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워서 남주자 다시보기
<블랙>
빛의 또다른 이름, Black
서승미 장유지역센터 교사 spssp@naver.com
한번 쯤, 어두움을 두려워했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늦은 시간 깜깜한 골목길, 어두운 장소, 혹은 자신의 캄캄한 미래 등 어두움은 종종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주곤 합니다. 태생적으로 인간의 생이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어두운 방안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것이 가진 ‘불확실함’ 때문일 것입니다. 어두움은 보이지 않는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불확실함과 그 안에 잠재해 있을지 모를 사고의 위험에 대한 불확실함을 동반합니다. 사실상, 인간은 외부세계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데 상당부분을 시각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각으로 보여 지는 정보를 통해 많은 것을 판단합니다. 사람에게 ‘보다’라는 행위는 사물과 세상을 ‘인지’하는 연결고리 통해 ‘안다’라는 것을 취득하게 하고 안다는 것은 개인이 위험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판단 할 수 있게 해줍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다’와 선을 같이 하는 ‘어두움’은 개인의 그러한 판단을 무력하게 합니다. 이러한 어두움을 마주할 때에 그 안에 홀로 그것과 직면하고 그것이 가진 잠재적인 위험에 자신을 보호해야만 하는 것이 자신밖에 없다면 어두움은 실제 그것이 가진 크기보다 훨씬 큰 몸집의 두려움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이러한 어두움이 평생 지속된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인도의 산제이 릴라 반사이 감독의 2005년 작 <블랙(black)>은 이러한 생을 살아야 하는 여자, 미쉘 맥날리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입니다. 영화의 여주인공 미쉘에게는 어두움뿐만 아니라 침묵도 함께 주어졌습니다. 그녀에게 세상이란, 빛에 따라 색을 달리하여 변하고 무수한 소리의 무리로 가득한 곳이 아닌 캄캄하고 고요한 어두움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세계에 데브라이 사하이라는 남자가 찾아와 그녀의 스승이 되어 그녀의 인생은 빛을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이쯤 이야기하게 되면 이 영화의 이야기가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것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실 <블랙>은 19세기 미국을 휩쓴 감동 실화인 헬렌 켈러와 그녀의 스승인 앤 설리번의 이야기를 인도라는 무대로 가져와 풀어낸 영화입니다. 헬렌 켈러의 이야기는 이전에도 1962년 아서 펜 감독에 의해 <미라클 워커>로 만들어진 바 있습니다. <미라클 워커>가 헬렌 켈러보다 앤 설리번을 중심으로 그려진 영화라면 <블랙>은 그녀와 그녀의 스승 모두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어둠을 타고난 아이
영화의 네러티브는 주인공 미쉘이 점자자판을 두드리며 그녀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끌어가는 자전적인 구성을 취합니다. 장면이 바뀌고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이상한 걸음걸이, 젊은 여자에겐 어울리지 않는 지팡이, 내리기 시작하는 눈을 허공에 아무렇게나 손을 휘저어 잡아보려고 하는 여자. 그녀가 바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미쉘 맥날리입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이러한 고요한 어두움과 함께 살아야 함이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모두와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불행히도 ‘장애’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변사람들로부터 미쉘을 자신들과는 다른,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심지어 그녀의 생부조차 그녀를 짐승처럼 대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누구나 존엄을 갖고 하나의 인격체로 살아갈 권리를 가집니다. 그러나 미쉘이 짐승취급을 받아야만 했던 것은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언어, 도덕, 규범, 예절 등의 인간의 문화에 대한 학습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상당 부분 보고 듣는 것으로 그것이 체득되는 과정을 거치지만 미쉘의 경우 그러한 외부정보를 받아들이는 주요 기능 두 가지가 원천봉쇄 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전달 방법으로는 학습이 불가능했습니다. 미쉘은 이러한 학습 과정 없이 단순히 먹고, 싸고, 자면서 ‘살아가고’있을 뿐이었습니다. 기실, 이 영화의 모태가 된 헬렌 켈러가 태어났던 1880년대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거의 황폐한 벌판과 같았습니다. 영화에서도 간간히 언급되지만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를 거의 구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산업혁명 이후 경제적인 관점에서 사회 무능력자로 취급받기까지 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특수학교라는 집단수용시설에 보내지고 시설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러한 모래벌판에, 장애인에 대한 ‘인권’이라는 풀이 자라고 ‘복지’라는 나무가 생기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른 지금까지도 그들에 대한 차별과 소외는 계속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는 장애를 가지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이 소수에게 ‘보여지는’ 차이성을 이유로 그들에게 갖는 편견과 오해의 시선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안에서 미쉘 역시 자기 외부의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고 그녀가 보여주는 남다른 감정 표현과 행동 때문에 정신지체아가 수용되는 시설에 보내지려고 했습니다. 