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 논술 자료함
도반 감상글 1.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변신, 그리고 또 다른 제안
프로이트 이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자주 회자되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사람들은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수많은 작가들 중에서 카프카의 문학 세계는 바로 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주로 기인하는 작품들이 많고 이 『변신』또한 그러하다. 그것은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제 글쓰기의 주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의 가슴에 안겨 푸념하지 못하는 것들만 글에서 털어놓았을 뿐입니다. 글쓰기는 아버지로부터의 작별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기 위한 방책이었습니다. 이 작별은 아버지에 의해 강요된 것이지만, 제가 정한 방침에 따라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변신에서 주인공은 자고 일어나 보니 <흉측한 해충ungeheures Ungeziefer>이 되어 있었다. <해충>이라는 말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폐만 끼치는 곤충을 의미한다. 곧 카프카가 아버지 때문에 스스로 느껴야 했던 자괴감의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소설 전반에 걸쳐 이 해충(이 된 그레고르)에 대한 묘사가 두드러지는데 이는 카프카 스스로가 얼마나 자신이 해충이라는 생각을 끔찍이도 갖고 있었는지가 드러난다. 예를 들면 첫 부분에서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아 결국 침대에서 떨어질 때까지의 묘사는 극히 장황하고 세세하다. 그토록 길고 세밀한 표현은 스스로 해충이라 여기는 이가 아니면 묘사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그것이 아버지로 인해 느끼는 감정 때문이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는데,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작품에서 그레고르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 사람들은 지배인, 누이, 어머니, 아버지이다. 그 외 하녀나 하숙객들이 있지만 그들의 영향은 유별나 보이지는 않는다. 먼저 누이와 어머니는 대체로 그레고르를 동정하고 사랑을 베푸는 역할을 하고 있다. 누이가 매일같이 그의 방에 음식을 갖다 주는 모습이나 <오빠>의 방 청소를 도맡아 하는 모습에서 그런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어머니의 경우에는 <그레고르에게 가게 좀 해줘요. 그 애는 불쌍한 내 아들이란 말예요! 내가 그 애한테 가봐야 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단 말예요?>라는 모성적 사랑을 담은 절규에서 그 같은 모습이 명백히 드러난다. 하지만,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지배인과 아버지는 그레고르와 적대적이라 할 수 있다. 지배인은 처음부터 그레고르를 인격체로 보질 않았던 것 같다. <우리 장사꾼들은 - 유감스럽게 생각하든 다행으로 여기든 - 약간 몸이 불편한 것쯤은 장사를 생각해서 매우 빈번히 그냥 참고 넘어가야 한다는 점입니다.>라는 말에서 그런 점은 명확히 노출되며 겨울밤 도심의 거리를 쓸어가는 칼 끝에 걸린 바람에 젊음이 맥없이 쓰러져 갈 즈음 나의 손에는 카프카의 '변신'이 들려있었다. 인간의 영혼을 피안으로 데려간다는 까마귀(카프카는 체코어로 까마귀임)의 섬뜩한 안광으로 부조리를 쏘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존재의 남루함은 이내 비참함 속에서 가루로 잘게 부서져 날리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아야만 했었고, 카프카의 생애는 나의 인생에 거침없이 투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는 나 자신의 흉칙함이었고, 무기력이었다.
어느 날 아침에 잠에서 깨었을 때 갑작스레 변한 벌레의 모습, 어느 누구나 불안 속의 현대의 삶에서 필연적 가능성을 내포하는 변신이라는 사건은 우리에게 강한 정신적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 비현실적 상황이 강렬한 리얼리티 속에 용해되어 독자들은 양자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 지고 또한 작품의 전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래서 카프카를 환상적 리얼리즘의 효시로 보기도 한다.
벌레의 육신과 인간의 의식과의 치열한 대립, 가족의 구성원들과 벌레가 된 그레고르 사이의 억압과 굴종, 나아가 직장이라는 사회 속에서 한 개인의 벌레와도 같은 존재의 무가치와 유용성이라는 메커니즘 아래서의 노동의 착취등은 크게는 인간의 소외라는 개념에 닿고 있다. 이러한 실존의 소외와 변신은 밀접한 관계에 놓인다. 이는 카프카 자신이 생전에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에 깊은 감명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의 작품의 보급에 있어서도 사르트르나 까뮈에 의해서 전세계에 전파되어진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으로의 변증법적인 실존의 발전 과정으로 작품을 해석할 수도 있겠다.
또한 마르크스적 소외의 개념인 타유화 과정 즉 노동에서의 소외, 생산물에서의 소외도 지적할 수 있다. 작가 자신이 사회주의에 심취하여 한 조직에서 활동에 전력을 쏟은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 영향 역시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가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에서 보여지는 어릴 적부터 형성된 열등의식(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초점을 맞춘 해석의 시도도 눈에 띤다. 유년기 유일하게 사회를 접하는 통로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아버지라는 데에 이견은 없다. 그때에 어린 카프카는 아버지의 강인한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대비시키면서 거대한 힘-사회까지 포괄하는-에 언제나 복종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에서 처절한 고독과 버림받은 존재의 쓰라림을 간직하고 살아야만 한다.
