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워서 남주자 다시보기
2006 대입 논술 준비하기
현재에서 미래 찾기
김혜진 | 해오름 평생교육원 전임강사
■ 학습목표
- 미래는 현재의 연장임을 이해한다.
- 과학기술의 발달이 곧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한다.
- 미래를 어떻게 잘 만들 것인지 고민하도록 한다.
텔레비전을 켜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는 유비쿼터스의 미래가 보입니다. 아이가 집에서 무서워할 때 밖에 있는 엄마가 화상전화로 아이를 달래면서 아이가 잠자기 좋게 조명을 바꾸어줍니다. 가스불을 끄지 않고 나와서 걱정이 될 때 전화 한 통화로 가스불도 잠글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어서 사람이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세상은 정말로 편리해 보입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우리에게는 그런 미래가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날을 우리는 기대해도 될까요?
그런데 영화나 미래사회를 다룬 소설을 보면 정반대입니다. 오웰의 『1984』도 멀지 않은 미래를 다룬 소설이었지만, 이 때의 유비쿼터스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장치입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일일이 감시되고 보고됩니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나의 삶은 모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똑같이 미래를 들여다보고 있지만 누구는 그 안에서 인간을 더욱 풍요롭고 편리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고, 누구는 인간이 그 안에서 감시당하고 통제되는 암울한 미래를 보고 있습니다. 어떤 전제들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요?
낙관과 비관의 교차점
미래사회를 다룬 영화의 공통적인 특징은 기술을 통제하여 권력화 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미래사회의 권력자들은 그다지 선하지 않기에, 높은 기술 수준을 자신의 손 아래 통제하면서 중앙집중화하고 있습니다. 『1984』에 나오는 ‘빅 브라더’는 텔레스크린을 통해서 사람들의 의식을 통제하고, 생각의 변화까지도 읽어냅니다. 그들은 집요하게 사람들을 추적하고 대상화합니다.
미래사회의 노동은 대단히 이원화되어 있습니다. 누구는 아주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갖고 첨단화된 노동을 하지만 누군가는 마치 하수구와 같은 곳에 살면서 비참한 인생을 삽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노동에서의 해방이 가능해지지만 그것은 일부에게 독점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길거리로 내몰리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래 사회를 비관론적으로 보는 이들의 주장은, 이 모든 문제가 기술 자체라기보다는 그것을 통제하는 인간이 성과를 함께 나누기보다 독점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광고에 나타난, 그리고 최근에 유행하는 미래학은 기술에 대한 대단한 신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술수준 자체가 인간의 관계와 권력의 형태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습니다. 앨빈 토플러와 같은 미래학자들이 생각할 때 지금까지 세계에서 나타났던 문제는 에너지의 부족이거나 기술이 충분하게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이 발전하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대중매체의 탈대중화로 점차로 중앙집권화된 것에서부터 자유롭게 개성적인 분산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과학기술의 특성 자체가 인간관계를 변화시키고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재택근무에 대한 진실 혹은 거짓말
미래사회를 보는 이러한 관점들을 다시 되짚어봅시다. 이러한 낙관과 비관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차이들이 있지만 동시에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미래사회에 대한 객관적 인식은 그런 전제들을 꼼꼼하게 살펴볼 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까운 사례를 통해서 과연 미래사회의 이런 낙관 혹은 비관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야기해봅시다.
최근에 ERP 시스템(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이 확대되면서 재택근무가 활성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재택근무가 되면 사람들의 출퇴근 시간이 줄어들고 업무 효율성도 높아질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면 재택근무가 과연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고 있을까요?
(1) 미래사회의 변화를 추동하는 힘은 기술인가, 인간인가
만약 재택근무를 통해서 사람들이 집에서 일을 할 수 있고, 그로 인해서 업무 효율성이 높아진다면 사람들은 누구나 기꺼이 재택근무를 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재택근무 인원을 받은 KT나 대교 등 학습지의 경우 선생님들이나 노동자들이 재택근무를 꺼리는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과학기술이 급격하게 발달한 이유는 이것이 자본주의 이윤생산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재택근무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기술을 발전시킨 이유는 사람들의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만들어서 기업이 원하는 시간에 자유롭게 일을 시킬 수 있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사무실이라는 공간에 있을 때에만 일하는 시간이라는 관념을 없애고 모든 시간이 일하는 시간이 되도록 만들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과학기술만 제대로 발달한다면 이제는 사무실을 유지하는 비용을 줄이고, 공간적 한계를 뛰어넘어 본사는 인도에 있고 상품은 필리핀에서 만들고, 판매는 국제적으로 하면서 사무실 개념이 사라지는 상황이 오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재택근무를 가능하게 만든 힘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재택근무는 어떤 사람에게는 밤낮없이 일에 매달려야 하거나, 어떤 이에게는 똑같은 노동을 집에서 똑같이 하는데 임금은 절반밖에 안 되는 비정규직 생활을 의미하거나, 어떤 이에게는 안정된 공간 하나 없이 집안 일도 하면서 정신없이 회사 일도 해야 하는 이중 생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재택근무는 집에서 놀면서 편하게 할 수 있고 시간을 자신이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는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유비쿼터스 시스템 아래에서 어디에서나 어디든지 명령이 가능한 조건 때문에 재택근무가 가능한 것이므로 시간에 대한 자율적 조정이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게 됩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기만 하면 우리의 미래가 낙관적으로 변할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아름다운 재택근무가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은 이러한 실제들을 장밋빛으로 덧칠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결국 재택근무를 가능하게 하는 과학기술은 바로 이윤을 보다 많이 남기기 위해서 투자된 기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는 인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윤이 중요한 것입니다.
(2) 미래는 현재와의 단절인가, 연장인가
재택근무가 노동시간에 대한 자유로운 조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24시간 대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점은 우리 현실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미 재택근무를 시행하고 있는 KT나 학습지 회사의 경우 노동자들은 결코 이런 방식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의 현실이 과학기술의 발달을 인간을 위해서 사용할 수 없는 구조 안에 놓여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우리는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열광합니다. 난치병 치료의 가능성 때문에 열광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현실을 들여다보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이미 에이즈약이나 백혈병 치료제 등은 개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특허 때문에 비싼 약값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장티푸스 등 조금만 투자하면 치료약을 개발할 수 있는 질병에도, 이 병에 걸리는 사람들 대부분이 돈 없는 사람들이란 이유로 투자가 거의 없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생각해봅시다. 과학기술이 있다고 해서 치료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는 누군가에게(우리는 그것을 우리 국가라고 믿고 있지만) 막대한 이득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돈만 된다면 그 연구는 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인간의 가치를 왜곡시켜서 날 때부터 불평등한 신체 구조와 지능을 가진 사람들을 만드는 방식으로 이용될 수도 있습니다. 돈이 되면 뭐든지 열광하는 사회 안에서는 그것을 제어하는 윤리적인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현재 그런 사회이기 때문에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재택근무가 가능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체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더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재택근무를 가능하게 하고, 그것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은 현재 과학기술이 모든 이들에게 어떻게 분배되고 있는가를 들여다보면 허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미래란 현재의 연장이지 결코 단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미래는 어떻게 상호 연결되어 있는가?
미래는 현재의 연장이며 또한 동시에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례 하나를 놓고 그것이 바람직한 미래를 만들 것인지, 아닌지를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어떤 변화를 낳을 것이고, 또는 어떤 변화에 의해 지연되거나 발전하는지 면밀히 검토해야 합니다.
