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 논술 자료함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본질적인가?
와타나베 준이치(작가. 전직 산부인과 의사)
이 글에는 남성은 물론 여성 자신도 잘 알지 못했던 문제들, 즉 여성의 인체구조가 여성의 심리와 사회적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의 문제가 다방면에서 솔직히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동안의 글들이 너무 관념적이어서 실생활에 접목시키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었는데 그 표현에서 보이는 명쾌함과 솔직함이 읽는 이로 하여금 청량음료를 마신 것 같은 상쾌함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이 글은 산부인과 전공의 전직 외과의사인 와타나베 준이치가 여성의 사회 문화적 행동을 여성의 신체적 특성과 관련시켜 재미있고 흥미롭게 분석한 일종의 여성 이론서입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남성에게 여성은 영원한 수수께끼이다. 여성은 이상한 존재여서 종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남성들은 “여자란 알다가도 모를 동물이다.”라고 한탄하다가 결국에는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 버린다. 그렇다면 이렇게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알 수 없는 동물이라고 이야기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들 남성과 여성은 서로 생김새도 비슷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 또 모르는 점이 있으면 서로 물어 보곤 하는 관계이다. 그런데도 “모르겠다”고 말하게 된다는 데에는 변화가 없다. 아니,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주고받을수록 오히려 상대를 더 모르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그녀와 나는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라는 한탄으로 결론이 나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방향을 약간 바꿔서 우리네 인간들과 개나 원숭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그러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개나 원숭이의 행동을 보고 “정말 모를 짓들을 한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개가 살점이 붙은 뼈다귀를 먹으려고 흙더미 속을 파헤치고 있든 원숭이가 사람들 앞에서 자위를 하든 묘한 짓을 하는 놈들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짐승같은 짓을 한다고 생각할 뿐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는 하지 않는다. 당연한 짓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개나 원숭이는 인간들과는 전혀 다른 종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개는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후각이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흙 속에서 뼈다귀를 찾아낼 수 있고, 원숭이는 짐승이기 때문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위 행위를 하면서도 창피함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모르겠다”는 의문을 갖지는 않는다. 이 점은 다른 동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에서 대해서 “모르겠다”라고 말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자기와 똑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게다가 남성과 여성은 서로에게 너무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모르는 점이 더 많아지게 된다. 요컨데 우리들 남녀는 서로를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바탕 위에서 바라보고 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는다. 상대는 나와 똑같은 존재이므로 같은 입장에서 서로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고 방식이 남녀가 서로를 잘못 알게 되는 시발점이 된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증오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와 같이 서로를 착각하는데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서로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까. “나와 그녀는 전혀 다른 종족이다. 나는 남성이라는 족속이고 그녀는 여성이라는 족속이다.” 남성과 여성이 이렇게 서로를 전혀 다른 종족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개나 원숭이를 볼 때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냉철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할 수 있게 된다. 억지로 자기의 생각만을 밀어붙이려고 조바심 내는 일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더욱이 종족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나 동행하는 것도 다르다고 인식하게 되면 쓸데없는 오해나 증오심도 갖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기는 쉬워도 막상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렵다.
그러기에는 우리 남녀는 서로 닮은 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은 모두 양다리와 양팔을 가지고 있고,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으며 은밀한 부분에 털을 가지고 있다. 또 똑같이 말을 하고 웃으며 눈물도 흘리고 잘 때는 눕는다. 이래서야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종족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없다. 오히려 서로 틀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물론 남성과 여성이 외관상 약간은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골격과 목의 기관, 생식기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이것으로 완전히 다른 종족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정도의 차이가 너무 적다. 또한 생식기야말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만 그것이 남성과 여성으로서의 차이점일 뿐 이른 바 종족의 차이 평가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런데 밖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차이들은 사실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좀 더 근본적인 차이는 체내에 숨겨져 있다. 그리고 이 실체를 파헤치지 않는 한 올바른 의미에서 남성이 여성을, 여성이 남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측히 여성의 경우는 숨겨져 있는 신체가 외형상의 모습과는 크게 다르다. 그 내면은 더욱 알기 어렵다. 따라서 숨겨진 이 실체를 아는 일이야말로 여성론을 펼치기 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기초 공사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여성론을 다룬다면 그것은 토대 없이 집을 짓는 것이나 같다.
