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불정책을 옹호함

 

출전 : 창비주간논평. 2008년12월10일

글쓴이 : 김종엽 /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이명박정부의 성격이, 낡은 성장주의와 미국발 금융위기와 더불어 마찬가지로 낡아버린 신자유주의의 결합이라는 것은 이제 대중적 상식이다. 안팎에서 닥쳐오는 경제위기 속에서 이명박정부는 아주 '실용적으로' 이 두 가지 정책 레퍼토리를 구사하고 있다. 시장에 대한 국가개입 요청에 대해서는 터무니없는 분양가와 과잉공급의 주체인 건설사 구제나 변형된 한반도운하 사업 같은 성장주의적 대응을 하고, 경기부양 요구에 대해서는 부자에 대한 감세 같은 신자유주의로 응대한다. 엄중한 경제위기에 대한 이명박정부의 이런 정책적 동문서답을 관류하는 핵심은 아주 좁게 설정된 지지층과 더불어 "상황이 어떻든 챙길 건 다 챙기겠다"는 탐욕에 다름아니다.

  이런 후안무치에 대한 사회적 저항의 조직화를 막기 위해 이명박정부는 사정기관들을 동원하고, 숱한 정책연구기관장과 방송사 사장에 더해 정치와 무관한 문화·예술 관련 공공기관장들마저 내쫓고 있다. 그리고 방송에 대한 통제를 항구화하기 위해 지상파 방송사업에 재벌과 보수신문사가 진출할 길을 열고자 하고 있다. 속내가 뻔한 정치산술과 이권추구가 판을 치고 있는 셈이다.

  교육제도 개편의 핵심은 국제중 설립과 3불정책 폐지

  그런 중에 이른바 국가 백년대계라는 교육에 대해서도 정부와 여러 관변단체들이 손발을 맞추어 판을 새로 짜겠다며 덤비고 있는데, 이에 대한 공세는 다른 정책영역에서의 이권추구를 한층 넘어서는 야심이 내비치고 있다. 오랫동안 평등주의적 기조 아래 운영된 교육영역을 위계적인 체제로 재편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이 재편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국제중학교 설립과 3불정책 폐지이다.

  뉴라이트의 역사관과 다르다는 이유로 근현대사 교과서를 막무가내로 강제 수정하려 드는 작태나 4·19혁명을 데모로 격하하는 경악스러운 역사인식을 좌시할 수는 없지만, 굳이 경중을 두어 말한다면 이런 문제는 국제중학교 허용이나 교육 3불정책 폐지 시도에 비하면 덜 중요하다. 그리고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이라는 해괴한 명칭의 단체가 서울의 전교조 교사명단을 공개함으로써 일으키고 있는 논란도 숨은 의도가 있든 없든 간에 그 핵심효과는 이런 더 중요한 문제에 대한 전교조의 저항을 약화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국제중학교와 3불정책이 매우 중요한 문제인만큼 이런저런 토론들이 조직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논의의 중심에 등장하는 것은 사교육비 문제였다. 하지만 국제중학교 설립과 3불정책 폐지가 중심 문제인 이유는 사교육비 증대 때문이 아니다. 사태를 사교육비 증감의 견지에서만 조명한다면, 우리 사회 성원들은 문제의 심각성에 오히려 둔감해질 것이다. 사교육비는 지난 몇 십년간 꾸준히 증가해왔다. 사교육비 증가를 막는 데 적극적인 정치세력이 집권한 시기에도 그랬고, 사교육비 증가를 막겠다는 입시개혁이 도리어 사교육비를 증대시킨 경우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어떤 정책이 사교육비를 증가시키느냐 억제하느냐 하는 논란에 냉소적이 되거나 무관심해졌다.

  국제중―특목고―명문대로 이어지는 특권적 경로

  국제중학교 설립과 3불정책 폐지의 요점은 사교육비 증대보다는 교육을 통한 계급재생산의 특권적 경로가 완성된다는 점에 있다. 국제중학교는 예전 특목고가 그랬듯이 계속해서 팽창해나갈 것이다. 생각해보라. 서울에 국제중학교가 2개나 생겼는데, 부산과 광주와 대구 같은 도시들에 그것을 금지해야 할 어떤 이유가 있겠는가? 2010년에 있을 지방선거와 교육감선거에서 국제중학교 설립은 핵심의제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진보적인 정당들조차 이 문제를 비껴가고서 선거에서 승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국제중학교는 전국적으로 확립된 진학경로로 발전해갈 것이다. 그리고 특목고와 연결되는 하나의 통로를 형성해나갈 것이다.

  이런 통로를 다시 명문대학들과 연결하기 위해서는 3불정책 폐지가 요청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굳이 3불정책의 공식적인 폐지가 요구되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특목고의 팽창으로 인해 평준화가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대학들은 사실상 고교등급제를 시도하고 있다. 연·고대가 수능성적만으로 정시의 50%를 뽑는 전형을 채택한 데서 보듯이, 본고사 금지 또한 그렇게 중요한 의제가 아니다. 본고사 폐지는 대학이 언제나 쓸 수 있는 카드 한장을 손에 넣는 것일 뿐이다. 지뢰밭이나 다름없는 기여입학제 문제도 현재 국면에서는 논의의 장을 형성하는 것 이상은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3불정책 폐지는 편법적 관행을 법적 상태로 전환하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립대학총장협의회나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이 끈기있게 이런 주장을 해온 것에서 보듯이, 이런 전환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일이다. 이 전환이 없다면 2009년 고대 수시 2-2 일반전형에서처럼 대학은 계속해서 a와 k 값을 가지고 '장난'을 쳐야 하고, 그만큼 많은 지원자들에게 분노와 원한감정을 심는 동시에 그 자신은 권위의 실추를 경험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특권은 조잡한 협잡의 산물로 의심받게 된다. 그래서는 특권이 제 값어치를 하기 어렵다. 특권은 항상 그것을 정당한 성취로 전환하는 마법을 필요로 하며, 그 일차적 과제는 위법의 낙인을 벗고 합법성을 획득하는 일이다.

  3불정책마저 폐지된다면…

  그렇기 때문에 허울만 남았다고 해서, 그저 상징적 이름으로만 남았다고 해서 3불정책을 손쉽게 보수층과 상류층에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실제를 빼앗긴 것보다 이름을 넘겨주는 것이 더 큰 것을 양보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름이 남았을 뿐이라면 더욱 그 이름을 지켜야 하며, 그것이 이름에 걸맞은 실제를 회복할 디딤돌을 잃지 않는 길이다. 뿐만 아니라 3불은 우리 사회가 스스로 그어왔던 선이다. 이 선 이외에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교육제도에 대해 합의한 것이 무엇이 있었는가? 그 선이 자주 침범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선을 지워야 하는가? 아무런 다른 합의선이 형성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선을 지우는 것이 수상한 협잡과 사회적 배제로 얼룩진 특권의 경로를 매끈하게 다듬는 데 봉사하는 것인데 말이다.

  물론 3불정책을 고수하는 것으로는 전혀 충분치 않다. 애먼 전봇대를 뽑으며 시작한 정권이 3불정책을 전봇대마냥 뚝딱 뽑고자 덤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대지에 뿌리를 내린 나무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3불을 지켜야 하지만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더 넓게 뿌리내리게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뿌리는 더 나은 교육적 비전과 그것을 제도화하려는 실천임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에 진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