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4 - 동화 속 나라, 프라하

뮌헨에서 프라하로 가는 기차는 다시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고약했다. 마치 70년대 우리나라의 통일호나 비둘기호 수준이라면 딱 알맞을 기차를 종일 탔다. 허리가 끊어지는 듯 했다. 좌석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앉으면 임자. 사람들은 많고 거기다 모두 큰 가방들을 하나씩 들고 탔으니 거의 질식할 지경이었다.
숙소인 한국인 민박은 프라하 외곽에 있었다. 프라하 중앙역에서 지하철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밖으로 나오니 사방팔방 휑하니 뚫린 거리였다. 날씨는 춥고 이미 지쳤고 해서 택시를 탔다. 주소를 보여주며 가자고 했더니 운전사가 짧은 영어로 '아주 멀다'라고 했다. 그런가 보다하고 가는데 한 삼십분 정도 거리였다. 근데 내리면서 차비를 물으니 70유로를 달라고 했다. 우리돈으로 거의 10만원! 깜짝 놀라 되물었지만 미터기까지 보여주며 그렇다는데 할 말이 없었다. 나중에 민박 아주머니의 말에 의하면 미터기를 조작한 사기라나? 20유로면 충분한 거리란다. 제길! 또 한번 '숙소는 역 근처로 정할 것'이란 조언을 떠올렸다.
딸은 예약할 때부터 한국인 민박을 반대했다. 외국에 나가면 되도록 한국인과 섞이는 것을 경계하는 한국인들을 많이 봐 왔지만 나는 왜 그러는지 잘 몰랐다. 딸은 싫다고 했는데도 새해를 이곳에서 맞이할 것이라 그래도 우리나라 음식을 먹고 싶어 내가 우겼다. 하루를 지나고 나서 몹시 후회했지만. 돈을 내고 묵는 곳인데 뭔가 요구할 게 있을 때마다 별스러운 것 처럼 괜히 미안해진다. 딸은 한국사람 끼리라서 그런 거란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라고나 할까? 하긴, 민박이란게 원래 자기가 사는 집에 방 몇 개를 빌려주고 푼돈을 번다는 생각으로 하는 거니 거기서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을 생각은 말아야 했겠다. 화장실과 욕실을 공동으로 써야 되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고 한밤에도 마루에 불을 훤히 켜놓아 잠을 자기도 힘들었다. 방음이 전혀 안되니 모든 소리를 다 들어야 했다. 다만 아침마다 따뜻한 밥과 국, 몇 가지 간소한 반찬은 맛났다.
오는 길은 몹시 힘들었으나 프라하의 인상은 브뤼셀보다 한결 나았다. 우선 사람들이 더 순박해 보였고 표지판이 친절하게 곳곳에 있어서 거리도 찾기가 쉬웠다. 지하철역도 소박하고 깨끗했으며 지하철 안도 역시 그랬다. 타민족의 침략이야 여기도 만만찮았던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도 제나라 말이 있어서 그럴까? 훨씬 더 안정되어 보였다.
프라하는 작고 예쁜 도시였다.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도시전체가 아기자기, 알록달록한 모습이어서 동화의 나라 같았다. 지도도 한 눈에 볼 수 있고 걸어서 다닐 수 있어서 숙소에서 프라하시가지로 오갈 때만 버스와 지하철을 타면 되었다.
뮌헨에서 충분히 쉬었으므로 프라하는 두 구역으로 나누어 활기차게 걸어다녔다. 먼저 카를교를 건너 프라하 성을 보러 갔다. 시간이 멈춘 듯 한 곳, 카를교는 한 번 건너면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다리였다. 건너편의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강폭은 넓지 않았지만 검푸르게 흐르는 블바타강은 몹시 황량해 보였고 추운 다리위에는 수백년 그대로 서 있었을 조각상들이 검을 빛을 띄고 우리를 굽어보고 있었다. 차가 다니지 않는 다리위에는 온통 예술가들의 움직이는 가게로 가득했다. 딸은 "예쁘다!"를 연발해 대며 엽서나 악세서리를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리를 건너 프라하 성으로 가는 오밀조밀한 골목길도 모두 예쁜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었다. 한 눈에 혹해서 사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았다. 손재주가 좋은 민족인지 대부분 손으로 만든 조그마한 인형들이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몇 개 샀지만 이 나이에 그런 걸 사서 뭣에 쓰겠는가.