재택근무라는 하나의 현상도 과학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그대로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유비쿼터스 시대가 되면서 재택근무가 가능한 구조가 생깁니다. 하지만 기업들이 재택근무 방식을 잘 채택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 생긴다 하더라도 사람들 사이의 협조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유대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재택근무의 문제가 많이 파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또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통제 시스템이 잘 발달하지 않으면 기업들이 전체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도 집안일과 기업의 일을 분리시키는 사회환경을 선호하는 문화적 경향이 남아있는 이상 재택근무를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재택근무를 위한 기술이 발달했다는 것이 재택근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한 사회·문화적 조건들이 확보되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 일과 쉼이 분리되지 않게 되면, 사람들은 이제 쉬기 위한 또 다른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놀이산업이 발달하게 되지요. 놀이를 위해 밖으로 나간 사람들은 열심히 오락을 소비합니다. 놀이기구를 소비하고, 음악을 소비합니다. 이제 쉬는 것은 쉬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소비의 공간이 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치는 일이 없어지고, 그렇게 되면 사람과 만나게 하는 공간에 대한 욕구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스웨덴 같은 나라에서는 직접 사람을 찾아가서 일을 보는 것이 무척 낯설고 힘든 일이 되고 있으며 모든 일을 이메일이나 팩스로 처리하는 것이 익숙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공동체성을 잃고 개인과 가족으로 도피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히려 새로운 공간에 대한 욕구를 발전시키고 그래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놀이문화를 소비하거나 아니면 산악회 등 각종 오프라인 모임들을 만들어냅니다. 재택근무가 생기면 이제는 일하는 시간과 그렇지 않은 시간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특정한 시간에 출퇴근을 하지 않으므로 엄격한 시간구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24시간 사회로 접어들면서 낮과 밤으로 구분되던 것들은 이제 사라집니다. 24시간 전부가 가동된다는 것은 사람 생활의 규칙성을 파괴하기도 하고, 그러면 점점 더 시간에 대한 주권이 사라지면서 시간에 대한 통제가 더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재택근무가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보아야 하고, 그 속에서 재택근무의 가능성이나 긍정성이나 부정성이 평가되는 것입니다. 재택근무라는 변화 하나도 무수히 많은 또 다른 변화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다양한 변화들은 서로가 서로를 추동하기도 하고, 서로 반대작용을 일으키기도 하면서 미래사회라는 총체를 이루어갑니다. 그러므로 미래사회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면서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미래사회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변화하는 구조 안에 있는 사회이니까요.
(4) 미래는 소수가 만드는가, 다수의 선택인가?
한 명의 천재가 100명을 먹여 살린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창조적인 천재 몇 명에게만 투자하라는 것이지요. 아마도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회장인 빌게이츠를 빗대서 우리나라 교육부에서 이야기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맞는 말이 아닙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무수한 창조적인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사람들을 자신이 독점으로 묶어두기도 합니다. 많은 소프트웨어들은 마이크로소프트 회사에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수많은 마이크르소프트 및 그 회사에 의해 묶여있는 무수히 많은 프로그래머들이 빌 게이츠를 먹여 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사회를 이야기할 때 지식기반사회라는 이름으로 창조적인 소수자가 되라는 요구는 그래서 의미있는 이야기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런 창조적 소수자에 대한 왜곡된 신화는 미래사회를 어둡게 그리고 있는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우매한 민중들은 자신들이 속는 것도 모르고 그저 따라가다가 몇 명의 똑똑한 사람들이 나타나서 문제를 뒤엎고 결국은 인간의 얼굴을 한 미래사회를 만들 것이라는, 일명 ‘메시아 주의’ 영화이지요. 물론 어두운 미래를 만드는 사람들도 소수의 음모론자들인 것으로 그려집니다. 한 쪽에서는 창조적 소수가 되라고 부추기고, 또 한 쪽에서는 그러한 창조적 소수들이 미래사회를 어둡게 만들기도 하고 구원하기도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는 다수의 선택이며, 다수의 힘에 의해 변화됩니다. 예를 들어 재택근무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광고를 해도, 사람들이 우매하게 따라가지는 않습니다. 재택근무를 위한 시스템이 구비되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만나는 것을 선호할 수도 있고, 현재의 가족제도가 집 안에서 안정적으로 일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기술적 변화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저항이나 수용에 따라 수용 여부가 판단되는 것입니다.
저항이나 수용은 대중들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이것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문화적 조건들이 더 결정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람들에게 해로운 기술을 사람들은 수용과 변형을 거쳐서 더 좋게 만들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재택근무가 더 적은 임금과 일상적 통제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의 저항과 변형을 통해서 오히려 개인의 자율성을 더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미래사회를 이익만을 위한 기술발전에 종속시키려는 사람들과, 그 기술발전의 틈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삶을 조금 더 의미있게 만들려는 사람들의 경쟁과 갈등 관계가 미래사회의 모습을 다양하게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매한 민중과 소수의 창조적 소수자라는 등식이 주는 공포와 장밋빛 미래 모두를 거부하고, 변화 속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노력을 열심히 지지하고, 그런 삶을 우리가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미래학과 기술주의 예찬을 넘어 현실 들여다보기
기술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구호가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황우석 교수가 만병통치약을 만들 것이라는 기대,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유비쿼터스가 된 사회에서 인간은 편하게 앉아서 모든 것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과학기술의 발달을 끝없이 추구하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미래에 대한 맹목성, 기술에 대한 무한한 신뢰는 어떻게 보면 근대성의 특징인 것 같기도 합니다. 최초로 열린 파리의 만국박람회에서 에펠이 기술의 무한발전을 상징하는 대형철탑을 세울 때, 그리고 물리학이 가장 촉망받는 직업으로 군림할 때, 근대의 사람들은 과학과 기술은 인간의 풍요를 이끌 원동력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미래에 대한 낙관은 과학기술 결정론에 기반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앞서 있는 것은 편리함에 대한 추구라는 오해와 왜곡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편리함을 추구하며 그것을 통해 보다 인간답게 될 것이라는 발상이 지금의 과학기술을 상품화하는 가장 큰 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편리란 과연 진정한 편리였을까요? 우리는 세탁기가 우리를 편리하게 했다고 믿지만 사실은 청결의 개념을 변화시켜서 한 달에 한 번 빨래를 해도 될 것을 매일매일 세탁기를 돌리는 노동을 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편리해졌다고 믿고 있는 것이지요. 재택근무로 인해 편리해질 것이라는 신화도 이동하지 않을 편리를 주지만 결국 자신의 시간을 온전하게 자본에게 바쳐야 하는 편리로 이어지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편리에 대한 신화에서 자유롭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회는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이런 과학기술은 중요하다. 여기에 의문을 갖지 말아라. 의문을 갖고 인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뒤쳐지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또한 일말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달려가지 않으면 다른 이들에게 뒤쳐진다는 것. 그 말은 뒤쳐지는 자는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한 사회가 와도 그 혜택을 누릴 수 없다는 일종의 협박과 같은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또 발전만이 우리를 살리도록 한다는 주술을 우리에게 걸어놓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성과 미래학이라는 이데올로기는 현실의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과학기술 입국을 이룰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행복한 미래가 보장된다는 아주 오래된 주술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현재의 우리는 왜 이와 같은 모순을 안고 있는가? 산업사회가 시작된지 불과 100년만에 놀랄만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왜 굶어죽는 사람들은 나날이 늘어가고 원시적인 질병으로 죽는 사람도 이리 많은가? 기술은 발전했는데 왜 누구는 실업자가 되어 길거리를 떠돌고 누구는 장시간 노동으로 죽어나가는가? 이런 현실의 문제를 냉정하게 들여다볼 때 과학기술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그 과학기술조차도 어떤 목적을 갖고 발전하는 것임을 알게 되고, 그 과학기술에 대한 제대로 된 통제는 무엇을 통해 가능한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과학기술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발전하는 것이며,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어떤 의미를 주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막상 편리함을 원하지만 이것이 편리의 탈을 쓴 감시이기도 하고, 인간의 불안심리를 자극하여 안전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결국 CCTV를 통한 사생활 침해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막으려면 왜 우리는 불안한가? 편리함이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당연하게 발전해야 하고, 당연하게 편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천박한 인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진짜 인간다운 미래, 우리의 삶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만드는 미래의 꿈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문학이 없는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위해 사용되지 못하며, 현실사회에 대한 이해가 없는 미래학은 모두 허구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미래를 만드는 것은 바로 인간이며 대중들의 올바른 선택과 수용에 의해 변화의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독해자료
아래 글들은 인간에 관한 과학적 탐구가 인간의 행동이 지향해야 할 바를 제시해줄 것인지 하는 문제에 관련해 부정적인 입장에서부터 긍정적인 입장으로 옮겨가는 현대의 사상적 추이를 순차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 글들을 잘 읽고, 이러한 추이의 결과와 관련지어, 마지막 글에서 언급되는 “진화과정을 스스로 조정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서술해 보라.
