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햇살이 도톰하게 살이 오르고 있는 요즘,
지금은 모두 대학 2학년으로 열심히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 있을
사랑스런 05학번 도반들과의 아름다운 추억이 생각났습니다.

도반들과 강원도 깊은 산골로 무박이틀 모꼬지를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해 유난히 많은 눈이 내렸던 날
강원도 설악 아랫 자락 진동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며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지나갔습니다.

그 때 그 도반들 가끔씩 서로 만나기도 하고
이제는 같은 성인으로서 한 잔 나누는 즐거움도 있지요.
아마 우리들 사이에 이런 추억이 있어서
서로의 인연을 질기게 이어가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래 두 글은 이 때 함께 모꼬지 다녀 온 도반들이
모고지 후기를 글로 썼는데
그 중 두 편을 골라 싣습니다.
다시 읽으니 그저 '안습~!' 입니다.


도반 글 1

“허억... 허억...”
숨을 깊게 내쉬자, 하얀 입김이 눈앞 가득히 생겨났다.  
조금 전 귀 기울여 들어본 내 호흡이 고른 것 같아 안심되었다. 아직까지 나의 심폐기능에는 이상이 없는 듯 싶었다.  발가락도 까딱거려 보았다. 다행히 스패치 덕분에 신발 속에는 눈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단순히 버스 안에서만 입으려한 허술한 나의 청바지를 내려다보며 버스 안에 있을 새로 산 스키바지에 대한 갈망이 점점 더 커져갔다.
파삭거리며 부서지는 눈의 소리를 들으며 걷기를 얼마쯤 되었을까, 얼굴을 들어 보니 저 앞에 통나무집이 나타난 것 같았다. ‘그래 조금만 더 가면 되는구나...’ 그러나 새로이 생긴 기운으로 그 앞에까지 걸어가 보니, 그것은 임시 주거용 컨테이너박스였다. 아까는 전원주택, 그 전에는 동물농장을 보고 통나무집인 줄 착각하며 좋아했었는데... 문득 생각해보니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나는 착시현상에서 우러나온, 통나무집에 대한 강렬한 집념의 힘으로 눈을 헤쳐왔던 것 같다. 다시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고 오늘 새벽에 집에서 출발했던 일을 생각해 보았다.

가볍게 일어나서 즐겁게 집에서 출발해 친구들과 만나 버스를 탔었다. 그리고 예상과는 달리 6시간을 버스에서 보내며 지루해졌을 즈음에, 선생님께서는 도로에 눈에 너무 많이 쌓여 더 이상 가지 못하니 조금만 걸어가야 하겠다고 하셨다. 그 말씀에 답답해하던 친구들은 모두 좋아하며 모자를 쓴다, 장갑을 낀다 하면서 부산스럽게 짐을 뒤적였다. 그리고 짐은 나중에 버스를 통해 도착할 거니까 몸만 간단히 가자고 덧붙이시는 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청바지 위에 스패치만 두르고 버스에서 뛰쳐나왔다. 그렇게 두시간 가량의 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바로 오늘 아침에 시작된 일인데도 마치 몇 년 전의 일인 듯 기억에서 가물거렸다.

다행히 어느 학교에 도착해서 ‘패잔병의 모습’을 한 사진도 찍으며 숨을 돌리고 있자, 별장 주인 아저씨가 자동차를 가지고 마중 나오셨다. 그때 차를 타면서 본 아저씨의 모습은 마치 빛의 천사를 데리고 하늘에서 죄인들을 구원하러 내려온 메시아와도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통나무집. 신발도 털고 모자도 말리며 방에 주저앉아 10분정도 멍하게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전신을 차려 둘러본 집밖의 풍경은 오로지 눈... 새하얀 눈뿐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그렇다, 나와 친구들은 논술공부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 한파가 몰려와 고립되었을
때를 대비한 훈련을 하러 온 것이다. 걱정스레 전화를 받으시는 선생님의 모습은 마치 영화
쉬리에 나오는 최민식과 같으셨다. 그러한 의혹은 밤이 되자 버스로부터 도저히 별장까지 올 수 없겠다는 연락을 받고서 더욱 확실해졌다.

