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자녀가 함께 보아야 할 성장소설
 - 『걱정쟁이 열세 살』, 『밴드마녀와 빵공주』, 『진휘 바이러스』, 『장수 만세』


이선희 | 해오름 평생교육원 전임강사 sunanna@naver.com


요즘은 각 학교마다 중간고사 시험 기간입니다. 어느 고등학생 친구가 슬며시 마음을 털어 놓습니다.
"선생님, 저 요즘 죽을 거 같아요. 엄마도 밉고, 친구도 밉고, 사람들이 다 미워요. 엄마는 내 얼굴보단 시험 성적만 보고 만날 아이고, 어떡한다니, 너 어디 가니 하고 있어요. 제 짝도 미워 죽겠어요. 난 정말 24시간 머릿속에 공부하는 것만 생각하고, 하루 종일 죽어라 책상 앞에 앉아 공부만 하는데, 그 친구는 설렁설렁 놀면서 대충 하는 거 같은데 시험을보면 꼭 그 친구가 나보다 더 잘 봐요. 속상해 죽겠어요. 죽고 싶단 생각만 나요."

'그래그래, 그럴 때 미워 죽겠지, 속상해 죽겠지, 아니, 그러다 정말 죽을라…….'
전국이 최진실 사건으로 한참 마음앓이를 하고 난 뒤라, 그냥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은 걸텐데도 혹시나 하는 걱정이 더 앞섭니다. 혼자 속으로 생각하다 깜짝 놀라 마음 다독거려 주고, 그럴 땐 다른 사람 보지 말고, 오로지 나 자신만 보라고 해 주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던 아이라 우리끼리 통하는 암묵적 신호가 있는데, 바로 『뛰어라 메뚜기』 이야기입니다.


조그마한 수풀 속에 숨어서 살던 메뚜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세상 밖으로 나옵니다. 그러자 뱀이며 사마귀가 사방에서 잡아먹으려고 덤비고, 메뚜기는 있는 힘껏 뛰어 위기를 모면합니다. 하지만 위험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메뚜기는 자기 등에 날개가 있다는 생각을 해내고, 온 힘을 다해 날갯짓을 했습니다. 그 날갯짓을 보고 잠자리나 나비가 비웃지만 메뚜기는 "자기 힘으로 날 수 있으니 정말 기쁘고 즐거워서" 모르는 척 하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바람을 타고 날아갔습니다. 황무지를 지나 멀리멀리 날아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짧지만, 우리의 의지에 대해 함축적인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연약한 상태에서 무언가 변화를 바라지만 그 변화가 한꺼번에 쉽게 오지는 않습니다. 이 메뚜기는 먼저 현실을 자각하고, 의지를 발동하여 더 나은 단계로 하나씩 앞으로 갑니다. 물론 그때마다 걸림돌이 있습니다. 나에게 위협과 공포를 주는 것들, 나를 비웃는 것들, 날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될 황무지 등등. 그러나 이 연약한 메뚜기의 위대한 점은 그러한 걸림돌에 넘어지지 않고 서서히 한 단계씩 자신을 변화시켜 나갔다는 데 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세상에 대해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엄마 아빠가 만들어준 울타리 안에서 세상을 즐기고 느끼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그 울타리 안에서 뿌리 내릴 수는 없습니다. 서서히 아이 등에는 날개가 돋고 아이는 그 조그만 날개로 자꾸 울타리 밖으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부모는 '얘야, 위험해.' 하면서 서둘러 새장을 둘러칩니다. 그러나 조금씩 날개가 더 커진 아이는 매일 나는 연습을 하고, 드디어 때가 되면 자기 날개를 활짝 펴고 저 넓고 먼 세상으로 날아갑니다. 매일 나는 연습. 이것이 바로 성장입니다. 몸을 이루는 세포 하나하나가 태어나고 죽기를 거듭하면서 우리의 몸을 키우듯이, 한 번의 마음다짐, 한 번의 실수와 실패가 태어나고 죽기를 거듭하면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키웁니다.

들판에서 꽃이 자라려면 꽃은 들판의 모든 조건을 수용해야 합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꽃은 자신의 외적인 조건을 수용하여 자신의 결실을 맺는 에너지로 전환합니다. 성장 또한 이렇듯이, 비가 있고 바람이 있습니다.