내가 제1장의 제목을 여성의 숨겨진 진실이라고 내세운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나는 현재 작가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전까지 약 10여년 동안 모 대학 병원 외과 의사로 있었다. 그 병원에서 나는 많은 남녀 환자에게 수술을 해주고 경과를 지켜보았다. 대부분은 완치되었지만 그 중에는 생명을 잃은 환자도 있었다. 수술을 하면서 내가 느낀 점은 여성이 남성보다 고통을 잘 견딘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여성이 남성보다 아픔이나 고통에 약하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여성의 몸이 남성의 몸보다 가냘픈 데다가 여성들이 작은 통증에도 잘 견디지 못하고 울어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여성은 약한 통증에는 남성보다 큰 반응을 보인다.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거나 아우성을 치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대수술을 하게 되면 오히려 침착해지거나 고통을 잘 감수한다. 반면에 남성은 작은 고통은 눈물을 머금으며 참아 내다가 그 고통이 켜지면 도무지 견디지를 못한다. 인내력이 여성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것이다.
결국 작은 통증에는 견딜 만하면서도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여성의 태도가 여유 있게 과장된 반응인 반면 남성의 반응은 여유라기보다는 아픔을 곧이곧대로 나타내는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아픔의 정도가 심해지면 남성은 여성보다 더 큰 비명을 지르게 되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인체 중에서 아픔을 가장 예민하게 느끼는 부위는 뼈를 감싸고 있는 골막과 피부이다. 아픔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국소 마취로 수술을 할 때는 이 두 군데에 대량의 마취제를 주입하게 된다. 나는 전에 수술을 할 때 이 국소 마취량을 남성과 여성에게 약간씩 가감해 실험해 본 적이 있다(이런 짓을 상습적으로 한다면 인체 실험이라는 측면에서 문제가 되겠지만 내 경우는 일시적인 것으로서 아무런 해를 주지 않았다). 그 결과 남성과 여성의 태도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먼저 여성의 경우에는 시험삼아 마취약의 양을 약간 줄여도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간혹 통증을 호소해 올 때 “걱정할 것 없어요”라고 말하면 곧 조용해진다. 그러나 남성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남성은 마취약의 미세한 양의 차이를 재빨리 알아차리고는 “아프다”고 호소한다. “걱정할 것 없어요”정도의 대사 가지고는 속지 않는다. 아프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더라도 얼굴을 찡그리면서 땀까지 흘리며 참느라고 애를 쓰는 것이다. 여성은 아프지 않으니 걱정 말라고 안심을 시키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아픔 정도는 참아 낸다. 그러므로 여성이 암시 요법이라든가 최면술에 걸리기 쉽다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성이 남성보다 고통을 잘 참는다는 사실은 출산을 생각해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출산은 여성만이 짊어진 숙명이지만 이것이 여성이 아픔에 강하기 때문에 주어진 것인지 아니면 출산이라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필요진화론(必要進化論)에 따라 여성의 몸이 강하게 단련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나는 사실 후자 쪽일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상당히 합목적적이라고 생각된다. 만일 출산을 남성이 했다면 30대 남성 가운데 과반수는 그 아픔을 이겨 내지 못하고 실신하거나 사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증거를 하나 들어보자. 담낭에 돌이 생기는 담석(膽石)이라는 병이 있는데, 담낭에 생긴 돌이 담도(擔道)를 빠져나오는 메커니즘은 출산과 비슷하다. 그런데 담력이 있는 남성이 아픔을 이겨 내지 못하고 마구 뒹구는 모습이란…. 그런데 그렇게 요동을 치다가 나온 것이란 겨우 새끼손톱만한 크기의 돌인 것이다.
