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이데아론                      

   小阪修平, 『서양철학사』中에서


* 진리를 깨닫는 것은 곧 스스로의 무지와 몽애에서 벗어나 자기 성숙에 이를 수 있는 계기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부터 철인들, 지식인들은 이러한 지식에의 강항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을 얻는 방법에 대해 다양한 이론들을 주장했습니다. 그중 서양철학의 거목,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이러한 진리에의 접근, 진리의 실체를 설명하는 가장 유명한 이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동굴의 비유를 알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플라톤의 이데아론, 동굴의 비유를 철학사 안에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진리에 대한 서양사상의 뿌리를 검토하고 플라톤의 진리 접근의 방법론을 확인해보기 바랍니다.  


  이데아 세계에의 동경

  플라톤에 이르기까지, 아직 철학은 사물의 진상을 단지 논리로서 말할 뿐 아니라, 전설·신화(미토스) 등의 구전으로서 이야기하는 양식을 띄고 있기도 하였다. 이에 『파이드로스』안에서 플라톤도 이데아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 제우스가 거느린 신들의 대열은 천구를 뛰어놀아, 천구(天球)의 끝을 지탱하는 궁륭(穹窿 : 한간운데는 높고 그 주위는 차차 낮은 하늘 형상)을 올라선 채 천구의 바깥쪽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이데아의 세계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예컨대 두 개의 목재의 <동등함>을 인식할 때 우리들은 <동등함>의 이데아를 떠올리게 된다는 플라톤의 생각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처럼 혼(魂)도 신들의 대열을 따라 하늘의 바깥 세계(이데아의 세계)를 바라보고자 원하고 있다는 설명 역시 그는 하고 있다. 그런데 혼은 날개를 가진 말몰이꾼과, 역시 날개를 가진 두 마리의 말로서 -- 곧 좋은 말과 나쁜 말로서 -- 구성되어 있다고 플라톤은 생각했었다. 또한 혼들은 하늘 밖을 달리려 하는 것이며, 이에 말을 잘 모는 혼은 아데아의 세계를 엿보기도 하며, 말을 잘 다루지 못한 혼은 지상에 떨어져 인간 육체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엿본 이데아의 세계를 우리들은 상기(想起)하게 되는 것이며, 이에 사랑도 광기도 육체라는 쇠사슬에 묶인 채 혼에 대한 동경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혼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곧 지상으로 떨어진 혼 중에 이데아를 가장 잘 관망해 볼 수 있었던 혼은 지(知)를 추구하는 사람 가운데 머물게 되며, 두 번째로는 왕자의 혼 안에, 세 번째는 정치인이나 부자 안에…… 그리고 일곱 번째로서는 직인이나 농부, 여덟 번째로는 소피스트나 민중선동가의 혼 안에, 최하급의 아홉 번째 혼은 참주 안에 머물게 된다고 그는 연이어 설명하였던 것이다.
  이 신화적 혼의 위계질서 안에서 우리는 민주제와 참주제의 혼란에 대한 플라톤의 혐오와, 순수한 세계에의 동경을 찾아볼 수 있다. 곧 육체란 그 자체가 무지이며, 이데아의 세계를 가장 잘 엿본 사람으로서의 철학자는 육체없는 혼의 세계를 가장 동경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에 플라톤은 <홀로 지(知)를 추구하는 철인(哲人)의 정신은 날개를 가진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시대의 혼란 안에서 이데아의 세계는 단순히 철학적으로 요구되는 것만이 아닌, 혼란한 지상에서 천상의 왕국을 대신한다는 색채를 일면 띄고 있었던 것이다.


