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태의 어려움 / 정희진/서강대 강사·여성학


혁명보다 어려운 것이 개혁이다. 혁명은 이름과 의식을 바꾸는 것이지만, 개혁은 몸의 형태를 바꾸는 것, 즉 변태(變態)의 과정이다. 개혁(改革)은 글자 그대로 살갗을 벗기는 것. 피가 쏟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느 시대나 개혁을 주장하는 지도층은 스스로 피 흘리는 고통을 보여줄 때만이 국민을 설득할 수 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는 테제로 유명한 맥루언의 걸작 〈미디어의 이해〉의 부제는 ‘인간의 확장’이다. 오늘날 인터넷, 휴대 전화가 우리 몸의 일부이듯, 이 책은 몸이 인식의 매개체(미디어)라고 주장한다. 앎이란,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에게로 몸을 확장하는 것. 인식과 발상의 전환을 경험하게 되면, 다시는 알기 이전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안다는 것은 확장된 자기 몸에 사로잡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변화는 새로운 인식을 의미하는데, 이는 ‘머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에서 발생한다. 알이 부화하여 나비가 되듯, 몸이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하는 변태의 고통을 뜻한다. ‘변태’가 원래 의미보다는 흔히 ‘변태 성욕’의 줄임말로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기존 질서를 수호하고자 하는 사회는 변태하는 사람을 싫어할 것이다.

사랑과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인생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자기 부정이다. 사랑과 운동은 목적에 헌신하기 위해, 그들 몸의 일부가 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역량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이나 사유를 사랑하기도 하지만, 사랑이 깊을수록 대상과의 관계로부터 자신을 철회하기도 한다. 금연, 다이어트, 일찍 일어나기, 관계·초콜릿·카페인·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기 등 사람들의 계획이 대개 실패하는 것처럼, 자기 변태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변태는 기존의 나를 상실한다는 점에서 위협적이며, 미래의 것이기 때문에 알 수 없어 두렵다. 특히, 연령주의 사회에서는 나이가 들면, 오후 3시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오후 3시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고, 포기하기엔 미련이 남는 위치다. 자기 문제를 극복할 수도 승복할 수도 없고, 자기 조건에서 탈출하기도 저항하기도 힘들다. 막다른 골목을 꺾어진 골목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인간은 그리 많지 않다.

변태는 자신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존재가 인간이다. 우울증으로 고통 받던 미국의 어느 소설가는 자살을 결심한다. 상처받을 주변 사람들을 걱정하여, 남들도 납득할 만한 자살 이유를 찾다가 에이즈에 걸리기로 마음먹는다. 6개월 동안 온갖 위험한 섹스를 시도하다가, 어느 날 타인에게 에이즈를 전염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두고 검사를 의뢰한다. 결과를 기다리며 그는 에이즈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죽음 앞에서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것이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비참하다.

너무 심란한 이야기인가?
모든 사람이 “나를 바꾸고 이전과 같이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책을 쓴다”는 푸코처럼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실은, 변태 과정에서의 좌절과 자기혐오가 변화 없는 현실의 괴로움보다 더 고통스러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그냥 생긴 대로 살까? 나를 다른 세계로 날아가지 못하게 하는 현실의 중력을 인정하며, 어차피 가끔 중독은 필요한 것이라 자위하며, 결핍은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든다고 믿으면서, 이렇게 사는 것이 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