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 교과서에서는 열역학 제1법칙과 제2법칙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외부에서 물체에 가한 열량을 Q, 물체가 외부에 한 일의 양을 W라고 하면 내부 에너지의 증가 ?U는 다음과 같다.

   ?U 〓 Q - W

즉, 물체의 내부 에너지의 변화량은 외부에서 받은 열량과 물체가 외부에서 한 일의 차와 같다. 이것은 열에너지를 포함하는 에너지 보존 법칙을 나타낸 것으로서 열역학 제1법칙이라고 한다. 이 법칙은 에너지는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전환할 수 있지만 에너지의 총량은 항상 일정하게 보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송인명 외 2인, 고등 학교 물리 Ⅱ, 교학사, 1998, pp. 190>

  열현상을 포함한 대부분의 자연 현상은 비가역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 변화의 과정이 한쪽 방향으로만 진행될 뿐이고, 그 반대 방향으로는 진행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연 현상의 비가역성을 열역학 제2법칙이라고 한다.

열역학 제2법칙은 ‘열은 고온의 물체에서 저온의 물체로 이동하며, 스스로 저온의 물체에서 고온의 물체로 이동하지는 않는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면 열현상의 비가역성을 분자의 열운동으로 살펴보자.

온도가 다른 두 물체를 접촉시킬 때 열이 이동하기 전에는 두 물체의 분자들이 서로 다른 평균 운동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상태를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를 질서가 있는 상태라고 한다.

그러나 열이 이동하여 열적 평형 상태에 이르면 두 물체의 모든 분자들의 평균 운동 에너지가 같아져서 분자의 에너지 상태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상태를 무질서한 상태라고 한다.

     <송인명 외 2인, 고등 학교 물리 Ⅱ, 교학사, 1998, pp. 198>

  열역학 제1법칙과 제2법칙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어 보면 다들 대답을 잘 합니다. 적어도 제가 근무하는 학교의 아이들은 그렇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머리는 단편적인 지식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창고 같습니다.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죽어라 외우고 또 외우니 그럴 밖에요. 그러나 막상 이를 활용한 논제를 제시하면 할말을 못하고 마는 게 우리 아이들의 현주소입니다. 왜 많은 지식을 알고 있으면서 이를 논리적 자기 주장으로 이끌어 내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많은 지식을 꿰어 낼 만한 실, 다시 말해 통합 교과적 사고가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0-2. 그러니 다음과 같은 문제를 내놓으면 입을 꼭 다뭅니다.

  □ 다음 글은 지구에서의 물질-에너지 환경의 대이동과 엔트로피 흐름에 관한 법칙에  인류가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다루고 있는 책의 일부이다. 이 책의 결론은 ‘엔트로피 법칙에 의한 인간의 활동에 물리적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에 대한 우리들의 반응이 숙제로 남아 있고, 그 반응에 따라 우리의 미래는 각각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첫째,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가 어떠한 사회적 조건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밝히고, 둘째, 에너지 흐름이 최대가 되도록 맞추어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엔트로피 패러다임(paradigm)은 어떤 실천적 의미를 지니는가 논술하라.

  
  열역학 제1법칙과 제2법칙은 물리학의 초보 단계에서 배우지만 거기서 논하는 것은 매우 단순하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법칙을 발견하기까지는 험하고 복잡한 이론을 구사하고, 치밀한 정신으로 몇 번이나 조용히 명상해야만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열역학의 법칙이 지닌 의미에 대해 과학자는 노고를 아끼지 않고 있는 데 반해 일상 생활에서는 이 두 법칙이 확립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말을 누구나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다.”
“엎질러진 물은 그릇에 담을 수 없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열역학의 두 법칙은 모두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우주에 있는 모든 에너지의 총화는 일정하고(제1법칙), 모든 엔트로피는 끊임없이 증대한다(제2법칙).”