  동굴의 세계

  하지만 이렇듯 이데아의 세계가 혼의 고향이라면, 어째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데아의 세계를 잊고 있는 것일까? 이에 플라톤은 유명한 <동굴의 우상>이란 비유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곧 플라톤에 의하면, 보통 인간은 태어나면서 동굴 안에 있게 되고, 뒤를 볼 수 없도록 목이 고정된 수인(囚人)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동굴의 수인 뒤에는 등불과 인형극과도 같은 장치가 있게 되며, 돌이나 나무, 인형의 상만을 사람들은 거느리고 있는 채, 그 그림자만이 수인들이 마주보는 벽에 비치고 있는 것이다. 어딘지 꿈과 같은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이 동굴 안에서 수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림자만을 보며 자라난다. 그러므로서 수인들은 이 그림자를 실물이라고 생각하고, 그림자밖에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곧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플라톤이 말하는 바 수인(보통의 인간)이란 태어난 때부터 영화관 안 밖에는 알지 못하는 인간인 것이다. 혹은 SF풍으로 말하면 우주선 안에 감금된 채 우주선 밖의 우주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란 어린이를 상상해봐도 될 것이다.
  만약 수인 한 사람이 속박을 풀고 등불 쪽을 돌아본 채 등불의 강한 빛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고통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동굴을 나와 태양의 강렬한 빛이 내리쬐는 세계 속에서 그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단지 비쳐진 그림자의 세계를 그리워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차츰 태양의 빛에 익숙해지면, 이미 이 수인은 그림자의 세계를 실물의 세계라고는 생각하지 않게 된다. 여기서 재차 수인은 동굴로 돌아가, 남아 있는 수인들에게 그들이 보고있는 것은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을, 밖에는 실물의 세계나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하지만 남아 있던 수인들은, 이 밖에서 돌아온 수인의 말을 좀처럼 납득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이 바깥세계로서 비유한 것은 이데아의 세계이다. 그중에도 태양으로 비유되고 있는 것은 이데아 중의 이데아, 곧 <선(善)>의 이데아에 해당된다. 그리고 여기서 표현되는 동굴 안의 세계란 이처럼 우리들이 육체 속에 속박되어 살고 있는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바깥 세계를 보고 온 수인은 철학자에 해당될 것이며, 이 플라톤의 태양과 동굴의 비유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눈으로 <본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곧 우리들은 눈으로 사물을 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우리들은 태양광의 반사면만을 보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눈에 보여지는 사물은, 실은 태양광을 받음으로 해서 우리에게 보여지듯이, 이 눈에 보이는 세계는 <선>의 이데아에 의해 실재하고 있다고 플라톤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빛 그 자체(이데아의 세게)는 단지 사유에 의해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비유에 의하면, 우리들은 대단히 초라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현실 천시의 사상이라 불리워도 좋을 만큼 플라톤은 현실을 혐오했던 것이며, 혼의 세계를 동경하는 사상을 오르페우스와 피타고라스의 신비주의에서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세계를 순수한 세계와 눈에 보이는 세계로 나눌 수 있었던 것이 철학이 길을 물어 도달했던 바 세계의 이분법이며, 이 이분법은 고대 말기의 신플라톤주의를 지나 그리스도교에로 이어져간다. 그런데 그 중심은 혼의 불사 사상이며, 피타고라스에서 플라톤을 경유한 이 사상적 흐름은, 그 옛날 신비스럽게 인식되었던 로고스의 활동적 영역 안에서 추구되었던 것이다. 물론, 보통 우리들은, 철학이란 신비주의와 반대되는 합리적 사고방식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철학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살펴볼 때, 피타고라스에서 보여지는 바 신비주의를 말(logos) 안에서 합리화해왔던 것이다. 물론 이 합리화의 과정은 아직 플라톤에 있어서는 철저하지는 않았으나, 이것은 후에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말이 분석의 작업이라는 개념으로 변천되어짐 속에서, 이 합리화의 과정은 그 완성된 형태를 취해갔던 것이다.




   진리에 대한 해석학적 입장              

                                 가다머, 『진리와 방법』中에서

* 『진리와 방법』(1960)은 해석학의 철학적인 의미를 부각시키고 순수 합리성이 인식 기준으로서 갖는 보편적 역량을 의문시한 가다머의 주저입니다. 이 글에서 정신 과학적 이해 과정은 무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역사적 선(先)이해 혹은 <선입견>에 근거하고 있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사태, 혹은 진리를 인식하는 과정이 그 대상과 직접적으로 대면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선이해라는 전제가 있다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가다머는 <해석학적 순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해 작용은 모든 해석에 앞서 전제되어 있는 역사적 의미 전체로부터 부분으로 나아가고, 다시 역으로 부분에서부터 다시 전체를 보다 분명히 파악하고 수정하는 순화의 모습으로 진행됩니다. 이해, 혹은 인식은 자기 이해와 전통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나타납니다. 진리 인식의 과정에 대한 이번 문제와 다소 근접해있는 주제이기에 어려운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실어놓았습니다.