밤이 깊어지자 친구들은 주인댁이 사시는 곳 좀더 위에 지어진 전통 귀틀집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서로에 대한 질문을 하고 진지하게 대답도 하며 피로를 풀었다. 질문을 할 때는 가볍게 했는데 막상 내 차례가 되어 친구들의 질문에 대답할 차례가 되자 긴장이 되었다. 그래서 초반의 몇몇 질문들은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답을 해주어서 약간 놓쳐버린 질문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질문이 계속되자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대답을 하면서 어느 정도 성실하게, 내 자신을 한번 더 뒤돌아보며 답해주었다. 친구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 동안 몰랐던 새로운 면을 많이 알았다. 특히 같이 갔던 선생님의 제자인 오빠에게는 학업에 대한 집중적인 질문이 쏟아졌다. 그분의 말씀을 통해 아이들이 많이 위안도 받고 도움도 얻은 것 같다. 나 역시도 오빠의 솔직한 인생의 선배로서의 말이 가슴속에 많이 남았다.

저녁식사후의 우리는 선생님의 주최하의 조금의 운동을 곁들인 레크레이션 시간을 가졌다. 도망가고 뛰느라 땀도 많이 났지만 웃기도 많이 웃었다. 그리고 숙소로 간 우리에게 선생님께서는 라면과 함께 직접 담그신 특A품의 매실주를 주셨다. 매실주라 그런지 끝맛이 혀에 감기는 것이 부드러웠다. 취할까 다소 걱정도 되었지만 괜찮아 보여서 몇 잔 더 마셨다. 그리고 친구들과 이야기도 하고 노래부르는 것도 들으며 김치부침개도 열심히 먹었다. 친구들의 뺨에도 어느 새 홍조가 어리고 모두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친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들중의 가장 얌전했던 친구가 자신의 속마음을 속사포처럼 털어놓기 시작했는데, 그 친구의 의외의 모습과 그 속마음을 들으며 그렇게 웃은 것도 참 오래간만이었다. 그렇게 웃고 즐기다 아이들은 하나둘씩 이불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나도 어느 덧 잠이 들었다. 잠든 뒤 눈을 떠보니 다음 날 아침 열시 반이었다...

부랴부랴 주인댁으로 가 아침식사를 하고 MT를 온 기념으로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을 다리미로 천에 새겨 남기는 작업을 하였다. 모두들 크레파스를 앞에 두고 무엇을 그릴까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들이 정말 진지하였다. 나도 생각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옆의 친구를 보니 벌써 까마귀의 세 번째 다리를 그리고 있어 나도 손바닥을 발전시킨 나의 자체 캐릭터를 그렸다. 모두들 그림을 선생님께 드리고 2층 난간에 대롱대롱 매달려 구경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모두의 발바닥만 보여 나도 올라가서 같이 그 일원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천에 새겨진 우리들의 그림들은 꽤 멋있는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비록 선생님의 실수로 ‘패불 50학번’이 되었지만...

그렇게 아쉽게 오전 스케줄을 마치고 나자 다시 버스로 되돌아갈 것이 까마득하였다. 그래도 한숨을 앞세우며 마음을 다잡아 다시 등산화의 끈을 조였다. 그러나 다행히 도로의 길이 많이 치워져 조금만 힘겹게 걸어가고 나머지는 편하게 걸어가다 후진하며 다가오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올 수 있었다.

무박 2일... 처음으로 간 MT 였지만, 내 속에 그 많은 즐거움과 웃음을 가지고 돌아오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될 수만 있다면 걸어가며 마주친 그 모든 눈보라와 눈송이들도 품고 오고 싶었다. 친구들과 함께 지낸 시간과 매실주를 곁들인 밤은 다른 사람들에게 단순히 이야기 해줄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아니라 영원히 녹지 않을 추억으로 내 속의 한 부분을 영원히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시간을, 공간을 나눈 친구들도 나에게 영원히 남을 것이다.



