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메가를 따라 키르키츠순방에 참여한 황석영 작가의 행동을 두고 말이 많다.
변절이라 카는 이들과 웅대한 큰 꿈을 꾸는 행동가라고 치켜세우는 이들말이다.
우찌되었든 황석영은 문단에 익히 알려진대로 "황구라"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자신의 블로그에 토해 놓았다.
바리데기 공주를 환생시킨 황석영 작 "바리데기"를 보면
이 땅의 못나고 착한 노동자 존재를 각인시킨 "삼포 가는 길"을 보면
민중의 삶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찬양한 "장길산"을 보면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직설한 "무기의 그늘"을 보면
우리는 황석영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훌륭한 글쟁이 인가를 느낀다.
또한 아래에 있는 구차스런 변명을 보면
그가 얼마나 환상적인 구라를 시원하고 명료하게 잘 배설하는 지를 깨닫는다.
두 시선을 모두 부정할 수 없는 그이다.

아깝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고 자랑스러워 했던 작가를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지워야 한다는 사실에 서럽고 분통이 절로 난다.
그의 글에서 이제 진정성을 느낄 수 없고
살떨리듯 다가왔던 깊은 공감을 이룰 수 없음에
분노가 일어난다.

이번 행동이 한 늙은 작가의 치매끼어린 망동이라 치부하기엔
그의 무게가 워낙 컸기 때문일까?
온 국민을 적대시하는 이메가와 나란히 서서 찍은 그의 표정이
비굴하고 비겁해 보이는 것은 나만의 감정이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생존의 위기에 맞서 절규하는 수 많은 노동자들과 선량한 시민들을
거리낌없이 비난하며 마구 잡아들이는 이 권력자 집단들에게
중도실용의 찬사를 헌사하는 그대를 보는 것은
이제 역겨워질 것 같다.

광주민중항쟁을 광주폭동이라 규정하고
오일육군사쿠데타를 혁명이라 칭하며
항일의 정당성을 친일의 명분으로 덧칠하는 뉴라이트들의 소굴에서
당신이 꿈꾸는 중도실용의 세계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아래는 황석영의 블로그에 실린 그의 변명 전문이다.
이 공간에 이 글을 싣는 것조차 불쾌하고 어이없는 짓이지만
함께 읽으며
우리가 가야 할 길을 함께 되새겨보는 것도
민주를 지키고 자유를 사랑하는 시민의 이름으로
해야할 일이 아닌가 싶다.
황석영의 행동이 한순간 실수라고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아주 작은 실가닥처럼 남아있기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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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지난 며칠 동안 얼마나 놀라고 황당하셨습니까?

  중앙아시아에서 날아오는 그림의 ‘기묘한 풍경’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당연한 노릇이었겠지요. 작가는 언제나 사회적 금기를 깨는 자이며, 저의 장기가 바로 월경(越境)이기 때문에 행동 자체가 논의의 출발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논의의 출발로부터 엉뚱한 해석과 성급한 판단이 속출했습니다. 우선 제 말과 행동의 뜻에 대하여 구구하게 변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주위의 염려처럼 한 호흡 쉬고 나서 대답할 것을 성급하게 대응한 면이 있겠지요. 다른 무엇보다도 광주는 내 문학이자 나의 인생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척박한 시대에 진보 정당을 고수하고 있는 분들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의인들입니다. 저는 창당 전야에 눈이 강산같이 내린 덕산 시골집에 찾아왔던 벗들의 그 걸음을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지요.

