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 논술 자료함
씨네21 칼럼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자주국방 대 한미동맹?
2006.09.29 글 : 정희진 (서강대 강사)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 한국사회 내부의 성별, 계급, 지역 등 권력관계가 반영되게 마련이다. 성희롱은 ‘sexual harassment’의 번역인데, 여성의 시각에서는 오역에 가깝다. ‘harass’는 의도를 갖고 반복적으로 괴롭힌다는 뜻이지만, 장난과 비슷한 ‘희롱’으로 번역되면서 의미가 사소화되었다. 말 자체가 특정 계층의 이해를 대변한데다, 한국 실정과 안 맞는 경우도 많다. ‘노동시장 유연성’이 대표적이다. 노사관계 선진국과 달리 한국처럼 사회안전망이 거의 없는 사회에서 유연성은 “사용자 맘대로 해고”를 미화할 우려가 있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노동시장이 ‘경직’된 것이 나은데, 경직성은 유연성보다 어감이 나빠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다(97년 대선 때 이인제 후보는 노동시장을 “딱딱하게” 하겠다고 공약한 적 있다).
부시 대통령은 2000년 당선되자마자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을 추진했다.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strategic flexibility)이다. 유연성의 핵심은 자유롭고 빠른 이동이다. 미군을 특정한 국가에 붙박이로 주둔시키지 않고, 언제든 출동 태세를 갖춰 세계 곳곳에 신속하게 파견해 전쟁을 치르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일(駐日)미군은 극동 지역을 넘어 중동까지 활동 범위를 확대하고, 주한미군은 더이상 북한 대비용이 아니라 중국과 대만 갈등에 개입하는 등 동북아시아를 분쟁지역화하는 데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부시 행정부의 관점에서 유연한 것이지, ‘침략을 받는’ 지역 입장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파괴가 그만큼 신속하게, ‘저항없이 유연하게’ 진행된다는 뜻이다. 폭력과 살인을 목적으로 하는 군대라면, 늦게 도착할수록 아니, 아예 움직이지 않는 게 바람직한 것 아닌가?
전시 군 작전권 환수를 자주국방이냐 한미동맹이냐로 논하는 것은 현실 왜곡이다. 이 문제의 핵심은 ‘자주국방’도 ‘한미동맹’도 아니기 때문이다. “작전권 환수=한미동맹 약화=안보 공백”이라고 아우성치는 보수 세력의 무지와 시대착오는 비판하기에도 기운 빠지는 일이다. 이들을 보면, 이승만 정권 당시 주한미군 주둔 이유가 북의 남침만이 아니라, 이승만의 북침 계획을 억제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현재 남한의 국방비는 북한의 9배가 넘어 북한의 GNP에 근접할 지경이다. 방위비 외에도 남한은 북한보다 국민소득 33배, 무역 규모 155배이다. 1994∼98년 무기 수입은 남한 세계 4위, 북한 70위 밖이었다. 지난 10년간 남한의 무기수입비는 북한의 37배였다.
평화네트워크,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등 많은 전문가 집단이 지적했듯이, 군 작전권 이양은 군사주권 문제라기보다는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미국의 필요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회주의권 붕괴로 인한 탈냉전의 도래는 자본주의의 승리가 아니다. 원래 미국의 안보 세력과 군수 자본가에게 미소 대립이라는 냉전 체제의 목적은 승리나 패배가 아니었다.
사회주의라는 가상/‘실제’의 위협을 강조하여 전세계에 군사적 긴장을 창출하고 억압적인 안보 질서를 구축하는 것, 그래서 세계 경찰로서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 전쟁 국가의 목표는 승리(전쟁의 끝)가 아니라 전쟁의 공포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소련이라는 공식적인 ‘적’이 사라진 뒤, 미국은 북한과 이라크 같은 새로운 적을 지목했다. ‘적’이 없다면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 팍스 아메리카나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러와의 전쟁은 적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미국이 ‘하고 싶어서’ 하는 임의적인 전쟁이다. 미국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영구 전쟁(permanent war)이다. 미국이 영구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본이나 한국 같은 ‘동맹국’의 협조, 즉, 비용 분담이 필수적이다. 문제는 이 비용이 동북아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헤게모니 확보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미국이, 한국이 제시한 2012년보다 빠른 2009년경에 작전권을 이양하겠다는 등 적극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이 작전권을 “빨리 가져가라”고 요구하는 마당에 뭐가 ‘자주국방’이란 말인가?
작전권 환수가 국방비 증가로 이어진다면, 이는 한국이 “주변국의 잠재적 위협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계획대로 “주변국(북한)을 위협하는” 지역 동맹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자주국방은 주권국가의 꽃”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군대를 통한 국민국가 완성 의지가 아니길 바란다. 부국강병 욕망은 (‘자주’를 위해 극복해야 하는) 미국 모방일 뿐이다. 지금 한반도 정세에서 전쟁 위협에 시달리는 국가는, 남한이 아니라 미국의 선제공격을 두려워하는 북한이다. 지난해 참여정부가 주장한 대로, 한국이 미국과 동등한 ‘동북아 균형자’가 되는 길은 군사비 증강이 아니라 외교력과 민주화, 문화 역량 같은 소프트 파워를 통해서 가능하다. 더이상의 강병은 침략 행위다.