제1법칙에 대해 덧붙여 설명하면 에너지는 더 이상 조성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간이 시작된 이후로 우주의 에너지의 총화는 일정하며 사간이 끝날 때까지는 불변할 것이다. 이 열역학의 제1법칙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고도 하며, 에너지는 더 조성되거나 소멸되는 일이 없지만 어떤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환되는 것은 가능하다고 바꿔 말할 수 있다.

가장 구체적인 예로 자동차의 엔진을 들어 보자. 가솔린 속의 에너지는 ‘엔진에 의해 조성된 일에, 발생한 배기 가스 속의 에너지를 더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영구 운동(永久運動)을 하는 기관을 개발하려고 했던 시도가 모두 실패한 것처럼 무(無)에서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 사람은 없었으며, 앞으로도 이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에너지를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꾸는 것뿐이다.

제2법칙은 에너지가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할 때마다 장차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사용 가능한 에너지’를 잃는다는 것이다. 엔트로피(entropy)란 이것을 말하며 이미 일로 변환될 수 없는 에너지 양을 가리킨다.

즉 엔트로피가 증대한다는 것은 더 이상 쓸 수 없는 에너지가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계에서 무엇이 일어날 적마다 장차 어떤 일을 하기 위한 에너지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쓸 수 없는 에너지의 대표적인 것이 공해이다. 또한 산업 폐기물도 낭비된 에너지라고 말할 수 있다. 열역학 제1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더 만들어질 수도 없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가능한 것은 ‘변환시키는’ 일뿐이다. 그리고 제2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하나의 방향, 즉 사용된 상태에서만 변환된다. 이런 점에서 공해란 그야말로 엔트로피에 주어진 별명이며―이를테면 어떤 ‘계(系)’(상호 관련을 가진 반응 체계)에 나타난 사용이 불가능한 에너지의 양을 가리킨다.

우리들 자신들이 사용하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이 적절한 기술을 개발하기만 하면 완전히 재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앞으로 이 세계가 경제적으로 살아남으려면 말할 필요도 없이 재활용(recycling)을 더욱 효율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하지만, 100% 재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예컨대 청량 음료의 빈 깡통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듯이 대부분 한 번 사용한 금속의 평균적인 재생 이용률은 현재 30% 정도이다. 나아가 재활용할 때는 사용된 소재의 수집?운반?처리에 또 다른 에너지가 필요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환경의 전(全) 엔트로피는 증가하게 된다. 따라서 무엇을 재활용하려면 새로 쓸 수 있는 에너지의 방출을 위한 비용과 환경의 전 엔트로피 증가라는 희생이 반드시 따른다.

여기서 거듭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지구상에서는 끊임없이 물질적인 엔트로피가 증대하여 나중에는 극대점(極大點)에 도달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지구가 우주와의 관련에서 ‘닫힌 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지구가 우주 공간과 교환할 수 있는 것은 에너지뿐이며 물질은 아니라는 점이다. 때때로 지구에 떨어지는 운석(隕石)이나 우주진(宇宙塵)을 제외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닫혀진 우주의 소계(小系)’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 : ‘엔트로피’에서>

  ☞ 유의 사항
  ① 제목을 쓰지 말 것
  ② 자신의 신원을 드러내는 표현은 쓰지 말 것
  ③ 한 편의 완결된 글로 쓸 것
  ④ 어문 규정과 원고지 작성법에 따를 것
  ⑤ 띄어쓰기를 포함하여 1,600자 내외(±200자 허용)로 쓸 것



  0-3. 고전을 제시문으로 하는 논술을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 말을 잇지 않겠습니다. 제시문을 어떻게 분석하고 분석한 제시문으로 논의의 틀을 잡아 서론?본론?결론을 어떻게 써 나가야 할까2)에 대해서는 다들 일가견을 갖고 계실 것이므로 ‘뱀다리’를 그려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문제는 ‘어떻게’가 아니고 ‘무엇을’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용성 확보라는 문제만을 생각해 봅시다.