한편 카프카의 대사회적 상황이 바겐바하의 말처럼 '유태교도도 아닌 유태인에게서 태어났고, 독일인도 아니면서 프라하에서 태어났으며 시민계급도 노동계급도 아닌 이방인'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들뢰즈는 그의 문학을 소수집단의 문학으로 규정하면서 이러한 문학의 특징으로 정치성을 꼽고 있다. 카프카도 자신의 일기에서 문학은 문학사의 문제라기보다 민족의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문학과 정치적 문제와의 연계성을 드러낸다.
이렇게 하나의 작품에 대하여 수많은 관점에서의 해석의 시도가 가능하고 지금도 그 노력은 계속되는 엠리히의 말처럼 '불가해'한 작품이 바로 카프카의 소설들이다. 난해성, 은유, 상징으로 그 생명력을 키우면서 그 근저에는 삶이란 복잡한 실타래를 풀어보려는 작가의 노력이 숨어있기에 오늘날 우리에게도 변신한 벌레의 모습이 현재의 자신의 모습은 아닌지 섬뜩하고 가혹하게 되묻게끔 하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그레고르를 대면하게 되었을 때 그저 도망가기에 바쁘다는 점도 그런 증거이다.
도반 감상글 2.
'변신'을 읽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은 굉장히 독특한 방식을 띄고 있었다. 책표지에 나와 있는 프란츠 카프카의 외모부터, 그의 특이하다 못해 비정상적인 약력은 이미 책 내용의 비현실적인 특이성을 단적으로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그 모순적이고 상당히 비정상적인 이 소설에 깊은 호기심을 가졌고 '변신'은 그런 나의 호기심을 넘칠 듯이 채워주었다. 변신에 등장하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그 집안을 책임지는 실질적인 가장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가족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 '그레테'는 그레고르에게 모든 경제적인 생활을 의지하여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누가 봐도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성실히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안정감 있게 잘 짜여진 설정일 뿐이다. 카프카는 이 평화로운 설정을 첫 장면부터 모든 것을 엎어버리고는 다르게 전개시켜 나간다.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어 보니 그레고르는 자신이 아주 흉측하고 큰 벌레로 변신해 있었던 것을 깨닫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 카프카가 왜 여기에서 사람이, 그것도 성실하게 직장 생활을 해나가는 평범한 젊은이가 벌레로 변신 되어버리는 충격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물론, 벌레로 변신한 사건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것은 하나의 비유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나는 판단했다. 만약, 내가 지금 직장이나 가족들에게 벌레 같은 존재로 보여졌을 때, 과연 그들은 나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 할 것인지를 한번 지켜보자는 작가의 이상한 의도였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 보면 그의 누이가 아버지에게 '그레고르'에 대해서 발언을 하는 것은 볼 수 있는데, 대충 그가 벌레로 꿈틀거리며 살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그녀는 고작 '장난'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나는 그녀의 "저것이 장난하고 있어요!" 라는 외침을 읽고 나서 굉장히 놀라버리고 말았다. '그럼 이제까지 그녀가 그에게 조금이나마 베풀었던 친절은 뭐였을까? 다 가식이었던 것인가?' 라는 혼란 때문 이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또는 동물이 살아남기 위하여 지친 몸을 이끌고 힘들게 일어서려는 생존의지의 행동을 그녀가 말하는 [장난]으로 치부시켜버린다면 과연 그레고르는, 그의 행동의 진짜 본심을 어떻게 남에게 알려야 할까?
다시 한번 강조해 보지만 나에게 있어서 변신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던 한 남자가 일순간에 벌레로 변해버린 것도 그렇긴 했지만 나에게 가장 섬뜩했고 두려웠던 점은 그가 이제까지 자신의 꿈을 접어가며 먹여 살렸던 가족들은 그들의 이해타산에 따라 한 대상을, 그것도 자기의 오빠나 아들 이였던 존재를 각기 괴물로 보고 타인으로 인식하여 "없어져야 할 존재" 라고 중얼거렸던 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정상인의 사고로 생각을 했었을 때 그들의 행동을 나무랄 수는 없다. 어찌 보면 굉장히 자연스럽다 못해 당연하게 여겨진다. 내가 그 상황을 지켜보는 한 사람이 된다고 해도 나 역시 끝까지 그레고르를 믿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 만큼 그는 흉측한 괴물로 변신해 버려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동정표를 던져주지 않을 만큼...
'변신' 속에서 그와 가장 큰 갈등을 빚는 것은 역시 그레테, 하나뿐이고 그가 굉장히 자랑스러워했던 누이동생 이였다. 그녀는 그 흉측한 외양을 보는 것은 끔찍이 두려워하면서도, 종전의 오빠였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양심에 어쩔 수 없이, 그 극심한 공포감을 견디면서 오빠의 방에 출입한다. 물론, 그에게 음식을 마련해주는 것도 그녀였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굉장히 안도했었다. 그래도 이 불쌍한 그를 동정하는 이가 있구나!! 라는 일말의 기쁨을 자아냈었지만, 나는 곧 그것은 나의 착각 이였다는 것을 후반부로 넘어가서야 뚜렷하게 깨달았다.
