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배반하는 과학』, 『욕망하는 테크놀로지』, 『과학과 사회운동 사이에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과학 이야기

 

 

정진원 | 피츠버그 대학 연구원 solitarywind@hanmail.net

 

1. 과학은 완결된 것이 아니다

 

현재 과학에 몸담고 있는 필자는 과학사를 좋아합니다. 교과서, 혹은 논문으로만 접해 오던 수많은 과학적 발견, 지식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중국사보다는 『삼국지』를 읽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걸까요. 단편적인 사실들보다는 흐름이 있는 이야기가, 그리고 뒷얘기가 더 재미있는 법입니다.

과학도 인간의 활동이기 때문에 역사가 있으며 인간의 활동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속성을 그대로 가지게 됩니다. 희로애락이나 경쟁, 시기 질투뿐만 아니라 과학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모순, 오류 등도 있지요.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의 과학들은 인간의 지식이나 기법들이 미흡했기 때문에 혹은 헛된 신화나 종교, 믿음에 얽혀 있었기 때문에 모순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현대, 혹은 근대의 과학은 그렇지 않지 않은가?’ 그러나 과학의 이야기, 과학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과학사를 들추어 보면 이런 인간적인(?) 과학의 모습은 쉽게 발견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와 유사하게 과학이 주는 엄밀함이라는 인상은 종종 이에 반하는 에피소드와 결합하게 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게 됩니다. 아인슈타인이 수학이나 물리를 빼놓고는 열등생이었다던가, 플레밍이 우연히 날아든 곰팡이 포자로 인해서 페니실린을 발견했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이러한 범주에 속합니다. 열등생, 우연, 실수 - 이런 단어들은 과학이 주는 날카로운 이미지와는 모순되기 때문에 이러한 요소가 결합된 일화들에 사람들은 흥미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화로 인해 과학은 단순한 이야기 거리로 전락해 대중들에게 소모되고 맙니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Ernt Peter Fischer는 『과학을 배반하는 과학』(해나무)을 통해서 과학사의 에피소드가 가진 오류, 인간의 활동으로서 과학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과학을 대하는 새로운 자세를 요구합니다.

 

“과학은 인간의 활동이다. 인간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따라서 과학에는 오류들이 있다. 그것도 허다하게 있다. 논리적으로 이토록 단순하고 명백한 사실을 이상하게도 대중은 의아하게 여긴다.(35쪽)”

 

이와 함께 저자는 대중들의 상식과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중 두 얘기가 앞서 언급한 아인슈타인과 플레밍 이야기입니다.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아인슈타인은 모든 분야에서 우수한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다만 아인슈타인은 스위스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첫 대학시험에서 낙방한 경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독학으로 입시를 준비한 탓이었습니다. 한편 최고점이 1점에서 시작해 숫자가 커지는 독일과 달리 스위스에서 최고점은 6점으로부터 시작해 점점 낮아지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를 혼동한 독일 출신의 전기작가가 여러 과목에서 5점을 받은 아인슈타인은 공부를 못했다는 말을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플레밍에 대한 평판도에서도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 플레밍이 1920년대 후반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은 사실이지만 플레밍 자신은 이 발견이 항생제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부정적인 의견과 영향을 보였다고 합니다. 후에 2차대전이 발발하여 항생제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커지는 시점에 하워드 플로리 같은 영국의 과학자들이 페니실린을 항생제로 이용할 수 있음을 보이자 플레밍은 이때부터 ‘자신의’ 신약에 대해서 떠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따라서 페니실린이 인류사회에 기여한 질병극복의 공을 논할 때 플레밍의 위치는 그저 각주 중의 하나에 불과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을 열거하기 시작하면서 저자는 과학을 다르게, 혹은 거꾸로 볼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이제는 다소 고리타분하게 들리는 “역발상의 창조성”을 강조하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다음을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 각각의 모든 사유 방향에 대하여 관점 뒤집기가 가능하고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우리는 이렇게 바꾼다. ‘내가 어떤 것의 반대를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나는 그것을 아직 많이 알지 못한다는 점을 나는 안다.’ 어떤 아름다운 생각의 반대를 인정하고 최소한 조금이라도 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 아름다운 생각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을 아인슈타인의 빛은 일깨워준다. (27쪽)”

 