  먼저 글쓰기를 ‘쓰기’에만 한정시키는 분절적 사고 방식부터 뜯어고쳐야 합니다. 글쓰기, 특히 논술쓰기는 말하기?듣기?읽기와 연계하여 지도해야만 바라는 바에 다다를 수가 있습니다. 최근 글쓰기의 연구 동향만 봐도 그렇습니다. 작문과 독서에 대한 연구가 점차 통합되면서 글쓰기에 중요한 이정표가 마련되었습니다. 글을 써 나가는 데 필요한 기능뿐만 아니라 그 내용성도 독해의 경험으로부터 획득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무슨 책을 권할까 하는 고민이 진지하게 이루어져야3)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책인데 무슨 책을 권해야 하겠습니까? 이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다 옳은 얘기입니다. 그러나 제 경험으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책은 ‘교사가 읽어 본 책’입니다. 그리하여 그 책의 이데올로기를 독해할 능력을 교사가 갖고, 학생들로 하여금 그 포위망을 뚫을 수 있게 할 수 있는 책이 가장 좋은 책입니다. 교사 스스로는 읽지도 않고서 독서 지도를 한다면 그것은 속임수이거나 착각입니다. 교사가 책을 읽고 나야, 비로소 그 책은 수업 자료로 활용될 수 있고, 아이들에게 권할 수도 있습니다. 독서에서 사제 동행은 필수입니다.

  이 논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에 대한 전반적인 독해부터 이루어져야 합니다. 제가 이 책을 처음 대했을 때 감동은, 마치 잠수부가 고요한 바닷물 속에서 미처 예상하지 못한 해저의 풍요로운 풍경을 발견했을 때 느끼는 감동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조금은 어렵지만 고등 학생들과는 충분히 독서 토론이 가능한 책입니다. 이 책을 함께 펼쳐 봅시다.

  현대를 일컬어 과학 기술 사회라 합니다. 그만큼 과학 기술의 역할이 무겁고 크다는 말이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마이크를 들이밀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통해 처방을 받고 살아갑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 막강한 과학 기술의 힘에 의해 인류는 발전을 보장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한 듯합니다. 한편에서 자원 고갈 문제, 환경 오염 문제 등을 제기하고 있지만, 그쯤이야 과학 기술이 더욱 발달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안심시킵니다.

  그러나 잠시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는 것도 더 큰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로운 천년을 맞는 우리 모두가, 어떤 이는 ‘불을 보듯 확실히’, 어떤 이는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들 있습니다. 그래서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말 한마디쯤은 할 줄 압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내일의 암탉보다는 오늘의 달걀’에 더 눈을 파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까. 그래서 리프킨은, 현대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세계관을 바꾸지 않고서는 ‘언 발에 오줌 누기’라고 잘라 말합니다. 현대 사회는 한쪽 환부가 좀 낫는가 하면 어느새 다른 쪽이 곪아터지는 시행 착오가 반복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리프킨은, 생각을 바꾸자는 게 아니라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현대를 진단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 책 ‘엔트로피’를 통해 현대 사회의 세계관인 ‘기계적 세계관’에 대한 재검토에 나섭니다. 그가 검토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입니다. 이 법칙을 통해 ‘현대 사회의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미래의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 해답을 동시에 제시합니다.


  [1장 : 세계관] 인간은 일생 동안 행동을 다스리는 규범의 틀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세계관(世界觀)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세계관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물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데에, 그들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세계관이 어릴 때부터 내재화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역사상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한 세계관이 발생하였습니다. 현재 우리들의 세계관은 약 400년 전에 형성되었습니다. 우리는 17세기 뉴턴주의의 ‘세계 기계라는 패러다임’의 영향력 아래에 있습니다. 곧,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여 물질적 행복을 더 많이 누리면 누릴수록 세계는 더 질서 있는 상태로 정돈된다는 것입니다. 발전은 부익부의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점점 더 질서 있는 세계로 나아간다는 게 바로 기계적 세계 패러다임의 핵심이 되는 작동 원리입니다. 발전(發展)이라는 개념이 이 시대의 기본 특징이지요.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세계관의 탄생에 즈음해 있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뉴턴의 기계적 세계관을 대치할 새로운 세계관으로서 ‘엔트로피 법칙’이 다음 시대의 역사를 지배할 패러다임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엔트로피 법칙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2장 : 엔트로피 법칙] 엔트로피(entropy)는 열역학 분야에서 등장하는 개념으로서 매우 난해하게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 생활에서 이미 ‘엔트로피’의 개념과 친숙해 있습니다. 제시문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다.”, “엎질러진 물은 그릇에 담을 수 없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등의 말이 그것이지요.