(1) 인간의 본질 및 인간의 특수지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지능이나 선택능력보다는 훨씬 높은 곳에 있다. … 인간을 인간이도록 하는 새로운 것을 감각충동, 본능, 연상적 기억, 지능, 선택능력 등에 무엇인가가 보태지는 데서 찾는다 해도, 그것을 역시 심적 생명영역에 속하는 기능이나 능력으로 본다면, 이 또한 잘못이다. 그러한 것이라면 그것은 새로운 본질이라 하더라도 심리학이나 생물학의 대상에 속하는 것일 뿐이다.
인간을 인간이도록 하는 새 원리는 우리가 넓은 의미에서 생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새 단계가 아닐 뿐 아니라, 생명이나 심성이 현현(顯現)하는 단계의 새로운 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 일반에 대립하는 원리요, 따라서 인간 내부의 생명에도 대립되는 원리다. 이 원리는 참으로 새로운 본질적 근원사태로서 자연적 생명의 진화로 돌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미 이런 원리를 주장했고 그것을 이성이라고 명명했다. 우리는 오히려 이에 대해 하나의 포괄적인 단어, 즉 ‘정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정신은 확실히 이성의 개념을 포함하지만, 이념의 사고와 함께 일종의 직관도 포함한다. 즉 근원현상 혹은 본질적 내실(內實)에 관한 직관과 또 호의, 애호, 후회, 경탄, 행복, 절망, 자유, 결단 등과 같은 특정한 단계의 의지적이고 정서적인 작용을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정신이 유한한 존재의 내부에서 드러나는 그 작용중심을 인격이라고 부르며, 이를 모든 ‘기능적’인 생명중심과 준별(峻別)한다.
(2) 동서양에서 생각하는 인간의 특성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적 특성과 이성적, 정신적 존재로서의 특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과거의 철학자들 중에는 인간의 이러한 두 성질을 서로 대립되고 상반되는 특성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의 동물학적 특성을 억제하고 이성적인 특성을 살려야만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견해는 다소 설득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이성적 측면과 함께 생리적, 기본적 욕구도 중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3) 사회생물학은 현존하는 모든 생명 종(種)들이 진화의 산물이며, 생물학적 진화를 초래하는 것은 유전자 재조합, 돌연변이, 그리고 자연선택이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한다. 사회생물학은 행동 방식, 특히 인간을 포함한 생물들의 사회적 행동에 진화론적 사고를 적용한다. … 사회생물학은 생존, 즉 번식의 성공이 최고의 원리임을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이타적 행동도 번식을 위한 일이거나 생존경쟁 속에서 자신의 최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다.
사회생물학은 본질적으로 유전이론이다. 개별적 학습이 중요하다는 것과 외적인 영향에 의한 행동이 변화될 가능성은 당연히 인정된다. 그러나 입론의 근거가 되는 명제는 (사회적) 행동을 유전자가 조종한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사회생물학은 생물체를 유전자에 의해서 조종되는 생존 기계로 본다.
인간도 사회생활하는 생물이라는 명제를 발판으로, 사회생물학은 진화 - 유전학적 모델을 인간의 사회적 행동에 적용시킨다. 여기에는 도덕적 행위도 포함된다. … 도덕도 진화의 산물로 해석된다.
(4) 베일에 가려졌던 인체의 신비가 벗겨지면서 생명공학 분야에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인간 유전자 완전해독은 사람의 유전체에 어떤 유전정보가 담겨 있는지를 밝혀낸 혁명적 사건이다. … 수십 억의 인류가 저마다 다른 특징을 지니는 이유는 아데닌(A), 구아닌(G), 시토신(C), 티민(T) 등 네 가지 염기서열로 구성된 DNA란 유전정보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의 유전자는 30억 개 염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번 연구 결과 이들 염기가 어떤 순서로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 밝혀진 것이다. … 전 세계가 인간게놈 발표에 열광하는 이유는 염기서열을 이용해 인체의 신비가 완전히 밝혀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즉 유전정보를 통해 타고난 외모나 유전병은 물론 음식을 소화하는 능력, 질병에 대처하는 방식,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도 예측 가능한 시대가 온 것이다.
(5) 자기 인식은 언제 어디서나 중요했다. 오늘날 그것은 시대적 소명이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통찰이 종(種)으로서의 우리 자신의 존립을 결정할 수 있을 듯하기 때문이다. 그럴진대 이러한 자기 인식을 고양하는 것은 일종의 윤리적 의무에 속한다. 단, 우리가 살아남기를 원한다는 전제하에서 그러하다. 호모 사피엔스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할 이유는 진화의 그 어느 것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들 앞에 존재했던 수많은 다른 종들처럼 그들 역시 얼마든지 멸종될 수 있겠지만, 설사 그렇게 된다 해도 진화의 역사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화과정을 스스로 조정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은 비상(非常)한 것으로 인간에게만 고유하게 주어져 있다. 결단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 토론하기
다음은 인간의 가까운 미래 주거형태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서술한 글이다. 이 글을 읽고 다음 내용을 토론해보자.
1. 이 사람이 주거형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측하는 데에 주요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 사람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이야기해 보자.
2. 이 사람의 주장은 현실화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요소가 이런 현상의 현실화를 방해할지 생각해보자.
3. 이 사람의 주장대로 현실화된다면 우리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대해 생각하여 이야기해보자.
미래수직도시 전망과 하이퍼 빌딩
현재의 공학기술로 500~800m 높이의 건축물을 짓고 있는데 2015년에는 1000m, 2025년에는 2000m, 2050년에는 4000m의 건축물을 짓게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1000m가 넘는 극초고층 수직도시에 대한 구상은 벌써 10년 전부터 구체적으로 세워져 왔다.
