가는 대신 개성에 투자한다면 국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남북 화해의 노력들이 우리 민족 사이를 가로막아온 50년간의 세월을 이기고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로 가는 여정에서 역사적인 이정표가 되기를 바라면서 오랫동안 손꼽아 오던 북녘의 땅을 밟게 되는 날이 오늘이라니 하는 설레임 반, 혹시나 북한 땅에서 미아가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두려움 반으로 2박 3일간의 여행길에 올랐다.
1시, 강원도 고성 금강산 콘도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2시간 정도를 더 가니 남측 출입사무소에 도착하였다. 절차는 외국에 나갈 때와 거의 같았다.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출국 신고서를 작성할 때는 마음이 아팠다. 남쪽에서 요구하는 복잡한 절차와 북쪽에서 요구하는 복잡한 절차를 모두 거친 후에야 북쪽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나 보았던 북측 군인들이 양팔을 앞뒤로 휘저으며 인원을 검사하러 버스 위에 올라탔을 때는 순간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텔레비전에서 볼 때는 꼭 다른 사람 같던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언어로 우리와 같은 얼굴로 인원을 확인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왜 헤어져있어야 하는지 무엇이 나를 북측 사람들에 대한 이질감을 갖게 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2박 3일간의 여행을 안내해 줄 조장 언니도 만나고 자연을 훼손하지 말 것, 사진 촬영은 허용하는 곳에서만 할 것, 말을 조심해서 할 것, 관광증을 항상 목에 걸고 잘 간수할 것 등 여러 주의 사항도 들었다. 몇몇은 우리가 엄격한 규제를 받는 것들이었지만 사상과 이념이 다른 곳이니 이 정도는 어쩔 수 있겠는가.
조장 언니의 안내에 따라 갈아 탄 금강산 관광버스는 금강산 관광버스 전용 도로만을 이용하는데, 이 도로는 장전항에서 온정리까지의 10km정도의 구간이고, 현대 측이 자본을 제공하고 북측 사람들의 손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통일의 도로라고 불렀다. 길 옆쪽으로 보이는 철로는 지금 보수중이고 곧 철로를 통해 여행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으니 언젠가 보았던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표지판이 생각났다. 이제 철마는 곧 달리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해로로 그리고 육로로 이제는 철로로 발전해 나가는 금강산 여행 과정을 생각하며 통일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마음에 뿌듯했다. 또 이 철로가 한반도를 거쳐 대륙으로 바로 달려 중국, 러시아를 지나 유럽까지 연결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렜다.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도 길 위에서 4시간 반을 보내고, 출입 절차를 밟는데 2시간이 넘게 걸려서 내가 묵을 온천장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첫째 날 일정은 이로써 끝이었다. 저녁 식사 후 숙소에 짐을 정리하고 내일을 위해 좁디좁은 잠자리로 몸을 던졌다.    