  엔트로피 법칙은 열역학의 두 중요한 법칙 가운데 제2법칙에 속합니다. 열역학의 두 법칙을 한 문장으로 나타내면, “우주의 전체 에너지량은 일정하고(제1법칙), 전체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려고 한다(제2법칙).”고 할 수 있습니다. 에너지는 생성되거나 소멸될 수 없으며, 에너지가 어느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환될 때에는 반드시 불리한 상황이 더해진다는 것이지요. 그 불리한 상황은 현재가 아닌 미래에 벌어집니다. 즉 미래에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사용 가능한 에너지를 현 시대에 끌어다 사용함으로써, 미래에는 에너지가 부족하게 됩니다. 이것에 대한 용어가 바로 엔트로피입니다.

  엔트로피란 더 이상 일로 바꿀 수 없는(사용 불가능한) 에너지량에 대한 척도입니다. 그러므로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감소한다는 뜻입니다. 이 엔트로피 법칙은 본질적으로 우주의 삼라만상이 질서(秩序) 있고 가치(價値)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無秩序)하고 무가치(無價値)한 혼돈 상태로, 한 방향으로만 변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법칙은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모든 과학의 법칙이며 또한 우주 최상위의 형이상학적 법칙”입니다.

  엔트로피 법칙의 적용 범위는 전 우주에 미칩니다. 곧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 생명, 형이상학 등 모든 것과 관련됩니다. 한 가지 예로 ‘생명’을 들어 봅시다. 생명체는 놀라운 질서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과학자들은 생명체는 제2법칙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의 총체적 엔트로피가 항상 증가하고 있다면, 생명의 과정 역시 엔트로피가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즉 ‘생명체의 생성으로 나타난 국부적인 미소한 엔트로피 감소는 우주 엔트로피의 더 큰 증가를 수반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엔트로피 법칙은 모든 물리적 실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3장 : 엔트로피―새로운 역사의 틀] 엔트로피 법칙이 모든 물리적 실체에 적용됨을 주장하고 난 다음 리프킨의 눈은 역사로 향합니다. 그에 따르면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도 아니고, 계급 투쟁의 역사도 아닙니다. 그 각각의 역사 이론은 그림 조각에 지나지 않으며, 진정한 역사 이해에는 엔트로피가 그 열쇠라는 겁니다.

  역사상 일어난 중대한 변화 즉 수렵에서 농경으로, 다시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전환된 것은 기존의 설명처럼 풍요로움 또는 잉여 생산물 때문이 아닙니다. 그 전환들은 오히려 자원의 고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엔트로피의 증가로 인한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감소 때문입니다. 곧, 주위 환경의 엔트로피가 대단히 높아지기 때문에 새로운 종류의 에너지로의 전환이 발생하고, 그와 더불어 새로운 양식의 기술, 새로운 유형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제도가 창출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의 전환에도 제2법칙이 적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대 사회를 이 새로운 역사의 틀을 사용해서 분석해 봅시다. 현대 산업 사회의 기술 문명과 사회 제도 등은 더 많은 에너지를 투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엔트로피 과정을 그만큼 가속화시키고 세계의 무질서를 증가시키는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계론적 세계관 아래 존재하는 현 세계는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원(석탄, 석유 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가 거의 바닥이 남으로써 바야흐로 새로운 엔트로피 분수령(分水嶺)에 서 있습니다.