적절한 비는 생명을 키우지만, 과도한 비는 생명을 앗아갑니다. 요즘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보면 걱정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 중에 『생명이 들려준 이야기』라는 책이 있는데, 그 중에 「아이는 왜 빨리 어른이 되어서는 안 되나」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 중에는
"어린이는 어른이 되기 위해 자라는 것이 아니라, 자라서 어른이 될 뿐이야. 어린이는 천천히 자라면서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해. 어린이는 단지 어른이 되는 법만을 배워서는 안 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거야. 그러려면 천천히 자라야 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를 천천히 키우기는커녕 더 빨리 더 뻥 튀겨서 아이가 다른 존재로 되어 있길 원합니다. 원래 타고난 성품의 아이가 아니라 엄마, 아빠가 바라는 능력의 아이로 짠! 하고 말입니다. 아이는 이 세상이 어떻게 헤쳐가야 하는 곳인지 알기도전에 세상에서 우위에 꼽히는 능력부터 갖추어야 합니다.


세상은 두려운 곳



아이들에게 세상은 두려운 곳입니다.
온전한 것 같은 가정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모순투성이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하던 엄마가 갑자기 왜 나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일까? 그러다가 다시 안아주는 것은 무얼까? 다정하던 엄마, 아빠가 왜 얼굴색을 바꾸고 싸우는가? 저러다가 덜컥 이혼이라도 하면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아침에 집을 나간 엄마나 아빠가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 아빠가 갑자기 죽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할까? 어떻게 엄마가 하지 말라고, 혹은 하라고 한 것을 그때그때 모두 다 기억할 수 있단 말인가? 어제와 오늘의 규칙이 서로 다른 점은 무엇일까? 식구들은 정말 나를 원할까? 나는 필요한 존재일까? 이렇게, 아이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너무나 많습니다.

학교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이들은 커 가면서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냅니다. 학교 안에서도 아이들은 바르게 성장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만고만한 또래들 사이에서 선생님으로부터 진정한 사랑과 배려를 받고 싶습니다.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나의 개성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나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진정한 친구도 사귀고 싶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받았던 전적인 사랑과 신뢰가 학교에 가면 조건부로 바뀌게 됩니다. 공개적인 경쟁, 공식적인 검증이 이루어지는 곳이 학교입니다. 학교에서 살아남으려면 난 뭔가 다른 사람의 눈에 드는 짓을 해야 합니다. 공부를 잘 하든가, 예쁘든가, 모범적으로 학교가 원하는 것을 수용하든가, 아니면 힘이 세든가,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무시하고 말든가. 하지만 이런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작은 사회인 학교가 이럴진대, 우리 사회는 이제 내가 도저히 풀 수 없는 카오스 덩어리입니다. 텔레비전 속의 세상은 화려하고 아름답기만 한데, 우리 사회는 어지럽기 짝이 없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언어 연수까지 다녀와야 합니다. 날마다 더 이상 집이 아닌 신개념의 아파트를 선전합니다. 대한민국 1%가 타는 차를 소개하고, 행복을 약속하는 카드 회사의 광고는 소비하지 않으려면 살 가치도 없다고 나를 소외시킵니다. 비정규직의 문제가 무엇인지, 금융대란의 위기가 무엇인지,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환경 파괴의 결과가 무엇인지, 도대체 나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너무 두렵고, 과연 내가 이 두려움을 이기고 잘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내라 하란 대로만 하면 된다는 엄마 말대로 엄마말만 잘 들으면 될까? 네 옆에 있는 사람은 모두 경쟁자라는 선생님의 말대로 밟고 올라서면 될까? 왜 도무지 엄마 친구 아들들은 그리도 다 잘난 걸까? 난 뭘까? 난 뭘까? 난 뭘까? xyzzzzz…… 제발 누가 나 좀 구해줘요!!!