저자는 책을 통하여 과학에 대한 ‘거꾸로 보기’를 시도한 예를 소개하기도 합니다. 또한 동시에 과학사를 연구한 학자로서 과학사와 과학에 대한 대중의 상식에 도전하기도 합니다. 스스로가 과학을 전공한 과학자이자 과학사가인 저자가 쓴 이 책은 저자가 한 신문에 기고한 100개의 글을 모아서 편집한 탓에 각 글의 호흡이 짧고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탓에 책 전체가 산만하게 읽혀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어떤 글은 과학 그 자체를 관조하는 현학적이고 문학적인 글도 있고 글 쓸 당시 독일 사회의 현안에 대한 글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100개의 글이 만드는 큰 그림을 통해서 저자는 과학에 대한 신화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과학에 대해 보다 열린 관점을 가질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과서로만 과학을 접하고 이 지식을 통해 입시문제를 풀어야 하는 우리는 ‘과학이란 완결된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학생들은 미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학교에 갔다가 개념적인 지루함에 지쳐 집에 돌아온다. 고등학교에는 어떤 자연과학이 필요할까? 단박에 예리하게 정의되고 테두리가 쳐지는 그런 과학은 아니다. 오히려 열려 있는 과학, 경이롭다는 느낌을 자아내는 과학이 필요하다. 자연은 수수께끼들로 가득 차 있다. 과학은 우리에게서 수수께끼를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수수께끼로 인도해야 마땅하다. (205쪽, 고등학교에서는 어떤 자연과학을 가르쳐야 할까?)

 

과학과 사회의 관계, 또는 과학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며 이 책의 소개를 마칩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과학은 자신의 결과에 대해여 책임을 져야 한다는 문장은 헛소리다. 이 문장에는 과학을 이용하는 자들은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 암묵적으로 들어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군중은 책임이 없기를 바란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그들은 책임을 면할 수 없고 면해서도 안 된다. 마르크스가 옳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역사를 만들었고, 따라서 과학에 대한 책임이 있다. 우리는 그 책임을 미룰 수도 떨쳐낼 수도 없다. (335쪽, 인간과 역사)”

 

“예전처럼 지금과 과학의 진보는 있지만, 그 진보가 반드시 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과학만 바뀌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의 소비자들인 우리 모두 또한 달라져야 한다. …’더 나은 삶’과 ‘더 쉬운 삶’은 다르다는 점을 망각한다. 참된 과학은 삶을 더 어렵게 만들고 모두 각자에게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352쪽, 과학의 힘들 다루는 올바른 방법)”

2. 과학기술에 대한 ‘세련된’ 논의들

 

이제 ‘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은 상투적으로 들리기까지 합니다. 특히 2000년대 들어서 폭발적으로 발전, 보급된 인터넷, 휴대전화와 같이 개인 생활 깊숙이 침투한 통신발전술의 약진은 우리의 생활상을 너무 많이 바꿔놓아, 이제는 이 전술 없는 생활을 상상하기 힘듭니다. 10년 전만 해도 학술정보 검색용이나 일부 사람들만 취미생활로 하던 월드와이드웹, 혹은 인터넷은 이제적으로과 방송을 대신해 미디어 역할을 하고 쇼핑에서부터 은행 업무, 주민등록등본 발급과 같은 관공서 업무 처리까지 모두 맡아 처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국의 PC방이 일시에 마비되었던 2003년의 슬래머웜에 의한 인터넷 대란사건이나 지난 7월에 있었던 DDos 사건은 우리 삶에 인터넷이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들어왔는지, 우리가 인터넷이나 휴대전화에 얼마나 기대어 살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간의 삶에의 기술의 강한 침투는 예상하지 않은 문제점들을 야기시킵니다. 기술의 발전이 새로운, 그리고 더 큰 문제점을 가져오게 만든 것입니다. 항공기술의 발전은 누구나 싼값에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게 했지만, 소수인원 투입으로 최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테러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휴대전화와 인터넷의 엄청난 보급률은 역으로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불편함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술을 그저 자연물을 우리에게 적합한 형태로 만드는 방법이나 수단 정도로 쉽게 생각하고 있지만 위에서 본 것처럼 기술은 그 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확실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문명을 이룬 이후 항상 따라다니는 현상일 것입니다. 만화 『불의 검』에서 묘사됐던 것처럼 고대국가의 흥망에는 철기문명, 즉 철을 다루는 기술과 이를 통한 생산력, 전력 증강이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기술과 사람의 삶, 혹은 사회와의 관계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20세기 초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가 기술에 관해 논한 바 있었지만,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많은 사람들이 과학기술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를 내게 되었습니다. 원자폭탄, DDT, PCB, 환경호르몬, 유조선사고, 공해 등에 의해서 일어난 환경오염문제와 체르노빌, 스리마일과 같은 대형 원자력발전소 사고와 같이 과학기술이 빚어낸 엄청난 문제를 직면하게 된 결과입니다.

