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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특집「인권교육」을 들어가며
- 아이들에게 왜 ‘인권’을 가르쳐야 하나?
김혜진┃해오름 평생교육원 전임강사
세계인권선언문을 보면 그 시작에서 “인류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타고난 존엄성과 남에게 넘겨줄 수 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구절이 있다. 이 때 ‘인류사회의 모든 구성원’이란 피부 색깔이 연하거나 진하거나, 여성이거나 남성이거나, 장애인이거나 비장애인이거나 유럽 사람이거나 아시아 사람이거나, 그가 어떤 종교를 갖고 있거나 어떤 사상을 갖고 있거나, 그가 나이가 어리거나 많거나에 상관이 없이 ‘누구나’ 갖고 있는 ‘권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과연 인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인권’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하기는 하지만 때로는 사회질서의 유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 혹은 인권보다 경제적 이익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암암리에 내비치기도 한다. 그것은 인권에 대해 그만큼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것을 권리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능력주의가 판치는 지금 사회에서 ‘인권’은 뭔가 도덕교과서에나 나오는 케케묵은 이야기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세계인권선언문 제26조 2항에도 나오듯이 “교육은 인격을 충분히 발전시키고, 또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경을 강화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그렇기에 아이들에게 ‘인권’이 무엇인지 가르쳐야 한다.
1. 인권에 대한 아이들의 오해
오해 하나. 능력에 따라 대우하지 않는 것이 인권침해이다.
인권에 관한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인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차별 받지 않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생각하는 ‘차별’은 무엇일까? 그것은 합리적이지 못한 이유로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다. 즉 아이들은, 사회가 누군가를 차별한다 하더라도 그 이유가 합리적이기만 하다면 인권침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합리적 차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아이들은 능력이 뛰어난데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으면 이것은 인권침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능력은 어떻게 형성될까? 부모의 좋은 머리를 물려받아서 두뇌가 뛰어날 수도 있고, 선생님을 만나서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을 수도 있다. 이것은 모두 우연에 의한 것이거나, 아니면 부모 혹은 돈의 위력으로 결정되는 것들이다. ‘능력’도 이미 사회적 차별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적 차별을 ‘합리적 차별’이라고 인정하는 것 자체가 인권에 대한 침해라는 사실을 아이들은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그럼 누구나 똑같아야 한다는 거예요?”라고 질문한다.
그렇다. 누구나 똑같아야 한다.(여기서 똑같다는 말을 수량적 일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세계인권선언문에서도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 사람이 능력이 뛰어나다는 이유가, 그에게 더 높은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오해 둘. 인권은 시혜를 베푸는 것이다.
‘인권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먹고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대답도 많이 한다. 아이들은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 인권 보장의 기초는 바로 생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할 때 아이들은 생존이 권리가 아니라 ‘시혜’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게으르거나 무능력하여 그런 상태가 된 것이지만 사회가 그들을 불쌍하게 여겨서 최소한 죽지 않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동정심은 사람의 마음에서 매우 중요한 항목일 수 있지만, 최소한의 생계 보장은 시혜가 아니다. 장애인들이 불쌍해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국민기초생활 보장제도의 수급권자들이 불쌍해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노동할 권리, 편하게 이동할 권리를 제한 당해 있기에 이동권, 노동권, 생활권을 요구하는 것은 당당한 것이며, 사회는 이에 응할 의무를 갖는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권리의 제한 자체가 비 인권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권이 시혜를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상,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수당 인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프랑스 실업자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오해 셋. 인권은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제한할 수 있다.
아이들은 당연히 두발자유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교칙은 소중한 것이므로 지켜야 할 의무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인권을 침해하는 교칙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도 자신의 신체를 함부로 침해당하지 않아야 한다. 인권은 어떤 이유로도 제한 당하지 않는 고유의 권리이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사회 전체의 이익이나 질서를 위해서는 인권이 어느 정도 침해당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권’이냐 ‘사회 전체의 이익이냐’라는 허무맹랑한 논쟁이 가능한 것이다.