극초고층 건물은 건축물이 개별건물로서 도시의 일부로 인식되는 한계를 넘어서 인구 10만 명 이상을 수용하는 수직도시로 변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미래도시의 수직적인 신공간 개념의 적용은 하이퍼 빌딩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재 지구상의 인구는 약 65억 명으로 간주되는데 의학기술과 사회복지 환경의 발전으로 인구는 더욱 증가일로에 있으며 특히 현대의 도시는 늘어나는 거주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미래의 공간을 위하여 건축가 파울로 솔레리나 일본의 도시기반공단 같은 도시공간 연구자들은 하이퍼 빌딩이란 신개념의 건축을 제안하고 있다.
이들은 기존 도시의 저층·저밀도 분산에 따른 전통적인 수평배치는 건축물과 자연환경 공존이 실현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평으로 광범위하게 배치된 건축물에 의해 오히려 자연의 생태계가 침식되고 건축물간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사람과 물류의 이동이 증가해 에너지가 과도하게 낭비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수직공간의 확보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수평 거주공간을 수직 거주공간으로 변환하는 것을 추구하며, 지상공간의 확보를 통해 자연을 보호하는 친환경적 공간 창조에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기존의 평면도시의 다양한 공간이 수직으로 집적된 입체도시 공간으로 변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 극초고층 빌딩 건립기술
극초고층 건축물은 기술적으로 기존의 50~100층 규모의 건설기술과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극초고층 빌딩의 건설을 위해서는 혁신적인 공법과 신소재 및 빌딩 운영시스템의 개발이 필요하다. 즉 건설용 자재는 초극강, 초극내력을 지닌 초경량 불연자재여야 한다. 이에 따라 현재 사용되고 있는 콘크리트와 철강 재료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 신소재들이 속속 개발되고 있으며 더 뛰어난 소재의 개발이 계속되고 있다.
또 현재 엘리베이터 기술은 200층 규모의 수직 운송이 가능한 단계이나 극초고층 빌딩에서는 건물 내부의 간선도로 시스템이 설치되어야 하고, 자기부상 캡슐형 이동장치와 같은 수직 및 수평 이동을 위한 신개념의 운송수단이 적용될 것이다. 또한 수만~수십만 명의 인구를 수용해야 하는 데 따른 에너지 소비를 절감하기 위한 자연에너지 활용 및 에너지 재활용 시스템과 수자원의 재활용 시설, 쓰레기 운송 처리 시스템, 화재나 테러에 대비한 재난 방재 시스템 등이 단일 건물 내에서 구축되어야 한다. 중국 상하이시는 21세기 중국의 국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2050년에 인구 3000만명 시대를 대비하여 ‘바이오닉 타워’라는 이름의 1100m가 넘는 극초고층 빌딩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피오즈 등의 건축가가 제안한 바이오닉 타워는 주거공간과 함께 사무실, 백화점, 병원, 학교, 공원 등의 시설을 모두 수용하며 25층 단위의 독립적인 생활공간을 수직으로 12개 쌓아올려 300층에 달한다. 강한 지진에 견딜 수 있도록 건물 기초에는 호수 등으로 이루어진 지진 흡수지역을 설치하고 태풍 등 강풍에 대해 최상층의 진동 범위를 2.5m 이내로 조절하는 구조시스템을 채용하였다.
또한 건물 내부 화재시 재해 확산 방지를 위해 바닥을 방화구조로 하는 등 재해에 대한 대책도 고려했다. 일본에서는 1994년부터 건설성 및 90개 이상의 관련업체가 참여하여 높이 1000m, 연면적 약 300만평(1000ha), 수명 1000년 이상인 수직형 도시를 개발하려는 연구가 시작되었다.
극초고층 빌딩의 기본 구성은 3개의 공간을 단계별로 연결시키는 구조를 갖는다. 첫 단계 구성인 인체의 뼈대에 해당하는 구체는 1000년의 내구성을 지닌 복합기능 타워 등으로 구성된다. 두 번째로는 공간을 분할하는 구조물을 구체에 부착하고, 이 공간 분할 구조물 속에 세 번째 구성에 해당하는 내부빌딩을 설치한다.
극초고층 건물의 건설은 3개 혹은 그 이상의 유닛(건물 단위)이 조합될 때 완공되는데 대체적으로 하나의 유닛을 완성하는 데 30년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첫 번째 유닛이 완성되면 이를 하나의 타워로 사용하고 이와 동시에 타워를 수평과 수직 방향으로 확장시킨다. 교통수단으로 이용될 나사형 통로는 산악용 열차와 같은 방법으로 빌딩 내부를 연결하게 된다.
이밖에도 360도 회전하는 초고층 빌딩을 세워서 각 실마다 정해진 방향에서 일조량과 전망이 정해져 있는 기존 건축물과 달리 일조권과 조망권을 공평하게 해줄 수 있는 기술도 실현될 예정이다.
또 초고층 빌딩에서는 바람의 세기와 실내외 기압 차로 인해서 자연환기를 도입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이중외피(二重外皮) 시스템을 도입하여 자연환기에 의한 난방 에너지 절감 방법이 사용되고 있으나 장래에는 공기를 투과시킬 수 있는 유리의 채용과 일사량이 많은 빌딩 외피에 대해서 태양의 이동과 빛의 세기에 따라서 투명도를 자동으로 조절하는 유리를 사용하여 1000m 이상 고도의 강한 바람과 온도 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만들게 될 것이다.
공사기간도 매우 빠른 속도로 단축되고 있다. 500여m인 타이베이금융센터101 빌딩이 3년10개월에 지어졌으며 이보다 더 높은 버즈 두바이는 3년11개월의 공사기간이 소요될 예정이어서 1990년대 초반에 비해 2배 이상 단축되고 있다.
환경친화적인 도시 개발의 중요성
친환경 극초고층 빌딩의 건립에는 수평적 도시개발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지만 인류공생을 위한 환경친화적 도시의 구축이 가능하고 길어야 100년을 내다보는 기존 건축물보다 3~10배 이상 오래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사용기간을 고려한다면 훨씬 경제적인 대안이다.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구입하려면 초기비용은 많이 들지만 유지비용이 훨씬 저렴하고 수명이 길며 환경에 기여한다는 점과 비슷한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와 같이 좁은 국토에 인구집중과 그로 인한 도시환경의 악화가 매우 심각한 상황의 국가 및 도시에서는 이러한 당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친환경적인 초고층 수직도시화가 불가피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초고층 건립 경쟁에서 선두에 설 수 있도록 국내에서도 초고층 건립이 활발히 이루어져야 하고 이를 위한 제도의 정비가 절실히 필요하다.
또 새로운 건설기술과 건설 신소재의 개발 및 자연친화적인 쾌적한 실내 환경 구축을 위한 기술개발의 최첨단에 서야만 한다. 그동안 100~200층 건설에 5억~10억 달러가 소요되고 있는데 1000m 이상 극초고층 빌딩은 100억 달러에서 수백억 달러 이상의 건설비용이 들어가는 부가가치 창출과 기술 파급효과가 매우 큰 시장이다. 첨단 공학기술의 발달로 이루어지는 초고층 빌딩 건립기술이야말로 무병장수와 우주개발의 시대를 여는 첨단 과학기술과 함께 국가적·국민적 차원에서 성원과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미래에 우리가 살아갈 삶의 공간을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인식해야 한다.