소설 주인공들, 너도 나와 같구나



『리버 보이』의 작가 팀 보울러는 "성장은 전투"라고 말합니다. 마치 전장 같은 현실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특명을 지닌 아이들. 아이들이 성장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시기를 겪는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두려운 세상 속에 각자 자기 문제를 가지고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의 한 과정입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너무나 공부에 내몰려 자신의 실존적 문제를 들여다 볼 힘이 별로 없습니다.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아니 어떤 욕구가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런 아이들이 '지금, 여기'에서 자라는 중에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도 자주 과거를 회상하고 과거로 이동합니다. 특히 부모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끊임없이 나의 과거와 대비하게 됩니다. '내가 그 나이 때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면, 솔직히 지금 아이들은 어린 시절의 나보다 더 현명하게 자기 삶에 대처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도 부모는 욕심을 가지고 아이가 더 잘 했으면 합니다.

이런 현실의 한계에서 우리 삶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게 해주는 좋은 도구가 바로 성장소설입니다. 성장 소설이란 말 그대로 '주인공의 육체적, 정신적 성장 과정을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 형상화한 작품을 말합니다. 성장소설의 주인공들은 자신을 보호해 주던 유토피아로부터 분리되어 삶의 모순과 혼돈을 느낍니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세계와 마주치게 되고, 모순과 혼돈 속에서 시련을 이기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자아를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성장소설은 '통과의례적' 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장소설을 통해 아이들은 책 속의 주인공들이 처한 현실을 보게 됩니다. 과거와 현재의 다양한 고민들, 여전히 아이들을 위협하는 것들, 그 속에 주인공들이 가지는 의지와 노력, 그러면서 내가 처한 세상을 다시 보게 되고, 그들의 문제해결력을 배우게 됩니다.

책 속의 주인공들은 나의 실존적 고민을 대신해 줍니다. 책 속의 주인공은 나보다 더 비참하며, 나보다 더 결핍 상태에 있습니다. 내가 따뜻한 방안에서 책을 읽을 때 그들은 추위에 내몰립니다. 내가 안전한 집안에 있을 때 그들은 집도 없이 거리로 내몰립니다. 물론 책 속의 주인공과 내가 같은 처지에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 나는 비로소 안도감의 한숨을 쉽니다. '나만 겪는 일이 아니었어, 너도 나와 같구나.'
 

마음 빌려오기



그런데 성장소설의 미학은 따로 있습니다. 그건 바로 모든 사람이 불쌍하지만 모든 사람이 씩씩하게 이겨낸다고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현실 속의 주인공들은 때로 실망하고 좌절하고 거꾸러집니다. 하지만 책 속의 주인공들은 그러는 법이 없습니다. '시련이 온다. 그래서 그 시련에 넘어지고 말았다.'는 마치 '행복한 주인공이 있었다. 그래서 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만큼이나 허무하게 들립니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의 제제는 다섯 살 나이에 이미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겪습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지만, 이유 없이 매를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모가 남만도 못하고, 내가 의지하던 뽀르뚜까 아저씨는 영영 잃어버리고 맙니다. 어린 나이에 겪어야 하는 슬픔치곤 너무나 가혹합니다. 그러나 슬픔도 힘이 된다는 걸 나중에서야 우리는 알게 됩니다.『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의 로버트는 날마다 피 냄새가 배어 있는 아버지에게서 성실히 노동한 냄새를 배우고, 자연의 풍요로움을 가진 부자임을 배웠기에 지독한 가난의 아픔, 아버지를 잃는 슬픔에서도 의연히 일어납니다.『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의 프랜시는 브루클린의 빈민가에 살고 있지만, 삶의 지혜를 지닌 외할머니와 인생의 고통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려 노력한 엄마를 통해, 인간이 진정으로 지녀야 할 품성과 진실을 배워서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책이니까 그렇지 뭐.' 하기엔 그들의 시련이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 그들의 슬픔이 너무나 내 것처럼 생생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묵묵히, 천천히, 인내하며, 때론 반항하며, 옳은 것을 지향하며 행동합니다. 그리고 그 시련들을 이겨냅니다. 나는 아직 어리고, 용기 없고, 소심하며, 두렵지만 책 속의 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리지만 용기 있고, 소심하지만 두려움을 이길 줄 알고, 지혜롭게 할 말을 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인정할 줄 알고, 자신에게 맞닥뜨린 세계를 다시 구성할 줄 압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자신 안에 힘을 기르고 이야기 속의 세계에서 당당히 우뚝 섭니다.