아이들에게 인권은 어떤 이유로도 제한 당해서는 안 되는 고유의 권한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기는 참으로 어렵다. 어렸을 때부터 인권의 제한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이 국가적 이익, 혹은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말로 정당화 되어왔던 과정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2. 아이들은 왜 이런 오해를 하는 것일까?
아이들에게 인권은 도덕교과서에나 나오는 추상적인 말이다. 매우 이상적인 것이기에 현실에서는 제약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이미 다양한 이유를 들어 인권을 침해하는 반 인권적인 상황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체벌에 대한 토론을 하다 보니 아이들은 “우리들은 때려야 말을 잘 듣는다”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는 이미 폭력에 길들여져 있으니 자발적인 판단과 행동을 기대하지 말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 얼마나 끔찍한 자신에 대한 비하인가. 그런데도 아이들은 선생님이 체벌을 해도 되는 이유로 이런 주장을 꼽고 있다.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의 부족, 자신의 판단력에 대한 비하가 끝없이 폭력을 낳고, 자신을 길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폭력 없이도 스스로가 결정하고 판단할 수 있는 주체라는 믿음조차 잃어버린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그 이유가 어떻든 무조건 나쁜 것으로 매도되고, 학생들이 두발자유화를 외치며 집단행동을 하면 단지 집단행동을 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징계의 대상이 된다.
그러면서도 사회 전체가 집단성에 매몰된다. 월드컵 축구가 시작되면 마치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대표팀을 응원해야 하는 것처럼 몰아간다. 텔레비전 광고도 온통 국민적 성원을 바라는 내용뿐이다. 축구는 개인의 취향이다. 좋아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국가를 대표해서 하는 것이니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하고, 꼭 우리나라 대표팀을 응원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매국노라고 주장하는 집단적 광기 앞에서 개인의 선택권이나 다른 나라 팀을 좋아할 권리 등, 소수자의 권리는 무너진다.
이런 반 인권적 태도나 인권에 대한 오해와 무지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사회적 신봉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경쟁력’을 가르친다. 남을 짓밟고라도 높이 올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조작에 대해서도 국익에 도움이 되면 조금 거짓을 보태도 된다는 논리가 횡행한다. 강한 자는 모든 것을 용서받고, 경쟁력만 있으면 모든 것은 따라온다고 주장한다. 인권과 신자유주의는 정면으로 부딪치는데 바로 우리 학교 현장이 신자유주의적인 경쟁논리가 가득 차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인권에 대한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3. 인권은 역사적이다.
아이들의 오해는 인권이 교과서에 나오는 원칙과 당위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권은 역사적인 개념이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으로 인해서 확장되는 것이다. 즉 인권은 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그것을 이해할 때 인권에 대한 추상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권은 초역사적인 개념이 아니다. 인권은 200년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인권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인권선언, 즉 ‘사람 및 시민의 권리선언’은 1789년에 만들어졌다. 이 인권선언은 봉건제의 신분제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사유재산의 형성과 축적을 갈망하는 도시 부르주아지들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그들의 요구가 집약된 ‘사람 및 시민의 권리’에서는 여성과, 시민(부르주아)이 아닌 돈 없는 사람들은 배제되었다.