하지만 기술에 대한 유의, 기술의 악용을 경계한다는 단순한 반성만으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습니다. 원자폭탄이 터진 지 50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기술이 일으키는 환경오염과 같은 여러 문제를 여전히 껴안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과학기술학자 - 과학기술자가 아닙니다 - 9인이 공동집필한 『욕망하는 테크놀로지』 (이상욱 등저 / 동아시아)는 이러한 기술이 주는 문제점을 보다 세련되고 깊게 이해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하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여기서 삶의 조건을 규정하는 기술적 인공물이 꼭 휴대전화나 고속철도와 같은 누가 봐도 ‘첨단’의 것들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밥을 해먹는 밥솥이나 뚝배기도 기술이고, 더 중요하게는 쌀 자체가 기술적 산물이다. 야생 벼에서 얻을 수 있는 쌀알은 우리가 흔희 보는 쌀처럼 곱게 도정되어 반짝거리지 않으며 크기도 그렇게 크지 않다. 밥맛은? 한 번 직접 시도해 보기 바란다. (8쪽)”

“대규모 기술 시스템은 한두 사람의 의지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 이럴 경우에 기술은 그 내적 논리에 따라 발전하고, 자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술로 인해 더 큰 원력을 얻는 사람들이 기술을 통한 암묵적이고 보편적인 지배와 권력을 행사한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기술에 대한 철학과 사상이 그것도 비판적이면서 균형 잡힌 철학과 사상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기술에 대한 이해는 사회와 인간에 대한 이해와 바로 통해 있는 것이다. (24쪽)”

책에 소개된 몇 가지 유명한 예들을 통해 과학기술학자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논해가는 방법에 쉽게 접근해 볼 수 있습니다. 직경 1.4미터가 넘고 타이어를 채용하지 않아 불편하고 힘들었던, 그래서 자전거 타기를 격렬한 운동으로 여기는 남자들에게만 선호되었던 자전거가 어떻게 현대의, 크지 않은 두개의 같은 크기의 타이어가 달린 형태로 발전하여 보급되었는가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책은 자전거가 변화해 온 과정을 통해 사회 안에서 기술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설명하기도 하고, 당시 흑인들의 주요 교통 수단이었던 버스나 트럭은 공원에 접근할 수 없도록 고의적으로 다리를 낮게 설계한 예를 통해 기술이 인종차별과 같이 정치적으로 쓰이거나 더 나아가 기술 그 자체가 정치를 내포할 수 있는 경우를 다루기도 합니다. 기술의 선/오용이라는 고전적인 논쟁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견해를 소개하기도 합니다.

 

“총은 중립적인 도구이고 용도에 따라서 좋은 목적으로 혹은 나쁜 목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총이 사람을 죽이는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가? 그의 해법은 사람이 총을 가짐으로써 사람도 바뀌고 총도 바뀐다는 것이다. 총을 가진 사람은 총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달라지고, 마찬가지로 총도 사람의 손에 쥐어짐으로써 옷장 속에 있는 총과는 다른 존재가 된다. 즉 총과 사람의 합체라는 잡종이 새로운 행위자로 등장……(89쪽)”

 

