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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강, 관찰하기
‘쌀’ 관찰 기록문
봄, 이경아
2016년 9월 20일 불의 날, 정각 12시. 시계의 큰 바늘과 작은 바늘이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듯 우뚝 서 있는 시각이다.
환경지킴이 study 도반들은 팀별로 가져 온 관찰 사물들 앞에 아이처럼 신나고 흥미로워 하고 있다. 봄의 팀 앞에는 오곡이 놓여 있다. 오곡을 준비하면서 농촌 출신이면서도 기장과 조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놀랐던 순간이 스쳐지나간다.
루페를 챙겨드니 설레고 신나는 마음이다. 오곡이 담긴 다섯 개의 병들을 살피자 쌀이 든 병에 눈길이 멈춘다. 우리 삶에 가장 가까이 있는 곡식인 쌀, 오랜 세월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의 주식으로 농부의 손길을 88번이나 받는다는 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는 마음이 살며시 인다.
옥수수 뻥을 먹은 뒤라 입안에 단맛이 남아 있어 기분은 느긋하고 가볍다. 잠시 가을 팀에서 도깨비방망이 열매를 톱으로 자르는 걸 보고 탄성을 지르며 들뜨는 기분도 들어 왔으나 눈을 감으니 곧 마음이 오롯해진다.
왼 손바닥에 올려 둔 쌀알들을 오른 손 검지로 만져 본다. 단단한 느낌이 손끝에 전해진다. 굴러보니 피부를 찌르는 듯한 뾰족함이 느껴진다. 냄새를 맡아본다. 겨 냄새가 물씬 풍긴다. 입안에 넣어 굴러보니 매끄럽다. 그러나 침이 묻자 표면이 금세 물러지며 말랑해진다. 살며시 깨물자 끈적끈적한 느낌이다. 밋밋한 맛 속에 약간의 달큰한 맛도 느껴진다. 새로운 쌀을 서너 알 입에 넣고 곧바로 깨물어 본다. 바짝 마른 쌀알이 타타닥 소리를 내며 가루가 된다. 꺼끌꺼끌한 가루로 입안이 텁텁한 느낌이다.
쌀의 생김새는 약간 길쭉한 타원형이고 상아빛에 노란 빛이 감돈다. 투명한 감도 있다. 쌀 한 톨의 무게는 거의 느껴지지 않으며 한 줌 정도 쥐었을 때 약간의 무게감이 감지 될 정도이다. 쌀의 크기는 길이가 4~5mm, 폭이 2~3mm, 두께는 2~3mm 가량이다.
더 이상 관찰할 게 없는 것 같아 루페를 사용해 본다. 10배로 커지자 투명감이 훨씬 많이 느껴진 쌀은 한쪽 끝이 오목한 모양으로 깊이 파여 있다. 구멍 중앙은 누런색이 박혀 있는데 겨 가루도 붙여 있다. 구멍주위는 흰 테두리가 둘러져 있다. 또 길이 쪽으로 1개의 누런 빛깔의 선이 선명하게 나 있고 전체 표면은 불규칙한 그물형의 누런 무늬가 있다. 서너 개의 쌀을 동시에 놓고 보니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 다르다. 같은 모양을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병 안에 든 쌀을 흔들어 본다. 착착착 하는 소리를 낸다. 경쾌한 느낌이다. 종이 위에 쏟아서 좌우로 흔들어 본다. 차르르 차르르 소리가 마치 파도에 쓸리는 모래소리와 흡사하다.
약 10여분 동안 오감을 동원하여 쌀을 관찰해 보았다. 집중하는 자체가 즐거운 느낌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은 배경이 될 뿐, 쌀을 관찰하는 동안 오직 쌀과 나와의 만남만 있다. 고요함 속에 전해져 오는 몸의 언어.
대상과 온전하게 만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뿐, 어떤 분별이나 판단이 들어오지 않는다. 몸의 언어만을 듣는다. 몸의 언어에 귀 기우릴 때, 미세한 감각들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 재미나고 살아 있는 느낌이다.
수십 년간 손으로 쌀을 만지고 눈으로 봐 왔으며 밥을 지어 먹고 살았다. 그동안 쌀의 무엇을 봐 왔을까? 오늘에야 쌀과 온전히 만난 느낌이다. 그동안 어느 한 형태, 기능, 눈에 보이는 것만 스치듯 인식했다. 쌀에 대해 설명해 보라하면 그야말로 피상적인 앎뿐일 터였다.
쌀을 이렇게 만나왔듯 세상과도 이렇게 관계를 맺어왔다는 생각에 가슴 한 켠이 툭 비워지면서 텅 빈 느낌이다. 무엇과도 온전히, 진실하게 만나지 못했다는 자각. 순간순간, 오직 대상과 대상의 만남이 아니라 늘, ‘경험의 나’로 만났다는 울림 때문이다. 또한 한 줌의 쌀의 모양과 크기가 다르듯이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모습이고 서로 다른 경험체일 뿐.
나의 진실은? 앎은 과연 무엇인지, 나의 관계 맺기 방식은 어떠한지, 깊이 느껴지는 지금, ‘오직 모를 뿐’인 마음으로 가만히 있어 본다.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