결국, 누이동생이 그렇게 거짓호의를 베푸는 것은 다만, 그 상황으로부터 견디는 것이었을 뿐, 자발적인 호의는 아니다. 그걸 명확하게 드러내주는 것은 그가 괴물로 변한 것으로 말미암아 집안의 경제 사정이 더욱 어렵게 되자, 그녀가 "그를 죽이자."고 아버지에게 말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제까지의 습관 때문이었는지 그를 계속 돌봐 주고 있었지만, 누이가 차츰차츰 그의 이방인적인 괴물느낌과 자신의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뚜렷하게 자각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간다.
그러나 결코,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그레고르 잠자' 라는 인격과 자존심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점은 누이의 바이올린 연주 때, 자신이 아직도 음악을 좋아하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하지 말아야했을 행동을 저질러 버린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도 자신이 엄연히 '인간'이기 때문에 그걸 즐겨야 된다는 어떤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것은 온 식구들과 하숙생들의 분노를 샀다. 그들의 모욕적인 발언으로 인해서 그의 이런 강박관념 적인 태도는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지만, 가장 결정적으로 그는 누이동생의 "저건 인간도 아니에요.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들어버리게 된다.
그는 얼마나 상실감이 컸을까? 그래도 자신을 위해주고 생각 해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에 근근히 목숨을 연명해나가던 그레고르에게는 말할 수도 없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그 충격적인 말을 듣고 난 뒤, 즉시 죽게 된다. 결국 그레고르는 인간인 채로 죽는 것이 아니라 벌레로써의 죽음을 택한 것 같다. 따라서 그의 완전한 변신은, 이 최종 장면이자 소설의 가장 결론적인 부분은 바로 그의 죽음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는 몸도 마음도 모두 벌레로서 죽어갔다. 소설이 거의 마지막에 다다르게 되면 그가 결국 말라비틀어져 죽게 되는 것이 나오게 되는데 거기에서 우리는 가정부가 그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책에서는 그것에 대하여 아무런 거론도 하지 않았지만, 가정부의 말투나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카프카는 독자들에게 그의 처리 방법을 암시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짐작해 보자면, 카프카는 가정부의 입을 빌려 그의 비참한 죽음과 인간의 인성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레고르가 죽자, 가정엔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 라는 식으로 소설은 결말지어진다. 그런데 카프카는 이런 가족들의 그에 대한 견해를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무엇을 알리려고 했을까?
여기서 카프카는 가족 역시 이익 집단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솔직히 나는 부정하고 싶지만 읽다보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나는 이 장면을 곰곰이 되씹으면서 가족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레고르는 벌레이고 방에서 거의 나오지도 않으며 음식 또한 약간의 상한 찌꺼기이면 괜찮다. 그렇게 본다면 그레고르는 가족들에게 경제적인 짐이 되는 존재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그를 경멸했고 급기야 그의 등에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고통스럽게 박혀있다.
결국 나는 그의 가족들의 관심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벌레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수 없었던 그는 마침내 가족들로부터 ' 처리할 방법을 찾는 대상' 이라는 거추장스러운 명칭과 더불어 논의되어야 하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부조리한 세상. 그러나 누구에게 이 부조리의 책임을 묻는단 말인가? 유감스럽게도 아무도 그 책임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부조리한 세상은 결국 그레고르 그 자신이 만든 것이다.
앞에서 자주 거론했던 이야기이지만, 카프카의 글들은 대체로 난해하다. 그리고 종잡을 수 없다. 그나마 이 '변신'이 있어서 '프란츠 카프카' 라는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카프카는 구체적인 상황 묘사에 있어서 전혀 문학적인 표현이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글을 이해하기는 너무나 쉽지 않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그는 마치 꿈속에서 나오는 비현실적인 사건의 이어짐과 같이 글을 써내려 간다. 아마 나는 카프카의 작품성보다는 이제까지 내가 접했었던 여느 문학작품과는 전혀 다른 방식에 더 흥미가 있었던 것 같다. 느닷없이 장면이 바뀌고, 아무런 예시도 없이 뜬금없이 상황이 바뀐다. 나는 그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조금은 어렵지만 부조리한 인간의 삶을 글로 표현하자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그의 몽상적이고 난해한 작품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는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들로 나열 되어있는 글들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물론, 그를 닮아서 그 비정상적이고 해괴한 약력을 가지고 싶다는 소리는 아니다.
변신을 읽은 뒤에 나는 카프카의 여러 작품들을 읽어보았지만 역시 작품들 중 '변신'은 가장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의 작품들을 읽어나가면서 왜 사람들이 그를 '카프카는 위대한 몽상가다' 라고 찬사를 보냈었는지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작품은 비록 이해가 가는 작품은 아니지만 나는 그저 변신을 읽고 난 뒤 줄거리보다는, 작품의 난해하고 어려운 해설보다는, 난 나의 생각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도반 감상글 3
세상에 과연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본질은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에 감추어져 있고, 우리는 단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집착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로 살아가다가 죽는 것은 아닐까.
요즘 들어 부쩍 느끼는 것이지만, 늘 어떤 생각을 하고 지내지 않으면, 무엇을 접하든 거기서 느끼는 것이 별로 없게 마련이다. 그래서 카프카는 어려웠다. 왜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고 빙빙 둘러 말하는 거지? 비겁하게. 비현실적 설정을 하는 것 자체가, 부조리한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 자체를 꺼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카프카의 소설은 [변신]이후로 읽지 않았다. 답답했다. 그가 사용하는 기법들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군가가 카프카에 대해 논하면 나는 "그 작가? 어휴...."라는 말로 일축해버리곤 했다. 그런 카프카를 억지로라도 읽어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걱정부터 앞섰다. 싫은데........