인권선언의 중심이 되는 평등은 ‘법 앞의 평등’으로 축소되었고, ‘자유’ 중에서도 소유의 자유와 경제활동의 자유만이 확대되었다. 당시에는 법이 일정한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었기에 평등과 자유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굶어죽을 자유, 불공평한 법에 의해 처벌받을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영국의 ‘빈민구제법’은 지옥과 같은 노동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강제 징역형을 살리는 법안이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인권개념이 법으로 제도화되었고, 여기에 약간의 변형이 가해져서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문으로 정착되었다. 앞에서 사례로 들었던 인권선언문 조차도 ‘누구나’라는 표현 아래 돈 없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권리의 박탈을 용인하고 있는 것이다. 인권선언문은 ‘인권’이란 바로 자본주의이고, 평등은 매우 추상적인 관념에 지나지 않으며, 인권은 국가권력으로부터 억압받지 않는 ‘자유권’이 핵심이라는 생각을 심어놓았다. 물론 인권선언문에는,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많은 이들이 굶어죽거나 빈곤하거나 질병에 시달리는 점을 보완하기 위한 사회문화적 권리를 일부 넣을 수밖에 없었다. 인권선언문은 단지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만이 아니라, ‘사회ㆍ문화적 권리’라는 개념을 일부 수용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극심한 빈곤으로 인해 반란을 일으키거나 권력에 대항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주안점을 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장애인에 대한 차별, 동성애에 대한 차별, 여성에 대한 차별, 국가 간 빈부격차 문제 등을 중심에 둔 새로운 문제제기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의 인권은 주로 국가에 대항하여 개인의 인권을 어떻게 보장할까 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집단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에까지 이르고 있다. 게다가 이 인권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집단에 속해있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거나 억압을 받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오랜 기간 동안 힘든 투쟁을 함으로써 권리로 확장을 시켜온 것이다.
즉 인권이란 굳어 있는 개념이 아니다. ‘당연히 이래야 한다’는 당위여서 현실은 따라가지 못하는 개념도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문제를 개선하고 권리를 확장하기 위한 무수히 많은 노력의 산물로 인권이 만들어지고, 인권의 개념이 확장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권은 항상 현재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4. 우리 시대의 인권 과제
앞에서 학교야말로 반 인권적인 곳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인권에 대한 무감각을 배우고, 인권을 추상적인 것으로 인식하도록 훈련된다. 그러나 인권은 역사적인 개념이라고 이야기했다. 인권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현실의 모순을 꿰뚫어보는 눈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 현실에서 인권 문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이야기 해보자.
인권은 초기에 ‘자유권’, 즉 국가적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봉건적인 신분억압에 저항하는 시민(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면서 이것은 보편 이념이 되었다. 이제는 누구나 국가의 폭력과 억압에 함부로 노출되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것은 법에 의해 보장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시대에는 여전히 국가에 의한 억압이 ‘법’의 이름으로 진행된다. 법이 불공평하거나 법자체가 폭력적일 때에는 인권이 보장되지 못한다. 그래서 법 또는 국가권력이 얼마나 인권을 잘 보장하는가가 그 사회의 인권 척도가 되기도 한다. 우리사회는 예전에는 군사적 억압을 포함하여 법을 초월한 폭력과 억압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법을 초월한 억압은 별로 없다. 최소한 법에 의한 지배는 확립되고 있다. 하지만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을 둘러싼 극한 대립에서 정부가 군대를 동원하거나 용역깡패들을 용인하거나 농민들의 토지를 강제 수용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법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국가폭력이 개인의 삶을 짓밟는 사례도 많은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법의 이름으로 감옥에 보내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이 인권의 담지체로 나타나지만, 인권 자체가 한계 속에 놓여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개인에 대한 국가의 억압과 폭력은 일상의 차원에서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개인의 자유권은 많이 보장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가의 억압과 폭력은 매우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들에게 파고들어 간다. 범죄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CCTV를 설치하거나, ‘편리’하기 때문에 전자주민카드를 만들어내고, 선거 시기 인터넷 실명제를 함으로써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기도 한다. 우리의 일상에 대한 감시와 억압은 폭력적이지는 안 되, 은밀하게, 그리고 ‘편리’나 ‘보호’를 명분으로 확장된다.
그 속에 안주하는 개인은 자기 일상의 삶이 감시당하고, 자료가 집적되고, 자율적인 발언에 제재가 가해져도 무감각하게 받아들인다. 결국 사람들은 감시를 내면화하게 하고, 권력의 의도대로 훈육된다. 이는 국가 억압의 새로운 형태이며, 이것은 자유권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자유권은 가시적 억압과 눈에 보이지 않는 억압 모두에 대항하는 개념이어야 한다.