  [4장 :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와 다가오는 엔트로피 분수령] 전세계적으로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원이 고갈되어 감에 따라 에너지 위기가 초래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 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점점 심화되어 갈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종류의 재생 불가능 에너지원으로 옮겨가려는 노력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합성 연료의 개발, 핵분열 에너지, 핵융합 에너지의 이용에 대한 연구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합성 연료는 그 효율 면에서 문제가 많고, 핵분열 에너지는 안전성 문제, 엄청나게 비싼 생산 비용, 핵 폐기물 문제 등을 안고 있으며, 핵융합 에너지는 기술적인 문제와 자원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때문에 에너지 위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고도로 산업화된 경제 체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주요 광물이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광물 자원의 고갈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다른 광물로의 대체, 재사용, 보존 등이 제안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요 광물들의 공급이 급속하게 감소하고 있기 때문에, 한 금속을 다른 금속으로 대체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재사용 역시 열역학 제2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즉 광물이 재순환될 때마다 그 일부는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손실되고 맙니다. 보존은 절대적으로 요구되지만, 현재의 사회 구조에서는 많은 에너지 유입이 요구되므로 그 범위가 지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즉 작은 에너지 흐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회가 변혁되어야 이러한 모든 시도는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고식책(姑息策)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5장 : 엔트로피와 산업 시대] 우리는 과거에 비해 발전된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경제 체제나 사회 제도가 발전했으며, 교통이 발달했고, 농업의 경우 생산성이 높아졌고, 건강이 증진되어 평균 수명이 연장되었고, 보다 나은 교육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리프킨은 우리가 발전이라고 믿고 있는 각 분야―예를 들어 경제학, 농업, 수송, 도시화, 군대, 교육, 건강―에서의 변화의 실체가 무엇이었는가를 수치를 들어 가며, 엔트로피 법칙을 사용하여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분석 결과는 충격적입니다.

  그는 농업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도끼와 쟁기만을 가진 농부가 현대 미국의 기계화 농장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겁니다. 소비된 에너지에 대한 생산량으로 볼 경우 그렇다는 얘기지요. 다른 분야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전쟁과 전쟁 준비는 인간 행동에서 가장 엔트로피가 높은 형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세계관은 더 질서 있고, 더 물질적으로 가치 있는 세계를 창조한다는 환상을 사람들에게 불어넣고 있다고 그는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엔트로피 법칙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유용한 물질과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 다음 두 가지 사항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첫째, 개인, 제도, 단체, 사회 모두가 생산물을 사용하여 얻는 가치보다는 그 생산물을 만들 때 생기는 무질서에 대하여 결국은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겁니다. 둘째, 미래의 우리 후손과 인간 이외의 생태계가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가 감소한다는 겁니다.

  [6장 : 엔트로피―새로운 세계관] 에너지 흐름이 최대가 되도록 맞추어진 고도 산업 사회 구조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제도들―그 형태, 목적, 운영 방법―은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이 부상하고 있는 질서를 내다보면서 어떻게 우리 사회가 개편될 것이며, 어떻게 우리 생활이 변모될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먼저 우리 인생에 의미와 방향을 제시해 주는 기본적 가치들에 주의를 돌려봅시다. 저엔트로피 세계관에서의 지배적인 윤리 원칙은 에너지 흐름을 극소화하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회에서는 ‘적은 것이 많은 것’이라는 구호가 최고의 진리가 됩니다. E. F. 슈마허가 그의 책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언급한 말이 떠오르지요? “인간은 작다. 그러므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 새로운 기술은 인간의 키에 맞추어야 한다.”는 그 말!  

  이러한 원칙 아래에서 각 분야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노동과 생산에 대한 접근 방식에도 고엔트로피 문화와는 차이를 드러냅니다. 즉 저엔트로피 사회에서 일은 ‘의식의 깨우침에 이르기 위한 노력의 필수적 요소’입니다. 또한 생산은 사치스러운 발상이나 하찮은 일이 아니라, 꼭 필요하다는 필연성의 믿음을 좇아서 생활 유지에 필요한 물품을 적당한 범위 안에서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

  2.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파악되며, 따로 분리시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을 정복한다는 개념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생물들과 전체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대치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3. 농업은 다양화된 유기 농법으로 변형되어야 합니다.