"카프카 소설은 삶 자체이다. 十도 一도 아닌 그것 자체의 모호함과 부조리함..." 책의 첫 장 책을 읽은 누군가가 써 놓은 글이다. 없던 호기심이 생겨났다. 다시 처음부터 읽어내려 갔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가 마음에 걸리는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기가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커다란 벌레로 변한 것을 깨달았다.' ...역시 황당한 설정이다. 어, 그런데 신기했다. 한 문장 한 문장 씹어 삼켰다. 길지 않은 분량을 꽤 오랫동안 읽었다. 하나도 버릴 문장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 됐다. '비겁하지 않은 방법'으로 풀어썼다면 표현할 수 없는, 소위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는 인생의 모습들을 황당한 상황 설정 속에서의 상징을 통해, 정말 완벽에 가깝게 표현해내고 있었다. 왜 몰랐을까? 충격... 머리가 아파왔다. 모호한 것들로 둘러싸여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인데, 그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고 한다는 것 또한 진실이 아니다. 오히려 '벌레 같음'을 '벌레 자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더 정직하지 않은가. 비겁하다는 나의 비판을 듣고 카프카가 많이 억울했겠다.
그레고르는 벌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 심지어는 가족마저도 흉칙한 해충으로 변해버린 그의 모습에서 그의 영혼을 발견하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껍데기만이 바뀌었을 뿐인데, 음악에 감동할 줄 알고, 가족을 걱정할 줄 알고, 그런 감정이 있는 그레고르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벌레'라고만 생각한다. 결국은 '무늬만' 벌레인 그레고르를 그레고르가 '아니라'는 이유로 죽여버리는 가족들. [법 앞에서], 법에 다다르기 위해 왔던 사람이 원래의 목적은 잊고 겨우 첫 번째밖에 안 되는 문지기의 수염 속에 있는 벼룩까지 보게 되는 상황과, 가족들이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의 겉모습만을 보고 그를 죽여 버리는 상황은 너무나 비슷하다. 또한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진실을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어리석게도 눈에 보이는 껍데기들에 집착하여 그 속에 다다라야 한다는 생각조차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벌레의 형상을 하고 있든,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든, 그것이 가진 영원한 본질은 존재하는 것을...
그 동안 진실의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를 많이 느껴서 힘들었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단지 옳고 그름만이 있을 뿐...성급하게 이런 결론을 내릴 즈음, 카프카를, [변신]을, 다시 읽게 되어서 천만 다행이다. 깊이 생각하고 있었기에 보이는 것도 많았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나서> 정순구
책을 읽는 내내 과연 작가가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이 책을 썼는지 궁금했다. 주인공이 변신한 벌레에 대한 묘사가 너무 실감나게 나와 있어서 징그러운 생각이 끊이질 않았고, 작품을 쓴 의도도 쉽게 파악되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을 하다 보니 작가는 변신을 우리가 일생동안 살아가면서 예기치 못하게 벌어질 수 있는 변수들로 표현한 것 같다.
주인공은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는 나날 중에 갑자기 징그러운 벌레로 변신해 버리고, 가족들은 그런 변한 주인공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고, 그나마 돌봐주던 동생마저 시간이 지나면서 주인공이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로인해 주인공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되고, 서서히 죽어가게 된다. 이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예기치 못한 불행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주인공이 변신하게 되면서 가족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고 고독함을 느끼면서 죽었던 것처럼, 우리도 예기치 못한 사고나 질병 등으로 지금 현재의 모습과는 굉장히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나를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런 선입관이나 부정적인 생각 없이 예전의 나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또한 인정해 줄 수 있을까? 나를 피하거나 그저 빨리 없어졌으면 좋겠단 생각밖에 들지 않는 존재로 생각하진 않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들게 한다.
내가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내 내적인 모습이나 성격 등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모습만이 부각되는,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모습으로만 비춰지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굉장히 무서워 진다. 처음에는 그저 징그러운 벌레에 대한 생각만을 하고 읽었는데, 깊게 생각해 볼 수록 우리의 인생과 연관시켜서 생각이 들게 했다.
변신- 임환균
이 변신이라는 책을 나는 여러 번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을 때마다 평범한 독신 세일즈맨인 그레고르 자무자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그가 처한 상황 자체를 안타깝고 불쌍하다는 생각을 느끼게 된다. 열심히 살아온 그가 벌레로 변하자, 그에게 생계를 의존하던 가족들은 그를 버리면서 혐오스럽게 여기기까지 이른다. 열심히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살아온 그는 결국 열등감, 비애, 분노 등으로 인해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아 결국 죽게 된다.