미쉘의 어머니는 특수학교에 보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사랑만으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특별한 그녀에게는 특별한 언어와 특별한 스승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런 사람이 미쉘에겐 사하이였습니다. 사하이는 가족조차도 손을 대지 못하고 무질서하게 사는 그녀와 소통을 시작하고 교육하려 합니다. 그가 그녀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언어, 궁극적으로 언어가 가진 의미였습니다. 즉, 모든 사물과 행동이 가진 이름과 존재의 관계였습니다. 철저히 어두운 적막에 둘러싸인 자기안의 세계에 홀로 살아내야만 하는 그녀를 외부의 세상과 소통하는 길을 내어 줌으로써 하나의 인격체로 설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하이는 가능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이 일에 매달려 그녀를 포기하지 않고 끈기를 가지고 그녀를 가르칩니다. 미쉘에게 사하이가 보여준 끈기와 열정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사하이 역의 모티브가 된 앤 설리번의 이야기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헨렌 켈러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앤 설리번 역시 수술을 받아 미약하게나마 시력을 회복하게 되긴 하지만 시력을 잃은 적이 있고, 또한 유년시절 심각한 정서불안 판정을 받고 수용시설에 격리 된 적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어린동생을 시설에 보내어 잃은 경험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구구절절이 설리번의, 사하이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하이가 기본적으로 설리번의 캐릭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몇몇 요소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하이가 안약을 넣는 장면이나 그가 어린동생을 잃었던 적이 있는 것이나 항상 선글라스를 끼고 다닌다는 것들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한 사람의 교육에 열정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자신과의 동질감이나 연민으로 인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설리번이 수용시설에 격리 되었을 당시, 그곳에서 그녀는 그녀의 인생을 바꾸게 만들어주는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에 스승으로 받은 삶의 빛을 그녀는 헬렌 켈러를 만나 다시 건네어 주는 겁니다. 인간에 대한 가능성과 긍정의 힘에 대한 믿음, 그러한 믿음은 또 다른 이를 위해, 개인과 개인, 세대를 넘어 전이 되어 간 것입니다. 영화에서 사하이가 미쉘에게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이 가능했던 것은 사하이가 가진 미쉘에 대한 믿음, 즉 사람의 가능성에 대한 끊임없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디 Education은 라틴어의 Educare에서 유래된 용어로 ‘밖으로’의 뜻을 가진 ‘e’와 ‘꺼내다’의 뜻을 가진 ‘ducare’가 결합되어 형성된 단어입니다. 즉, Education의 의미는 인간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키워준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언급한 것처럼 무리 모두가 무지라는 어둠을 가지고 태어나고 그러한 어두움에 스승이란 빛이라는 등불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사하이는 단지 그녀가 가진 장애를 동정하고 그녀의 옆에서 수족이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가진 장애를 이해하고 그녀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녀가 스스로 세상과 관계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미쉘에게 들어온 언어는 단순한 언어를 넘어서 지식이 되고 그것을 통해 꿈을 가지게 됩니다. 영화가 매력적인 것은, 그저 조금 다르게 태어났다는, 다르게 되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평가 절하하는 그 다수들에게 미쉘과 사하이가 생을 이루어 내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모두 태어나는 동시에 같은 존엄성을 가지고, 같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라는 같은 개체라는 사실과 정신을 감싸는 껍질에 불과한 육체의 무엇이 부족하고 더하고 간에 각자는 다른 타인의 우위를 점할 수 없음을 상기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다수의 편협과 편견이 만들어낸 오만함의 허를 찌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빛으로, 빛은 어둠으로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영화는 장애를 가진 한 여성의 인생역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하이는 설리번과 다르게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자못 감동을 해칠지도 모르는 ‘성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피해가지 않습니다. 