그리고 경제ㆍ사회ㆍ문화적 권리들은 미처 확보되지도 못했는데, 오히려 더 후퇴하는 양상을 보인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을 경쟁체제로 내몬다. 그래서 개인의 능력으로 그 권리를 획득하라고 말한다. 결국 그것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제로섬게임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문화생활을 누릴 권리는 돈이 있을 때 가능한 권리가 된다. 세상의 모든 것이 상품의 논리로 재단되는 순간, 우리들의 사회적 삶의 풍요로움도 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권의 한 요소인 사회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제3의 인권이라고 이야기하는 집단적 권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자유주의는 초기 자본주의 시대 부르주아지들의 중요한 권리였던 ‘자유권’과 ‘재산에 대한 권리’만을 옹호하기에, 노동조합 등 그것에 반하거나 효율성을 해친다고 생각하는 모든 집단적 권리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다. 모든 것을 개인의 능력으로 돌리는 사회에서는 소수 집단에 대한 관용(인정)이 사라지며, 그들의 권리 요구에 대한 혐오증이 커진다. 소수는 능력이 없거나, 자신이 선택을 잘못한 것이 문제이므로 집단적으로 권리를 요구하기보다는 개인의 능력을 키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인권은 ‘자유권’을 넘어서야 한다. 사람들을 위계화하고, 경쟁을 가속화하고, ‘누구나’ 당연하게 누려야 할 권리들을 ‘돈’이 있을 때에야 가능한 권리로 치환하여 사실상 인권을 무너뜨리는 신자유주의와 부딪치며, 인간으로서의 권리(누구든, 아무런 제약 없이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5. 인권이 보장될 때 우리 삶은 풍요롭다.
우리가 인권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곳에서 인권은 살아 숨쉰다. 인권이 고정불변의 이상향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과 억압을 깨치고 계속 확장되어온 과정임을 이해한다면 우리 시대의 인권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삶을 불편하게 하고, 억울하게 만드는 그 모든 곳에서 재발견되어야 한다. 그 장소는 바로 학교이다. 아이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서는, 체벌과 경쟁과 성적에 따른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고, 효율성이라는 미명 아래 머리와 복장을 강제로 통일시키고, 생활지도라는 미명 아래 함부로 남의 통신 등 사생활을 엿보고, 그리고 이런 모든 행위들이 ‘너희들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인권은 어떤 명분으로든, 어떤 이유로든 침해될 수 없는 권리라는 점이 너무 간단하게 무시되고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아이들에게 인권을 가르쳐서 인권에 대한 민감성을 기르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인권에 대해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인권의 눈으로 교실을 들여다보면 숨막힐만한 반 인권적 사례들이 발견된다. 그러나 아이들이 그런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시도를 할 수 없다. 학교에서의 반 인권 행위들은 구조적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인권 문제에 대해 눈을 감으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학교에서 어떤 반 인권적 요소가 있는지 발견하지만 정당하게 주장할 수는 없는 그런 상황이 된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에게 인권을 가르쳐야 한다. 반 인권적인 상황에 길들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반 인권적인 상황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사회에 나가서도 문제들을 답습하며, 새로운 세대에게도 여전히 그런 상황을 물려주려고 한다. 그러나 길들여지지 않는다면 설령 지금 학교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변화를 위한 큰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올바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하고, 쉽게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인권이 최종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라고 할 때 그 지향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한계적인 인권 개념을 넘어서서 우리시대의 인권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질 때 현실의 문제를 넘어서는 길을 찾을 수 있고, 우리 아이들의 삶도 강해지고 당당해진다. 권리에 대한 인식, 쉽게 포기하지 않는 정신, 그리고 그것을 이뤄나가는 집단적 힘에 대한 신뢰가 아이들에게 필요하다.