그리고, 나는 책을 읽으며 그들의 마음을 빌려옵니다. 그들과 같이 가슴 조이고, 그들과 같이 분개하고, 그들과 같이 눈물 흘리며 그들의 마음을 빌려옵니다. 그것은 흥분되고, 용기가 생기며 내 마음자리를 무한히 넓고 깊게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습니까?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_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첫 번째 이야기, 흔들리는 나의 뿌리
 - 『걱쟁쟁이 열 세 살』(최나미 / 사계절 / 2006)



나는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정상인 사람이다. 나한테 정상적이지 않은 건 가족뿐이다. 가족만 빼면 나머지는 다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학교에서 나는 집에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까불고 떠들고 야단맞고 장난치고, 아주 즐겁게 지낸다. 성적도……. 음, 다른 건 몰라도 수학은 잘한다. 모든 과목이 수학처럼 깔끔하게 답이 딱 하나라면, 아마 나는 수재소리를 듣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집에서도 깔끔하고 똑 떨어지게 살고 싶은데 엄마와 누나만 생각하면 기분 잡친다. 또 하나 들자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아빠.
 -『걱쟁쟁이 열 세 살』(최나미 / 사계절 / 2006)



제목만 보고 그냥 걱정이 지나친 열세 살 아이인 줄 알았더니, 주인공 상우는 집과 학교에서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무지 가족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집 나간 지 3년이 지난 아빠, 사는 건 곧 죽어가는 과정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며 툭 하면 눈물을 흘리는 엄마, 조르는 건 자식의 특권이라며 모든 게 자기중심적인 누나. 가족 문제만 빼면 모든 게 행복할 거 같습니다. 다른 식구들이 그럭저럭 상황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도 상우만은 가슴 속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빠가 왜 집을 나가셨는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남은 식구들이 그런 일을 어떻게 견디어 내는가 하는 게 중요한 일입니다. 상우의 말처럼 인생이 수학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답이 딱 떨어지고 분명하고 정확하고……. 상우는 아빠가 돌아와야 우리 가족이 완전히 정상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아빠가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요?
 
우리 집에서 나를 살려주는 건 컴퓨터뿐이다. 컴퓨터는 정상적이지 않은 내 상황을 잊게 해 주는 유일한 물건이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컴퓨터 게임에 몰입하는 아이들이 요즘 한 둘이 아닙니다. 뭐라 하는 사람도 없고, 그 안에서는 내가 왕인 세상입니다. 더구나 그동안 억눌려 있던 것들을 발산하기 딱 좋습니다. 단순하게 자동차 속력을 내어 누가 먼저 빨리 달려가나 하는 게임도 있지만, 총을 쏴서 사람 머리를 맞추거나 수류탄을 던져 다 폭파시키는 게임도 있습니다. 먼저 많이 잘 죽여야 레벨이 오르는 게임들 속에 자신을 퍼붓고 있는 아이들. 다행히 상우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건강하게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상우는 '유성우'라는 홈페이지를 만들고, 거기서 '오백년 전에 폭발한 별에서 온 외계인'을 만나게 됩니다. 맞는 것보다 애들한테 맞은 상처를 보이는 게 더 쪽팔리던 '오폭별'은 사백 년 전에 폭발한 별이 이제야 내 눈에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우주적 시각을 갖게 됩니다. 모든 아이들이 다 이렇게 우주적 시각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우는 엄마와의 대화를 통해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라는 새로운 통찰을 하게 됩니다.

"네 마음을 믿고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했으면 한다."는 엄마의 말에 상우는 여지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걱정을 내려 놓습니다. 겨우 열세 살인데 어른들 세상으로 등 떠밀리는 것 같아 겁이 났던 것, 아빠가 비워놓은 자리를 지켜야 할 것 같아 숨이 찼던 것을 하나하나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걱정 대신 씨알만한 희망을 품기로 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각자 어떤 걱정 속에 살고 있을까요? 상우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철딱서니 없는 부모 밑에서 거꾸로 어른 노릇하며 사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지나친 공부에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를 벌써부터 겪는 아이도 있습니다. 마음은 그저 그냥 따라가는 척 하지만 몸이 저 먼저 알아 틱 현상을 보이는 아이도 있습니다. 자기의 고민이 무엇인지, 걱정이 무엇인지 생각할 틈도 없이 밖으로만 내몰리는 아이들. 언제 자기 안을 들여다보고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어른들은 다 똑같아. 자기들도 우리만할 때는 괴로웠으면서 이제 뭐든 다 할 수 있으니까, 우리더러만 참으라고 하고……. 우리한테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데.