  1. 새로운 노선의 위태로움에 대하여

  올해는 저 개인적으로는 1989년 문익환 목사와 더불어 방북을 결행했던 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제가 벌써 낼모레면 칠십을 바라보고 주위에서 씁쓸하게 농담처럼 말하는 대로 ‘관계자 전원 사망’에 저 혼자 살아남아 있습니다. 문익환 목사, 그리고 협상 상대역이었던 김일성 주석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타계했고, 우리의 방북을 주선했던 일본 이와나미 출판사 사장 야스에 료스케 선생이 돌아갔고, 북에서 저를 안내했던 소설가 최승칠 선생도 진작에 세상을 떠났으며, 오갈데없이 망명하며 떠돌던 저를 보호해주셨던 작곡가 윤이상 선생도 돌아가셨고, 남쪽에서 저의 귀국을 주선하며 애태우던 시인 김남주도 떠나가고, 저의 해외 망명 시기에 먼저 나와서 남측 해외운동의 줏대를 세우면서 나를 흔들리지 않게 북돋아준 광주 최후의 수배자 윤한봉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북한 방문 일정의 마지막 날에 문목사 일행과 저는 다른 초대소에 묵고 있어서 먼저 떠나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러 들렀던 일이 생각납니다. 문목사는 대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정자에 올라가 있었어요. 그는 시를 한편 지었노라면서 제 앞에서 큰 소리로 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우 낭만적이고 순수한 내용이었고 이제 돌아가면 체포 투옥될 엄중한 상황과는 전혀 걸맞지 않는 장면이었습니다. 재일 시사평론가인 정경모 선생을 찾았더니 그는 방안에서 침대에 걸터앉아 귀에다 이어폰을 꽂고 뭔가 열심히 듣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없이 제게 이어폰을 내밀었어요. 슈베르트의 연가곡인 ‘겨울나그네’였습니다. ‘폭풍우의 아침’이라는 곡인데, ‘광란의 폭풍우는 하늘을 찢고 흩어진 구름은 몸부림치고 있다’ 라고 시작되는 노래지요. 맨 앞에 나오는 노래는 ‘밤의 안녕’인데 ‘안녕, 살을 에는 듯한 밤의 추위 속으로 나는 사랑을 떠나 방랑의 길에 나선다’. 십여 곡의 노래들에는 잃어버린 사랑의 추억을 남기고 정처없이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지요. 정선생이 내게 말했습니다. 우리들 같지요? 엄중한 분단상황 속에서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분들이었지요. 당시에 남은 국가연합으로 북은 연방제로 통일방안이 팽팽하게 맞서 있었는데 사실은 글자만 몇 개 다를 뿐 같은 소리였습니다. 문목사가 남측의 형편상 중간에 과도적 기간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김주석이 한 발 물러섰다고 하는 것이 ‘느슨한’을 앞에 붙인 연방제 안이었습니다.

  이 ‘느슨한’은 언제나 편협하고 상투적인 교조주의에 의하여 금방 훼손되어버리고는 합니다. 저도 귀국 직전에 벗들과 상의하여 결별 선언을 하게 되지만, 문목사님은 ‘범민련’의 편향에 대하여 근심하다가 대중적인 통일운동을 할 수 없다며 탈퇴를 선언했습니다. 통일운동이 거리에서 정부와 투쟁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서는 안 되며 대중적인 통일운동은 민관이 하나로 되어야만 가능하다고 문목사님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열성주의자들이 찾아가 그를 몰아세우지요. 심지어는 안기부의 앞잡이라고 공격했고 이에 정신적 충격을 받은 문목사님은 그 점심에 체하여 이튿날 급사합니다. 윤이상 선생님도 범민련 의장직을 사퇴하고 ‘각서’를 쓰지 않는 조건이라면 고향 통영을 방문하겠다고 했지요. 그러자 베를린의 열성주의자들이 몰려가 시위를 하면서 공항에서 분신하겠다며 아우성을 쳤고, 윤선생은 뒤이어 병원으로 실려가 작고합니다. 정경모 선생은 남북 중립노선을 지키며 여운형기념사업회 일을 하셨고 드디어는 유학경험 때문인지 펜타곤의 스파이라고 매도당하면서 외롭게 일본에서의 망명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윤한봉 역시 광주의 지역주의를 벗어나자며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면서 혼자서 ‘불편한 존재’ 노릇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지요. 돌이켜보면 해방정국에서 김구 선생과 여운형 선생도 각자 자기 진영에 의하여 살해당했던 것입니다. 분단체제는 냉혹한 이분법을 낳았습니다. 오직 자기 진영만이 선이고 상대 진영은 악이라는 논리로만 무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이분법에서 벗어나 ‘느슨한’ 꿈을 꾸고자 하는 것입니다.