내가 볼때 카프카는 현대 사회에서 열심히 자신의 앞길만 바라보며 사는 현대인들에게 그들이 지금 그대로 사는 모습은 벌래인 자무자와 다를 바가 없으며, 우리들 주위에는 우리들의 필요성과 우리의 존재로 인하여 그들이 취 할 수 있는 이득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를 버리는 그런 사람들을 곁에 두며 살아가는 이기적이고 고독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은 주제를 강하게 전달해주기 위해서 카프카는 사람이 곤충으로 변한다는 다소 말도 안 되고 충격적인 소재로 우리들에게 다가 온 것 같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변신, 그리고 또 다른 제안
프로이트 이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자주 회자되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사람들은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수많은 작가들 중에서 카프카의 문학 세계는 바로 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주로 기인하는 작품들이 많고 이 『변신』또한 그러하다. 그것은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제 글쓰기의 주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의 가슴에 안겨 푸념하지 못하는 것들만 글에서 털어놓았을 뿐입니다. 글쓰기는 아버지로부터의 작별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기 위한 방책이었습니다. 이 작별은 아버지에 의해 강요된 것이지만, 제가 정한 방침에 따라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변신에서 주인공은 자고 일어나 보니 <흉측한 해충ungeheures Ungeziefer>이 되어 있었다. <해충>이라는 말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폐만 끼치는 곤충을 의미한다. 곧 카프카가 아버지 때문에 스스로 느껴야 했던 자괴감의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소설 전반에 걸쳐 이 해충(이 된 그레고르)에 대한 묘사가 두드러지는데 이는 카프카 스스로가 얼마나 자신이 해충이라는 생각을 끔찍이도 갖고 있었는지가 드러난다. 예를 들면 첫 부분에서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아 결국 침대에서 떨어질 때까지의 묘사는 극히 장황하고 세세하다. 그토록 길고 세밀한 표현은 스스로 해충이라 여기는 이가 아니면 묘사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그것이 아버지로 인해 느끼는 감정 때문이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는데,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작품에서 그레고르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 사람들은 지배인, 누이, 어머니, 아버지이다. 그 외 하녀나 하숙객들이 있지만 그들의 영향은 유별나 보이지는 않는다. 먼저 누이와 어머니는 대체로 그레고르를 동정하고 사랑을 베푸는 역할을 하고 있다. 누이가 매일같이 그의 방에 음식을 갖다 주는 모습이나 <오빠>의 방 청소를 도맡아 하는 모습에서 그런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어머니의 경우에는 <그레고르에게 가게 좀 해줘요. 그 애는 불쌍한 내 아들이란 말예요! 내가 그 애한테 가봐야 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단 말예요?>라는 모성적 사랑을 담은 절규에서 그 같은 모습이 명백히 드러난다. 하지만,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지배인과 아버지는 그레고르와 적대적이라 할 수 있다. 지배인은 처음부터 그레고르를 인격체로 보질 않았던 것 같다. <우리 장사꾼들은 - 유감스럽게 생각하든 다행으로 여기든 - 약간 몸이 불편한 것쯤은 장사를 생각해서 매우 빈번히 그냥 참고 넘어가야 한다는 점입니다.>라는 말에서 그런 점은 명확히 노출되며 겨울밤 도심의 거리를 쓸어가는 칼 끝에 걸린 바람에 젊음이 맥없이 쓰러져 갈 즈음 나의 손에는 카프카의 '변신'이 들려있었다. 인간의 영혼을 피안으로 데려간다는 까마귀(카프카는 체코어로 까마귀임)의 섬뜩한 안광으로 부조리를 쏘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존재의 남루함은 이내 비참함 속에서 가루로 잘게 부서져 날리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아야만 했었고, 카프카의 생애는 나의 인생에 거침없이 투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는 나 자신의 흉칙함이었고, 무기력이었다.
어느 날 아침에 잠에서 깨었을 때 갑작스레 변한 벌레의 모습, 어느 누구나 불안 속의 현대의 삶에서 필연적 가능성을 내포하는 변신이라는 사건은 우리에게 강한 정신적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 비현실적 상황이 강렬한 리얼리티 속에 용해되어 독자들은 양자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 지고 또한 작품의 전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래서 카프카를 환상적 리얼리즘의 효시로 보기도 한다.
벌레의 육신과 인간의 의식과의 치열한 대립, 가족의 구성원들과 벌레가 된 그레고르 사이의 억압과 굴종, 나아가 직장이라는 사회 속에서 한 개인의 벌레와도 같은 존재의 무가치와 유용성이라는 메커니즘 아래서의 노동의 착취등은 크게는 인간의 소외라는 개념에 닿고 있다. 이러한 실존의 소외와 변신은 밀접한 관계에 놓인다. 이는 카프카 자신이 생전에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에 깊은 감명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의 작품의 보급에 있어서도 사르트르나 까뮈에 의해서 전세계에 전파되어진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으로의 변증법적인 실존의 발전 과정으로 작품을 해석할 수도 있겠다.
또한 마르크스적 소외의 개념인 타유화 과정 즉 노동에서의 소외, 생산물에서의 소외도 지적할 수 있다. 작가 자신이 사회주의에 심취하여 한 조직에서 활동에 전력을 쏟은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 영향 역시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가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에서 보여지는 어릴 적부터 형성된 열등의식(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초점을 맞춘 해석의 시도도 눈에 띤다. 유년기 유일하게 사회를 접하는 통로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아버지라는 데에 이견은 없다. 그때에 어린 카프카는 아버지의 강인한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대비시키면서 거대한 힘-사회까지 포괄하는-에 언제나 복종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에서 처절한 고독과 버림받은 존재의 쓰라림을 간직하고 살아야만 한다.