현재에서 미래 찾기
김혜진 | 해오름 평생교육원 전임강사
■ 학습목표
- 미래는 현재의 연장임을 이해한다.
- 과학기술의 발달이 곧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한다.
- 미래를 어떻게 잘 만들 것인지 고민하도록 한다.
텔레비전을 켜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는 유비쿼터스의 미래가 보입니다. 아이가 집에서 무서워할 때 밖에 있는 엄마가 화상전화로 아이를 달래면서 아이가 잠자기 좋게 조명을 바꾸어줍니다. 가스불을 끄지 않고 나와서 걱정이 될 때 전화 한 통화로 가스불도 잠글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어서 사람이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세상은 정말로 편리해 보입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우리에게는 그런 미래가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날을 우리는 기대해도 될까요?
그런데 영화나 미래사회를 다룬 소설을 보면 정반대입니다. 오웰의 『1984』도 멀지 않은 미래를 다룬 소설이었지만, 이 때의 유비쿼터스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장치입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일일이 감시되고 보고됩니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나의 삶은 모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똑같이 미래를 들여다보고 있지만 누구는 그 안에서 인간을 더욱 풍요롭고 편리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고, 누구는 인간이 그 안에서 감시당하고 통제되는 암울한 미래를 보고 있습니다. 어떤 전제들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요?
낙관과 비관의 교차점
미래사회를 다룬 영화의 공통적인 특징은 기술을 통제하여 권력화 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미래사회의 권력자들은 그다지 선하지 않기에, 높은 기술 수준을 자신의 손 아래 통제하면서 중앙집중화하고 있습니다. 『1984』에 나오는 ‘빅 브라더’는 텔레스크린을 통해서 사람들의 의식을 통제하고, 생각의 변화까지도 읽어냅니다. 그들은 집요하게 사람들을 추적하고 대상화합니다.
미래사회의 노동은 대단히 이원화되어 있습니다. 누구는 아주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갖고 첨단화된 노동을 하지만 누군가는 마치 하수구와 같은 곳에 살면서 비참한 인생을 삽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노동에서의 해방이 가능해지지만 그것은 일부에게 독점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길거리로 내몰리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래 사회를 비관론적으로 보는 이들의 주장은, 이 모든 문제가 기술 자체라기보다는 그것을 통제하는 인간이 성과를 함께 나누기보다 독점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광고에 나타난, 그리고 최근에 유행하는 미래학은 기술에 대한 대단한 신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술수준 자체가 인간의 관계와 권력의 형태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습니다. 앨빈 토플러와 같은 미래학자들이 생각할 때 지금까지 세계에서 나타났던 문제는 에너지의 부족이거나 기술이 충분하게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이 발전하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대중매체의 탈대중화로 점차로 중앙집권화된 것에서부터 자유롭게 개성적인 분산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과학기술의 특성 자체가 인간관계를 변화시키고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재택근무에 대한 진실 혹은 거짓말
미래사회를 보는 이러한 관점들을 다시 되짚어봅시다. 이러한 낙관과 비관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차이들이 있지만 동시에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미래사회에 대한 객관적 인식은 그런 전제들을 꼼꼼하게 살펴볼 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까운 사례를 통해서 과연 미래사회의 이런 낙관 혹은 비관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야기해봅시다.
최근에 ERP 시스템(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이 확대되면서 재택근무가 활성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재택근무가 되면 사람들의 출퇴근 시간이 줄어들고 업무 효율성도 높아질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면 재택근무가 과연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고 있을까요?
(1) 미래사회의 변화를 추동하는 힘은 기술인가, 인간인가
만약 재택근무를 통해서 사람들이 집에서 일을 할 수 있고, 그로 인해서 업무 효율성이 높아진다면 사람들은 누구나 기꺼이 재택근무를 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재택근무 인원을 받은 KT나 대교 등 학습지의 경우 선생님들이나 노동자들이 재택근무를 꺼리는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과학기술이 급격하게 발달한 이유는 이것이 자본주의 이윤생산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재택근무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기술을 발전시킨 이유는 사람들의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만들어서 기업이 원하는 시간에 자유롭게 일을 시킬 수 있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사무실이라는 공간에 있을 때에만 일하는 시간이라는 관념을 없애고 모든 시간이 일하는 시간이 되도록 만들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과학기술만 제대로 발달한다면 이제는 사무실을 유지하는 비용을 줄이고, 공간적 한계를 뛰어넘어 본사는 인도에 있고 상품은 필리핀에서 만들고, 판매는 국제적으로 하면서 사무실 개념이 사라지는 상황이 오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재택근무를 가능하게 만든 힘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재택근무는 어떤 사람에게는 밤낮없이 일에 매달려야 하거나, 어떤 이에게는 똑같은 노동을 집에서 똑같이 하는데 임금은 절반밖에 안 되는 비정규직 생활을 의미하거나, 어떤 이에게는 안정된 공간 하나 없이 집안 일도 하면서 정신없이 회사 일도 해야 하는 이중 생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재택근무는 집에서 놀면서 편하게 할 수 있고 시간을 자신이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는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유비쿼터스 시스템 아래에서 어디에서나 어디든지 명령이 가능한 조건 때문에 재택근무가 가능한 것이므로 시간에 대한 자율적 조정이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게 됩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기만 하면 우리의 미래가 낙관적으로 변할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아름다운 재택근무가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은 이러한 실제들을 장밋빛으로 덧칠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결국 재택근무를 가능하게 하는 과학기술은 바로 이윤을 보다 많이 남기기 위해서 투자된 기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는 인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윤이 중요한 것입니다.
(2) 미래는 현재와의 단절인가, 연장인가
재택근무가 노동시간에 대한 자유로운 조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24시간 대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점은 우리 현실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미 재택근무를 시행하고 있는 KT나 학습지 회사의 경우 노동자들은 결코 이런 방식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의 현실이 과학기술의 발달을 인간을 위해서 사용할 수 없는 구조 안에 놓여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우리는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열광합니다. 난치병 치료의 가능성 때문에 열광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현실을 들여다보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이미 에이즈약이나 백혈병 치료제 등은 개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특허 때문에 비싼 약값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장티푸스 등 조금만 투자하면 치료약을 개발할 수 있는 질병에도, 이 병에 걸리는 사람들 대부분이 돈 없는 사람들이란 이유로 투자가 거의 없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생각해봅시다. 과학기술이 있다고 해서 치료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는 누군가에게(우리는 그것을 우리 국가라고 믿고 있지만) 막대한 이득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돈만 된다면 그 연구는 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인간의 가치를 왜곡시켜서 날 때부터 불평등한 신체 구조와 지능을 가진 사람들을 만드는 방식으로 이용될 수도 있습니다. 돈이 되면 뭐든지 열광하는 사회 안에서는 그것을 제어하는 윤리적인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현재 그런 사회이기 때문에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재택근무가 가능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체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더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재택근무를 가능하게 하고, 그것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은 현재 과학기술이 모든 이들에게 어떻게 분배되고 있는가를 들여다보면 허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미래란 현재의 연장이지 결코 단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미래는 어떻게 상호 연결되어 있는가?
미래는 현재의 연장이며 또한 동시에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례 하나를 놓고 그것이 바람직한 미래를 만들 것인지, 아닌지를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어떤 변화를 낳을 것이고, 또는 어떤 변화에 의해 지연되거나 발전하는지 면밀히 검토해야 합니다.