  

2. 현정부의 정체성과 당면 과제에 대하여

  현정부가 ‘중도 실용주의’냐 아니냐 하는 규정을 내리기 전에 한국사회의 현단계를 먼저 함께 고민해보십시다.

  우리가 직접선거 내지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기회를 획득했던 6월항쟁 이후 87년체제를 제대로 자기화하지 못했던 것은 양김의 분리에 의하여 민주화운동 세력이 두쪽으로 갈리면서 운동의 주체를 스스로 포기하고 보수 정치의 틀 속으로 흡수되면서 우리의 원죄가 시작되었습니다. 호남과 영남은 자연스럽게 진보와 보수로 구분되고 선거를 치르면서 양극화가 첨예해졌고 여기에 근대화 시기의 민주화 세력과 독재정부 사이의 갈등의 잔재가 지속되었습니다.

  극우보수로 표현되는 한쪽은 보수라고 부르기보다는 여러 가지 면에서 파시즘에 가깝고 오히려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가 틀림없는 보수 정부였던 셈이지요. 이들 십년간의 두 정부가 보수 정부가 아니라면 어떻게 철저하게 신자유주의적 시장 경제를 신봉할 수가 있었겠으며 중동 파병이나 자유무역협정 따위를 밀어붙였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진보정당은 그 좌파적 함의의 절반 이상을 북한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지요. 천만 노동자라고 하면서도 그들의 투표는 매우 보수적입니다.

  시민사회란 국가와 시장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문화적 영역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사회는 문화는 없고 진영만 존재합니다. 이분법적인 진영론에 근거한 논리만이 환영받는다는 것입니다.

  한국사회에서 합리적 보수 또는 중도 우파의 숫자가 많아져야 시민사회의 건전한 상식이 설 수 있다고 말하면, 황 아무개가 이제부터는 합리적 보수가 되려나보다 라고 대번에 나옵니다. 그러니 모두들 자기 진지를 굳건히 고수하며 선명성 경쟁을 해야 되지요. 남남갈등이나 남북대결을 놓고 보더라도 대동소이(大同小異)는 상식의 타당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강경하고 지당한 말씀을 해서 자기편의 지지를 받기는 쉬운 일입니다. 저는 큰 선에서 양쪽을 다 비판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저희끼리의 옳은 얘기보다는 대중과의 소통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기거든요.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양자택일형 옳고 그름을 따지고 밀어붙이는 데에 국민적 역량을 탕진하고 있다’는 의견에 동의하지요. 이런 식의 이념적 정쟁으로 집권을 되풀이하게 되면 좌든 우든 준비되지 않은 정부와 정책의 간헐적인 주고 받기가 계속될 뿐입니다. 그리고 양편이 새로운 줄세우기로 5년마다 국력을 허비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명박 정부가 ‘중도실용주의’ 정권인가. 그들은 위의 가치를 선거 공약으로 내걸고 저들 말대로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촛불시위’ 이후 용산참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잃어버린 10년’의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역행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공안기관을 중심으로 우편향이 가속화되면서 전반적인 민주주의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남북관계는 거의 냉전시대로 회귀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지요.

  우리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거나 묘하게 꼬이면 ‘팔자’라고 허탈하게 얘기합니다. 이렇게 세계사적으로 중차대한 시기에 금쪽 같은 날들을 허비하고 있으니 우리 민족의 팔자가 얼마나 기박한가 한탄하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중도실용을 자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정부는 대통령의 중도실용을 이념적 우편향으로 해석하고 그에 맞는 정책만 쏟아내고 있습니다. 진정한 중도실용은 이념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실사구시(實事求是)’해야 가능합니다. 제가 이명박 정부를 중도실용이라고 한 것은 이 정부가 말 그대로 중도실용을 구현하기를 바라는 강력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안보의 원칙은 평화입니다.