  계몽 사상에도 역시 본질적인 선입견이 있다. 계몽의 근본적인 선입견은 선입견 일반에 대한 반대라는 선입견이며, 이로써 전승의 무력화이다.
  걔념사적 분석에 따르면, 계몽을 통하여, 비로소 선입견의 개념이 우리에게 익숙한 부정적인 뜻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 자체에 있어서 볼 때, 선입견은 모든 내용적 규정 계기들을 최종적으로 검토하기 이전에 내려진 판단을 말한다…
  따라서 <선입견>은 거짓된 판단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개념에 있어 선입견은 긍정적으로 또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라틴 말 ‘praejudicium(예비판단)’과의 연관성이 선입견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도 가질 수 있다. 정당한 예비 판단들이 있다. 이러한 사정은 오늘날 우리의 언어 감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독일말 포어우어타일(Vorurteil)은 -- 프랑스 어 프레쥐제(prejuge)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보다 심하게 -- 계몽을 통하여 그리고 계몽의 종교 비판을 통하여, ‘정초되지 않은 판단’이라는 의미로 한정되어 버린 것처럼 보인다. 내용적인 일치 자체가 아니라 정초함이 비로소, 방법적인 안정화가 비로소 판단에 위엄을 부여한다. 정초의 결여는 계몽의 눈으로 볼 때 어떤 다른 방식의 확실성도 얻을 수 없으며 단지 다음의 사정, 즉 그 판단이 어떤 실제적인 바탕도 갖지 않는다는 사정, 그 판단이 ‘바탕이 없다’는 사정을 의미한다. 이것은 합리주의 정신 안에서의 참다운 결론이다. 모든 선입견의 명예 훼손이, 선입견을 말살하라는 과학적 인식의 요구 주장이 바로 이러한 근거를 갖는다.…
  우리가 인간의 유한한 -- 역사적인 존재 방식을 알맞게 고려하고자 하면, 선입견이라는 개념의 원칙적인 명예 회복이 필요하며 정당한 선입견이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로써 진실로 역사적인 해석학의 중심 물음이 다음과 같이 정식화될 수 있다. 즉 선입견들의 정당성이 어디에 바탕을 가져야 하는가? 그것들을 극복하는 일이 비판적 이성의 부정할 수 없는 관심사인 모든 무수한 선입견들로부터 정당한 선입견들을 구별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계몽이 바판적 의도에서 발전시킨, 위에서 설명된 선입견들에 대한 이론을 이제 긍정적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우리의 문제에 접근해 보자. 우선 선입견을 권위의 선입견과 성급함의 선입견으로 구별하는 일에 대해서 살펴보자면, 이러한 구별의 바탕에는 계몽의 근본 전제가 놓여 있음은 분명하다. 이 근본 전제에 따르면 방법적으로 훈련된 이성의 사용이 모든 오류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방법이념이었다. 성급함은 자기 자신의 이성을 상요할 때에 빠지는 오류의 본래적인 원천이다. 이에 반해 권위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이성을 도대체 사용하지 않는 일에 대해 책임을 진다. 따라서 이 구별은 권위와 이성의 배타적인 대립에 근거한다.…
  사실 모든 권위의 명예 훼손만이 계몽을 통하여 스스로 굳어진 선입견인 것은 아니다. 명에 훼손은 마침내 권위의 개념의 왜곡화(본질 변화)도 초래하였다. 이성과 자유라는 계몽주의적 개념에 근거하여 권위의 개념 안에 이성과 자유의 단적인 대립자가, 즉 맹목적인 복종이 두드러져 돋보일 수 있었다. 이는 우리가 현대적인 독재 정치를 비판할 때의 언어 사용으로부터 배워 온 의미이다.
그러나 이러한 뜻은 권위의 본질 안에 전혀 들어 있지 않다. 물론 권위는 우선 개인들에게 소속한다. 하지만 개인들의 권위는 이성을 제압하고 거부하는 활동에 그 최종 근거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승인과 인식의 활동에, 즉 다른 사람이 나보다 판단과 통찰에 있어 우워하다는 인식,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판단이 앞서 간다는, 즉 나 자신의 판단보다 우선권을 가진다는 인식의 활동에 그 최종 근거를 가진다. 권위는 원래 부여되는 것이 아나라 획득되는 것이며, 이떤 사람이 권위를 요구하고자 할 경우에 그 권위는 획득되어져야만 한다는 사정이다. 권위는 승인에 근거하며, 그런 만큼 이성 자체의 횔동에 근거하다. 이 때의 이성은 자신의 한계를 의식하고 다른 이성들이 보다 나은 통찰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올바른게 이해된 권위의 의미는 맹목적인 명령 복종과는 무관하다. 그렇다. 권위는 복종과는 직접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다. 권위는 바로 인식과 직접적으로 관계한다. 물론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능력에 또 명령 복종에 권위가 속한다. 그러나 명령 및 명령 복종은 어떤 사람이 갖는 권위로부터만 비롯한다. 명령 질서로부터 도출되는, 상관이 갖는 익명적이고 무인격적인 권위도 역시 최종적으로는 이 명령 질서로부터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권위가 이 질서를 가능하게 한다. 권위의 진정한 근거는 여기에서도 역시 자유와 지성의 활동이다. 자유와 이성은 상관이 보다 넓게 보거나 혹은 더 깊이 정통해 있기 때문에, 즉 여기서도 역시 상관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상관에게 권위를 인정한다.




