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 조용한 가족 에세이 모음 /동물해방을 읽고 /4338년 3월 6일

김현진 / 동물해방을 읽고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접하고 있는 거의 모든 필수품들이 제작되는 과정에는 많은 생명들이 희생된다. 바로 동물들이다. 나도 ‘동물해방’을 읽기 전에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으나 이 책에 보여진 동물학대의 정도가 가히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동물을 어느 선까지 이용할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니라 동물 학대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가부터 고민해 봐야 한다.
사람은 동물학대를 전혀 꺼림칙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에도 몇 만 마리의 동물들이 인류의 편의를 위해 잔인하게 죽어간다. 동물학대의 종류만 해도 굉장히 많은데 토끼의 눈에 로션을 넣는 행위부터 소의 꼬리를 자르는 것까지 참 다양한 방법으로 동물을 죽인다. 내가 대표적으로 말한 이 두 가지 동물학대 방법은 단지 인류의 ‘편의’ 가 아닌 ‘꼭 필요하지 않은 편의’를 위해 동물이 희생된 예이다. 연고나 로션의 껍질에 써 있는 ‘눈에 들어가도 이상 없습니다’ 와 같은 메시지 뒤에는 수많은 토끼와 햄스터가 희생되었으며 우리가 소위 말하는 질기지 않은 1등급 쇠고기는 소에게 꼬리가 잘리는 고통을 준 뒤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을 적당히 이용하는 것은 욕할 수 없다. 소를 목초지 에 풀어놓아 우유를 짠다거나 고기로 이용하는 식의 방법은 이미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전통적으로 해오던 방법이다. 하지만 요즘에 행해지는 동물학대는 꼭 필요하지는 않은 것을 위한 것이다. 소의 꼬리를 자르면 고기가 연해지지만 소에게는 엄청난 고통이며 파리를 쫓는 도구를 빼앗는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쇠고기가 조금 연해지는 것을 위해 한 생명체의 몸은 자르는지가 의문이다. 신이 인간과 동물을 창조해냈을 때 둘의 공존을 바란 것이지 한 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라고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동물학대의 실태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동물 해방에서 꽤 구체적으로 동물들이 어떤 식으로 죽어 가는지 알렸지만 우리가 읽고 기겁했던 그 과정들은 동물학대의 지극한 ‘일부분’ 일 뿐이다. 동물들은 말 할 수 없으며 인간만큼 생각할 만한 능력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지구상에서는 인간이 모든 생명체 중 가장 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신이, 인간을 지배할 만한 능력이 되는 더 고등한 생물을 만들어 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랬더라면 우리가 ‘동물해방’을 읽으면서 잔인하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실험들이 바로 우리에게 적용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단지 운이 좋을 뿐이다. 아직은 인간보다 고등한 생물이 나오지 않은 것이 말이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동물학대는 같은 생명체로서 해서는 안될 짓이며 최대한 그 정도를 약화해야 한다. 연한 육질를 만들어 내기 위해 동물을 움직일 수도 없게 하거나 장애원숭이를 만들어 내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나는 사실 동물 애호가가 아니다. 하지만 동물 해방에 나와 있는 생체 실험을 보고 인간으로서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동물을 학대하게끔 하는 기업들, 혹은 인류 생활 자체가 모두 동물학대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학대의 실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알더라도 그냥 지나치기 쉽다. 고통을 느낄 수 없지만 동물과 인체구조 등 많은 부분이 닮은 ‘물체’를 만들어내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그 대단한 ‘편의’를 위해 조금이라도 더 생명을 살릴 수 있다.