도반 글 2

  아침 6시, 아버지의 차 안에서 졸고 있는 나. 원래 6시에 모이기로 했는데도 불구하고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제 시간에 학원 앞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보다 늦는 사람이 있겠지...’ 라는 이상한 생각(?)에 잠기며 졸다가 한 10분쯤 늦어서야 도착을 했다. 그 때 내 차림 낮이었더라면 아주 웃겼을 것이다. 등산을 할 것이라는 말에 쫄바지 같은 등산 바지에 짐을 꽤 빵빵하게 넣은 커다란 여행용 가방에 상의는 두툼한 파카. 흔히 쓰는 말로 ‘언밸런스’(!)한 복장을 하고 있는데, 마침 또 버스 앞에서는 아주머니들 몇몇 분이 모여 계셨다. 인사를 하면서 고개를 푹 수그리고 들어가니 선생님께서 따뜻한 얼굴로 맞아주셨다.(나중에 핸드폰을 보니 문자에다가 부재중 전화까지 있었다. 죄송합니다.) 버스 안에서는 애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졸리지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캠프를 간다는 생각에 모두들 즐거웠던 것이다. 6시간 후의 행군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기에...

  선생님께서는 한 오전 10시쯤 되면 넉넉하게 도착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가뿐한 마음으로 잠을 보충하다가 (밤샘을 한다고 하기에 체력 보충) 휴게소에 내려서 선생님께서 사주시는 갈비탕 한 그릇 후루룩 말아서 맛있게 아침을 뚝딱 해치우고, 펀치 머신도 한 번 건드려 보았다. 펀치 머신에 나오는 숫자가 굉장(!)했기에 신나게 치고 차고 하다가 버스에 올라탔다.

‘아, 조금만 더 가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버스 안에서 ‘너구리들의 전쟁’(정확한 제목은 잘 모르겠어요)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보게되었다. 너구리들을 빌려서 사람들이 개발이란 명목 하에 자연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실상을 그리는 것이었다. 너구리들이 사람들을 겁줘 쫓아내기 위해 실행한 ‘요괴 대작전’마저 사람들에게 이용되고 마는 대목에서 너무나도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러면서 결국은 인간 세상에 동화되어 버리고 마는 너구리를 보며 ‘드래곤 라자’라는 판타지 소설을 떠올렸다.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주인공 후치는 마지막 ‘드래곤다운 드래곤’인 아무르타르(맞나?)를 더 서쪽으로 가게 한다. 이미 다른 드래곤들은 드래곤 라자가 필요 없을 만큼 인간에 동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는 또 의미심장한 구절 하나가 반복된다. ‘엘프가 숲을 걸으면 바람이 되고, 인간이 숲을 걸으면 오솔길이 생긴다. 엘프가 별을 보면 별이 되고, 인간이 별을 보면 별자리가 생긴다.’(정확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음. 읽은 지 좀 되서...) 엘프는 자연에 동화되어 살지만 인간은 자연을 자신들의 위주로 고쳐 산다는 것이다. 그만큼 인간은 자신들을 위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인간만큼 존귀한 것은 없다.’ 또는 ‘인간의 목숨은 다른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다.’등등... 정말이지 인간 위주의 말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사람 목숨이나 파리 목숨이나 한 생명체의 목숨인 것이다. 그 무게를 생명의 저울에 놓고 저울질 한다면 똑같이 무게가 나갈 것인데, 사람들은 대부분 파리 목숨이 하찮은 것이라고 여긴다. 심지어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만 못하다.’라는 말도 있다. 파리 목숨이 어때서? 파리 목숨도 파리 자신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우리에게 우리 목숨이 소중한 것처럼 말이다. 사람이라는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이 필요하다.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으므로.


  앗, 이야기가 옆으로 새버렸다. 다시 수련회 체험기로 돌아가서. 그렇게 털털거리는(?) 버스를 타고 가서 어느덧 강원도 어귀에 접어들었다. 길가의 풍경이 달랐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눈이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는 것이다. 정말 서울에서는 눈이 온건지 만건지 할 정도로 내리다 말았는데 여기 눈은 화끈하게(!) 내렸다고 말할 정도로 많이 내렸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정말 눈이 많이 오지 않으면 이런 경험은 하기 힘든데 그렇게 눈을 푹푹 밟게 되니 기분이 괜히 좋았다. 푹푹.

