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를 위하여」를 읽고>

                                            경기고2. 이승환

1. 메뚜기 선생과 교생 선생이 가지고 있는 교육 방식의 차이
2. 아이들 속에 내재화된 규율권력 - 지배와 복종의 문제를 분석하기
3. 이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찾아보기

이 「아우를 위하여」는 황석영이라는 작가가 군에 입대해 떠나간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이 편지를 보낸 이유는 두 가지일 것 같다. 첫째는 입대해 가족들과 헤어져 혼자 있게된 동생에게 무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려는 형의 자상한 마음의 발동이고, 둘째로 더 중요한 것은 「병아리 교생을 아직도 생각하고 존경하는 나처럼 우리 모두는 항상 너를 기억하고 있으니, 용기를 잃지 말아라.」라는 감동적 메세지의 전달이다.
한데 위 논제들을 보니 이 형제간의 정이 담뿍 들어 있는 아름다운 편지를 또 다시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해왔던 「파시즘」의 색안경을 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게다가 비슷한 내용의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마저도 이 글을 이해하는 길잡이가 되어주니, 또 하나 씌어진 색안경에 기뻐해야 할 지 아쉬워 해야할 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메뚜기 선생과 교생 선생님의 차이를 되집어 보는 동시에, 아이들 속에 내재화된 규율 권력과 한국 사회의 문제점들을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부정적 인물로까지 폄하 될 수 있는 메뚜기 선생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 이 글의 전개를 위해 더 유리할 수도 있겠다. 그는 주인공의 국민학교 담임 선생님으로, 어떤 가게를 부업으로 벌여 놓고 교장 선생님의 순찰을 피해 자기 돈벌이에만 몰두한다. 게다가 어쩌다 하는 수업은 몇 시간 동안이나 그림만 그리게 하는 등 엉망이다. 한 마디로, 교사라는 직업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는 사람인 것이다. 때문에 아이들의 힘의 논리를 앞세운 파벌 싸움, 권력 투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힘의 경주의 최종 승자가 된 영래의 독재적인 학급운영도 그는 「학급에 기강이 서고 자치 능력이 향상」된 줄 알고 만족해한다. 마치 이문열의 소설에서 엄석대가 보여준 비민주적이고 획일적인 학급 운영과 그를 묵인한 담임 선생님의 관계를 보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렇게 메뚜기 선생은 아이들에게 간섭할 능력도, 시간도, 관심도 부족한 가운데 영래의 독재는 계속되던 중, 작은 이변이 일어난다. 메뚜기 선생이 자신의 수업 공백을 메우기 위해 냉큼 데려온 교생 선생님이 새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아직 젊고 아름다운 그녀는, 재치 있는 답변으로 타칭 「병아리 선생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역시 젊어서일까. 병아리 선생님은 이제는 너무나 전형화, 상투화 된 말인 「민주적」인 방식으로 아이들을 지도하고, 선도하려한다.
첫째로, 철저한 평등주의다. 반에서 가장 공부 잘 하는 주인공이 야속함을 느낄 정도로 철저히 평등하게 아이들을 대한다.
둘째로, 순수와 솔직함의 전달이다. 영래 패거리들이 그녀에게 외제 나일론 스타킹을 선물했을 때, 그녀는 아이들을 아이들답지 못하다며 나무란다. 어른들의 솔직하지 못함을 탓하면서 말이다. 특히 이 부분에서 나는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 논술 수업에서의 첫 에세이 습작에서 내가 한국의 페스탈로찌라는 최고의 찬사를 보내 드린 바 있는 중학교 3학년 때의 담임이셨던 최병수 선생님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자세히는 말할 수 없는 어떤 중대한 사건 이후 그 분이 하신 말씀을 적자면 이렇다. 「너희들이 이렇게 어른들의 나쁜 짓거리들만 배워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이렇다면 현재 저 썩어빠진 정치인들과 너희가 다른 게 무어냐?」 이 글이 쓰여졌을 몇 십년 전의 병아리 선생의 말과 2000년도의 말이 똑같이 되풀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 때보다 지금이 나아 진 게 없다는 것일까 아니면 언제까지라도 반복될 모든 젊은 양심적 교사들의 슬픈 동어 반복일까? 당연히 후자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유토피아가 아닌 이상, 잘못된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젊은 교사들은 기성 세대의 모순을 답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어린 새싹들에게 그런 말을 해 줄 수밖에 없다. 아니, 해 주어야 한다. 한데 유토피아란 없으니, 그 말의 필연성은 자명한 일이지 않은가.
셋째로, 새내기 병아리 교생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능란한 문제 해결 능력이다. 만약 그녀가 강탈당한 양조장 집 아들의 도시락 사건을 알고 당사자들에게 “야! 너희들 당장 도시락을 돌려줘!”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할 가치조차 없을 것 같다. 그 상황에서 병아리 교생은 교묘하게도 아이들이 도시락을 2개씩 가져오게 함으로써 점심을 굶는 아이들을 없애고, 기지촌에 사는 아이들과 일반 아이들과의 적의까지 해소시키는 양동 작전을 훌륭히 수행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 일상적 파시즘의 붕괴이다. 그 때까지 영래를 위시한 아이들이 구축하고 있던 철옹성과도 같은 독재체제는 그녀가 무너뜨렸다. 단체 행동에 참가하지 않던 아이들을 벌주는 영래를 벌줌으로써 그러한 파시즘의 굴레를 벗겨준 것이다. 또다시 이문열의 소설에서 굳이 비유하자면, 신임 담임선생님에게 매맞고 쫓겨난 엄석대 정도가 될 것이다.