진리 인식과 독서                          


                          이희승,『인생의 지혜로서의 독서』

* 진리 인식의 현실적 경로는 뭐니뭐니해도 독서입니다. 책을 읽는 문화 속에서 진리는 분명해지고, 많은 이들에게 공유되게 마련입니다. 이 글은 이상의 실현과 문화의 창조를 위한 지식 획득의 수단으로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설문의 일부입니다. 진리란 시대에 따라 실체가 달라지는 것이지만, 진리의 내용과 상관없이 독서의 중요성은 진리에의 도(道)로서 항상 강조될 수 있는 겁니다.

  문화란,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유익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은 모두 지식의 소산인 것이다. 이상이나 문화나 다 같이 사람이 추구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요, 또 인생의 목적이 거기에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완전히 일치되는 것은 아니니, 그 차이점은 여기에 있다. 즉, 문화는 인간의 이상이 이미 현실화된 것이요, 이상은 현실 이전의 문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두 가지를 추구하여 현실화시키는 데에는 지식이 필요하고, 이러한 지식의 공급원으로는 다시 서적(書籍)이란 것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가 없다. 문화인이면 문화인일수록 서적 이용의 비율이 높아지고, 이상이 높으면 높을수록 서적 의존도 또한 높아지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서적 중에는 입수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는 불평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인류가 지금까지 이루어 낸 서적의 양은 실로 막대한 바가 있다. 옛날에도 서적이 많다는 표현을 오거서(五車書 : 다섯 대의 수레에 실을 만한 서적)와 한우충동(汗牛充棟 : 소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리며 끌 정도로, 집에 쌓아 놓으면 천장에 닿을 지경)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오거서’나 한우충동‘ 따위의 표현으로는 이야기도 안 될 만큼 서적은 많다.
  우리 나라 사람은 일반적으로 책에 관심이 적은 것 같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시험이란 악마(惡魔)의 위력(威力) 때문이랄까, 울며 겨자 먹기로 교과서를 파고들지만, 일단 졸업이란 영예의 관문을 돌파한 다음에는 대개 책과는 인연이 멀어지는 것 같다.
  옛말에, “하루 책을 읽지 아니하면 입 속에 가시고 돋친다.(一日不讀書 口中 生荊棘)”라는 말이 있지만, 오늘날은 하루 책을 안 읽으면 입에 가시가 돋치는 문제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처럼 생존 경쟁이 격심한 마당에 있어서 하루만큼 낙오가 되어, 열패자의 고배와 비운을 맛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무리 천재적인 지혜와 역량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널리 남의 의견을 들어서 중지(衆智)를 모아 놓지 아니하면, 자기 깜냥(일을 가늠보아 해낼 만한 능력)의 정와(井蛙 : 우물 안 개구리)의 편견(偏見)으로 독선(獨善)과 독단(獨斷)에 빠져서 대사를 그르치는 일은 옛날부터 비일비재(非一非再)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재벌의 거두(巨頭)와 사업가들도, 그 성공의 비결의 중요한 일부분은 독서에 있었다는 것이다. 자기 공장에서 나오는 생산품을, 어떻게 하면 사용하기에 가장 편리하고, 내구력(耐久力)이 있고, 또 가장 생산원가(生産原價)를 적게 하여 제일 저렴(低廉)한 가격으로 공급하는 동시에, 수요자(需要者)의 구미에 맞도록 고안할 수 있을까 온갖 심혈을 경주(傾注)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