이에 비해 출산의 고통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선 고통의 시간이 길다. 무려 10시간에 걸친 진통을 겪은 후 3000g이 넘는 아이를 낳는 것이다. 남성으로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10개월간의 임신 기간, 10시간 이상의 진통, 젖을 먹여야 하는 수유기간 등등 갖은 고통과 번잡스러움을 마다 않고 여성은 출산을 감행한다. 그뿐인가. 여성은 아이를 하나 더 가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기가 막힌 일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여성은 남성과는 분명히 다른 족속임에 틀림없다.
앞에서 설명한 유의 차이는 근원적인 생명력이라는 면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람의 체중 가운데 13분의 1은 혈액량이며, 그 중의 3분의 1정도의 혈액을 잃게 되면 사망한다는 것은 의학생이라면 누구나 아는 기초 상식이다. 예를 들어 체중이 52kg인 사람이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체중의 13분의 1, 즉 4kg의 혈액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의 3분의 1, 즉 1.3kg(1300cc)을 출혈할 경우 사망하게 된다. 그런데 여성은 자궁 외 임신이라든가 자궁 파열 등 대량 출혈을 유발하는 질병을 앓기가 쉽다. 내가 지금 예로 들려고 하는 여성 환자를 검진했을 때 그녀의 뱃속도 자궁 파열로 피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체중이 45kg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미 2000cc가 넘는 피를 흘려서 간신히 심장만 뛸 뿐 살아 있다고 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난 앞에서 말한 기초 상식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에게 “절망적이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수혈을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한 20분쯤 지나자 희미하게 맥이 뛰는 소리가 들려 왔던 것이다. 그리고 30분 뒤에는 창백했던 얼굴에 붉그레한 기운이 돌더니 한 시간쯤 지났을 때는 신음 소리를 내며 “아프다”고 호소했고, 마침내 한 시간 반 만에 혈압이 130으로 회복되었다. 그녀는 마치 땅 속에서 기어나오듯 죽음 속에서 살아 나온 것이다.
이 사건은 내가 의사가 된 바로 그 해에 겪은 일로서 그 뒤 나의 여성관을 완전히 바꿔 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의 졸저 <모태 유전>이라는 소설은 당시의 체험을 다룬 작품이다.
어쨌든 이 사건은 앞에서 설명한 절대적인 기초 상식을 부정한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의학서가 터무니없는 거짓을 썼다고 볼 수는 없다. 확실히 전혈액량 중 3분의 1을 쏟아내면 죽는 삶들이 많기 때문이다. 바로 남성들이다. 따라서 실혈사(失血死) 항목은 이렇게 고쳐 써야 옳다.
“남성은 전혈액량 중 3분의 1을 잃었을 때 사망하고, 여성은 2분의 1을 초과했을 때 사망한다.”
몇 해 전에 여성의 생명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실감나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각 신문에 실린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북알프스에 갔던 여자 두 명이 눈이 쌓인 산중에서 길을 잃어 죽을 고비에 처했으나 눈굴 속에서 초컬릿 두 개로 굶주림을 견뎌 내어 결국 2주일 만에 무사히 구조되었다.” 그런데 이 기사를 다룬 신문이나 잡지의 논조들은 하나같이 “갸냘픈 여성의 몸으로 추위와 굶주림을 용케 견뎌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과연 옳은가. 여성의 육체는 언뜻 보기에는 남성의 육체에 비해 연약하고 미덥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마른 여성이라 해도 피하 지방은 남성보다 많다. 이 말은 마른 듯해 보이는 여성이라도 보통 체격의 남성보다 훨씬 많은 지방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하물며 살찐 여성이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이처럼 여성은 체내에 천연의 망토를 두르고 있다. 따라서 여성이 남성보다 추위에 강한 것은 당연하다. 또 이 지방은 굶주렸을 때 칼로리원(源)으로 전용시킬 수 있다. 일부러 굶어서 피하 지방을 줄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굳이 초콜릿을 먹지 않더라도 여성이라면 대개 2주일이나 3주일 정도는 피하 지방에서 충분히 칼로리를 공급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때 문제는 물인데, 그들은 눈굴 속에서 지냈다고 하니 눈을 녹여서 먹으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공복감을 느꼈을 테지만 그런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다. 이 사건에서 두 여성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로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고독을 이겨내는 여성의 인내력에 관해서이다.