상은이의 말이 다시 새겨집니다. 우리도 그만 때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소중한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지금 아이들이 우리보다 나은 건지도 모릅니다. 집은 아이들에게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는 아이들의 뿌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이 뿌리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부부간의 갈등으로, 별거로, 이혼으로. 뿌리 약한 아이들이, 뿌리 없는 아이들이 어떻게 제대로 자랄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몸으로 마음으로 그 상처를 고스란히 받아 안고 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안에 옹이를 하나씩 만듭니다. 이 옹이는 아이가 암만 자라도 그래도 아이에게 흔적을 남깁니다. 아이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래도, 상처가 있더라도 작가의 말대로 너무 빨리 자라려고 애쓰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하루하루를 소중히 생각하며, 가능하다면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나의 아픔 외에 또 다른 세상도 있다는 것을, 그 세상 속에서 그나마의 행복을 찾아가며 커갔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내 상처를 치유하고 내 눈을 뜨게 하는 친구
 - 『밴드 마녀와 빵 공주』(김녹두 / 한겨레아이들 / 2007)
 - 『진휘 바이러스』(최나미 / 우리교육 / 2005)



두 아이가 만났습니다.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가 날 때마다 밴드를 붙이는 은수, 먹을 걸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 자기 스스로 자기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는 공주. 이 둘은 밴드 마녀와 빵공주라고 불리지만 운명처럼 서로를 보듬습니다.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 낯선 아빠의 집. 호호 아줌마가 잘 해주지만 은수를 미워하는 이복 언니 준희는 얄밉기만 합니다.

은수는 예전에 아빠가 바람 피웠을 때 존재조차 모르다가 데려온 아이입니다.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은수는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 자신같이 여겨집니다. 자신의 존재의 필요성을 모르던 은수는 마음이 아플 때마다 밴드를 붙이고 공주에게조차 마음을 열지 못합니다. 공주의 엄마는 공주가 3학년 때 아빠와 싸우고선 자기 인생을 찾겠다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런 엄마에게서 이혼 소송장이 날아옵니다. 그래도 엄마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던 공주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입니다. 은수와 공주는 엄마를 찾아 가출을 합니다. 반가워할 줄 알았던 엄마는 서먹하기만 합니다. 이제 엄마는 내 엄마가 아님을 확인하고, 은수 또한 친엄마를 찾아 나서는데, 엄마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누구에게도 쓸모없는 아이,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 은수는 죽고 싶어 하고, 공주는 은수 가슴에 밴드를 붙여주며 울음을 터뜨립니다.

존재를 의심받는 것처럼 흔들리는 일이 있을까요? 엄마가 병 때문에 자신을 아버지 집에 보낸 것을 알게 된 은수는 엄마의 죽음까지도 묵묵히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마음앓이를 하는 은수에 비하여 은수 아버지는 뻔뻔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부인에게 모든 것을 몰아세우고, 한때 사랑했던 여자에 대한 마음도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아버지상이 이럴까 싶습니다. 『이 세상에는 공주가 꼭 필요하다』의 춘희 아버지는 병들어 누워 있으면서도 딸을 공주로 만드는데, 은수 아버지는 은수를 존재 없는 아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도 은수에게는 공주가 있습니다. 자신도 아픔이 있으면서 남의 아픔을 감쌀 줄 아는 마음 넉넉한 아이. 혼자 된 아버지를 걱정하며 의젓하게 자기 몫을 다하는 아이. 자신은 비록 빵으로 채우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아이 공주. 은수는 공주의 손을 꼭 잡습니다.


널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네가 있어서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었으니까.