31일 둘째 날. 아침 식사에 대한 말을 못 들어서 식사도 하지 못하고 바쁘게 구룡연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금강산은 다우지라 얼마 전에 거의 내 키만큼 눈이 와서 아이젠 없이는 등산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정말 등산로는 어느 정도는 제설 작업이 되어있었지만 남아있던 눈이 등산객의 발에 다지고 다져져서 거의 얼음판이 되어 있었다. 개미 걸음으로 등산을 시작해서 금강산 입구의 철다리를 지나자 목란관이라는 식당이 있었는데 운영은 하지 않고 있었고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등산로는 다시 산 속으로 접어들었고, 눈 덮인 나뭇잎 사이로는 늠름한 바위연봉들이 멀게 때로는 가깝게 나타나고 있었다. 바위들의 모습은 기묘했다. 나는 산을 오르고 내릴 적마다 자꾸만 앞뒤를 살펴보면서 내가 걸어갈 길과 걸어온 길을 모두 품에 안고 기억 속에 담고 싶었다. 금강산의 명칭은 참으로 다양하다. 산의 모습이 다양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가져서가 아닐까? 뼈가 드러난다는 뜻의 개골산이란 이름처럼 겨울의 금강산은 바위가 그대로 드러나고 그 위에 눈이 쌓이면서 겨울만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은 '금강산의 아름다움은 세계 어느 명산의 아름다움을 초월하고 있다. 대협곡은 너무나도 황홀하여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이다.'고 했다. 정말 눈앞에 펼쳐진 웅장한 금강산의 절경은 마치 신선의 세계에 여행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눈이 없었다면 험한 등산로는 아닐 것 같았지만 길이 너무 미끄러워서 상팔담 정상에 까지 오르지는 못하고 구룡폭포까지 갔다. 폭포는 얼어붙어 있었는데 언 물길을 보고 있으니 세차게 떨어지는 폭포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얼핏얼핏 비로봉도 보였다. ‘비로봉까지는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기에 그만 여기서 내려가는 것이 괴이한 일이 아니다.’라고 한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송강 정철은 비로봉의 높음을 공자의 도의 경지에 비유하여, 성인의 도를 따라갈 수 없음을 비로봉에 오르지 못함에 비유하여 말했지만, 만약 북측에서 비로봉을 관광 코스로 개방해 준다면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여 꼭 한 번 올라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산을 오르는 내내 버려진 휴지 한 조각도 볼 수 없었다. 자연 그대로였다. 금강산에는 금을 비롯하여 많은 광물자원이 매장되어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측 안내인은 ‘김일성 주석이 금강산을 보존하기 위해 금광의 개발을 금지시켰다’고 전한다. 남한이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백두대간을 마구 파헤치는 것과는 좋은 비교가 되었다.
산행을 마치고 나니 바람과 씨름하고, 엉덩방아를 여러 번 찧어서 그런지 온몸이 피로했다. 온 정각 휴게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신계사에 들렀다.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된 신계사는 6.25때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신계사를 복원하는 것은 하나하나 회복되어 나가는 한반도의 상처이고 역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완공되지 않긴 했지만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는 부처님을 보며 하루 빨리 이곳을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기를 염원했다.    
온정각 휴게소에서 식사를 마친 후에는 이산가족 상봉의 현장을 느낄 수 있는 글들을 볼 수 있었다. ‘댕기머리를 따고 오빠를 졸졸 쫓아다닌 지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늙어서 만나다니’, ‘곧 통일이 된다 해도 90세가 넘으신 어머니는 다시 보기 힘들 것 같다.’는 이산가족들의 글을 보면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던 이산가족의 슬픔이 피부로 와 닿았다. 바다를 건너는 것도 아니고 산을 넘어야하는 것도 아닌 그냥 선 하나만 넘으면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던 50여년을 기다려온 가족을 만날 수 있는데. 50여년의 긴 세월도 서로의 상처를 보다듬어 주기에는 모자란 시간이라니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점심 식사 후에는 온정각 휴게소를 둘러보고 통일 교육을 받았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할 길을 50년 만에 열었으니 현대 아산은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다. 통일 교육 후에는 잠시 쉬다가 6시 반부터 평양 교예단 공연을 보았다. 공연 내내 주먹을 꽉 쥐고 펼 수가 없었다.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아슬아슬한 묘기의 연속이었다. 이 공연의 기본기만 익히는 데에도 10년이 걸린다고 한다. 10년의 연수 과정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공연의 기초를 익힐 수 있는 것이다. 한 손으로 붙잡은 끈 아래 여러 명이 매달리고 또 매달려서 생명을 끈 하나에 매달고 있다니 아름답기도 했지만 가슴을 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조장에게 들은 이야기이지만 이런 공연은 모두 자유 의지로 이루어지고 어떤 배우들은 우리나라의 장・차관급 대우를 받는다고 해서 놀랐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이 공연을 보고 너무 잘해서 한번 눈물을 흘리고 안타까워서 또 한번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후자의 눈물은 전쟁 이후에  철저한 반공 교육을 받고 북한 주민들을 불쌍하게만 생각한 결과 생겨난 착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억에 남는 공연은 북쪽 교복 차림을 한 배우들이 여러 개의 장대를 타고 올라가는 재주를 펼치다가 마지막에 '하나'라는 기를 펼치는 것이었다. 저 붉은 기의 한반도처럼 우리가 어서 하나가 되기를! 저녁 식사를 하고 둘째 날도 추위에 떨며 잠자리에 들었다.