잠시 내려서 볼일을 보고 다시 버스 출발! 버스 안이 덥고 목도 아프고 좀 지겹기도 하고 할 쯤, 버스가 턱하니 멈춰버렸다. 수련회의 일정이 180도 바뀌는, 비극이라면 비극이라고 할 수도 있고 희극이라면 희극이라고 할 수도 있는, 전주곡이 시작된 것이다. “눈이 엄청 쌓였네요~!”버스 운전 기사 아저씨께서 머리에 얹힌 눈을 탁탁 털며 들어오시며 하신 말씀. 그 때 그 분의 헤어스타일(!) 덕분에 우리는 또 한 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 길을 보시기 위해서 버스에 내려 길을 걸으시는 동안 우리 역시 내려서 막 뛰고 눈 던지고 만져도 보고 했다. 그것 역시 몇 분 후의 행군을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눈을 즐기기 위해서 였다고나 할까...

선생님께서 들어오시며 하시는 말씀. “버스로 들어가기 힘들겠는데?” 우리는 그 때 캠프를 못하고 다시 서울로 가야하나 라는 너무나도(!) 비극적인(!) 생각까지 했다. 다행히 아니었지만. 잠시 후, 굉음(?)이 울리더니 우람하고 믿음직스럽고 든든하고 멋있는(!) 포크레인이 와서 우직하게 길 앞의 눈을 마구마구 퍼내기 시작했다. 그 때는 정말이지 포크레인 운전 기사 아저씨처럼 멋있어 보이는 아저씨가 세상에 없다는 생각까지 했다. 우리는 엄두도 못 낼 제설 작업을 혼자서 포크레인 한 대를 가지고 무지막지하게 행하시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씨익 웃으시면서 하시는 한 마디.“꼭 가야 되요?” 윽, 포크레인으로도 완전 제설은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하는 수 없었다. 우리가 가진 가장 미끈한 신체부위, 두 다리로 저 눈길을 헤쳐나가는 수밖에. “얘들아, 매는 가방 있는 사람은 가방에다가 따뜻한 물 넣은 보온병 넣고, 옷 따뜻하게 입어라.”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버스 기사 아저씨와 여러 가지 상의를 하시는 듯 했다. 아마 버스를 일단 뒤로 빼고, 우리가 먼저 가벼운 차림을 해서 통나무집에 도착을 하면, 제설 작업이 되는 대로 버스로 무거운 짐들 - 우리 짐도 포함해서 - 을 나르기로 하신 것 같다.


  우리는 등산할 때의 차림(적어도 나는 그랬다. 추울 것 같아서)으로 가방 맬 사람은 매고 해서 가볍게 출발했다. 처음 눈길은 무릎도 푹푹 빠지고 하는게 재미있었다. 평상시에는 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물론 강원도에 시골을 두고 있는 사람들은 많이많이들 경험했겠지만. 막 뛰어도 가고, 눈 위에 드러누워도 보았다. 영화에 보면 눈이 수북히 쌓여있는 곳에 사람이 털썩 누우면 사람 자국이 그대로 남는 것이 기억나서 해본 것이다. 처음에는 손자국만 내다가 해본 것인데 의외로 꽤 재미있었다. 그래도 계속 털썩털썩 드러누우면서 갈 수는 없기에 다시 탈탈 털고 일어나서 가던 길을 계속 갔다. 한참 가다보니 계속 눈이 무릎에 쌓이자 조금은 지쳤다. 그래서 영화에 나오는 장면을 또 하나 흉내내 보았다. 전쟁 영화나 모험 영화 같은 것들을 보면 눈길 위를 행군하다가 사람들이 픽픽 쓰러지면서 “나는 이제 가망이 없어. 나는 놔두고 너희들 먼저가.”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딱히 무슨 영화에 나온다는 것은 잘 모르겠다. 그냥 왠지 많이 본 장면인 듯 했기에) 눈도 좀 날리고 했기에 한 번 따라해 보았다. 물론 곁에 있던 아이들의 반응은 ‘제 왜 저래. 잠을 제대로 못 잤나봐.’였을 것이다(보긴 봤을는지...안 봤으면 다행이다. 휴~).