두 여성은 눈굴 속에서 2주일 동안 날씨가 개기를 꾸준히 참고 기다렸다. 조바심하지 않으면서 쓸데없는 체력 소모를 피했다. 사실 이것은 여간해서는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남성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구(舊)소련과 미국의 우주선 제1호에는 각각 암컷의 개와 원숭이가 태워졌다. 왜 꼭 암컷이어야 했는가. 거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암컷이 수컷에 비해 고독을 잘 견디고 인내력도 강하기 때문이다. 이는 동물생물학 분야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는 사실인 동시에 인류에게도 해당되는 진리이다.
나는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쥐와 토끼로 실험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수컷은 인내력이 약하기 때문에 그만큼 반항하는 힘도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험 가운데 쥐의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한 후 다른 한쪽 다리는 그대로 두어 이때 암컷과 수컷의 근육과 뼈에 어떤 상태 변화가 일어나는가를 비교하는 실험이 있었다. 수컷은 깁스를 하자마자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깁스한 곳을 갉으며 어떻게든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야말로 필사적인 저항이었다. 그러나 암컷은 수컷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깁스를 할 때 저항한 것은 암컷도 마찬가지였지만 일단 깁스를 하게 되자 오히려 그런 상태를 감내하려는 듯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마치 주어진 운명에 그대로 따르겠다는 자세였다. 그러다가 모든 것을 단념하고는 깁스한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먹이를 먹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인간과 원숭이, 개, 쥐 등 어떤 종족에 관계없이 모든 암컷이 갖는 특성이다. 인류의 역사에서도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결혼을 예로 들어보자. “저런 남자는 싫다”고 말하면서도 그 남자와 결혼한 후 일년쯤 지나면 제법 즐겁게 사는 여성이 많다. 물론 좋아하는 남성과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지만 차선의 남성을 선택해서도 그런대로 살 만한 모양이다. 사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여성은 대체로 남성보다 체념이 빠르다. 한 번 체념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 점에서 볼 때 남성은 융통성이 없다. 싫은 여성과 결혼해서 살면 시간이 흘러도 상황은 좋아지지 않는다. 싫은 건 여전히 싫은 것이다.
이야기가 잠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만일 앞서의 우주선에 수컷을 태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고독에 약한 수컷은 아마도 자기 주위에 있는 계기(計器)를 만지작거리면서 어떻게든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감행했을 것이다.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우주 실험은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눈굴에 갇혀서 날씨가 갤 때까지 기다린 심정도 우주선에 실린 암컷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참고 기다리면 날씨가 갤 것이고, 그러면 구조대가 나타날 것이다. 지금은 견디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남성은 그렇지가 못하다. 눈굴 속에서 구조대가 오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수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용감한 체 눈굴에서 뛰쳐나가 헤매다가 결국 대부분이 얼어 죽고 만다. 스포츠에 비유하자면 남성은 씨름꾼, 여성은 마라톤 선수감인 것이다. 남성은 여성을 완력으로 때려눕힐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순간의 일일 뿐 여성은 쓰러져서 기회를 엿보다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 남성은 다시 때려눕힌다. 그러나 이런 일이 반복되는 사이에 남성은 결국 지쳐서 쓰러지고 만다. 결국 승리는 여성의 것이 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남성은 자신이 먼저 지쳐서 쓰러지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때리는지도 모른다. 반대로 여성은 결국은 자신의 승리로 끝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맞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여성은 얼마나 무서운 족속인가. 여기서 지나치게 어수룩한 남성의 일면을 한 번 살펴보자. 내구력이 없으면서도 등산을 할 때는 여성의 배낭을 대신 짊어진다. 눈굴에 들어가면 “춥지?” 하면서 지방이 많은 여성에게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입혀 준다. 그러고는 자기가 먼저 얼어 죽는다. 입으로는 큰소리를 치지만 사실은 어리석은 종족이라고 여성은 내심으로 웃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성의 생명력이 강하다는 사실은 남녀의 평균 수명 차이에서 명쾌하게 드러난다. 현재 여성의 평균 수명은 남성의 수명보다 6~7년 정도 길다. 문명의 발달은 모두 여성에게만 유리할 뿐 남성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전기 세탁기, 청소기, 전기 밥솥, 전자 레인지, 인스턴트 식품 등은 여성의 가사 노동을 단축시키고 있다. 반면에 남성은 문명 발달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각종 자동기기들은 남성의 업무 내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을 뿐 업무 부담을 줄여 주지 못한다. 기업의 합리화라는 미명하에 업무량만 늘어났을 뿐이다.
