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e   최정필  첨부파일

Subject  살림학교 교사연수과정 두번 째 모임 소감과 평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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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시 만난 날 : 2004년 5월 4일

1. 마음 열기에 대해
- 또다시 쫒기 듯 집을 나섰다. 무엇이 그리 바쁘고, 무엇을 위해 바쁜 건지 여전히 스스로에게 질문만 던지다 시간은 흘러간다.
해오름에서 선생님들과 세 번째 만남을 가졌다. ‘나에게 성실할 수 있을까’ 또다시 회의감이 밀려든다. ‘즐겁고 참된 삶’을 또박또박 읊어가며, ‘아침이 오면’‘저녁이 오면’의 차분한 노래를 담아가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이렇게 세 번째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 삶이 성숙한 사람은 타인을 나와 동일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자세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 내가 네가(네가 내가) 되어보는 시간이 되었다. 얼마 전의 고민과 생활을 다른 선생님을 통해 듣는 것과, 얼마 후의 고민과 생활이 될 것 같은 것들의 조화였다.

-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과 철학을 가지고 사는 것의 차이. 다들 넓고 깊은 생각으로 아주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모임인가? 나도 생각 좀 하면서 살아야겠다.

- 마음이 흐트러져 잘 열리지 않으면 마음열기에 걸리는 시간이 많이 드는 것 같다. 마음 열기는 수업을 위한 준비가 아니고,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이고 다른 사람의 마음도 마주 대하는 하나의 문이 아닌가?

2. 바탕 공부에 대해
- 논문을 읽으며 혼자서는 깨우쳐지지 않는 개념들을 이 시간에 명확히 가르침을 받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조급함 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슈타이너를 읽으며 들었던 생각의 변화들을 돌아가면서 이야기하고, 그것이 또한 자신의 한계임을 인정하는 새로운 방식에 놀랐다.

- 지난주에 주신 인쇄물을 보면서, 숙제를 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엄청나게 짜증이 났었다. 그러면서 노작이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인 듯한 인쇄물을 보고 과거에 서민들은 노작이 바로 생활이었는데 그때도 ‘문제아’는 있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답답한 채로 무엇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몰랐는데 ‘용어’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아직도 뭐가 뭔지 아리송하지만 가슴 한편이 편안해 지는 느낌이다.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제 뭘 모르는지 조금 알 것 같은 가능성을 보았다.

- ‘왜 하필 [슈타이너]일까 라는 고민을 여직 하지 못했던 것일까’라는 자문을 하고 공부에 임했다. 용어에서 오는 생소함과 편견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은데, 그것 자체도 모순적인 것 같다. [슈타이너]에 대한 이해를 통한 발전을 위한 비판을 하자면 그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그를 설명해 주는 용어는 알고 가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물어본다.
아이들의 발달과정에 대한 것, 기질에 관련된 것 등 눈으로 보여 진 것만 혹은 눈으로 본 것만 받아들이려는 의심 병(?)이 새로 생긴 것 같아 내내 찜찜하다.

- 주제 수업의 문제제기 부분이 충분히 정리되지 못한 것 같다.

- 이번 시간엔 ‘슈타이너가 지향하는 것은 무엇인가’와 ‘슈타이너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슈타이너는 육체, 영혼, 정신으로 구성된 전인적 존재로써의 인간의 진정한 의미를 이야기했고, 찾고자했으며 그 방법론 적인 것이 교육이어야 함을 역설하는 듯 하다. 인간은 우주 안에서 지극히 미세한 원자에 불과하지만 우주의 모든 질서 체계가 들어있는 온전한 존재이기도 한 것 같다. 이러한 나의 막연한 생각에 보다 확실한 체계와 가치를 가지고 슈타이너는 나의 문제를, 인간의 문제를 설득력 있게, 깊이 있게 다가서는 듯하다.

- 슈타이너가 말한 ‘정신’과 ‘영혼’의 개념에 대해 의견을 나누면서 혼란스럽기도 하고 자신감도 떨어졌다. ‘내가 인식하는 나’와 ‘실제의 나’는 다를 수 있겠다는 의문이 들면서, 내가 나에 대해 분명하다고 확신하던 것들이 갑자기 불확실해 지면서, 그러면 나는 나와 세상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무척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런 혼란스러움이 반가웠다. 어린이가 사춘기를 겪으며 외부 세계의 다름과 내면의 혼란을 통해 자아 정체성을 찾아가듯, 나또한 참된 나를 발견하는 과정으로서 이 혼란스러움을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3. 노작과 놀이에 대해
-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는 놀이였다. 화음으로 마음을 움직여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놀라웠다. 옆의 동료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동시에 관계에서 좀더 진지해지는 내 자신을 느꼈다.

- 돌림 노래인 ‘송알송알’과 ‘해가 나면’을 함께 했다. 다른 이들의 음을 들으려고 할수록 나의 음이 확실해 짐을 느낀다.
발도르프 학교의 쇠공을 가지고 마음을 전해 본다. 울림은 느끼는데 마음을 느끼기에는 아직 멀다.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겠지!

- 필요 이상의 말이 많은 것. 말이 필요 없는 교감이 충분히 느껴질 수 있도록 여유를 갖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충분한 교감은 시간의 문제라기보다 성급히 답을 찾으려는 조급함을 떨쳐버리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 작은 공의 울림에서도 무엇인가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정말 놀랍다. 집에 와서 아이들과 해 봤다. 공도 물론 다르겠지만 나의 신기한 경험을 아이들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또 놀랍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우리 아이들도 돌림노래의 소리를 느껴봤다.
알고 있던 것들도 아이들에게 유용한 것을 왜 여직 몰랐을까…. 이런 고민의 시작이다.

- 공놀이; 구리로 만든 공이 보기보다 친근하고 속에서 울림이 느껴지는 게 참 신기하다. 공에 다른 사람의 체온이 실려 온다.
노래; 어른이 되어 돌림노래를 부른 적이 있던가? 이렇게 아름다운 화음에 내 목소리도 들어있다는 게 행복하다.

- 즐겁다. 놀이와 노래에 빠져 나와 상대방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로 느끼게 하는 시간이었다. 노래와 놀이는 단비 같다. 메마르고 갈라진 흙 가슴이 단비를 맞으면 폭신폭신 말랑말랑한 땅이 된다. 우리는 함께 비를 부르고 그 비를 흠뻑 맞았다.

4. 소감
- 어수선한 마음으로 시작한 것에 비해 끝은 가뿐하다. 이래도 되는 건지 스스로에게 또 묻는다. 선생님들이 제기했던 집중적 토론의 부족 문제는 좀 더 고민하고 체계화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