  금강산과 개성을 두고 혹자는 ‘퍼주기’라고 얘기합니다. 위의 두 지역을 전쟁을 통하여 군사적으로 점유하려면 전문가들에 의하면 50조 원이 든다고 하며 거기에 인명의 살상은 돈으로 따질 수도 없지요. 94년 제1차 핵위기 때에 미국의 전쟁 시나리오에 의하면 개전 초기에 남북에서 약 1천만 명의 인명이 살상될 거라는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한국 경제의 신용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남북 분단의 리스크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은 ‘퍼오기’였던 것입니다. 분단체제를 지속하면서 과연 우리가 2만 불을 넘어서서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이제는 불투명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대외의존도가 높은 남한 자본주의의 한계점인 셈이지요.

  현정부의 ‘비핵 개방 3000’이라는 대북정책의 골격은 북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기분 나쁜 보따리인 셈입니다. 물론 비핵이라는 것은 한반도 평화의 가장 우선적인 목표입니다. ‘개방’은 너무 노골적이고 일방적인데다 ‘햇볕’이라는 말도 남들이 쓰던 말이라 싫다면 ‘교류협력’이라는 평범한 말이 있습니다. 비핵과 교류협력은 다른 보따리에 싸야 한다는 말입니다. 당근과 채찍이라는 제국주의적 외교언어를 같은 민족끼리 써서는 안 되지만 주고 받으면서 협상 협력을 해나가야만 합니다.

  이번의 개성공단 위기만 하더라도 구금된 직원 문제와 개성공단의 실무적 현안 문제를 다른 보따리에 꾸렸어야 하겠지요. 미국 기자의 이란 처리방식과 북한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다는 보도를 보면서 탁자 위에서 할 것과 밑에서 할 것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화의 원칙은 대화를 하는 것이며, 협상의 원칙 또한 협상을 하는 것입니다. 싸워서 이긴 것이 ‘안보’입니까? 이미 주변에 주검이 즐비한데요. 손자병법에 싸우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나와 있지요. 원칙을 지키면서 대북 관계를 새로이 바로잡겠다지만 긴장과 갈등만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안보의 원칙은 평화입니다. 아울러 남북간의 모든 대화와 협상의 원칙은 ‘평화를 위해서’인 것입니다.

  저는 현정부가 위와 같은 한계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여러 차례 밝혀왔습니다. 이것은 특정 정부나 정당의 지지 여부를 떠나 현재 시점이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때라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좋은 때는 힘든 것과 함께 오기 마련이지만, 구한말에 우리가 스스로 개혁하지 못하고 남의 나라의 식민지가 된 이래로 지금이 그 대단원의 마지막 시기라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첫째로 근대사의 거의 절반이 넘는 기간에 해당되는 냉전과 분단시대가 드디어 변화하려는 시점에 도달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세계체제의 재편성이 진행되는 가운데 동북아권의 경제 문화적 역량이 증대되고 있습니다. 셋째로는 우리나라가 중국과 일본 등 강대국 사이에서 과연 선진국으로 비약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갈림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10년 동안 이른바 진보적 성격의 정부 시기에는 오히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그 기간에 저는 무려 열여섯 권의 책을 썼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제가 혜택을 받았다고 모함에 가까운 말을 공개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독립적으로 글을 써서 먹고 살았습니다. 저를 먹여살린 것은 오직 저를 사랑해준 독자들이었습니다. 문화부장관이 어떠냐, 공천을 받아라, 이런저런 제안들이 있었지만 저는 인생에서 문학 이외에 다른 여한이 없는 사람입니다. 많은 분들이 정부와 함께 일하고 있어서 저는 오히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비판적인 자세를 지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정체성도 다른 정부에 접근하는가?

  보수측에서는 좌파가 심은 첩자 또는 ‘트로이의 목마’라 하고 진보측에서는 ‘변절’이라고 합니다. 남북이 얼어붙고 대립 구도로 정지되었듯이 정부와 시민사회가 극단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국내 현안과 정책을 놓고 싸울 때에는 싸워야 하겠지만 타협하고 다른 방향으로 가도록 정책을 견인해내기도 해야 합니다. 어느 원로 지식인이 최근에 ‘거버넌스’의 정치를 제안했지요. 시민단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민주적 원칙을 관철해낼 수 있는 관절입니다. 관절이 없는 몸은 식물화되겠지요.