재택근무라는 하나의 현상도 과학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그대로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유비쿼터스 시대가 되면서 재택근무가 가능한 구조가 생깁니다. 하지만 기업들이 재택근무 방식을 잘 채택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 생긴다 하더라도 사람들 사이의 협조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유대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재택근무의 문제가 많이 파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또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통제 시스템이 잘 발달하지 않으면 기업들이 전체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도 집안일과 기업의 일을 분리시키는 사회환경을 선호하는 문화적 경향이 남아있는 이상 재택근무를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재택근무를 위한 기술이 발달했다는 것이 재택근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한 사회·문화적 조건들이 확보되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 일과 쉼이 분리되지 않게 되면, 사람들은 이제 쉬기 위한 또 다른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놀이산업이 발달하게 되지요. 놀이를 위해 밖으로 나간 사람들은 열심히 오락을 소비합니다. 놀이기구를 소비하고, 음악을 소비합니다. 이제 쉬는 것은 쉬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소비의 공간이 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치는 일이 없어지고, 그렇게 되면 사람과 만나게 하는 공간에 대한 욕구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스웨덴 같은 나라에서는 직접 사람을 찾아가서 일을 보는 것이 무척 낯설고 힘든 일이 되고 있으며 모든 일을 이메일이나 팩스로 처리하는 것이 익숙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공동체성을 잃고 개인과 가족으로 도피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히려 새로운 공간에 대한 욕구를 발전시키고 그래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놀이문화를 소비하거나 아니면 산악회 등 각종 오프라인 모임들을 만들어냅니다. 재택근무가 생기면 이제는 일하는 시간과 그렇지 않은 시간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특정한 시간에 출퇴근을 하지 않으므로 엄격한 시간구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24시간 사회로 접어들면서 낮과 밤으로 구분되던 것들은 이제 사라집니다. 24시간 전부가 가동된다는 것은 사람 생활의 규칙성을 파괴하기도 하고, 그러면 점점 더 시간에 대한 주권이 사라지면서 시간에 대한 통제가 더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재택근무가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보아야 하고, 그 속에서 재택근무의 가능성이나 긍정성이나 부정성이 평가되는 것입니다. 재택근무라는 변화 하나도 무수히 많은 또 다른 변화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다양한 변화들은 서로가 서로를 추동하기도 하고, 서로 반대작용을 일으키기도 하면서 미래사회라는 총체를 이루어갑니다. 그러므로 미래사회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면서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미래사회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변화하는 구조 안에 있는 사회이니까요.
(4) 미래는 소수가 만드는가, 다수의 선택인가?
한 명의 천재가 100명을 먹여 살린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창조적인 천재 몇 명에게만 투자하라는 것이지요. 아마도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회장인 빌게이츠를 빗대서 우리나라 교육부에서 이야기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맞는 말이 아닙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무수한 창조적인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사람들을 자신이 독점으로 묶어두기도 합니다. 많은 소프트웨어들은 마이크로소프트 회사에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수많은 마이크르소프트 및 그 회사에 의해 묶여있는 무수히 많은 프로그래머들이 빌 게이츠를 먹여 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사회를 이야기할 때 지식기반사회라는 이름으로 창조적인 소수자가 되라는 요구는 그래서 의미있는 이야기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런 창조적 소수자에 대한 왜곡된 신화는 미래사회를 어둡게 그리고 있는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우매한 민중들은 자신들이 속는 것도 모르고 그저 따라가다가 몇 명의 똑똑한 사람들이 나타나서 문제를 뒤엎고 결국은 인간의 얼굴을 한 미래사회를 만들 것이라는, 일명 ‘메시아 주의’ 영화이지요. 물론 어두운 미래를 만드는 사람들도 소수의 음모론자들인 것으로 그려집니다. 한 쪽에서는 창조적 소수가 되라고 부추기고, 또 한 쪽에서는 그러한 창조적 소수들이 미래사회를 어둡게 만들기도 하고 구원하기도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는 다수의 선택이며, 다수의 힘에 의해 변화됩니다. 예를 들어 재택근무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광고를 해도, 사람들이 우매하게 따라가지는 않습니다. 재택근무를 위한 시스템이 구비되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만나는 것을 선호할 수도 있고, 현재의 가족제도가 집 안에서 안정적으로 일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기술적 변화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저항이나 수용에 따라 수용 여부가 판단되는 것입니다.
저항이나 수용은 대중들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이것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문화적 조건들이 더 결정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람들에게 해로운 기술을 사람들은 수용과 변형을 거쳐서 더 좋게 만들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재택근무가 더 적은 임금과 일상적 통제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의 저항과 변형을 통해서 오히려 개인의 자율성을 더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미래사회를 이익만을 위한 기술발전에 종속시키려는 사람들과, 그 기술발전의 틈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삶을 조금 더 의미있게 만들려는 사람들의 경쟁과 갈등 관계가 미래사회의 모습을 다양하게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매한 민중과 소수의 창조적 소수자라는 등식이 주는 공포와 장밋빛 미래 모두를 거부하고, 변화 속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노력을 열심히 지지하고, 그런 삶을 우리가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미래학과 기술주의 예찬을 넘어 현실 들여다보기
기술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구호가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황우석 교수가 만병통치약을 만들 것이라는 기대,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유비쿼터스가 된 사회에서 인간은 편하게 앉아서 모든 것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과학기술의 발달을 끝없이 추구하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미래에 대한 맹목성, 기술에 대한 무한한 신뢰는 어떻게 보면 근대성의 특징인 것 같기도 합니다. 최초로 열린 파리의 만국박람회에서 에펠이 기술의 무한발전을 상징하는 대형철탑을 세울 때, 그리고 물리학이 가장 촉망받는 직업으로 군림할 때, 근대의 사람들은 과학과 기술은 인간의 풍요를 이끌 원동력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미래에 대한 낙관은 과학기술 결정론에 기반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앞서 있는 것은 편리함에 대한 추구라는 오해와 왜곡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편리함을 추구하며 그것을 통해 보다 인간답게 될 것이라는 발상이 지금의 과학기술을 상품화하는 가장 큰 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편리란 과연 진정한 편리였을까요? 우리는 세탁기가 우리를 편리하게 했다고 믿지만 사실은 청결의 개념을 변화시켜서 한 달에 한 번 빨래를 해도 될 것을 매일매일 세탁기를 돌리는 노동을 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편리해졌다고 믿고 있는 것이지요. 재택근무로 인해 편리해질 것이라는 신화도 이동하지 않을 편리를 주지만 결국 자신의 시간을 온전하게 자본에게 바쳐야 하는 편리로 이어지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편리에 대한 신화에서 자유롭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회는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이런 과학기술은 중요하다. 여기에 의문을 갖지 말아라. 의문을 갖고 인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뒤쳐지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또한 일말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달려가지 않으면 다른 이들에게 뒤쳐진다는 것. 그 말은 뒤쳐지는 자는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한 사회가 와도 그 혜택을 누릴 수 없다는 일종의 협박과 같은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또 발전만이 우리를 살리도록 한다는 주술을 우리에게 걸어놓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성과 미래학이라는 이데올로기는 현실의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과학기술 입국을 이룰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행복한 미래가 보장된다는 아주 오래된 주술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현재의 우리는 왜 이와 같은 모순을 안고 있는가? 산업사회가 시작된지 불과 100년만에 놀랄만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왜 굶어죽는 사람들은 나날이 늘어가고 원시적인 질병으로 죽는 사람도 이리 많은가? 기술은 발전했는데 왜 누구는 실업자가 되어 길거리를 떠돌고 누구는 장시간 노동으로 죽어나가는가? 이런 현실의 문제를 냉정하게 들여다볼 때 과학기술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그 과학기술조차도 어떤 목적을 갖고 발전하는 것임을 알게 되고, 그 과학기술에 대한 제대로 된 통제는 무엇을 통해 가능한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과학기술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발전하는 것이며,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어떤 의미를 주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막상 편리함을 원하지만 이것이 편리의 탈을 쓴 감시이기도 하고, 인간의 불안심리를 자극하여 안전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결국 CCTV를 통한 사생활 침해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막으려면 왜 우리는 불안한가? 편리함이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당연하게 발전해야 하고, 당연하게 편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천박한 인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진짜 인간다운 미래, 우리의 삶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만드는 미래의 꿈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문학이 없는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위해 사용되지 못하며, 현실사회에 대한 이해가 없는 미래학은 모두 허구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미래를 만드는 것은 바로 인간이며 대중들의 올바른 선택과 수용에 의해 변화의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독해자료
아래 글들은 인간에 관한 과학적 탐구가 인간의 행동이 지향해야 할 바를 제시해줄 것인지 하는 문제에 관련해 부정적인 입장에서부터 긍정적인 입장으로 옮겨가는 현대의 사상적 추이를 순차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 글들을 잘 읽고, 이러한 추이의 결과와 관련지어, 마지막 글에서 언급되는 “진화과정을 스스로 조정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서술해 보라.