이상 위에서 말한 네 가지 요인들이 결국은 궁극적으로 아이들의 자발적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나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혹자는 단순히 병아리 선생님을 사모하는 주인공의 어린 마음이라고 치부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병아리 선생님의 그러한 교육이 없었다면 주인공의 용감한 행동이 있을 수 있었을까? 힘이라는 법보다도 무서운 권력, 반장이라는 상부적 위치를 이용한 영래의 규율 권력은 그로써 산산조각이 나 버린 것이다. 교생 선생님이 없었다면,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죽을 때까지도 그 규율 권력에, 다시 말하자면 일상 파시즘의 노예가 되 잘못된 것을 바로 보지 못하게 되고, 부정한 행위를 계속 묵인하게 될 것이다. 소수의 독재와 횡포에 침묵하는 다수의 양심 -이것이 바로 아이들 속에 내재화된 규율 권력- 일상적 파시즘이다.
그리고 좀 더 일반화시키자면, 그것이 또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인 것이다. 왜 그러한 부정적인 일상적 파시즘이 생겨났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그러한 현상은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 속에서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 1919년의 러시아 혁명과 같이 성공한 민중 봉기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이 더욱 심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소수의 횡포에 침묵하는 다수, 그리고 그로 인해 더욱 심화되는 부조리의 악순환은 분명 끊어져야 될 고리인 것이다. 그리고 그 고리를 끊는 방법은 분명하다. 「병아리 선생님」의 교육 자세를 본 받는 것이다. 평등주의, 진실 됨, 임기 응변 능력(문제 해결에 대한),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끊임없는 문제 의식의 발현, 이것들을 적절히 융합시키고 발전시킨다면 일상적 파시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것이다.

이상 위에서 메뚜기 선생과 교생 선생의 교육 방식의 차이, 아이들 속에 내재된 규율 권력과 그것이 바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이라는 것까지를 이야기했다. 용두 사미 격이요, 1번 논제에 아무래도 지나치게 치중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후회는 없다. 어쩌면 이렇게 새롭고 신선한 글들을 읽어나가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지식들을 얻어 가는 것 또한 그때까지 나를 지배하고 있던 일상적 파시즘을 깨부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개개인의 자각이 모여 사회에 궁극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과 실제로 역사 속에서의 그러한 수 없는 사례들(레닌, 마르크스를 보라!)을 마음에 새기면서, 내 마음에 자유와 평등, 진보의 정신을 심기 위해 더욱 정진할 것이다.