이와 맞물려서 영화 중반부터 미쉘과 동생 사이에서의 갈등이 부각되기 시작하는데, 다소 뜬금없는 전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흔히, 구성원 중에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는 한 가정에서 일어 날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 뜬금없는 것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미쉘과 동생의 이러한 갈등구도는 동시에 각자가 대변하고 있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서 보여 지는 것만이 장애가 아님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처럼 그녀의 탄생으로 시작하여 그녀의 생을 보여주는 것에 있어서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만을 잘라 말하지 않습니다. 영화에는 한 여성의 생이 커다란 줄기로 관통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물이라는 장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분수대의 물은 미쉘이 단지 물이라는 사물과 W.A.T.E.R라는 단순한 단어의 조합에서 양자의 관계를 알게 되는 최초의 대상이었습니다. 물을 느끼고 단어의 의미를 알게 된 것입니다. 미쉘은 성장한 후에도 누구보다 먼저 눈이 오리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눈으로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미쉘의 세계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세계에 사는 그녀에게 있어 새하얀 눈이란, 하늘이 주는 선물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눈 또한 비와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내리는 물입니다. 눈과 비 모두 형태만이 다를 뿐 본질은 같은 것입니다. 미쉘의 위로 눈이 내리는 장면은 영화에서 종종 나오곤 하는데, 단순히 그것이 주는 영상미를 넘어서 눈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가지는, 비단 그 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수없이 차이를 규정해 온 각각의 인간 군상들이 실상 같은 본질을 타고났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코드인 셈입니다. 이와 같은 또 하나의 장치는 영화의 커다란 틀로서 존재하고 있기도 합니다. 영화는 초반,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사하이와 성장 한 미쉘이 극적으로 만나는 사건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장면은 미쉘의 유년으로 돌아가 그녀의 생을 따라오게 되고 다시 처음의 시점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영화는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고 휴머니즘을 이끄는 방법에서 사하이를 설리번과 오버랩하여 그의 이야기를 설리번의 일생과 동일하게 이끌어가면서 어두움이 빛으로, 그리고 그것이 전이되는 과정을 통하는 대신에 미쉘과 사하이의 상황을 번복시키고 둘의 관계를 전복시키면서 좀 더 큰 의미의 삶에 대한 철학을 담고자 하고 있습니다. 즉, 미쉘의 탄생과 사하이의 죽음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액자식으로 구성함으로써 인간 모두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또한 빛에서 어두움으로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즉 영화가 미쉘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이야기 하고자 함은 이것입니다.
<블랙>은 미쉘의 이야기를 통해서 어둠이란 소수의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닌 누구나 어둠을 타고나며 그것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보편성,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빛이고 희망의 색이 될 수 있다는 상대성을 부여하여 ‘블랙’이 가지는 의미를 재규정하고 재위치 시킵니다. 미쉘이 자신이 가진 핸디캡에 대해서, 그것으로부터의 편견과 오해에 대한 극복의 과정, 사하이가 보여주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 궁극적으로 인간은 모두 같은 운명을 타고난 존재라는 것. 영화가 크게 맥을 따라가는 이러한 주제 이 외에도 이 영화에 가치를 더 얹고자 함은 개인주의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 타인을 위한 애정과 헌신, 혹은 이타심을 말하며 결과만을 중시하고 평가하기보다 과정에 가치를 두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같음’과 ‘다름’은 결국 같음과 다르지 않음을 설토합니다. 비단 이것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다름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분류하고 못 박는 수많은 삶의 모습들, 예컨대 여성과 남성, 아이와 노인, 고용자와 피고용자, 부유층과 빈곤층,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등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은 분명 차이는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다름은 상호가 인정하는 선에서 같음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렵나요? 장애인과 같음을 말한다고 해서 비장애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같은 조건에서 시작하고 같은 잣대로 그들의 능력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눈과 비를 구분하는 일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사하이는 미쉘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인생은 아이스크림과 같아서 녹기 전에 맛있게 먹어주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누구든 인간으로 태어나 생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각자는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