(1) 인간의 본질 및 인간의 특수지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지능이나 선택능력보다는 훨씬 높은 곳에 있다. … 인간을 인간이도록 하는 새로운 것을 감각충동, 본능, 연상적 기억, 지능, 선택능력 등에 무엇인가가 보태지는 데서 찾는다 해도, 그것을 역시 심적 생명영역에 속하는 기능이나 능력으로 본다면, 이 또한 잘못이다. 그러한 것이라면 그것은 새로운 본질이라 하더라도 심리학이나 생물학의 대상에 속하는 것일 뿐이다.
인간을 인간이도록 하는 새 원리는 우리가 넓은 의미에서 생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새 단계가 아닐 뿐 아니라, 생명이나 심성이 현현(顯現)하는 단계의 새로운 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 일반에 대립하는 원리요, 따라서 인간 내부의 생명에도 대립되는 원리다. 이 원리는 참으로 새로운 본질적 근원사태로서 자연적 생명의 진화로 돌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미 이런 원리를 주장했고 그것을 이성이라고 명명했다. 우리는 오히려 이에 대해 하나의 포괄적인 단어, 즉 ‘정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정신은 확실히 이성의 개념을 포함하지만, 이념의 사고와 함께 일종의 직관도 포함한다. 즉 근원현상 혹은 본질적 내실(內實)에 관한 직관과 또 호의, 애호, 후회, 경탄, 행복, 절망, 자유, 결단 등과 같은 특정한 단계의 의지적이고 정서적인 작용을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정신이 유한한 존재의 내부에서 드러나는 그 작용중심을 인격이라고 부르며, 이를 모든 ‘기능적’인 생명중심과 준별(峻別)한다.
(2) 동서양에서 생각하는 인간의 특성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적 특성과 이성적, 정신적 존재로서의 특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과거의 철학자들 중에는 인간의 이러한 두 성질을 서로 대립되고 상반되는 특성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의 동물학적 특성을 억제하고 이성적인 특성을 살려야만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견해는 다소 설득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이성적 측면과 함께 생리적, 기본적 욕구도 중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3) 사회생물학은 현존하는 모든 생명 종(種)들이 진화의 산물이며, 생물학적 진화를 초래하는 것은 유전자 재조합, 돌연변이, 그리고 자연선택이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한다. 사회생물학은 행동 방식, 특히 인간을 포함한 생물들의 사회적 행동에 진화론적 사고를 적용한다. … 사회생물학은 생존, 즉 번식의 성공이 최고의 원리임을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이타적 행동도 번식을 위한 일이거나 생존경쟁 속에서 자신의 최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다.
사회생물학은 본질적으로 유전이론이다. 개별적 학습이 중요하다는 것과 외적인 영향에 의한 행동이 변화될 가능성은 당연히 인정된다. 그러나 입론의 근거가 되는 명제는 (사회적) 행동을 유전자가 조종한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사회생물학은 생물체를 유전자에 의해서 조종되는 생존 기계로 본다.
인간도 사회생활하는 생물이라는 명제를 발판으로, 사회생물학은 진화 - 유전학적 모델을 인간의 사회적 행동에 적용시킨다. 여기에는 도덕적 행위도 포함된다. … 도덕도 진화의 산물로 해석된다.
(4) 베일에 가려졌던 인체의 신비가 벗겨지면서 생명공학 분야에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인간 유전자 완전해독은 사람의 유전체에 어떤 유전정보가 담겨 있는지를 밝혀낸 혁명적 사건이다. … 수십 억의 인류가 저마다 다른 특징을 지니는 이유는 아데닌(A), 구아닌(G), 시토신(C), 티민(T) 등 네 가지 염기서열로 구성된 DNA란 유전정보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의 유전자는 30억 개 염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번 연구 결과 이들 염기가 어떤 순서로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 밝혀진 것이다. … 전 세계가 인간게놈 발표에 열광하는 이유는 염기서열을 이용해 인체의 신비가 완전히 밝혀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즉 유전정보를 통해 타고난 외모나 유전병은 물론 음식을 소화하는 능력, 질병에 대처하는 방식,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도 예측 가능한 시대가 온 것이다.
(5) 자기 인식은 언제 어디서나 중요했다. 오늘날 그것은 시대적 소명이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통찰이 종(種)으로서의 우리 자신의 존립을 결정할 수 있을 듯하기 때문이다. 그럴진대 이러한 자기 인식을 고양하는 것은 일종의 윤리적 의무에 속한다. 단, 우리가 살아남기를 원한다는 전제하에서 그러하다. 호모 사피엔스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할 이유는 진화의 그 어느 것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들 앞에 존재했던 수많은 다른 종들처럼 그들 역시 얼마든지 멸종될 수 있겠지만, 설사 그렇게 된다 해도 진화의 역사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화과정을 스스로 조정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은 비상(非常)한 것으로 인간에게만 고유하게 주어져 있다. 결단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 토론하기
다음은 인간의 가까운 미래 주거형태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서술한 글이다. 이 글을 읽고 다음 내용을 토론해보자.
1. 이 사람이 주거형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측하는 데에 주요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 사람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이야기해 보자.
2. 이 사람의 주장은 현실화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요소가 이런 현상의 현실화를 방해할지 생각해보자.
3. 이 사람의 주장대로 현실화된다면 우리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대해 생각하여 이야기해보자.
미래수직도시 전망과 하이퍼 빌딩
현재의 공학기술로 500~800m 높이의 건축물을 짓고 있는데 2015년에는 1000m, 2025년에는 2000m, 2050년에는 4000m의 건축물을 짓게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1000m가 넘는 극초고층 수직도시에 대한 구상은 벌써 10년 전부터 구체적으로 세워져 왔다.