한혜준

  요즘 사회시간이나 뉴스에서는 40년 정도이면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자원이 다 고갈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이렇게 편안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것도, 따뜻하게 살 수 있는 것도 다 이런 자원에 의한다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자원의 사용이 더 가속화되어 지구 전체가 멸망하기 전에 우리는 현재의 물질관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면 가장 적절한 물질관은 무엇일까?? 이 시대의 가장 적절한 물질관은 ‘엔트로피’라고 본다. 엔트로피는 현재의 물질관처럼 최대의 이익많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이 어떻게 사용되어, 나중에 그 것이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는 , 즉 최소의 자원을 이용하여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효율적이면서 멀리 미래를 볼 줄 하는 물질관이다. 예를 들면, 현대의 물질관에 따라 페스트 푸드 체인점들은 가격을 낮추기 위해 브라질의 열대우림을 태우고 그 곳에 목초지들을 만들었다. 그 결과, 많은 면적의 열대우림이 태워지면서 이산화탄소가 나오게 되었으며, 산소를 발생시키는 나무의 소멸로 인해 더욱더 지구의 온난화 현상이 촉진화되었다. 업자들은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해 브라질 열대우림을 파괴했다. 하지만 그 것으로 지구의 온난화가 촉진됨으로서 전체 세계 인구에게 피해를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원의 손실을 막기 위해서는 열대우림을 파괴하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목축을 함으로써 열대우림의 자원의 손실을 막고 인간의 욕구를 충족하는데 이용해야 할 것이다. 단기적으로 보았을 때, 돈의 손실일 수도 있으나,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모든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또한 우리는 자원의 효율적인 분배가 필요하다. 통계적으로 보았을 때, 흔히 선진국이라 일컬어지는, 미국 ,캐나다, 호주 등은 지구의 너무 많은 자원을 쓰고 있다. 그들이 쓰는 양은 제 3세계가 쓰는 양의 4배에서 5배인 정도를 감안하다면 매우 많은 양이다. 각 나라마다 각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자원을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한 곳에서만 소비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 즉 자원을 더 싸게 얻기 위한 전쟁이나 국가 간의 협박 등을 초래한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자원을 많이 가지고 있는 국가들이 자원을 활발하게 유통시켜 제 3세계 등 에게 나누어주어 씀으로서 같이 발전을 거듭하면서도 지구의 미래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경제발전을 자원을 줄 수 없다면 각 국에서 지구에 미래에 좋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이라도 줄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면, 현재 각 국이 녹색협약을 맺고 형식상으로 개선하겠다고 하나, 그 것은 확실한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걸 했다고 처벌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들에게 엄격한 처벌로 강력하게 그 것을 실천에 옮기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지구의 자원이 보존되고, 환경도 좋아져 지구를 보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가 먹는 ‘동물들의 시체’를 잘 알아야 한다. 어릴 적부터 먹어 보았던 고기라 아무런 의심 없이 먹었겠지만, 순간의 미각의 욕구로 인해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을 보아야 한다. 업자들은 최대의 이윤추구라는 목표아래 소들을 감금하고, 곡식을 잔뜩 먹여서, 많은 부위의 고기를 팔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이 과정은 소에게 고통의 연속이다. 뿔 없어지고, 물 자유롭게 못 마시고 등등 이것은 최대의 이윤을 얻게 하지만 동물학대로 이어지며, 이런 수많은 행동들로 인해 수많은 종들이 멸종된다. 인간도 동물의 한 종이라고 생각해 볼 때 우리도 멸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소가 먹는 곡물의 효율성에 생각해 보아야 한다. 소는 아주 많은 양의 곡물을 소비하지만 우리가 그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양은 적다. 그러나 기아들이 그 것을 직접 먹는 다면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되어 기아를 죽음으로부터 구제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기를 먹는 것은 동물 입장에서도, 기아입장에서도 매우 나쁜 것이므로 행복하게 자란 소에서만 우리의 미각을 충족시켜야 한다.