특히 기술과 여성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과정에서는 우리의 상식과는 반하는, 기술과 사회간의 관계의 복잡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사노동을 돕거나 대체할 수 있는 세탁기와 같은 수많은 가사기술의 발전으로 여성은 가정에서 해방되어 사회 각 분야에 적극적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는가? …(중략)… 루스 코완은 미국 가사노동에 대한 자세한 경험적 연구를 통해 세탁기와 냉장고와 같은 가사 기술의 보급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1860-1960년 사이에 미국의 평균 가사노동 시간은 줄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중략)…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의미의 좁은 가사노동은 줄었지만 주부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의무로서의 가사노동의 총량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 점은 아무리 노동의 한 측면을 간편하게 해주는 기술이 도입되더라도 여성과 남성의 관계나 여성의 역할 및 지위에 대한 기존 관념이 바뀌지 않는 한 기술만으로 여성과 관련된 사회적 변화가 이루어지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166-171쪽)”

이 책에 대해 좀 아쉬운 것은 책에 소개되어 있는 구체적인 사례가 고전적인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필자가 과학기술학에 대해 처음 들어본 것이 약 15년전 일인데, 책에서 다루는 구체적인 논재들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물론 고전적인 예들은 고전이 된 만큼 논지를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세련된 장치겠지만 우리 세대를 대표하는 기술들에 대한 논증이 있었다면 보다 생생하게 읽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 대한 소개는 다음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마무리할까 합니다.

 

“인간이 기술을 지배한다거나 역으로 기술에 의해 지배당한다는 관점을 탈피해서 우리의 일부분으로서의 기술, 그리고 기술의 일부분으로서 우리를 생각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95쪽)”

3. 과학, 그 안에서 고군분투하기

 

마지막으로 소개할 책은 다시 과학 이야기에 관한 책으로, 진짜 과학자의 목소리입니다.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인 존 벡위드는 1969년, 최초로 유전자를 분리, 복제하여 생물체 내에서 시험관으로 옮겨낸 과학자입니다. 이에 대한 각종 매체의 관심과 스포트라이트는 얼마전 복제양 돌리가 발표될 때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성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에서 동시에 자신들이 선보인 새로운 기법이 가져올 유전공학의 잠재적인 위험성을 경고하는 메시지를 발표합니다. 비유하자면 황우석 박사가 <사이언스>지 논문발표 기자회견장에서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의 기사를 읽는 것과 같은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벡위드는 60년대와 70년대를 거쳐 유전자 발현조절과 세포막연구에 대해 많은 연구와 수행하고 그 연구결과를 저명한 저널에 발표하였습니다. 한 과학자의 능력을 그가 발표한 논문의 숫자와 수준으로 판단한다고 보면 그는 분명히 대단히 유능한 유전학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68년을 전후로 하여 세계를 휩쓴 이른바 68운동의 흐름 속에서 급진적 과학운동단체 활동에 투신하고 우생학논쟁, 사회생물학 논쟁, 유전자 차별 등의 중요 이슈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활발한 정치활동을 전개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과 사회운동 사이에서: 68에서 게놈프로젝트까지』(그린비)는 벡위드의 자서전으로, 과학과 기술과 사회가 격렬하게 충돌했던 1970년대의 풍경을 저자는 현장에서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앞선 두 책의 관점이 주로 관찰자적 입장이고 분석적일 수밖에 없는 것에 비해 이 책은 위 책들에서 말고자 했던 바를 직접 겪고 실천한 사람의 생생한 목소리이고 싸움구경마냥 흥미진진한 이야기입니다.