2006.09.29 글 : 정희진 (서강대 강사)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 한국사회 내부의 성별, 계급, 지역 등 권력관계가 반영되게 마련이다. 성희롱은 ‘sexual harassment’의 번역인데, 여성의 시각에서는 오역에 가깝다. ‘harass’는 의도를 갖고 반복적으로 괴롭힌다는 뜻이지만, 장난과 비슷한 ‘희롱’으로 번역되면서 의미가 사소화되었다. 말 자체가 특정 계층의 이해를 대변한데다, 한국 실정과 안 맞는 경우도 많다. ‘노동시장 유연성’이 대표적이다. 노사관계 선진국과 달리 한국처럼 사회안전망이 거의 없는 사회에서 유연성은 “사용자 맘대로 해고”를 미화할 우려가 있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노동시장이 ‘경직’된 것이 나은데, 경직성은 유연성보다 어감이 나빠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다(97년 대선 때 이인제 후보는 노동시장을 “딱딱하게” 하겠다고 공약한 적 있다).
부시 대통령은 2000년 당선되자마자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을 추진했다.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strategic flexibility)이다. 유연성의 핵심은 자유롭고 빠른 이동이다. 미군을 특정한 국가에 붙박이로 주둔시키지 않고, 언제든 출동 태세를 갖춰 세계 곳곳에 신속하게 파견해 전쟁을 치르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일(駐日)미군은 극동 지역을 넘어 중동까지 활동 범위를 확대하고, 주한미군은 더이상 북한 대비용이 아니라 중국과 대만 갈등에 개입하는 등 동북아시아를 분쟁지역화하는 데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부시 행정부의 관점에서 유연한 것이지, ‘침략을 받는’ 지역 입장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파괴가 그만큼 신속하게, ‘저항없이 유연하게’ 진행된다는 뜻이다. 폭력과 살인을 목적으로 하는 군대라면, 늦게 도착할수록 아니, 아예 움직이지 않는 게 바람직한 것 아닌가?
전시 군 작전권 환수를 자주국방이냐 한미동맹이냐로 논하는 것은 현실 왜곡이다. 이 문제의 핵심은 ‘자주국방’도 ‘한미동맹’도 아니기 때문이다. “작전권 환수=한미동맹 약화=안보 공백”이라고 아우성치는 보수 세력의 무지와 시대착오는 비판하기에도 기운 빠지는 일이다. 이들을 보면, 이승만 정권 당시 주한미군 주둔 이유가 북의 남침만이 아니라, 이승만의 북침 계획을 억제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현재 남한의 국방비는 북한의 9배가 넘어 북한의 GNP에 근접할 지경이다. 방위비 외에도 남한은 북한보다 국민소득 33배, 무역 규모 155배이다. 1994∼98년 무기 수입은 남한 세계 4위, 북한 70위 밖이었다. 지난 10년간 남한의 무기수입비는 북한의 37배였다.
평화네트워크,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등 많은 전문가 집단이 지적했듯이, 군 작전권 이양은 군사주권 문제라기보다는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미국의 필요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회주의권 붕괴로 인한 탈냉전의 도래는 자본주의의 승리가 아니다. 원래 미국의 안보 세력과 군수 자본가에게 미소 대립이라는 냉전 체제의 목적은 승리나 패배가 아니었다.
사회주의라는 가상/‘실제’의 위협을 강조하여 전세계에 군사적 긴장을 창출하고 억압적인 안보 질서를 구축하는 것, 그래서 세계 경찰로서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 전쟁 국가의 목표는 승리(전쟁의 끝)가 아니라 전쟁의 공포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소련이라는 공식적인 ‘적’이 사라진 뒤, 미국은 북한과 이라크 같은 새로운 적을 지목했다. ‘적’이 없다면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 팍스 아메리카나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러와의 전쟁은 적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미국이 ‘하고 싶어서’ 하는 임의적인 전쟁이다. 미국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영구 전쟁(permanent war)이다. 미국이 영구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본이나 한국 같은 ‘동맹국’의 협조, 즉, 비용 분담이 필수적이다. 문제는 이 비용이 동북아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헤게모니 확보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미국이, 한국이 제시한 2012년보다 빠른 2009년경에 작전권을 이양하겠다는 등 적극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이 작전권을 “빨리 가져가라”고 요구하는 마당에 뭐가 ‘자주국방’이란 말인가?
작전권 환수가 국방비 증가로 이어진다면, 이는 한국이 “주변국의 잠재적 위협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계획대로 “주변국(북한)을 위협하는” 지역 동맹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자주국방은 주권국가의 꽃”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군대를 통한 국민국가 완성 의지가 아니길 바란다. 부국강병 욕망은 (‘자주’를 위해 극복해야 하는) 미국 모방일 뿐이다. 지금 한반도 정세에서 전쟁 위협에 시달리는 국가는, 남한이 아니라 미국의 선제공격을 두려워하는 북한이다. 지난해 참여정부가 주장한 대로, 한국이 미국과 동등한 ‘동북아 균형자’가 되는 길은 군사비 증강이 아니라 외교력과 민주화, 문화 역량 같은 소프트 파워를 통해서 가능하다. 더이상의 강병은 침략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