  4. 도시의 규모 축소와 아울러 교통 체계 역시 앞으로 대폭 재조정되어야 합니다.

  5. 기술 또한 대규모 중앙 집중적, 에너지 자본 집약적 기술에서 벗어나 적절한 중간 기술을 사용해야 합니다.

  6. 엔트로피 패러다임을 완전히 내면화시켜 자녀를 갖고자 하는 개인적 욕망을 자제하여 자발적으로 인구를 제한해야 합니다.


  이를 받아들이려면, 각 분야에서의 변화의 방향이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 감을 잡아야 하는데 사실 그게 어렵습니다. 각 분야에서 옛날 식의 기계적 구조는 열역학 제2법칙이 요구하는 바에 맞춰진 새로운 구조로 대치되어야 하는데, 과연 우리가 현존하는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하지만 리프킨의 대답은 확고합니다. “엔트로피 패러다임만이 이 사멸을 향한 문화의 뒤얽힌 잔해를 헤쳐나갈 만큼 날카로운, 그리고 새 시대의 도래를 위한 길을 열 만큼 넓은 낫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태도 전향이 첫 번째 과제임을 지적하면서 시대의 새로운 질서는 과학, 교육, 그리고 종교의 개혁과 더불어 시작되어야 함을 주장합니다.

  ?-4. 이 문제는 환경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으니만큼 여기에 대한 배경 지식 또한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환경 문제 하면 1992년 리우 환경 회의가 떠오릅니다. 리우 회의에서는 환경 문제가 단순히 환경 공학적 차원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환경을 파괴하도록 강요하는 빈부 격차의 문제, 남북 문제를 포함한 사회적 불평등 관계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울러 자연과 인간이 관계를 맺는 방식, 다시 말해 자연관?인간관의 변화까지 수반되지 않으면 환경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환경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리우 환경 회의에서 제시된 세 가지 요소 중에 어떤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곧, 환경 문제와 관련된 주장은 기술 지향주의, 탈자본주의, 생태론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를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기술 지향주의는 오늘날의 환경 파괴가 과학 기술의 발전 때문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과학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므로 환경 문제는 과학 기술을 활용해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최근 오염 물질을 먹어 치우는 미생물을 개발하는 것을 그 대표적 사례로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항상 환경이 파괴되고 난 후에 그것을 해결함으로써 결국 ‘환경 파괴→새로운 기술의 개발→또 다른 환경 파괴→또 다른 기술의 개발’이라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근본적 해결 방안이 되지 못한다는 약점을 지닙니다.

  반면, 탈자본주의 환경론은 환경 문제가 자본주의의 과잉 생산에 그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자본이 보다 많은 잉여를 산출하기 위해 무차별적 욕망과 소비를 창출하는 가운데 자연 파괴는 가속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곧, 환경 파괴는 무한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환경을 무기로 후진국에 경제적 압력을 행사하는 ‘그린 라운드’도 그 일환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환경의 문제를 체제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환경 문제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비판받습니다. 다시 말해 지배와 착취 문제가 해결된다 하더라도 환경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생태론자들은 과학 기술이 오늘날 환경 파괴의 주범이라고 보고, 과학 기술 문명 자체를 거부하며 탈산업 사회를 강력하게 옹호합니다. 기존의 과학 기술 문명이 인간 이성에 의한 자연 법칙을 파악하고 그것을 무기로 자연을 지배한다는 사고가 그 근본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동양적 사고와 같이, 자연에 대한 지배적?이성적 태도가 아닌 동반자적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기 위해 기존의 자연관?인간관의 변화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기존의 모든 문명적 성과를 원시로 되돌릴 때에만 가능합니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구호처럼 오늘날과 같이 발전한 문명을 과거로 되돌리는 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위의 논제는 이 세 가지 관점 중에 첫 번째 기술 지향주의적 관점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생태론적 입장과 일맥 상통하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