<「아우를 위하여」를 읽고>

                               대원외고2 이혜림

① 메뚜기 선생과 교생선생이 가지고 있는 교육 방식의 차이

교사는 세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첫 번째는 자신의 학급에 신경 안 쓰고 학급 임원에게 모든 임무와 권력을 주는 교사, 두 번째는 자신의 학급에 적당히 신경쓰고 학급 임원에게 임무와 권력을 주는 교사, 세 번째는 학급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학생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주는 교사-이렇게 세부분이다.
메뚜기 선생은 첫 번째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툭하면 자습시간을 주고선 하루 온종일 밖으로 돌아다녔다. 이런 학급에는 자연스레 학급 임원의 권위가 높아진다. 이 글에서도 반장이 된 영래는 독재자처럼 학급일원 중 어느 하나라도 일탈을 하게 되면 곧바로 벌을 가한다. 그의 부하라고 할 수 있는 은수와 종하도 한 몫 거들어 영래가 주장한 것에 대하여 반대 의견을 나올 수 없게 만든다. 메뚜기 선생은 이런 일을 하나도 모른다. 영래는 이 선생이 올 때쯤 아이들에게 대청소를 시켜, 속사정을 모르는 메뚜기 선생을 만족시킨다.
반면, 교생선생은 메뚜기 선생과 다른 점이 있다. 그녀는 3번째 유형에 속해있다고 할 수 있다.
영래의 횡포가 점점 심화될 무렵 메뚜기 선생이 교생선생을 데려온다. 그녀는 젊었고 학급 아이들에게 잘 해주려고 노력하였다. 하루는 영래가 한 아이를 벌 주는 것을 보고 영래에게 독단적인 행동보다는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자기가 저지른 행동에 대해 스스로 반성해보라고 따뜻한 충고를 해준다. 그리고 도시락을 빼앗아 먹는 아이를 꾸짖는 대신에 아이들한테 결식하는 친구들을 위해 도시락 하나씩 더 싸오라고 하여 아이들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아이들은 교생선생의 이런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고 교생선생을 따르게 되었다. 그러던 중 교생선생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던 영래와 그 무리들은 교생선생을 조롱하는 쪽지를 반 아이들이 모두 볼 수 있게 돌렸지만 ‘나’는 그 쪽지를 보고 쪽지를 돌리지 않고 영래한테 가서 교생선생에게 사과하라고 항의를 한다. 영래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던 다른 아이들도 용기를 내어 항의 한다.
교생선생은 그리 적극적으로 학급 일에 참여는 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에게 교사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고, 아이들이 영래에게 항의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계기가 되었다.

② 아이들 속에 내재화된 규율과 권력-지배와 복종

영래는 자신의 신분인 반장(급장)을 빌미로 횡포를 많이 부린다. 영래를 따르는 무리를 총무, 기율부장으로 임명하여 더욱 아이들을 잡는다. 학급에서 권력을 잡지 못한 아이들은 영래의 권력에 눌려 있다. 몇 명의 아이들이 두려워서 자신의 주장은 펴보지도 못하고 혹 자신의 주장을 나타냈다간 오히려 욕을 먹고 자신의 주장을 취소한다. 영래의 말에 아이들은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영래가 학급비를 사적으로 쓰고 남의 의견을 무시해도 그냥 놔둘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아이들은 영래가 잘못을 저질러도 고쳐주려고 하지 않고 따르기만 하여 영래의 횡포는 점점 심해져갔다. 그러나 나중엔 아이들이 영래의 횡포에 폭발하여 강력하게 항의한다.
권력을 너무 남용하면 영래처럼 남은 전혀 생각 안하고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무조건 적인 복종도 좋지 못하다.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 수도 없고 아무런 항의가 없으면 자신이 옳은 줄 알고 계속 그 방식대로 밀고 나갈 것이다.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은 자신의 옳고 그름의 판단이 둔해지고 자신의 개성과 존재력도 점점 상실할 수도 있다.

③ 이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국 사회의 문제

이 학급의 문제를 한국 사회의 문제로 확장시켜보면 우선 정부와 언론을 예로 들 수 있다. 얼마 전 공정거래위원회가 신문고시 부활안을 규제개혁위원회에 제출하여 논란이 있었다. 언론은 정부의 사무처리 및 그에 대한 비평을 국민에게 알려 주는 동시에 우리 국민의 의견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 신문고시 부활안은 이런 언론을 정부의 권력으로 교묘하게 탄압하려는 의도가 있다. 권력자가 언론비판에 대한 인내의 한계를 드러내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권력이 언론에 대한 불만으로 체벌을 가한 것이다.
권력은 항상 언론에 거리를 두고, 언론은 권력을 비판해야 한다는 점에서 권력은 언론을 위해하려는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 그리고 언론은 무엇보다 정부권력에 대한 감시기능을 제대로 되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