- 아이들에게 왜 ‘인권’을 가르쳐야 하나?
김혜진┃해오름 평생교육원 전임강사
세계인권선언문을 보면 그 시작에서 “인류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타고난 존엄성과 남에게 넘겨줄 수 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구절이 있다. 이 때 ‘인류사회의 모든 구성원’이란 피부 색깔이 연하거나 진하거나, 여성이거나 남성이거나, 장애인이거나 비장애인이거나 유럽 사람이거나 아시아 사람이거나, 그가 어떤 종교를 갖고 있거나 어떤 사상을 갖고 있거나, 그가 나이가 어리거나 많거나에 상관이 없이 ‘누구나’ 갖고 있는 ‘권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과연 인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인권’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하기는 하지만 때로는 사회질서의 유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 혹은 인권보다 경제적 이익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암암리에 내비치기도 한다. 그것은 인권에 대해 그만큼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것을 권리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능력주의가 판치는 지금 사회에서 ‘인권’은 뭔가 도덕교과서에나 나오는 케케묵은 이야기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세계인권선언문 제26조 2항에도 나오듯이 “교육은 인격을 충분히 발전시키고, 또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경을 강화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그렇기에 아이들에게 ‘인권’이 무엇인지 가르쳐야 한다.
1. 인권에 대한 아이들의 오해
오해 하나. 능력에 따라 대우하지 않는 것이 인권침해이다.
인권에 관한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인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차별 받지 않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생각하는 ‘차별’은 무엇일까? 그것은 합리적이지 못한 이유로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다. 즉 아이들은, 사회가 누군가를 차별한다 하더라도 그 이유가 합리적이기만 하다면 인권침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합리적 차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아이들은 능력이 뛰어난데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으면 이것은 인권침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능력은 어떻게 형성될까? 부모의 좋은 머리를 물려받아서 두뇌가 뛰어날 수도 있고, 선생님을 만나서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을 수도 있다. 이것은 모두 우연에 의한 것이거나, 아니면 부모 혹은 돈의 위력으로 결정되는 것들이다. ‘능력’도 이미 사회적 차별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적 차별을 ‘합리적 차별’이라고 인정하는 것 자체가 인권에 대한 침해라는 사실을 아이들은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그럼 누구나 똑같아야 한다는 거예요?”라고 질문한다.
그렇다. 누구나 똑같아야 한다.(여기서 똑같다는 말을 수량적 일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세계인권선언문에서도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 사람이 능력이 뛰어나다는 이유가, 그에게 더 높은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오해 둘. 인권은 시혜를 베푸는 것이다.
‘인권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먹고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대답도 많이 한다. 아이들은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 인권 보장의 기초는 바로 생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할 때 아이들은 생존이 권리가 아니라 ‘시혜’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게으르거나 무능력하여 그런 상태가 된 것이지만 사회가 그들을 불쌍하게 여겨서 최소한 죽지 않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동정심은 사람의 마음에서 매우 중요한 항목일 수 있지만, 최소한의 생계 보장은 시혜가 아니다. 장애인들이 불쌍해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국민기초생활 보장제도의 수급권자들이 불쌍해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노동할 권리, 편하게 이동할 권리를 제한 당해 있기에 이동권, 노동권, 생활권을 요구하는 것은 당당한 것이며, 사회는 이에 응할 의무를 갖는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권리의 제한 자체가 비 인권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권이 시혜를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상,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수당 인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프랑스 실업자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오해 셋. 인권은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제한할 수 있다.
아이들은 당연히 두발자유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교칙은 소중한 것이므로 지켜야 할 의무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인권을 침해하는 교칙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도 자신의 신체를 함부로 침해당하지 않아야 한다. 인권은 어떤 이유로도 제한 당하지 않는 고유의 권리이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사회 전체의 이익이나 질서를 위해서는 인권이 어느 정도 침해당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권’이냐 ‘사회 전체의 이익이냐’라는 허무맹랑한 논쟁이 가능한 것이다.