벡위드가 앞으로 닥칠 사건에 휘말리는 과정은 마치 일본 소년만화의 전개와 비슷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능력을 가지고 있던 주인공이 우연히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과학계를 떠나야 하나 마나를 고민하던 박사후 연구원이었던 벡위드는 ‘운좋게’ - 물론 필자는 이것은 저자 벡위드의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 하버드대 교수자리를 얻어 과학을 계속 수행할 수 있게 되었고 얻은 성과를 발표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있었던 기질 - 60년대를 풍미했던 저항의 정신 - 로 말미암아 당시 과학자들로서는 꺼려했던 사회적 발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듬해 제약기업이 후원하는 학술상을 받은 그는 상금을 처분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다가 또 ‘우연히’ 연구원 시절 친하게 지내던 한 과학자가 흑인 급진 운동단체에 연루되어 투옥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벡위드는 상금을 이 단체를 위한 변호사비 및 병원비로 내놓는데, 이 때문에 요새말로 소위 ‘좌빨’로 찍히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과학자로서 사회문제의 격랑에 한발 들여놓자마자 우생학 논쟁, 사회생물학 논쟁, 유전자 차별과 같은 다양한 사건들이 연이어서 그를 찾아오게 되고 그는 그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에 대해 발언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물론 이전에도 벡위드는 반전이나 철거문제와 같은 사회․정치적 문제에 대해서 행동하고 발언해 왔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서 그의 활동무대는 과학과 사회가 맞닿아 있는 곳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벡위드의 자서전이 주는 생생함은 그의 경험이 사건의 한복판에서 과학자로서 동시에 사회활동가로서의 목소리로 전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75년, 벡위드는 신생아 및 아동을 대상으로 한 XYY 염색체 이상 연구가 과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 연구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XYY증후군이라고 불리는 이 염색체 이상은 1000명에 한명꼴로 나타나는 염색체 이상으로 남자에게 있어서 하나만 있어야 하는 Y염색체가 중복이 되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관찰되는 증상으로는 평균보다 큰 키와 여드름, 학습장애가 있지요. 그런데 1965년에 발표된 한 논문으로 인해서 미국 대중들은 XYY증후군을 가진 사람이 강한 범죄성향을 가지게 된다고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중의 편견은 XYY 증후군을 지닌 범죄자를 모아놓은 혹성이라는 설정으로 영화 <에일리언3>에 나옵니다.) 당시 하버드에서 진행되던 연구는 이러한 편견과 오해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었고 벡위드는 이에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일은 대학 내에서 숱한 적만 만들고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나는 그들 중 몇몇 사람에게 그 연구에 대한 우리의 평가에 과연 동의하지 않는지를 물어보았다. 내가 받은 답변들은 이들 과학자들 사이에 존재하던 –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 깊은 우려를 드러내 주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만약 이 과학 연구를 중지시킬 수 있다면 다음 번에는 내 연구가 그 대상이 될 것이오.’ 이들 동료들은 이 과학 연구의 중지를 보편적인 과학 연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여겼다…. 종신재직권을 아직 받지 못한 일부 교수들은 그들이 속한 학과의 선임 교수들로부터 우리가 제출한 결의안에 찬성하지 말라는 회유를 받았다는 말도 들렸다. (183쪽)”

 

이 사건은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자 집단이 인간 집단으로 갖게 되는 이기적인 본성에 대한 내부고발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이 연구는 사건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외부집단의 개입을 통해 3개월 후 종료되었습니다. 하지만 벡위드는 이 일로 하여 KKK단에게 다시금 ‘좌빨’로 찍히게 되고 대학동료부터 적대감을 사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한편 과학교육에 대한 벡위드의 다음과 같은 발언도 과학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핵심을 지적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형적인 과학 교과서는 과학과 기술의 주정적 효과들을 생략하고, 과학을 진리를 향한 부드럽고, 불가피하면, 거의 오루가 없는 전진으로 표상하였다. 교과서 집필자들은 과학기관의 역할이나 운, 개인적 특성과 같이 과학 연구의 수행에 좀더 인간적인 면모를 부여할 수 있는 그 모든 요인들을 무시하였다. 과학은 유익하지만 아직 발전시킬 여지가 매우 많은 지적 추구 행위로 인식되었다.

과학의 실제 작동방식에 대한 이러한 왜곡은 학생들이 과학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서 모두를 인식하는 현실주의적 과학관을 갖지 못하도록 하였다. 과학은 그 완성 과정에서 거의 깊이를 알 수 없고 도전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된다. 미래의 시민들은 미디어에 의해 시민들에게 표상되는 과학적 발전의 중요성 -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과학 - 에 대해 질문을 던질 준비가 잘 되어 있지 않았다. (134쪽)”

과학현장에 있는 사람으로서 필자는 벡위드의 삶에 대해 여러모로 부러움을 느낍니다. 그는 과학적으로도 성취를 이루었고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않고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행동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과학과 과학의 아름다움을 사랑했고 자신의 활동에 대해서 떳떳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의 학생들은 세계 각처에서 교수가 되었고 과학과 윤리, 과학과 사회라는 문제가 발생하면 사람들이 자문을 구하게 되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벡위드의 삶과 경험은 과학도로서 자신의 인생을 준비하는 학생에게 좋은 역할모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벡위드가 과학자로서 사회적 문제에 내었던 목소리는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는 과학적 이슈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고 해법을 찾아나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