2월 1일 셋째 날. 2박 3일간의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아침에는 금강산의 줄기가 바다에까지 뻗쳐 나온 해금강과 어떤 왕이 하루 놀러왔다가 하도 경치가 좋아 3일 동안 머물고 갔다는 삼일포를 둘러보기로 하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도 있듯이 둘째 날 못 먹은 아침 식사가 아쉬워서 셋째 날은 일찍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해금강까지는 비포장 도로여서 까지 꽤 오랜 시간을 달려 도착할 수 있었다.
해금강은 여성적 해안미와 남성적인 산악미가 어우러진 절경이 햇빛을 받아 반짝 빛나고 있었다. 바다 기슭의 흰 모래벌, 그 뒤에 둘러선 소나무 숲, 물결에 씻기운 절벽, 선돌, 푸른 소나무로 덮인 섬바위가 조화를 이루며 특유의 경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바닷물은 이어져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었지만 잘 보이지 않는 바위산 윗부분에는 남쪽을 향하여 장전된 대포가 놓여져 있었다. 언제 우리는 물처럼 하나 되어 흐를 수 있을까.  
해금강 구경 후 돌아온 길을 되돌아가 삼일포로 향했다. 길 곳곳에는 허허벌판이든 풀숲이든 군인들이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가는 길의 철조망 건너편 길에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추위 때문인지 몇 명 만나지 못했고 바쁜 걸음이었다. 또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직접적인 교류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삼일포는 그림처럼 바위산이 호수 둘레를 둘러서고 있었다. 그 바위산을 돌아 돌아 올라서 삼일포를 둘러보고 마지막에는 얼어있는 호수 위로 길게 펼쳐진 다리도 건넜다. 이 다리는 조금만 흔들어도 진동이 앞뒤로 전해져서 건너는 동안 마음을 졸이며 손잡이를 꼭 잡고 앞만 보고 빠르게 걸었다. 태풍 루사 때 뒤집혔었단 말을 들어서 더 그랬는지 겁이 나서 건너편 바위산에 발을 딛고 나서야 한 숨을 놓았다.  
   2박 3일간의 시간은 50여년의 분단의 암벽을 허물었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아직 우리는 서로 경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과 금강산 관광이 돈벌이의 상징이 되어 가는 것 같았던 점이다. 처음에 금강산에 가게 되었을 때 약간의 통제가 있더라도 북측 문화를 많이 접해보고 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숙소, 온정각 등의 관광객을 위한 시설은 거의 남측의 생활과 같이 해놓았다. 밤새도록 남측의 노래가 흐르고 텔레비전에서도 북측 프로그램은 볼 수가 없고 내가 평소에 즐겨보던 남측의 프로그램을 모두 볼 수 있기까지 했으니 어떨 때는 내가 정말 북쪽으로 넘어온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시 남측으로 넘어올 때, 전염병에 대한 간단한 조사를 하러 온 보건복지부 직원으로부터 들은 ‘북한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유엔에 전염병에 대한 신고를 하지 않은 나라’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보고 느낀 북쪽 사람들은 분명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과 어우러져 한껏 푸르러질 수 있는 통일의 봄날은 언제 오려는지.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에서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함께 손잡고 웃을 수 있는 그 날까지 우리 마음의 문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