한편 카프카의 대사회적 상황이 바겐바하의 말처럼 '유태교도도 아닌 유태인에게서 태어났고, 독일인도 아니면서 프라하에서 태어났으며 시민계급도 노동계급도 아닌 이방인'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들뢰즈는 그의 문학을 소수집단의 문학으로 규정하면서 이러한 문학의 특징으로 정치성을 꼽고 있다. 카프카도 자신의 일기에서 문학은 문학사의 문제라기보다 민족의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문학과 정치적 문제와의 연계성을 드러낸다.
이렇게 하나의 작품에 대하여 수많은 관점에서의 해석의 시도가 가능하고 지금도 그 노력은 계속되는 엠리히의 말처럼 '불가해'한 작품이 바로 카프카의 소설들이다. 난해성, 은유, 상징으로 그 생명력을 키우면서 그 근저에는 삶이란 복잡한 실타래를 풀어보려는 작가의 노력이 숨어있기에 오늘날 우리에게도 변신한 벌레의 모습이 현재의 자신의 모습은 아닌지 섬뜩하고 가혹하게 되묻게끔 하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그레고르를 대면하게 되었을 때 그저 도망가기에 바쁘다는 점도 그런 증거이다.
도반 감상글 2.
'변신'을 읽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은 굉장히 독특한 방식을 띄고 있었다. 책표지에 나와 있는 프란츠 카프카의 외모부터, 그의 특이하다 못해 비정상적인 약력은 이미 책 내용의 비현실적인 특이성을 단적으로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그 모순적이고 상당히 비정상적인 이 소설에 깊은 호기심을 가졌고 '변신'은 그런 나의 호기심을 넘칠 듯이 채워주었다. 변신에 등장하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그 집안을 책임지는 실질적인 가장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가족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 '그레테'는 그레고르에게 모든 경제적인 생활을 의지하여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누가 봐도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성실히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안정감 있게 잘 짜여진 설정일 뿐이다. 카프카는 이 평화로운 설정을 첫 장면부터 모든 것을 엎어버리고는 다르게 전개시켜 나간다.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어 보니 그레고르는 자신이 아주 흉측하고 큰 벌레로 변신해 있었던 것을 깨닫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 카프카가 왜 여기에서 사람이, 그것도 성실하게 직장 생활을 해나가는 평범한 젊은이가 벌레로 변신 되어버리는 충격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물론, 벌레로 변신한 사건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것은 하나의 비유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나는 판단했다. 만약, 내가 지금 직장이나 가족들에게 벌레 같은 존재로 보여졌을 때, 과연 그들은 나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 할 것인지를 한번 지켜보자는 작가의 이상한 의도였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 보면 그의 누이가 아버지에게 '그레고르'에 대해서 발언을 하는 것은 볼 수 있는데, 대충 그가 벌레로 꿈틀거리며 살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그녀는 고작 '장난'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나는 그녀의 "저것이 장난하고 있어요!" 라는 외침을 읽고 나서 굉장히 놀라버리고 말았다. '그럼 이제까지 그녀가 그에게 조금이나마 베풀었던 친절은 뭐였을까? 다 가식이었던 것인가?' 라는 혼란 때문 이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또는 동물이 살아남기 위하여 지친 몸을 이끌고 힘들게 일어서려는 생존의지의 행동을 그녀가 말하는 [장난]으로 치부시켜버린다면 과연 그레고르는, 그의 행동의 진짜 본심을 어떻게 남에게 알려야 할까?
다시 한번 강조해 보지만 나에게 있어서 변신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던 한 남자가 일순간에 벌레로 변해버린 것도 그렇긴 했지만 나에게 가장 섬뜩했고 두려웠던 점은 그가 이제까지 자신의 꿈을 접어가며 먹여 살렸던 가족들은 그들의 이해타산에 따라 한 대상을, 그것도 자기의 오빠나 아들 이였던 존재를 각기 괴물로 보고 타인으로 인식하여 "없어져야 할 존재" 라고 중얼거렸던 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정상인의 사고로 생각을 했었을 때 그들의 행동을 나무랄 수는 없다. 어찌 보면 굉장히 자연스럽다 못해 당연하게 여겨진다. 내가 그 상황을 지켜보는 한 사람이 된다고 해도 나 역시 끝까지 그레고르를 믿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 만큼 그는 흉측한 괴물로 변신해 버려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동정표를 던져주지 않을 만큼...
'변신' 속에서 그와 가장 큰 갈등을 빚는 것은 역시 그레테, 하나뿐이고 그가 굉장히 자랑스러워했던 누이동생 이였다. 그녀는 그 흉측한 외양을 보는 것은 끔찍이 두려워하면서도, 종전의 오빠였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양심에 어쩔 수 없이, 그 극심한 공포감을 견디면서 오빠의 방에 출입한다. 물론, 그에게 음식을 마련해주는 것도 그녀였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굉장히 안도했었다. 그래도 이 불쌍한 그를 동정하는 이가 있구나!! 라는 일말의 기쁨을 자아냈었지만, 나는 곧 그것은 나의 착각 이였다는 것을 후반부로 넘어가서야 뚜렷하게 깨달았다.
결국, 누이동생이 그렇게 거짓호의를 베푸는 것은 다만, 그 상황으로부터 견디는 것이었을 뿐, 자발적인 호의는 아니다. 그걸 명확하게 드러내주는 것은 그가 괴물로 변한 것으로 말미암아 집안의 경제 사정이 더욱 어렵게 되자, 그녀가 "그를 죽이자."고 아버지에게 말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제까지의 습관 때문이었는지 그를 계속 돌봐 주고 있었지만, 누이가 차츰차츰 그의 이방인적인 괴물느낌과 자신의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뚜렷하게 자각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간다.