  이제 그 눈을 이용한 유희도 접을 때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무시하고 통과했던 눈보라가 조금씩 세지기 시작한 것. 어떨 때는 너무 아파서 총알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물론 총알 스쳐 지나가는 경험은 못해봤지만 왠지 그럴 듯)아픔이 얼굴 전신에 퍼졌다. 처음에는 ‘어떨 때’만 눈보라가 아팠는데 어느 시점부터는 ‘언제나’ 눈보라가 총알 같았다. 처음에 눈보라가 회오리처럼 휘감겨 올라갈 때의 반응은 “와~! 멋있다~!”였는데 계속 눈보라를 맞고 나니까 눈보라가 휘감겨 올라가는 것만 보아도 “조심하자. 또 온다.”하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는 등뒤에서 전해져오는 강풍. 무릎이 푹푹 빠지는 눈 길 속에서도 흐르는 콧물을 훌쩍거려가며, 눈보라 올 때마다 견디어가며 걸어갔다.

하지만 눈보라가 지나가고 나면 우리의 말소리를 제외하면 엄청 조용했다. 차가 지나다니지도 않고 사람도 많지 않아서 인지 가끔가다가 나타나는 개들이 짖는 소리를 제외하면 조용한 눈길이었다. 경치도 푹 감상할 수는 없었지만 보기힘든 경치였다. 눈이 덮인 산이 양쪽에 늘어서서 계곡을 이루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계곡 이름이 진동 계곡이었다. 과연 눈보라가 치기 시작하면 계곡이 윙윙하면서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역시 지명은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다. 어떤 눈보라는 한 번에 얼굴을 팍 치는데 진짜 엄청난 수의 바늘이 한꺼번에 쏘아져서 때린 것처럼 엄청나게 아팠다.


  중간에 진동초등학교 분교에서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계속 걸어갔다. 굽이굽이 돌 때마다 집이 한 집씩 나타났고, 그때마다 우리는 “저 집인가요?”를 여쭸고, 선생님께서는 “아니, 좀 더 가면 돼.”라고 하셨다. 한 네다섯 굽이정도 지났을까. 마침내 우리의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와~저기다!” 목적지가 보인다는데 힘을 얻은 우리는 열심히 걸어갔고, 마침내 ‘세쌍둥이네 집’이라는 현판의 통나무집에 도달했다.

왜 세쌍둥이인지는 집에 들어가서야 알았다. 꼬마애들 세 명이 컴퓨터 앞에 모여서 옹기종기 놀고 있는데 걔들이 모두 쌍둥이란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는 엄청 신기해했다. 그리고 새삼 통나무집의 아주머니가 위대(!)하시다고 느꼈다. 신발을 벗으면서 우리는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쳐(!)온 통에 신발이고 양말이고 다 젖어버렸던 것이다. 내 경우는 좀 더 심했는지 신발이고 바지고 양말이고 전부 얼음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내 딴에는 다 털었다고 생각하고 마루에 털썩 앉았는데 뭔가 부스럭 하더니 얼음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바지 속 까지 얼음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얼음을 털러 다시 현관으로 향했다.


  눈길을 헤쳐오느라 모두 지친 우리는 아주머니께서 지어주신 점심밥을 맛나게 먹었다. 지친 우리는 여기저기에 기대어 휴식을 취했다. 그러면서 벌어진 369 게임. 벌칙은 저녁 청소, 설거지, 뒷처리 당번을 맡는 것이었다. 계략(!)이었는지 우연(!)이었는지 그 6번 369 게임에서 한 사내와 한 여인(다 알지? 말하면 당사자들 창피하잖니)만이 당번으로 걸렸다.

뒤이어진 쿵쿵따에서는 잘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던 까닭에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2시간 동안 걸어오느라 피곤에 지친 아이들은 한동안 조용히 있었다. 그리고는 우리 눈에는 낯설었던 통나무집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올려다보는 내 머리의 정면에 위치해있던 나의 두 눈에 발견된 것은 한 구절의 문장. “사람, 나무 함께 어울려 향기로운 빛이 되소서”라고 천장의 통나무에 새겨져 있었다. 지쳐있던 나의 눈에서 번쩍 띄이는 문구였다. 별다른 메모 도구가 없었던 나는 바로 핸드폰을 펼쳐 들고 메모장 기능을 이용해서 적어 넣었다. 이럴 때는 핸드폰이라는 도구가 참 편리하다. 별다른 것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메모장, 계산기, 달력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도구가 되어주는 것이다. 핸드폰의 위력을 실감하는 동시에 점점 우리의 생활이 과학에 대한 의존성이 높아져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눈에 띈 것은 이층에 올라가 있던 아이들. 나 역시  바로 이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이층에는 우리 몸만한 크기의 유리창이 있어서 밖을 훤히 다 보여주고 있었다. 유리창을 통해 보는 바깥 세상은 참 아름다웠다. TV에서나 보던 설경이었다. 밖에서 눈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니 경사진 지붕을 따라 만들어진 책장과 그 옆에 놓인 소파. 참 아늑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옆에 있던 방에 들어가보니 판자를 이용해서 한 방을 반 이층으로 만들어 놓았다. 사다리를 이용해서 오르락내리락 할 수 있었는데, 안 쓰는 방이라서 그런지 조금은 썰렁했다.