본래가 생명력이 강한 여성들이 이러한 사회상황에 힘입어 남성과의 평균 수명 차이를 벌려 놓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차이는 앞으로 더 벌어질 것이다. 머지않아 양로원은 할머니들로 넘치고 거리도 할머니들과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이 점거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지구인이 멸망해 가는 과정에 대해 하나의 예감을 가지고 있다. 먼저 감수성이 풍부한 남성 그룹이 사멸하고, 다음으로 비교적 감성이 풍부한 여성이 멸종할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일반 여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경이 가장 둔한 여성 한 명이 살아남을 것이다. 이것은 나만의 환상일까.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망상이 아니다. 나의 이러한 예감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여성이 강인한 생명력과 아울러 뛰어난 환경 적응력을 갖추고 있다는 데 기인한다. 이 적응력에 대해서는 앞에서 간단히 언급한 바 있는 실험과 결혼의 예로도 알 수 있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여성이 “나는 이러이러한 여자가 되고 싶다”고 바라면 소원대로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20여 년 전부터 줄어들기 시작한 여성의 모유 이야기이다. 최근 들어 아이를 모유만으로 기르는 어머니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 때문에 “만일 지구에서 소가 없어지면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라는 다소 과장된 말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모유가 잘 나오지 낳게 된 이유는 참으로 알 수가 없다. 대체로 모유는 영양 상태가 나쁠 때 잘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현대의 여성들은 영양을 잘 섭취하고 있는 데 왜 모유는 줄어드는 것일까. 그렇다면 적어도 영양 불량이 원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유다운 이유가 있다. 수십 년 전부터 오랫동안 젖을 먹이면 여성의 유방은 보기 흉하게 변하게 되고, 미용에도 좋지 않다는 생각이 일반에게 널리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는 의학적으로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어쨌든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여성들은 일제히 이 의견에 따랐다. 나이보다 일찍 늙어 보이는 것도 수유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의견이 실제 이상으로 선전된 결과 여성들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일을 마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젖을 먹이지 않게 되었다고 해도 젖이 나오고 안 나오고는 자기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음식을 소화시키거나 땀을 흘리는 일 등과 마찬가지로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여성들의 뜻대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젖이 지나치게 많이 나와 여분의 젖을 매일밤 짜내야 했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모유가 나오지 않게 되거나 어머니로서의 기본적인 수유 작업을 한 두 달만에 중단시키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이를 낳으면 늘어지곤 하던 유방이 아이를 낳은 후에도 탄력 있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여성들의 욕구에 영합이라도 하듯 각종 인공 영양제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게을러진 유방’은 안심하고 더 태만해졌다. 풍만한 유방이라고 해도 젖이 괴어 있는 유방이 아니다. 텅빈 탱크일 뿐이다. 아이를 위한 유방이 아니라 남성에게 과시하기 위해 풍만한 유방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유방은 이제 귀걸이나 브로치 같은 장신구로 변해 버렸다. “얼굴은 조그맣게, 키는 늘씬하게 자라도록 해주세요.”