아이들에게 인권은 어떤 이유로도 제한 당해서는 안 되는 고유의 권한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기는 참으로 어렵다. 어렸을 때부터 인권의 제한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이 국가적 이익, 혹은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말로 정당화 되어왔던 과정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2. 아이들은 왜 이런 오해를 하는 것일까?
아이들에게 인권은 도덕교과서에나 나오는 추상적인 말이다. 매우 이상적인 것이기에 현실에서는 제약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이미 다양한 이유를 들어 인권을 침해하는 반 인권적인 상황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체벌에 대한 토론을 하다 보니 아이들은 “우리들은 때려야 말을 잘 듣는다”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는 이미 폭력에 길들여져 있으니 자발적인 판단과 행동을 기대하지 말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 얼마나 끔찍한 자신에 대한 비하인가. 그런데도 아이들은 선생님이 체벌을 해도 되는 이유로 이런 주장을 꼽고 있다.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의 부족, 자신의 판단력에 대한 비하가 끝없이 폭력을 낳고, 자신을 길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폭력 없이도 스스로가 결정하고 판단할 수 있는 주체라는 믿음조차 잃어버린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그 이유가 어떻든 무조건 나쁜 것으로 매도되고, 학생들이 두발자유화를 외치며 집단행동을 하면 단지 집단행동을 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징계의 대상이 된다.
그러면서도 사회 전체가 집단성에 매몰된다. 월드컵 축구가 시작되면 마치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대표팀을 응원해야 하는 것처럼 몰아간다. 텔레비전 광고도 온통 국민적 성원을 바라는 내용뿐이다. 축구는 개인의 취향이다. 좋아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국가를 대표해서 하는 것이니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하고, 꼭 우리나라 대표팀을 응원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매국노라고 주장하는 집단적 광기 앞에서 개인의 선택권이나 다른 나라 팀을 좋아할 권리 등, 소수자의 권리는 무너진다.
이런 반 인권적 태도나 인권에 대한 오해와 무지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사회적 신봉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경쟁력’을 가르친다. 남을 짓밟고라도 높이 올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조작에 대해서도 국익에 도움이 되면 조금 거짓을 보태도 된다는 논리가 횡행한다. 강한 자는 모든 것을 용서받고, 경쟁력만 있으면 모든 것은 따라온다고 주장한다. 인권과 신자유주의는 정면으로 부딪치는데 바로 우리 학교 현장이 신자유주의적인 경쟁논리가 가득 차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인권에 대한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3. 인권은 역사적이다.
아이들의 오해는 인권이 교과서에 나오는 원칙과 당위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권은 역사적인 개념이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으로 인해서 확장되는 것이다. 즉 인권은 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그것을 이해할 때 인권에 대한 추상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권은 초역사적인 개념이 아니다. 인권은 200년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인권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인권선언, 즉 ‘사람 및 시민의 권리선언’은 1789년에 만들어졌다. 이 인권선언은 봉건제의 신분제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사유재산의 형성과 축적을 갈망하는 도시 부르주아지들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그들의 요구가 집약된 ‘사람 및 시민의 권리’에서는 여성과, 시민(부르주아)이 아닌 돈 없는 사람들은 배제되었다.