  정부측에서 본다면 구정부의 정책과 신정부의 기획에서 좋은 것을 선택하여 결합시키는 정책 보따리를 만들어 정치적 지지기반을 확대해나가야 하겠지요. 오히려 그동안은 ‘잃어버린 10년’을 슬로건화하여 사사건건 역행한 측면이 있습니다. 반대세력을 노골적으로 통제하여 약화시키는 것이 무리를 불러오는 악수인데 비해서, 근본적으로는 소통과 공론화를 통해 국정목표와 정책 전반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3. 어째서 북방정책인가?

  현재 전세계적인 공황기에 접어든 세계체제는 생존 조건에 따라 각 대륙별로 권역이 나뉘면서 문화 경제적인 협조 체계와 영향력은 보다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제 정치적 주도력은 고립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반면 중국은 중화주의를 내세우면서 동아시아에서 전통적인 대국주의를 복원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난 정부의 동북아정책이나 균형자론은 중국 일본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고, 점증하는 북한 미국의 불화 가운데서 정세를 과소평가하고 자기역량은 과대평가한 측면이 있습니다. 유럽 통합의 예를 동북아에서 실현해보겠다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좌우할 나라는 분단된 한국이 아니라 중국, 일본 또는 미국일 것입니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거기에다 분단까지 되어 있으며, 이는 세계 속에서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적 발전을 저해하고 스스로의 생존을 제약하는 근본적 위기의 요인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세계적 공황과 한반도가 부딪친 정치 경제적 한계를 극복하고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서도 국가 경영에 대한 비약적인 상상력과 기획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방향을 돌려서 ‘유라시아 대륙’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한반도의 북방에는 만주와 극동시베리아 그리고 그 너머로 몽골에 이어 중앙아시아에까지 닿습니다. ‘비단길’이 중국과 인도 그리고 아랍을 잇는 길이었다면 ‘초원길’은 고구려 이전부터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여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길이었습니다. 태평양에서 카스피 바다까지 닿는 영역입니다. 고대 사서에서도 고조선의 신시처럼 이들 다양한 민족과 문화 그리고 교역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 고구려나 발해는 ‘유목연합’이었던 셈입니다.

  지금도 남북한, 극동러시아, 몽골과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나라들과의 연합을 통하여 우리의 활로를 열 수 있습니다. 우리와 역사적 문화적 친연성을 가진 나라들과 공동체를 추진하면서 미국, 중국, 일본과 친(親)하며 러시아, EU, 아세안과 연(聯)함으로써 주변 강대국들을 자극하지 않는 우회의 구도로 추진되어야 합니다.

  이는 한반도가 갖는 대륙성과 해양성의 이점을 동시에 취하는, 우리 민족의 생존권이 연합을 통한 상생의 지정학적 공간으로 열려나가면서 확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의 역사가 분열과 사대로 일관되었던 한계에서 벗어나고 협소한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로 분단을 바라보았던 냉전적 관점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우리의 역사는 북방정책이 연이어 좌절되면서 축소되어온 역사입니다.

  이미 2003년에 한국과 몽골은 동몽골 개발에 관한 협정서를 체결한 바 있습니다. 동몽골은 한반도 남북한을 합친 면적이며 광활한 평야이기 때문에 실제 경작 넓이는 한반도 산지를 뺀 경작지의 몇 배가 넘는 지역입니다. 동몽골은 중앙 유목국가가 이곳을 기반으로 일어난 지역이며, 고조선, 흉노, 부여, 고구려, 선비, 돌궐, 몽골, 청의 기반이었습니다. 러시아와 일본이 오랫동안 전략적 요충지로 여겨왔으며 우리가 협정서를 체결하고도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일본은 현재 이곳에 진출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세계 최대의 비옥한 대초원이며 지하자원의 보고입니다.