한편 『진휘 바이러스』에 나오는 진휘는 우리 주변에서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아이입니다. 하지만 진휘 같은 아이 하나만 있으면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되듯이 아이들이 진휘 같이 되고 말 겁니다. 그래서 엄마들이 진휘를 무서워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진휘는 어떤 아이일까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승아는 서울서 전학 온 연주와 쭉 같이 어울려 다녔는데, 연주 엄마가 공부는 서울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덕분에 헤어지게 됩니다. 연주는 새 학교에서 진휘를 만나게 되는데, 진휘는 여간 이상한 아이가 아닙니다. 선생님 말씀마다 말꼬리를 잡고, 좋아하는 남자 아이에게 당당히 좋아한다 이야기하고. 자기가 안 한 일에 당당하게 항의할 줄 알고……. 진휘는 한순간에 영웅도 되고 문제아도 됩니다. 연주는 진휘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진휘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상황이 이상하게 꼬입니다.


"내가 언제 날 이해해 달라고 했어? 다들 자기밖에 모르면서. 그냥 나를 나로 봐 주면 안 되는 거래?"
"네가 왜 싫은 줄 알아? 네가 날 보고 있으면, 선생님이나 다른 어른들이 날 보고 있는 것 같아. 너하고 좀 다르다는 것을 못 견뎌 하는 눈빛 말이야."
"너를 보면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 생각 밖에 안 나던 걸. 고양이는 먹이 주고, 시키는 대로만 하면 사랑 받잖아."
"동물원에서 키우는 원숭이나 기린하고 뭐가 다른데? 밥 주고 학원 보내 주니까 남들한테 공들인 티 좀 나게 성적이나 오르라는 거? 아니면 얼른 어른이 되어 남보다 훨씬 잘난 사람이 되어 자기만 아는 사람이 되라는 거 말이야?"
"학교가 뭐 하는 데야? 애들 모두 똑같이 길들이기 위한 곳이야? 차라리 공장이라고 하지. 어느 날 보니까 난 구제불능 불량아가 되어 있더라."



독설에 가까운 진휘의 말은 그동안 엄마의 말에 순종하고 있던 연주를 깨웁니다. 내가 왜 공부를 잘 해야 하는지, 엄마가 시키는 대로 다 하는 것이 진짜 좋은 일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드디어 연주가 진휘에게 감염된 것입니다.

연주 엄마는 참 대단한 엄마입니다. 아이들 공부 뒷바라지 하느라 스물네 시간이 모자라는 엄마, 여기 저기 학원 알아보러 다니느라 바쁘고, 딸 생일에 영어 과외 선물하고, 딸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고, 인터넷 비밀번호 풀려고 애쓰고, 그러면서도 정작 딸의 진짜 소망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연주 엄마는 연주의 변화가 진휘 때문이라고 짐작하며 진휘를 전학시킵니다. 이런 엄마와 연주가 부딪히는 건 당연한 결과입니다.
우리 사회에선 진휘 같은 아이를 도무지 참아내지 못합니다. 어른들만 없으면 학교가 좋고, 학교에선 배운 건 어떤 담임을 만나느냐에 따라 학교 생활이 결정되는 것뿐이라고 말하는 건방진 진휘, 진휘가 정말 바이러스 같은 존재일까요? 입양아이거나 새엄마랑 살아서 그럴 거라는 고정 관념을 버리고 진휘를 정말 바로 볼 수는 없는 걸까요? 연주 엄마로 인해 진휘는 존재를 규정짓게 됩니다. 찍힌 아이. 연주와 진휘의 만남은 정말 잘못된 만남이었을까요?

진휘는 연주에게 한 바탕 회오리바람과 같았습니다. 잔잔한 바다에 회오리를 일으켜 태풍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태풍이 오면 바다는 저 밑바닥까지 뒤집혀 그 안의 것들이 다시 떠오르고 새롭게 생명의 질서를 찾아갑니다. 진휘를 통해 연주에게 자신의 실존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이 고민은 연주 자신의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밝혀줍니다.

성장하는 동안 어느 한 순간 저도 진휘 같은 아이를 만났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진휘 같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진휘 같이 용기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다른 존재가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늦은 건 없습니다. 다 자란 어른들에게도 여전히 성장소설이 필요합니다. 열세 살 적의 나는 이렇게 다시 내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너는 어른들이 그려 준 세상에 맞춰 살려고 버둥거리지만, 난 그렇지 않아. 적어도 그런 세상에 나를 키워 맞추고 싶지 않다고, 나는 나를 믿으니까."
"난 진휘 덕분에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았어. 내가 공부를 잘하거나 못하거나,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거나 아니거나, 나는 정연주라는 거. 앞으로 내가 살아갈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 있는 내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 것 같아."


