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아 / 중등논술22기 겨울조 토론내용 정리

우리 겨울조는 연윤경, 노호경, 박봉화, 권정화, 유미정, 박현아(사회) 샘이 함께 했습니다.
호흡이 잘 맞는 팀이었다고 자평합니다~ 호호호.
저는 질문번호에 따로 답을 달지 않고 한편씩 정리하겠습니다.

<꼬리없는 쥐>
   그(꼬리없는 쥐)가 꼬리는 자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절박한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행위를 통해 노동의 댓가를 받고 살아야 하는 노동자 입장에서, 특히 하루하루 업그레이드된 제품들이 나오는 컴퓨터업계에 종사하는 그로서는 광마우스라는 대세를 따라가고 싶었을 것이다. 회사에서는 자신을 업그레이드 시킬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게다가 그가 사는 집과 형편을 보라. 광마우스가 되기 위해서 모으는 적금도 아직은 한참 모자라고 먹을 것은 다 떨어졌다. 그리고 그는 하루아침에 해고되었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는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없었다. 오직 '이 사회에서 살아 남아야 해! 경쟁에서 낙오되면 안돼!' 이생각 뿐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혹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문제제기나 자기 성찰이 자라날 틈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수술을 앞두고 다시 한번 생각했어야 했다. 보다 높은 수입, 안정된 일자리를 바라고 그는 광마우스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광마우스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꼬리를 잘라야 한다는 현실로 나타나고, 결국 그는 꼬리를 자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마치 장기매매를 연상시키는).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가 자신의 몸에 대해서조차 잘 알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동물의 꼬리의 역할에 대해서는 "살랑살랑 꼬리로 말해요"를 보시면 쉽게 알 수 있음). 수술 후에 의사의 꼬리를 보고 놀라는 표정을 보라. 결국 그는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체제에 순응하는 것을 택했고, 그 결과 광센서는 얻었지만 주체적인 삶을 잃었다. 그리고 (그의 몸상태에는 적합해 보이나) 그 전보다 나을 것 없는, 더 열악한 직종으로 추락한다.
   겨울조의 논의는 현대사회가 우리에게 주는 강박은 일단 접어두고,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집중되었는데, 꼬리없는 쥐를 통해 문제제기, 자기 성찰이 없이 사회를 쫓아 가려고만 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꼬리가 없으면 어떻게 될 거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쥐.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나 다양한 삶의 가능성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했던 그를 보면서 우리는 순응하며 살기만 했던 자의 슬픔을 보았다. 그는 꼬리를 자르지 말았어야 했다. 아마도 그는 보조꼬리를 달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을 것이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잃어버린 한쪽을 찾아 길을 떠나는 동그라미. 그러나 한 조각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그(그녀)의 착각이다. 이가 빠진 모습 그대로가 완전한 모습인데,  그(그녀)는 그 부분을 채울 조각을 찾아 간다. 그러므로 '잃어버렸다'는 말보다는 '찾는다' '채운다'가 더 어울릴 것이다. 그러므로 찾기를 원하는 한 '조각'은 그(그녀)의 이상, 추구하는 바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살면서 무엇을 추구하는가? 배우자, 좋은 성적, 좋은 직장, 친구.... 이런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추구하는 것만을 만나지는 않는다. 동그라미가 나비와 벌레, 돌담 등을 만나는 것은 찾고자 했던 '조각'은 아니다. 그러나 여러 존재들을 만나면서 인생의 희노애락을 즐기게 된다. 이 과정에서 볼 수 있는 동그라미의 삶의 태도는, 적극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목표만을 바라보는 태도도 엿보인다.
   '조각'을 만난 동그라미는 추구하던 바를 성취한, 이상적인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한 순간, 동그라미는 자신이 매우 불편한 상태에 있음을 느낀다. 자신의 삶이 너무나 빠르게 굴러가 버려서 예전에 느끼던 즐거움을 누릴 수 없게 된 것이다. 동그라미는 생각을 한다. '생각하는 동그라미'는 삶의 변화에 직면했을 때 스스로를 성찰하고 자각하는 것을 뜻한다. '꼬리없는 쥐'의 주인공과 크게 대비되는 부분이다. 순응과 자기 성찰. 그리고 그 후의 선택은 매우 다르다.
   동그라미는 한 조각을 내려놓는다. '내려놓은 조각'은 동그라미가 추구했던 목표일 수도 있고, 채우고자 (착각)하는 욕망일 수도 있다. 동그라미는 조각을 버림으로서 목표와 욕망을 버리는, 혹은 조절하는 길을 택했다. 그 결과 자신을 성찰하고 삶의 태도, 삶의 방법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다.
   동그라미는 계속해서 한 조각을 찾아 길을 떠난다. 그러나 처음의 길 떠남과는 차원이 다르다. 무언가를 추구하는 삶이긴 하지만 추구하는 내용과 가치, 방법은 달라졌다. 쫓아가는, 순응하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사는 것이다.