  한국이나 몽골처럼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약소국들은 아무리 큰 내부적 발전과 번영을 이룬다 해도 그것이 대외적 차원에서의 자주적 생존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연합’ 모색의 근본적 출발점이라 하겠습니다. 몽골처럼 강대국들에 의해 내륙으로 둘러싸여 있거나 한국처럼 반도 국가로서 대륙과 해양 어느 쪽의 힘의 팽창에도 지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조건 속에서는 언제나 주변 강대국의 강력한 자장 속으로 빨려들어가 종속화 변방화될 수 있습니다.

  몽골은 인구 260만 정도의 인천시만한 규모이지만 토지의 넓이는 한반도의 8배가 넘고 엄청난 자원과 개발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의 지도층은 십여 년 전에 우리와 수교를 개시하던 초기부터 일관되게 ‘투 코리아+몽골’ 또는 코리아 몽골 중앙아시아가 모두 함께하는 ‘알타이연합’을 제안해왔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도 몽골의 문인 지식인들에게서 이러한 의견을 들은 바 있었고 지난 연말에 몽골 총리 일행을 수행한 민간사절단들로부터도 같은 제안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과거처럼 제국주의 시대가 아닌 이상 정복이나 전쟁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제문화공동체를 구상한다면 우리가 몽골 중앙아시아 등과 ‘알타이연합’을 이루는 일이 상상만으로 그칠 일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남미연합, 동남아연합, 유럽연합 등의 예와 같이 정치 경제 문화적 협력을 위한 연합적 공동체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알타이연합’ 지역은 한반도의 약 50배에 달하는 넓이이며 인구는 1억 2천만 명입니다.

  이러한 기획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문제는 바로 한반도의 분단이며 남북 당국간의 대화 단절입니다. 남북문제를 이념적인 측면에서 볼 것이 아니라 문화적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그런 면에서 북한과의 관계 변화는 이념적인 문제가 아니라 한민족의 활로를 여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오바마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중동과 북핵 문제를 동시에 처리해야 합니다. 더구나 클린턴 정부 이래의 숙제였던 북미 수교와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가 현안 과제입니다. 북미간에 합의가 이루어지고 한반도 평화체제가 되면서 북미 수교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동북아에 동서독 장벽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엄청난 세계사적 변화가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4. ‘알타이 문화연합’과 ‘평화열차 세계작가포럼’

  저는 금강산에서의 사고와 단절 이후 사회단체 후배들과 협의한 뒤에, 현정부와의 대화 통로를 자청하였습니다. 북한에 대하여는 저들의 주요 대의명분 중의 하나인 6.15와 10.4 선언의 인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즉각적인 식량지원과 농업기술 전반에 관한 협력을 제안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의 잉여분 50만 톤의 창고 유지비도 막대했던 것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려운 중소기업을 위해서도 트랙터 경운기 같은 농기계들을 사서 북한에 지원해주고 농업기술 전반에 관한 협력을 제안해야 함을 제언했습니다. 북한은 이 무렵에 식량난을 겪으면서 찐쌀을 중국에서 사다먹기도 하고 민간 통로를 통하여 톤당 가격을 인하해서 묵은 쌀이라도 팔아달라고 할 정도로 급박했습니다. 그러나 남측은 협상의 원칙을 고수할 수밖에 없는 듯 보였습니다. 국민이 목숨을 잃었으니 당연한 노릇이지요. 미국에서 식량 오십만 톤을 제공할 때에 남측은 오만 톤을 제의했다가 거부당하고 맙니다. 그러면서 양측의 감정은 쌓여갔습니다. 사실은 비핵과 교류협력 그리고 인도주의적인 지원을 분리하면서 열강들에 대하여는 한반도의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려는 노력을 주도적으로 견인해내야만 합니다. 남들은 전혀 바쁠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어쨌든 남북 관계가 물밑에서 오가던 내막을 어찌 다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우선 알타이 연합을 위한 전제로서 ‘알타이 문화연합’에 관한 제안과 이를 세계적으로 선언해낼 ‘평화열차 세계작가포럼’의 기획안을 정부에 제안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이 기획안에 대하여 큰 공감을 보였습니다.