인권선언의 중심이 되는 평등은 ‘법 앞의 평등’으로 축소되었고, ‘자유’ 중에서도 소유의 자유와 경제활동의 자유만이 확대되었다. 당시에는 법이 일정한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었기에 평등과 자유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굶어죽을 자유, 불공평한 법에 의해 처벌받을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영국의 ‘빈민구제법’은 지옥과 같은 노동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강제 징역형을 살리는 법안이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인권개념이 법으로 제도화되었고, 여기에 약간의 변형이 가해져서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문으로 정착되었다. 앞에서 사례로 들었던 인권선언문 조차도 ‘누구나’라는 표현 아래 돈 없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권리의 박탈을 용인하고 있는 것이다. 인권선언문은 ‘인권’이란 바로 자본주의이고, 평등은 매우 추상적인 관념에 지나지 않으며, 인권은 국가권력으로부터 억압받지 않는 ‘자유권’이 핵심이라는 생각을 심어놓았다. 물론 인권선언문에는,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많은 이들이 굶어죽거나 빈곤하거나 질병에 시달리는 점을 보완하기 위한 사회문화적 권리를 일부 넣을 수밖에 없었다. 인권선언문은 단지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만이 아니라, ‘사회ㆍ문화적 권리’라는 개념을 일부 수용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극심한 빈곤으로 인해 반란을 일으키거나 권력에 대항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주안점을 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장애인에 대한 차별, 동성애에 대한 차별, 여성에 대한 차별, 국가 간 빈부격차 문제 등을 중심에 둔 새로운 문제제기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의 인권은 주로 국가에 대항하여 개인의 인권을 어떻게 보장할까 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집단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에까지 이르고 있다. 게다가 이 인권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집단에 속해있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거나 억압을 받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오랜 기간 동안 힘든 투쟁을 함으로써 권리로 확장을 시켜온 것이다.
즉 인권이란 굳어 있는 개념이 아니다. ‘당연히 이래야 한다’는 당위여서 현실은 따라가지 못하는 개념도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문제를 개선하고 권리를 확장하기 위한 무수히 많은 노력의 산물로 인권이 만들어지고, 인권의 개념이 확장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권은 항상 현재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4. 우리 시대의 인권 과제
앞에서 학교야말로 반 인권적인 곳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인권에 대한 무감각을 배우고, 인권을 추상적인 것으로 인식하도록 훈련된다. 그러나 인권은 역사적인 개념이라고 이야기했다. 인권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현실의 모순을 꿰뚫어보는 눈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 현실에서 인권 문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이야기 해보자.
인권은 초기에 ‘자유권’, 즉 국가적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봉건적인 신분억압에 저항하는 시민(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면서 이것은 보편 이념이 되었다. 이제는 누구나 국가의 폭력과 억압에 함부로 노출되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것은 법에 의해 보장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시대에는 여전히 국가에 의한 억압이 ‘법’의 이름으로 진행된다. 법이 불공평하거나 법자체가 폭력적일 때에는 인권이 보장되지 못한다. 그래서 법 또는 국가권력이 얼마나 인권을 잘 보장하는가가 그 사회의 인권 척도가 되기도 한다. 우리사회는 예전에는 군사적 억압을 포함하여 법을 초월한 폭력과 억압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법을 초월한 억압은 별로 없다. 최소한 법에 의한 지배는 확립되고 있다. 하지만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을 둘러싼 극한 대립에서 정부가 군대를 동원하거나 용역깡패들을 용인하거나 농민들의 토지를 강제 수용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법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국가폭력이 개인의 삶을 짓밟는 사례도 많은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법의 이름으로 감옥에 보내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이 인권의 담지체로 나타나지만, 인권 자체가 한계 속에 놓여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개인에 대한 국가의 억압과 폭력은 일상의 차원에서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개인의 자유권은 많이 보장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가의 억압과 폭력은 매우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들에게 파고들어 간다. 범죄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CCTV를 설치하거나, ‘편리’하기 때문에 전자주민카드를 만들어내고, 선거 시기 인터넷 실명제를 함으로써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기도 한다. 우리의 일상에 대한 감시와 억압은 폭력적이지는 안 되, 은밀하게, 그리고 ‘편리’나 ‘보호’를 명분으로 확장된다.
그 속에 안주하는 개인은 자기 일상의 삶이 감시당하고, 자료가 집적되고, 자율적인 발언에 제재가 가해져도 무감각하게 받아들인다. 결국 사람들은 감시를 내면화하게 하고, 권력의 의도대로 훈육된다. 이는 국가 억압의 새로운 형태이며, 이것은 자유권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자유권은 가시적 억압과 눈에 보이지 않는 억압 모두에 대항하는 개념이어야 한다.