라고 여성이 소원하면 실제로 그렇게 된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연애를 하고 있는 여성의 살결에는 윤기가 흐른다. 성에 숙달해 있는 여성의 표정은 온화해 보이고 피부는 촉촉이 젖어 있다. 그러나 남성은 그렇지가 못하다. 연애를 하고 있는 남성은 왠지 침착해 보이지 않고 성생활을 하고 있는 남성은 초라해 보인다. 말하자면 여성은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것을 몸으로 구현할 수가 있다. 그렇다고 손이 하나 더 필요하다든가 다리가 더 길어졌으면 좋겠다든가 하는 터무니없는 요구는 무리이다. 그러나 호르몬 계통에 관계된 변혁은 마음속으로 그것을 바라면 쉽게 이루어진다. 이 방면의 작용은 뇌 중심부에 있는 뇌하수체라는 관제 센터에서 담당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자기 뜻대로 호르몬의 분비를 조절할 수 있다. 여성은 이런 생리적 경로가 남성보다 뛰어나다.
얼마 전에 <스타의 요즘>이라는 글이 E신문에 실린 것을 읽었는데, 그 글은 유명한 탤런트가 쓴 것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정말 이상한 일도 다 있다. 가령 악독한 여주인공 역할을 오랫동안 맡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약한 여자로 변해 있는 것만 같다. 또 뚱뚱보 여자 역할을 하면 진짜로 몸이 뚱뚱해지면서 마음이 너그러운 여자로 변해 버린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성의 변혁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이 장에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본질적인 생명력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강하다는 점이다. 남성이 여성보다 강한 것은 순간적인 체력 뿐으로 이는 지속적인 생명력과는 관계가 없다. 이처럼 여성이 강한 이유는 첫째 여성은 아픔에 둔하다는 것과 둘째 출혈에 강하다는 것, 셋째 환경에 대한 순응력이 뛰어나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점은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에 대해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고 싶어하는 독자들을 위해 참고로 몇 마디 덧붙인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다. 해부학적으로 보았을 때 남녀의 신경 분포는 같으므로(생식기는 다르다) 아픔에 강하다는 것은 신경의 감수성이 둔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이때 신경은 동물계에서 가장 고차원적인 기관이므로 이의 발달 여하에 따라 그 동물의 진화 정도를 결정할 수 있다. 환경 순응력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것이 가장 발달해 있는 것은 균의 일종으로 포자(胞子)를 뒤집어쓰고 있는 균류(菌類)이다. 이 균류들은 주위 환경이 나빠지면 포자라는 옷으로 외벽을 덮고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또 몸을 변혁시킬 수 있는 생물로 가장 먼저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아메바이다. 변혁은 재생 능력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불가사리나 지렁이를 토막내서 잘라 버리면 다시 한 마디씩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메바나 불가사리, 지렁이가 동물의 분류상 그다지 좋은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은 초등학교 어린이들도 잘 알 정도지만 어쨌든 강한 동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위의 암시적인 설명을 통해서 독자가 어떤 생각을 갖게 되든지 그것은 독자의 자유이다. 다만 나는 여성을 위대한 능력을 가진 인간으로 존경하고 동경하며, 또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껴안는 여자, 안기는 여자> 중에서, 도서출판 글이랑)
1. 필자는 이 글에서 여성의 인체 구조가 여성의 심리와 사회적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필자의 주장이 일리가 있는지 글을 읽고 생각해 보자.
2. 남성과 여성의 사회․문화적 행동 양식이 신체구조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은 반론의 여지가 많다. 필자의 주장에 허점은 없는가? 필자의 주장을 깨뜨릴 만한 반대 증거들을 우리 주변에서 찾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