  그렇게 통나무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선생님께서 윗집으로 올라오라고 하셨다. 가보니 이불이 깔려 있어서 거기서 자는 것인 줄 알았는데 자는 것은 아랫집에서 잘 것이라고 하셨다. 나중에 설명을 들으니 윗집은 전통적인 귀틀집이라고 하셨다. 나무를 엇갈려 쌓아 올린 다음 한지를 A4크기로 잘라서 두겹의 두께로 일일이 붙인 것이라는 것이다. 처음으로 귀틀집이라는 것을 봐서 그런지 매우 신기했다. 나무를 엇갈려 쌓아올려서 그런지 벽도 울퉁불퉁했다. 한지라 그런지 촉감은 대개 좋았다.

아궁이에서 불을 뗀 것의 열기가 슬슬 방바닥으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따뜻한 게 이불 속에 있는 것이 엄청 좋았는데 나중에는 후끈거려서 오히려 이불을 깔고 있었다. 그 곳에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궁금했던 것들을 질문했다. 금방 끝나리라고 예상했는데 저녁을 먹을 시간이 다 되어갈 때까지 질문과 대답은 끝나지 않았다. 평소에 그 아이에 관해 궁금했던 것들이라든지 어떤 가치관에 대한 자신의 견해 같은 것들이 오고 갔는데 이 질문과 대답을 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에 대해 좀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질문과 대답을 하는 사이사이에는 장난끼 어린 말들이 오가며 계속 웃었지만 질문과 대답을 할 때는 모두가 경청해서 그 질문과 대답을 들었다.


  도중에 저녁을 먹는 시간이 다 되어 통나무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맛있게 저녁을 먹고 난 후, 우리는 암담한 소식을 하나 들어야 했다. 바로 짐이 못 온다는 것이었다. 눈이 너무 쌓인 관계로 버스가 숙소로 올라오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짐을 구하러 가야만 한다’고 주장했지만, 밤길이 얼마나 어둡고 추운지를 한 번 느낀 후(윗집에서 통나무집으로 올 때) 그 주장은 조금 수그러들었다. 몸풀기 겸 게임으로 서로서로 안마해주거나 지압, 그리고 손을 꼬아 이어서 다시 원래대로 하는 것을 했다. 안마와 지압을 할 때 내 상대가 된 모양(?)은 내가 누르는 것이 아픈 듯 연신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그 때는 몸에 좋다고 해서 아픈게 몸에 좋은 것이라고 달래(?)가면서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많이 미안하다. 내 어릴 적에 아버지가 내 어깨를 장난으로 주무르신 적이 있는데 그 때 어린 나로서는 그 엄청난(!) 압력을 이를 악물고(!) 버텨낸 기억이 난다. 아마 모양도 그런 심정이 아닐까. 다시 한 번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나중에는 전체가 모여서 원을 그리며 앉아서는 여러 가지 게임을 했는데 중간에 있는 사람만 무지하게 맞는 놀이도 있었고(놀이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음) ‘여우와 토끼’라고 해서 손수건 돌리기 게임이 한 두 단계쯤 업그레이드된 게임도 있었다. 한 7명이 같이 모여서 한꺼번에 같이 일어나는 게임도 있었는데 처음에는 한꺼번에 일어서지 못하고 중간에 몇 명은 엉덩방아를 찧거나 자빠지는 등 상당히 힘들었는데 서로가 손잡는 방법을 바꾸니까 너무나 쉽게 되었다. 우리 역시 하면서도 놀라웠다. 단지 손잡는 방법을 약간 바꿨을 뿐인데 이렇게 쉽게 되다니. 세상사의 진리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세상에 대한 관점이 약간만 차이가 나도 그 사람의 사는 방식은 거의 180도 회전을 하게 된다. 바꿔서 이야기하면 관점을 약간만 바꾸게 되면 세상을 훨씬 더 행복하게 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우리로서는 잘 모른다. 그것을 진작에 알았다면 우리는 벌써 석가모니나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럼 세상도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겠지.