지금의 프라하성에는 대통령이 산다고 했다. 높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 올라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우리가 지나왔던 카를교와 블바타강, 그리고 구불구불한 길옆에 늘어선 알록달록한 지붕들이 보였다.  그 옛날 프라하에서도 보통 사람들은 이 성을 중심으로 이렇게 옹기 종기 모여 살았겠지, 지금은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말을 끌고 날마다 이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성을 오르내리며 무언가를 실어날랐겠지. 예나 지금이나 높은 사람들은 높은 곳에 사나보다. 성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줄이 성을 한 바퀴 빙 둘러서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밀려다니는 기분이었지만 그런대로 볼 것은 다 보았다. 황금소로라고 하는 아주 조그만 상점들이 있는 거리를 지나 성을 빠져 나왔을 때는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어스름녘, 성 위에서 내려다 본 프라하의 전경도 아름다웠지만 언덕을 내려오다 성을 올려다 보고는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조명을 받아 장엄하게 빛나는 왕궁은 정말 아름다웠다. 수백년 세월의 때가 빛을 받아 오히려 따뜻하게 보였다. 아침식사로 빵과 버터, 소시지, 우유 따위를 먹었을 때는 오후가 되도록 배고픈 줄 잘 모르겠더니 밥을 먹어서 그런지 배가 고팠다. 레스토랑마다 들렀으나 만원이란다. 그만큼 관광객이 많다는 이야기다.  성 아래 몇 번째 들린 레스토랑에서 가까스로 밥을 먹었다. 어슬어슬 춥고 배가 고팠던 터라 따뜻한 채소스프는 몹시 맛났다.
둘째 날은 구시가지로 갔다. 역시 광장이 나오고 조그만 간이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사람들은 그 사이로 다니며 먹고, 구경하고, 물건을 샀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무언가를 사 먹길래 우리도 샀다. 도넛 모양의 빵이었는데 그저 단맛만 조금 날 뿐 밀가루 냄새가 나는 딱딱한 빵이었다. '이걸 왜 사먹지?' 궁금해 하면서 반쯤 먹고 버렸다.
우리는 저녁에 볼 마리오네트극 표를 미리 사놓고 돌아다녔다. 커피를 마시러 들어간 카페에는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곡목은 기억이 안 나도 귀에 익숙한 곡을 연주했다. 딸이 사진을 찍자 그 멋진 노인은 피아노를 치며 웃었다.
마리오네트 국립극장. 날마다 인형극 '돈 죠반니'를 공연한다 했다. 조그만 극장이었지만 대단히 즐거웠다. 무대가 손으로 인형을 조종하는 모양을 다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지루하지 않도록 중간 중간 우스꽝스런 장면도 배치해서 두 시간여 동안 아주 재미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형보다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더 멋졌다. 오랜 연습을 통해 나왔을 인형극은 가장 체코다운 것이면서 온 세계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지 싶어 오래도록 박수를 쳤다.
새해 첫날을 프라하에서 맞았다. 두 분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친정어머니의 첫마디는 "안아프고 잘 먹고 다니냐?" 였고 시어머니의 첫마디는 "너는 돌아다녀 좋겠다만 애비는 혼자 힘들어서 어쩌냐?" 였다. 유구무언. 끝없이 이어지는 이 고슴도치 사랑에 대해서는 나도 결코 자유롭지 않겠지.
아침을 먹고 부다페스트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주인 남자가 20유로를 받고 역까지 차로 데려다 주었다. 나올 때 깍쟁이 같은 얼굴의 아내에게 기름값을 받아 오던 수더분한 인상의 남자는 프라하에 온지 5년 정도 되었다고 했다.  어째서 여기까지 왔는지는 묻지도 않았지만 눈치로 보아 아직 제대로 정착을 하지 못한 듯 했다. 슬쩍 슬쩍 보았던 살림도 드난살이처럼 알차지 못하더니 아마 아내가 민박으로 버는 돈이 생계에 큰 보탬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 며칠 동안 불편했던 일들이 오히려 가엾게 느껴졌다. 이 예쁜 도시에 뿌리를 잘 내리고 알콩달콩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