그러나 결코,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그레고르 잠자' 라는 인격과 자존심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점은 누이의 바이올린 연주 때, 자신이 아직도 음악을 좋아하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하지 말아야했을 행동을 저질러 버린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도 자신이 엄연히 '인간'이기 때문에 그걸 즐겨야 된다는 어떤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것은 온 식구들과 하숙생들의 분노를 샀다. 그들의 모욕적인 발언으로 인해서 그의 이런 강박관념 적인 태도는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지만, 가장 결정적으로 그는 누이동생의 "저건 인간도 아니에요.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들어버리게 된다.
그는 얼마나 상실감이 컸을까? 그래도 자신을 위해주고 생각 해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에 근근히 목숨을 연명해나가던 그레고르에게는 말할 수도 없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그 충격적인 말을 듣고 난 뒤, 즉시 죽게 된다. 결국 그레고르는 인간인 채로 죽는 것이 아니라 벌레로써의 죽음을 택한 것 같다. 따라서 그의 완전한 변신은, 이 최종 장면이자 소설의 가장 결론적인 부분은 바로 그의 죽음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는 몸도 마음도 모두 벌레로서 죽어갔다. 소설이 거의 마지막에 다다르게 되면 그가 결국 말라비틀어져 죽게 되는 것이 나오게 되는데 거기에서 우리는 가정부가 그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책에서는 그것에 대하여 아무런 거론도 하지 않았지만, 가정부의 말투나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카프카는 독자들에게 그의 처리 방법을 암시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짐작해 보자면, 카프카는 가정부의 입을 빌려 그의 비참한 죽음과 인간의 인성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레고르가 죽자, 가정엔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 라는 식으로 소설은 결말지어진다. 그런데 카프카는 이런 가족들의 그에 대한 견해를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무엇을 알리려고 했을까?
여기서 카프카는 가족 역시 이익 집단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솔직히 나는 부정하고 싶지만 읽다보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나는 이 장면을 곰곰이 되씹으면서 가족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레고르는 벌레이고 방에서 거의 나오지도 않으며 음식 또한 약간의 상한 찌꺼기이면 괜찮다. 그렇게 본다면 그레고르는 가족들에게 경제적인 짐이 되는 존재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그를 경멸했고 급기야 그의 등에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고통스럽게 박혀있다.
결국 나는 그의 가족들의 관심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벌레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수 없었던 그는 마침내 가족들로부터 ' 처리할 방법을 찾는 대상' 이라는 거추장스러운 명칭과 더불어 논의되어야 하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부조리한 세상. 그러나 누구에게 이 부조리의 책임을 묻는단 말인가? 유감스럽게도 아무도 그 책임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부조리한 세상은 결국 그레고르 그 자신이 만든 것이다.
앞에서 자주 거론했던 이야기이지만, 카프카의 글들은 대체로 난해하다. 그리고 종잡을 수 없다. 그나마 이 '변신'이 있어서 '프란츠 카프카' 라는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카프카는 구체적인 상황 묘사에 있어서 전혀 문학적인 표현이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글을 이해하기는 너무나 쉽지 않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그는 마치 꿈속에서 나오는 비현실적인 사건의 이어짐과 같이 글을 써내려 간다. 아마 나는 카프카의 작품성보다는 이제까지 내가 접했었던 여느 문학작품과는 전혀 다른 방식에 더 흥미가 있었던 것 같다. 느닷없이 장면이 바뀌고, 아무런 예시도 없이 뜬금없이 상황이 바뀐다. 나는 그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조금은 어렵지만 부조리한 인간의 삶을 글로 표현하자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그의 몽상적이고 난해한 작품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는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들로 나열 되어있는 글들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물론, 그를 닮아서 그 비정상적이고 해괴한 약력을 가지고 싶다는 소리는 아니다.
변신을 읽은 뒤에 나는 카프카의 여러 작품들을 읽어보았지만 역시 작품들 중 '변신'은 가장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의 작품들을 읽어나가면서 왜 사람들이 그를 '카프카는 위대한 몽상가다' 라고 찬사를 보냈었는지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작품은 비록 이해가 가는 작품은 아니지만 나는 그저 변신을 읽고 난 뒤 줄거리보다는, 작품의 난해하고 어려운 해설보다는, 난 나의 생각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도반 감상글 3
세상에 과연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본질은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에 감추어져 있고, 우리는 단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집착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로 살아가다가 죽는 것은 아닐까.
요즘 들어 부쩍 느끼는 것이지만, 늘 어떤 생각을 하고 지내지 않으면, 무엇을 접하든 거기서 느끼는 것이 별로 없게 마련이다. 그래서 카프카는 어려웠다. 왜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고 빙빙 둘러 말하는 거지? 비겁하게. 비현실적 설정을 하는 것 자체가, 부조리한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 자체를 꺼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카프카의 소설은 [변신]이후로 읽지 않았다. 답답했다. 그가 사용하는 기법들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군가가 카프카에 대해 논하면 나는 "그 작가? 어휴...."라는 말로 일축해버리곤 했다. 그런 카프카를 억지로라도 읽어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걱정부터 앞섰다. 싫은데........