  게임 후 우리는 다시 윗집에 올라갔다. 우리 중에서 선생님을 따라온 형과 누나가 계셨는데, 아궁이의 불이 꺼져 있었기에 형께서 부탄가스를 이용해서 화염방사기를 방불케하는 기구(정확한 이름은 잘 모른다)로 불을 쏘아대었는데도 나무에 불이 붙지를 않았다. 형이 포기하고 아궁이를 떠나자 모 군(?)이 와서 종이를 태우면서 불을 붙이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옆에서 나무 막대기를 하나 쥐고 불 붙이는 것을 도와주었다. 모 군의 말대로 하니까 신기하게도 불이 붙는 것이었다! 정말 신기했던 나는 커진 눈을 연신 비비벼(약간 졸렸으므로)불타는 나무를 바라보았고, 모 군은 왜 안 붙던 불이 붙었는지를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정말 신기했다. 부탄가스 한 통을 다 써도 안 붙던 불이 단 종이 4~5장을 태우니까 활활 잘 붙는 것이다. 우리가 신나게 나무를 더 때서 방이 따뜻한 정도를 넘어서서 손가락을 대면 대일 정도로 뜨거워질 정도가 되서야 우리는 방에 들어갔다.


  이불을 겹겹이 바닥에 깔고 중단되었던 질문과 대답을 마저 했다. 뒤에 한 사람 중에는 나도 껴 있었는데, 질문할 때는 몰랐는데 대답할 때가 되니까 상당히 내 자신이 진지해지는 듯 했다. 그러면서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잘 알 수 있기도 했다. 혹시나 대답 실수나 했는지 모르겠다. 형은 우리의 질문을 받아서 이야기를 상당히 많이 해주신 듯 하다(지금 기억이 약간 가물가물하기에. 누나는 질문만 하시고 대답할 때는 하시지 않은 듯). 인생의 선배로서 우리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셨다고나 할까.


  그렇게 시간은 흘러흘러 벌써 1시. 가래떡팀 3명은 남고 나머지는 아랫집에 내려가서 라면을 준비하기로 했다. 이 라면은 통나무집 아주머니께서 제공해주신 것이다. 원래는 우리가 다 가져왔어야 하는 건데 짐이 묶이는 바람에...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연의 힘이니까. 자연의 힘 생각하니까 옛날에 ‘삼국지’에서 읽은 것이 기억난다. ‘삼국지’에 보면 촉한 승상 제갈 공명이 기산을 6번째인가 쳤을 때 숙적인 사마 중달을 없애기 위해서 최후의 전략을 쓰게 된다. 즉, 한 번 써먹으면 두 번 다시 쓸 수는 없지만 한 번 성공했을 때의 효과가 엄청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침내 자신의 계략대로 사마 중달을 호로곡에 몰아넣은 제갈 공명은 그러나 비가 내리는 바람에 호로곡의 지뢰가 터지지 않아 사마 중달을 죽이는 데 실패하고 만다. 그것을 보면서 제갈 공명은 하늘을 향해 탄식한다. “계략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지만 그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하늘이구나!”(맞는가 모르겠다) 또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다시 돌아와서 나를 포함한 3명이서 가래떡을 굽는데 정말 힘들었다. 가래떡이 생각만큼 맛있어 보이지 않아서 “누가 이걸 먹을까?”라는 생각까지 했다(나중에 우리가 먹어봤는데 맛있었다). 다 굽지는 못하고, 한 5~6개쯤 구워서 아랫집으로 내려왔다. 이미 거기에서는 라면을 끓일 준비가 거의 완료된 상태였고 원으로 빙 둘러 앉아서 김치전, 김치 등을 야식 삼아 먹고 있었다. 우리는 가래떡을 가운데에 놓고 각자 원 사이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정신을 차려보니 왠 투명한 노란 액체가 든 병이 있는 것이었다. 이름하여 매실주. 옛날에 매실주 한 잔을 우연히 마셔본 나에게 매실주는 술이 아니라 오히려 달콤한 물이라는 개념이 강했다. 물론 좀 취하기는 하겠지만.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이 매실주는 장난이 아니었다. 선생님께서 따라주시는 술을 한 잔씩 마시고는 다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거나 자작하기 시작했다. ...(중략)...