세 번째 이야기, 이 다음에 우리는
 - 『장수 만세!』(이현 / 우리교육/ 2007)



많은 아이들이 그날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되돌아 볼 힘도 없이 하루를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의 나라는 사람이 과거의 순간순간의 집합체라고 볼 때 그 아이들이 미래에서 오늘의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오늘의 내가 쌓여 미래의 내가 된다고 할 때 나는 행복할까요, 불행할까요?
 

한 마디로 우리 집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정이다. 아빠는 술 만드는 회사의 과장님이고, 엄마는 아빠가 퇴직하기 전에 아파트 대출금을 갚는 것, 서울대생의 엄마가 되는 소망을 가지고 알뜰살뜰 모은 돈으로 우리의 교육비에 투자한다. 이름이 박장수인 오빠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쭉- 공부를 잘했다. 지금까지 받아온 상장을 다 모으면 한 권 의 책이 될 정도다. 상대적으로 평범한 동생인 나는 무척 괴롭다. 툭하면 오빠와 비교 당하는 정말이지 저주받은 운명이다. 내 속은 먹다 남은 라면 냄비를 가스 불에 올려놓은 것처럼 바글바글 끓어오른다. 자글자글 타들어간다. (중략)
지금은 엄마가 시키는 대로 죽어라 뛰어다니는 수밖에 없다. 으리번쩍한 일류대 졸업장을 가슴에 품고 모든 걸 참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이렇게 평범한 채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장수의 엄마는 소박한 소망을 품고 있는 보통 사람입니다. 공부 잘하는 장수에 비해 그만 못한 혜수를 국제중학교에 보내기 위해 필리핀 언어 연수를 권하기도 합니다. 정말 무심코 "확 뛰어내릴까 보다" 말한 혜수는 잘못하여 베란다에서 떨어지고, 엉겁결에 저승사자에게 끌려갑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저승에 와야 할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 오빠입니다. 원래 장수할 수명을 타고 난 오빠가 자살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저러 우여곡절 끝에 혜수는 이 세상에 돌아와 일주일 동안 생령이 되어 오빠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데…….
관찰자가 되어 바라본 오빠는 정말 이상합니다. 영어 문제집의 같은 페이지만 펴 놓고 하루 종일 우두커니 앉아 있습니다. 지갑 속의 하얀 종이를 들여다보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울음소리를 악물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학교의 모습도 장난이 아닙니다. 오빠의 공책이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소각장 불에 타고 있습니다. 시험 성적을 위해선 부정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고 왜 그랬는지도 깨닫지 못합니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아빠가 꿈꾸는 대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특목고를 바라며 따라오던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되자 뭔가 삐거덕거리기 시작합니다. 자랑거리였던 성적표가 숨을 옭아매는 올가미가 됩니다. 선생님은 남의 공책을 훔치는 아이들에게 그건 도둑질이며 자기 학대라고, "그래, 너희 잘못이 아닌지도 몰라. 무언가가 너희들을 그렇게 몰았겠지. 그래도, 그래도 이겨내라, 그게 젊음이다."라고 말합니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정이던 장수네 집이 장수가 삐걱거리기 시작하니 이제 곪았던 상처가 터지기 시작합니다.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간도 쓸개도 다 빼놓고 죽어라 뛰어 다녀야 하는 아빠는 사람 몰아세우는 이 나라 뜨고 싶어 엄마 몰래 주식에 손댔다가 엄청난 빚을 지고, 자신의 모둔 꿈을 포기하고 자식 공부에만 몰두했던 엄마는 이제 와서 모든 게 자기 탓으로 돌아오자 억장이 무너집니다. 모두들 자살을 꿈꾸며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채 열심히 살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장수는 고등학교에 들어온 다음부터 다른 건 다 멀쩡하게 보이는데 글자만 흐릿하게 뭉개져 버리는 증세를 겪습니다. 혼자 고민하며 자실까지 꿈꾸던 장수, 부모에게 이제는 더 이상 못하겠다고 소리칩니다.