*** 개인적인 얘기를 덧붙이려고 하는데요, 오늘 냈던 과제에 대한 변명이랍니다.
      제가 택한 글쓰기 방법은, 소위 자유구술이라는 건데, 사실 완성된 글은 아니지요.
      깊이 생각하고 정리된 글을 써야 하는데 그걸 못한 것이 첫째 원인이구요, 그 다음은
      그래도 과제를 내야 한다는 의무감에 어떻게라도 써보자라고 생각한 게 둘째예요.
      그래서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말하듯이 써본거랍니다.
      저, 이렇게 나중에 변명하는 거 아주 싫어하고 죄송해하는데도 쓰는 이유는
      김정겸 샘을 비롯하여 여러 샘들의 글에 아주 많이 감동받아서랍니다.
      혹시 제 글이 장난스럽거나 성의없이 보일까봐서요.
      물론 여러 샘들보다야 성의가 부족했던 건 사실이지만, 제 나름대로 진지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샘들, 다음 주에 만나요. 제가 과연 아리랑 곡선을 그릴 수 있을까요?





김정겸 (2005/10/07 09:14:20)

토론을 요약하신 샘의 글솜씨에 저 반했습니다.
토론하고 그 토론한 내용을 정리하는 일에 어섧기만 해서요, 아니
애당초 토론할 때부터 빨리 시원한 답을 찾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속으로 겉으로 마냥 횡설수설하게 되어서 난감하기 이를 데 없거든요.
더군다나 여러 사람의 생각을 모은다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줄이야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 엉킨 실타래를 풀려다 오히려 더 수습할 수 없을
지경으로 엉망이 되는 혼란을 겪곤 합니다.
암튼 샘의 요약 솜씨는 가히 한편의 잘 짜인 강의록을 보는 듯합니다.
토론 정리의 또다른 면모를 본 듯싶고 한수 배웠다는 뿌듯함이 드네요.

그리고 샘의 과제 저도 두 번이나 읽어 보았습니다.
(사실 샘들 글을 아주 열심히 보는 편입니다. 그치만 거기에 대고
무슨 말을 얹히거나 덧붙이거나 찢어 발기는 식으로 논평을 하기가 불편해
입 처닫고 있는데 말입니다.)
첨 샘의 글을 읽을 땐 '어라, 이건 또 뭐지?' 하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꾸물거리는 생각의 조각들을 그대로 글자로 현상해 낸 것처럼 보였거든요.
더군다나 글이라는 건 한약을 다리듯 오래도록 고다가 짜내는 국물이어야 한다고 믿는 축인데,
샘의 글은 온통 파편 같은 의혹만 난무해서 도무지 글답지 않다는 느낌을 받긴 받았어요.
글은 말하고도 다르고 더군다나 생각하고도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여간한 재간과 지난한 탁마를 걸치지 않고는 생각을 일그러뜨리지 않은 채
글로 써낸다는 게 불가능하지 않던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한켠으로는 흔히들 '의식의 흐름'이라는
글쓰기 기법을 끌어들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식으로 구구한 얘기가 샘한테는 언짢지 않을까 싶어서 저어되긴 한데,
암튼 샘의 글에선 날 냄새가 날지언정 과감한 글쓰기로 인해 오히려 신선합니다.
'난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그야말로 아닌 밤에 날아온 돌에 얻어맞았는데,
아프지 않고 진지해지지 않을 수가 없지요.
샘, 그럼 한주일 지는 잎새 즐겨 보셔요. 저도 그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