  아침에 일어나니 시간은 벌써 10시 반. 새벽 6시 인줄 알았다. 아침(?)에 일어나 정신을 좀 차리고 아침 식사를 하러 통나무집으로 향했다. 어젯밤의 뒤탈 때문인지 식사가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아침은 거르지 않는 습관이 있어서 아침 식사를 끝내 다 하고야 말았다. 아침 내내 느낀 거지만 역시 알코올이 들어간 것은 많이 마시면 안 된다.


  아침 식사 후, 우리는 우리 논술 교실에 걸려있는 그림이 그려진 천 같은 것을 만들기로 했다. 재료는 크레파스, 사포종이, 커다란 천, 그리고 다리미. 내내 구상해서 기껏 이상한 모양의 상자 하나 밖에 그리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심오한 의미를 주었다. 이층에서 완성되어가는 천을 내려다보며 감회에 젖었다. 우리도 저런 걸 했다는...


  드디어 귀환 시각이 닥쳐왔다. 모두들 하루만 더 있었으면 하는 표정들이었지만 어쩌랴. 가는 수 밖에. 다시 원래 자기의 짐을 챙겨 들고 길을 나섰다. 길도 전날 만큼 푹푹 파이진 않았고(물론 중간에 허리까지 오는 곳이 있어서 엄청 고생했지만) 두런두런 이야기도 하면서 왔기에 전날 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길 중간까지 올라와 있던 버스를 만나자 “좀 더 걸었으면 좋겠는데...”라는 생각마저 할 정도였다.

  버스를 타고 이제 집에 편히 가려나 했더니 또 트럭이 길을 막았다. 바퀴가 빠진 것. 다른 트럭까지 동원해가며 그 트럭을 눈 구덩이에서 빼내주고 우리는 의기양양할 때 형이 나지막하게 최악의 시나리오를 하나 이야기해주셨다. “만약에 우리 버스가 눈 구덩이에 빠지면 어떻하지?” 설마하는 마음에 버스에 뛰어온 우리는 다행히 버스가 잘 가서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곧 버스는 멈춰서버렸고, 선생님께서는 곧 우리를 다시 불러낼 듯 하셨다. 누군가(!) “5분만요~”를 외쳤고 그 후에 버스 기사 아저씨의 노련한 경험에 의해 우리가 뒷자석에 몰려 앉음으로써 버스는 무사히 눈 구덩이를 탈출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편안히 집에 오는 길만 남아있었다. 휴게소에 들르기 전까지는 계속 잠만 잤다. 그동안의 일과가 우리 몸에는 너무나 피곤했는지도 모른다. 휴게소에서 선생님이 사주시는 우동 한 그릇을 먹고 기운을 내 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오면서 애니메이션을 또 하나 보았는데 제목이 ‘반딧불의 묘’라는 것이었다. 다 보지는 않아서 전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일본을 그린 듯 했다. 이 상황에서 나타나는 비인간적인 일들이라든가, 주인공 남매를 대표로 하는 일본 서민들의 전후 모습 등을 비춘 이 애니메이션은 지금 현대 사회를 역설하고 있는 듯 했다. 지금의 경제 전쟁 역시 빈곤층을 양산해 냄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제 2차 세계대전과 다를 바 없는 전후 빈민들을 양산해내고 있다고.


  학원 앞에 도착함으로써 우리의 1박2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수련회는 끝이 났다. 그 동안 서로가 학원에서만 만나고, 자칫 딱딱해질 수도 있는 토론이나 의견 제시 같은 것만 해서 서로가 서먹했는데 이번 수련회를 계기로 서로 서로가 많이 친해졌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많이 있길 바라며, 이만 글을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