"난 이제 못하겠어요. 정말이지 이러다 미쳐 버릴 것 같아요. 죽어 버릴 것 같아요."
"시끄럽다! 네가 세상을 알아? 세상이 어떤 건줄 알고 고작 공부하는 걸 가지고 못 견디니 어쩌느니 하는 거야? 대학도 못 나오고 빌빌거릴래? 남 밑에서 굽실 거리면서 살래?"
"그 잘난 대학 나와서 아빠는 행복해요?"
"……행복하냐고? 그래, 난 행복하지 않다. 그러니까 나보다 잘난 놈이 되란 말이야. 그 누구도 깔볼 수 없을 만큼,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을 만큼, 잘난 놈이 되란 말이야."
"아빠 아들 박장수, 나도 잘난 놈이잖아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쭉 그랬잖아. 하지만 끝나지 않잖아요. 언제나, 계속, 잘난 놈이 되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잖아요. 대학에 간다고 끝날까요? 취직을 한다고 끝날까요? 돈을 많이 번다고 끝날까요?……."


고등학생이 되도록 엄마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만 해왔던 장수가 대학 나온 아빠한테 행복하냐고 소리칩니다. 그 절규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어쩌면 장수 아빠 시대엔 대학 나오면 행복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은 대학을 나와도 도무지 끝나는 게 없습니다. 특목고, 일류대, 대기업, 그 뒤, 또 그 뒤. 어디서쯤 이런 경쟁의 인생이 끝나는 것일까요?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하는 장수를 말려야 하나요, 마나요? 대학을 나와도 그런데 고등학교도 안 나와서 도대체 뭘 하며 먹고 살겠다는 건가요?


나를 바로 보고, 세상을 바꾸는 힘


장수의 절규가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 받는 스트레스와 하등 다르지 않습니다. 늘 긴장감과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 고등학생 30%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고, 70% 정도가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보도가 나온 적이 있는데 더 잘 살기 위해 더 빨리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재촉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디서 어떻게 끊어야 할까요?

『완득이』나 『직녀의 일기장』의 주인공들은 소위 말하는 '찌질이'들입니다. 난장이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변두리 옥탑방에서 빈민수급대상자로 살아가며 매일매일 담임인 똥주를 데려가 달라고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완득이. 집에는 오지도 않고 회사에서 연애하는 아버지와 수험생 오빠만 편애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학교 짱도 하고, 춤도 배우러 다니고 가출도 하는 그야말로 인생을 되는 대로 사는 직녀. 우리 주위에도 있음직한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그 아이들을 부르는 말은 정해져 있습니다. 공부 못하는 문제아들. 이 사회 어디에도 이 아이들이 주축이 될 곳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 구석에 그냥 찌그러져 살아야 할까요? 완득이나 직녀는 다른 선택을 합니다. 보다 당당하게 인생의 아픔과 모순을 겪어가면서 킥복싱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한 완득이는 스스로 자신의 삶의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직녀 또한 만만치 않지요. 매일매일 부딪히는 삶의 문제를 피하지 않고 이리저리 좌충우돌하며 어찌 보면 코믹하다시피 할 정도로 가볍게, 그러나 때론 냉철하게 자신을 볼 줄 아는 직녀입니다. 직녀가 간호사가 되고 싶은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그 이유를 누가 말릴 수 있겠나요? 그게 지금 아이들의 현실인데요.

난독증에 걸린 장수는 소원대로 학교를 그만두고 밤엔 주유소에서 일하고, 낮엔 세상에서 제일 좋은 학교 도서관에서 다시 책 읽기를 시작합니다. 혜수는 중학생이 되어 즐거운 학교 생활을 시작합니다. 장수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장수를 난독증에 걸리도록 내 몬 것은 결국 무엇이었을까요? 모든 부모는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데, 자식 또한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은데 어디서 무엇이 꼬이기 시작한 것일까요? 지금 바로 그 지점을 찾아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 부모는 아이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아이도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나 자신도 나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지키고 나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가족은 이렇게 평범한 채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세상이 암만 5%가 이끌어간다 해도 나머지 95%가 행복하지 않으면, 그 5% 역시 행복하지 않습니다. 우리 서로 연결되어 있고, 하나인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존재입니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잘 사는 세상, 보통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 비록 현재는 책 속에서만 존재한다 하더라도 이런 세상이 우리의 지향이 되어 우리의 미래를 이끌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