그리고 경제ㆍ사회ㆍ문화적 권리들은 미처 확보되지도 못했는데, 오히려 더 후퇴하는 양상을 보인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을 경쟁체제로 내몬다. 그래서 개인의 능력으로 그 권리를 획득하라고 말한다. 결국 그것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제로섬게임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문화생활을 누릴 권리는 돈이 있을 때 가능한 권리가 된다. 세상의 모든 것이 상품의 논리로 재단되는 순간, 우리들의 사회적 삶의 풍요로움도 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권의 한 요소인 사회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제3의 인권이라고 이야기하는 집단적 권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자유주의는 초기 자본주의 시대 부르주아지들의 중요한 권리였던 ‘자유권’과 ‘재산에 대한 권리’만을 옹호하기에, 노동조합 등 그것에 반하거나 효율성을 해친다고 생각하는 모든 집단적 권리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다. 모든 것을 개인의 능력으로 돌리는 사회에서는 소수 집단에 대한 관용(인정)이 사라지며, 그들의 권리 요구에 대한 혐오증이 커진다. 소수는 능력이 없거나, 자신이 선택을 잘못한 것이 문제이므로 집단적으로 권리를 요구하기보다는 개인의 능력을 키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인권은 ‘자유권’을 넘어서야 한다. 사람들을 위계화하고, 경쟁을 가속화하고, ‘누구나’ 당연하게 누려야 할 권리들을 ‘돈’이 있을 때에야 가능한 권리로 치환하여 사실상 인권을 무너뜨리는 신자유주의와 부딪치며, 인간으로서의 권리(누구든, 아무런 제약 없이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5. 인권이 보장될 때 우리 삶은 풍요롭다.
우리가 인권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곳에서 인권은 살아 숨쉰다. 인권이 고정불변의 이상향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과 억압을 깨치고 계속 확장되어온 과정임을 이해한다면 우리 시대의 인권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삶을 불편하게 하고, 억울하게 만드는 그 모든 곳에서 재발견되어야 한다. 그 장소는 바로 학교이다. 아이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서는, 체벌과 경쟁과 성적에 따른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고, 효율성이라는 미명 아래 머리와 복장을 강제로 통일시키고, 생활지도라는 미명 아래 함부로 남의 통신 등 사생활을 엿보고, 그리고 이런 모든 행위들이 ‘너희들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인권은 어떤 명분으로든, 어떤 이유로든 침해될 수 없는 권리라는 점이 너무 간단하게 무시되고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아이들에게 인권을 가르쳐서 인권에 대한 민감성을 기르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인권에 대해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인권의 눈으로 교실을 들여다보면 숨막힐만한 반 인권적 사례들이 발견된다. 그러나 아이들이 그런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시도를 할 수 없다. 학교에서의 반 인권 행위들은 구조적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인권 문제에 대해 눈을 감으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학교에서 어떤 반 인권적 요소가 있는지 발견하지만 정당하게 주장할 수는 없는 그런 상황이 된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에게 인권을 가르쳐야 한다. 반 인권적인 상황에 길들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반 인권적인 상황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사회에 나가서도 문제들을 답습하며, 새로운 세대에게도 여전히 그런 상황을 물려주려고 한다. 그러나 길들여지지 않는다면 설령 지금 학교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변화를 위한 큰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올바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하고, 쉽게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인권이 최종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라고 할 때 그 지향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한계적인 인권 개념을 넘어서서 우리시대의 인권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질 때 현실의 문제를 넘어서는 길을 찾을 수 있고, 우리 아이들의 삶도 강해지고 당당해진다. 권리에 대한 인식, 쉽게 포기하지 않는 정신, 그리고 그것을 이뤄나가는 집단적 힘에 대한 신뢰가 아이들에게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