  알타이 문화연합의 배경은 이미 말했지만, ‘평화열차’는 또 무엇인가. 저는 오래 전부터 유라시아 대륙의 마지막 혈맥을 뚫어내는 한반도의 남북 연결을 꿈꾸어왔습니다. 작년 가을에 오랜 벗인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가 잠깐 방한했을 때 예전에 내가 농담처럼 얘기했던 ‘평화열차’를 떠올리며 그 일을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지요. 리베라시옹 기자와 대담을 나누던 자리였습니다. 동서양의 저명 작가 30여 명이 파리에서 출발 행사를 갖고, 20세기의 분단 지역이던 베를린에서 행사를 벌이고, 모스크바, 옴스크를 거쳐서 바이칼 부근의 동서양 접점인 이르쿠츠크에서 평화와 새로운 문명에 대한 대축전을 벌이고 울란바토르를 거쳐서 베이징으로 내려와 국제열차 편으로 평양에 들어가 행사를 갖고 이미 지난 정부 때 시험 운행한 평양 개성 도라산 구간을 통과하여 서울에서 피날레 행사를 갖자는 기획안입니다.

  이들 행사에는 작가들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뮤지션과 연예인들을 도시마다 배치하여 전 세계로 한반도의 평화를 알릴 작정입니다. 기차 6량을 유럽철도에서 대절하여 20일 동안 움직이는 ‘평화열차’는 바로 한국전쟁 60주년이 되는 2010년 여름에 달리게 될 것입니다. 지난 4월에 뉴욕에서 열린 세계작가대회에서 저는 많은 서구 작가들과 평화열차에 대한 제안을 주고 받았는데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서로 가겠다고 호응했지요. 이는 금융위기로 촉발된 신자유주의의 위기는 20세기가 남긴 마지막 재앙이며, 21세기에는 새로운 문명사적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는 작가 지식인들의 고뇌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서로 일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문명사적 전환을 작가들이 앞장서서 문학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는 자부심이 내면에서 꿈틀거리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20세기적 이념형 정치가 망쳐놓은 분열의 세계를 문학이 평화로써 치유하는 꿈의 열차가 되도록 하자는 소망입니다.

  저는 북한의 서바이벌 게임이라 할 수 있는 로켓 발사 이후 급박하게 돌아가는 남북관계의 긴장을 지켜보면서, 만약에 우리 정부가 PSI에 참여하게 된다면 다음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대화의 문은 닫히고 말 것이며 정부에 걸었던 기대를 포기하리라 의사 표시를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대통령이 PSI 참여를 전면 보류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유라시아 순방의 동행을 제안해왔을 때 서슴지 않고 응낙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지요. 이는 저에게도 큰 부담이 되는 일이지만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역시 큰 부담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내년 상반기까지 한시적 동반을 말한 것은 신뢰관계의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그때를 넘기면 현정부에게도 별다른 선택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 여긴 때문입니다. 저는 대의명분이나 진영 의식을 넘어서 뒤늦게 시작된 신뢰가 실천적 현실로서 나타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열망하고 있으며,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마지막 사회봉사를 해볼 작정입니다.

  혹자는 엉뚱하게 노벨상 스캔들을 들먹거리기도 합니다. 오히려 저는 서구의 잣대로 이루어지는 평가에 대하여 비판적인 자세를 취해왔습니다. 노벨상을 염원하던 분들이 어서 받으셨으면 하지요. 저는 그런 논란에 끼어들기 싫어서 스웨덴에서 책이 나왔을 때에도 가지 않았고 그 어떤 문학행사도 스웨덴에서 벌인 적이 없습니다. 몇몇 문인들과 함께 올 10월에 행사를 하러 스웨덴에 가겠느냐는 관계자의 제안을 저는 거절했습니다.

  외국 작가에게 한국 작가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을 타진하는 우리의 언론이야말로 참으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땅의 내 독자들을 사랑하고 그 누구보다도 우리 문학에 대하여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찾아오고 세계의 작가들이 열차에 동승하여 평양과 서울의 막힌 혈관을 뚫게 될 때에, 그것은 세계문학이 설움과 한의 세월을 보내온 우리의 인민과 민중들에게 바치는 헌사가 될 것입니다.

  2009년 5월 18일 황석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