극초고층 건물은 건축물이 개별건물로서 도시의 일부로 인식되는 한계를 넘어서 인구 10만 명 이상을 수용하는 수직도시로 변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미래도시의 수직적인 신공간 개념의 적용은 하이퍼 빌딩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재 지구상의 인구는 약 65억 명으로 간주되는데 의학기술과 사회복지 환경의 발전으로 인구는 더욱 증가일로에 있으며 특히 현대의 도시는 늘어나는 거주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미래의 공간을 위하여 건축가 파울로 솔레리나 일본의 도시기반공단 같은 도시공간 연구자들은 하이퍼 빌딩이란 신개념의 건축을 제안하고 있다.
이들은 기존 도시의 저층·저밀도 분산에 따른 전통적인 수평배치는 건축물과 자연환경 공존이 실현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평으로 광범위하게 배치된 건축물에 의해 오히려 자연의 생태계가 침식되고 건축물간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사람과 물류의 이동이 증가해 에너지가 과도하게 낭비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수직공간의 확보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수평 거주공간을 수직 거주공간으로 변환하는 것을 추구하며, 지상공간의 확보를 통해 자연을 보호하는 친환경적 공간 창조에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기존의 평면도시의 다양한 공간이 수직으로 집적된 입체도시 공간으로 변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 극초고층 빌딩 건립기술
극초고층 건축물은 기술적으로 기존의 50~100층 규모의 건설기술과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극초고층 빌딩의 건설을 위해서는 혁신적인 공법과 신소재 및 빌딩 운영시스템의 개발이 필요하다. 즉 건설용 자재는 초극강, 초극내력을 지닌 초경량 불연자재여야 한다. 이에 따라 현재 사용되고 있는 콘크리트와 철강 재료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 신소재들이 속속 개발되고 있으며 더 뛰어난 소재의 개발이 계속되고 있다.
또 현재 엘리베이터 기술은 200층 규모의 수직 운송이 가능한 단계이나 극초고층 빌딩에서는 건물 내부의 간선도로 시스템이 설치되어야 하고, 자기부상 캡슐형 이동장치와 같은 수직 및 수평 이동을 위한 신개념의 운송수단이 적용될 것이다. 또한 수만~수십만 명의 인구를 수용해야 하는 데 따른 에너지 소비를 절감하기 위한 자연에너지 활용 및 에너지 재활용 시스템과 수자원의 재활용 시설, 쓰레기 운송 처리 시스템, 화재나 테러에 대비한 재난 방재 시스템 등이 단일 건물 내에서 구축되어야 한다. 중국 상하이시는 21세기 중국의 국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2050년에 인구 3000만명 시대를 대비하여 ‘바이오닉 타워’라는 이름의 1100m가 넘는 극초고층 빌딩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피오즈 등의 건축가가 제안한 바이오닉 타워는 주거공간과 함께 사무실, 백화점, 병원, 학교, 공원 등의 시설을 모두 수용하며 25층 단위의 독립적인 생활공간을 수직으로 12개 쌓아올려 300층에 달한다. 강한 지진에 견딜 수 있도록 건물 기초에는 호수 등으로 이루어진 지진 흡수지역을 설치하고 태풍 등 강풍에 대해 최상층의 진동 범위를 2.5m 이내로 조절하는 구조시스템을 채용하였다.
또한 건물 내부 화재시 재해 확산 방지를 위해 바닥을 방화구조로 하는 등 재해에 대한 대책도 고려했다. 일본에서는 1994년부터 건설성 및 90개 이상의 관련업체가 참여하여 높이 1000m, 연면적 약 300만평(1000ha), 수명 1000년 이상인 수직형 도시를 개발하려는 연구가 시작되었다.
극초고층 빌딩의 기본 구성은 3개의 공간을 단계별로 연결시키는 구조를 갖는다. 첫 단계 구성인 인체의 뼈대에 해당하는 구체는 1000년의 내구성을 지닌 복합기능 타워 등으로 구성된다. 두 번째로는 공간을 분할하는 구조물을 구체에 부착하고, 이 공간 분할 구조물 속에 세 번째 구성에 해당하는 내부빌딩을 설치한다.
극초고층 건물의 건설은 3개 혹은 그 이상의 유닛(건물 단위)이 조합될 때 완공되는데 대체적으로 하나의 유닛을 완성하는 데 30년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첫 번째 유닛이 완성되면 이를 하나의 타워로 사용하고 이와 동시에 타워를 수평과 수직 방향으로 확장시킨다. 교통수단으로 이용될 나사형 통로는 산악용 열차와 같은 방법으로 빌딩 내부를 연결하게 된다.
이밖에도 360도 회전하는 초고층 빌딩을 세워서 각 실마다 정해진 방향에서 일조량과 전망이 정해져 있는 기존 건축물과 달리 일조권과 조망권을 공평하게 해줄 수 있는 기술도 실현될 예정이다.
또 초고층 빌딩에서는 바람의 세기와 실내외 기압 차로 인해서 자연환기를 도입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이중외피(二重外皮) 시스템을 도입하여 자연환기에 의한 난방 에너지 절감 방법이 사용되고 있으나 장래에는 공기를 투과시킬 수 있는 유리의 채용과 일사량이 많은 빌딩 외피에 대해서 태양의 이동과 빛의 세기에 따라서 투명도를 자동으로 조절하는 유리를 사용하여 1000m 이상 고도의 강한 바람과 온도 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만들게 될 것이다.
공사기간도 매우 빠른 속도로 단축되고 있다. 500여m인 타이베이금융센터101 빌딩이 3년10개월에 지어졌으며 이보다 더 높은 버즈 두바이는 3년11개월의 공사기간이 소요될 예정이어서 1990년대 초반에 비해 2배 이상 단축되고 있다.
환경친화적인 도시 개발의 중요성
친환경 극초고층 빌딩의 건립에는 수평적 도시개발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지만 인류공생을 위한 환경친화적 도시의 구축이 가능하고 길어야 100년을 내다보는 기존 건축물보다 3~10배 이상 오래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사용기간을 고려한다면 훨씬 경제적인 대안이다.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구입하려면 초기비용은 많이 들지만 유지비용이 훨씬 저렴하고 수명이 길며 환경에 기여한다는 점과 비슷한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와 같이 좁은 국토에 인구집중과 그로 인한 도시환경의 악화가 매우 심각한 상황의 국가 및 도시에서는 이러한 당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친환경적인 초고층 수직도시화가 불가피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초고층 건립 경쟁에서 선두에 설 수 있도록 국내에서도 초고층 건립이 활발히 이루어져야 하고 이를 위한 제도의 정비가 절실히 필요하다.
또 새로운 건설기술과 건설 신소재의 개발 및 자연친화적인 쾌적한 실내 환경 구축을 위한 기술개발의 최첨단에 서야만 한다. 그동안 100~200층 건설에 5억~10억 달러가 소요되고 있는데 1000m 이상 극초고층 빌딩은 100억 달러에서 수백억 달러 이상의 건설비용이 들어가는 부가가치 창출과 기술 파급효과가 매우 큰 시장이다. 첨단 공학기술의 발달로 이루어지는 초고층 빌딩 건립기술이야말로 무병장수와 우주개발의 시대를 여는 첨단 과학기술과 함께 국가적·국민적 차원에서 성원과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미래에 우리가 살아갈 삶의 공간을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