"카프카 소설은 삶 자체이다. 十도 一도 아닌 그것 자체의 모호함과 부조리함..." 책의 첫 장 책을 읽은 누군가가 써 놓은 글이다. 없던 호기심이 생겨났다. 다시 처음부터 읽어내려 갔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가 마음에 걸리는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기가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커다란 벌레로 변한 것을 깨달았다.' ...역시 황당한 설정이다. 어, 그런데 신기했다. 한 문장 한 문장 씹어 삼켰다. 길지 않은 분량을 꽤 오랫동안 읽었다. 하나도 버릴 문장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 됐다. '비겁하지 않은 방법'으로 풀어썼다면 표현할 수 없는, 소위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는 인생의 모습들을 황당한 상황 설정 속에서의 상징을 통해, 정말 완벽에 가깝게 표현해내고 있었다. 왜 몰랐을까? 충격... 머리가 아파왔다. 모호한 것들로 둘러싸여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인데, 그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고 한다는 것 또한 진실이 아니다. 오히려 '벌레 같음'을 '벌레 자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더 정직하지 않은가. 비겁하다는 나의 비판을 듣고 카프카가 많이 억울했겠다.
그레고르는 벌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 심지어는 가족마저도 흉칙한 해충으로 변해버린 그의 모습에서 그의 영혼을 발견하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껍데기만이 바뀌었을 뿐인데, 음악에 감동할 줄 알고, 가족을 걱정할 줄 알고, 그런 감정이 있는 그레고르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벌레'라고만 생각한다. 결국은 '무늬만' 벌레인 그레고르를 그레고르가 '아니라'는 이유로 죽여버리는 가족들. [법 앞에서], 법에 다다르기 위해 왔던 사람이 원래의 목적은 잊고 겨우 첫 번째밖에 안 되는 문지기의 수염 속에 있는 벼룩까지 보게 되는 상황과, 가족들이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의 겉모습만을 보고 그를 죽여 버리는 상황은 너무나 비슷하다. 또한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진실을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어리석게도 눈에 보이는 껍데기들에 집착하여 그 속에 다다라야 한다는 생각조차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벌레의 형상을 하고 있든,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든, 그것이 가진 영원한 본질은 존재하는 것을...
그 동안 진실의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를 많이 느껴서 힘들었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단지 옳고 그름만이 있을 뿐...성급하게 이런 결론을 내릴 즈음, 카프카를, [변신]을, 다시 읽게 되어서 천만 다행이다. 깊이 생각하고 있었기에 보이는 것도 많았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나서> 정순구
책을 읽는 내내 과연 작가가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이 책을 썼는지 궁금했다. 주인공이 변신한 벌레에 대한 묘사가 너무 실감나게 나와 있어서 징그러운 생각이 끊이질 않았고, 작품을 쓴 의도도 쉽게 파악되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을 하다 보니 작가는 변신을 우리가 일생동안 살아가면서 예기치 못하게 벌어질 수 있는 변수들로 표현한 것 같다.
주인공은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는 나날 중에 갑자기 징그러운 벌레로 변신해 버리고, 가족들은 그런 변한 주인공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고, 그나마 돌봐주던 동생마저 시간이 지나면서 주인공이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로인해 주인공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되고, 서서히 죽어가게 된다. 이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예기치 못한 불행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주인공이 변신하게 되면서 가족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고 고독함을 느끼면서 죽었던 것처럼, 우리도 예기치 못한 사고나 질병 등으로 지금 현재의 모습과는 굉장히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나를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런 선입관이나 부정적인 생각 없이 예전의 나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또한 인정해 줄 수 있을까? 나를 피하거나 그저 빨리 없어졌으면 좋겠단 생각밖에 들지 않는 존재로 생각하진 않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들게 한다.
내가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내 내적인 모습이나 성격 등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모습만이 부각되는,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모습으로만 비춰지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굉장히 무서워 진다. 처음에는 그저 징그러운 벌레에 대한 생각만을 하고 읽었는데, 깊게 생각해 볼 수록 우리의 인생과 연관시켜서 생각이 들게 했다.
변신- 임환균
이 변신이라는 책을 나는 여러 번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을 때마다 평범한 독신 세일즈맨인 그레고르 자무자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그가 처한 상황 자체를 안타깝고 불쌍하다는 생각을 느끼게 된다. 열심히 살아온 그가 벌레로 변하자, 그에게 생계를 의존하던 가족들은 그를 버리면서 혐오스럽게 여기기까지 이른다. 열심히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살아온 그는 결국 열등감, 비애, 분노 등으로 인해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아 결국 죽게 된다.
내가 볼때 카프카는 현대 사회에서 열심히 자신의 앞길만 바라보며 사는 현대인들에게 그들이 지금 그대로 사는 모습은 벌래인 자무자와 다를 바가 없으며, 우리들 주위에는 우리들의 필요성과 우리의 존재로 인하여 그들이 취 할 수 있는 이득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를 버리는 그런 사람들을 곁에 두며 살아가는 이기적이고 고독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은 주제를 강하게 전달해주기 위해서 카프카는 사람이 곤충으로 변한다는 다소 말도 안 되고 충격적인 소재로 우리들에게 다가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