  지금까지 현재의 물질관과 새로운 물질관, 즉 엔트로피를 통해 여러 가지 사회 현상들을 보았다. 이것은 지금까지 일어난 사회의 전체적인 모습이 아니다. 단지 아주 국부적인 단편의 모습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구가 180도 변한다고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이렇게 하면 지구의 수명이 조금이라도 늘어 세계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밖에 확신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모두 엔트로피로 세계를 보아 좀 더 나은 세계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동물해방을 읽고/  김태호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중점적으로 생각해야하는 부분은 평등이 과연 어느 범위까지 적용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불과 몇 세기 전, 전 세계는 인간평등의 실현을 위해 떠들썩했다. 여성들은 남성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쟁했고, 흑인들은 백인보다 열등한 존재로 대우받지 않기 위해 피 흘렸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 덕분에 인간사이의 본질적인 차별은 줄었다. 그런데 이제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동물해방도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동물에 대한 비인간적인 학대를 고발하고 비판하고자 쓰인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평등을 고통 받지 않을 권리의 다소 좁은 의미로 거론했다. 즉 모든 동물이 평등하다는 그의 주장은 모든 동물에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부여하자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동물이 성장하는데 있어서 고통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동물을 이용한 실험이나 동물의 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잔인한 도구들과 방법을 소개하며 동물들이 느낄 고통에 비탄해한다. 그러면서 그가 내린 이상적인 해결방안이라는 것은 우리가 고기 섭취를 줄이거나 없애고 채식주의자가 되자는 것이다. 그는 이 방법이 동물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뿐만 아니라, 인간들도 건강에 해를 끼칠 수 d있는 음식의 섭취를 줄여 건강해 질 수 있다고 말한다. 난 이 책이 1975년도에 처음 쓰여졌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면 지금처럼 육식문화가 전 세계에 팽배하지 않았을 때이기에, 채식주의자가 되자는 싱어의 주장이 얼마나 강경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이런 극단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을 모색하기 전에, 점점 극에 달하고 있는 동물학대를 완화시키고 줄여 자연의 섭리대로 돌아가는 수준의 방법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 방법이 뚜렷한 효과를 거두지 못할 때 육식을 금지시키는 방법을 써도 늦지 않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읽고 허황되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다시 말하면, 동물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채식주의자가 되자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극단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 전에 앞서서 동물에 대한 학대를 최대한 줄여주는 방안을 먼저 시도해야한다. 인간이 고등한 능력을 이용해 먹이사슬의 정상에 위치했다는 것은 필요에 따라 먹이사슬의 아랫부분에 해당하는 동물을 이용할 수가 있다는 말과 같다. 즉, 인간이 동물을 이용하고 섭취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고기의 섭취를 끊는 것이 아니라, 많은 가축들을 고통이 받지 않는 단계에서 키워 섭취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이 책에서 저자가 피력하고 있는 사항은 종차별주의에 관한 것이다. 나도 저자의 종차별주의에 대한 관점에는 적극 동의한다. 종차별주의는 차이와 차별의 개념이 확고히 자리 잡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주장이다. 물론 순종과 잡종은 유전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잡종이라고 해서 유전적으로 결함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억측이다. 태어날 때 유전적으로 뒤쳐지는 면이 조금이라도 있지 않는 한, 순종과 잡종은 똑같은 조건에서 대우받고, 똑같은 권리를 행사해야한다.

같은 종류의 동물 안에서는 넓은 의미의 평등 즉 그 동물에게 주어질 수 있는 모든 대우나 권리를 똑같은 조건에서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 적용되지만, 인간과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같이 전혀 다른 종류의 동물 사이에서는 단지 심한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좁은 의미의 평등만이 적용될 수 있다. 이것이 평등에 관한 가장 이상적인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또 이러한 정의에 위배되는 행위는 고쳐져야 마땅한 것이지만, 이러한 정의 내에서 행해지는 일들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동물해방-essay권경민

동물학대에 관해서 평소에는 가끔 충격적인 동물도살의 과정에 대해서 들은 것이 전부이다. 그나마도 들은 그 때만 잠시 잔인하다고 생각할 뿐, 금새 잊어버리고 그 동물들은 우리의 식탁에 올라오게 된다.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물학대에 대해 무심한 편이며, 나 또한 그런 편에 속했다. 그런데 ‘동물해방’을 읽고 나서 동물학대의 실태가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심하고 범위도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기의 질을 높이고 살을 찌우기 위해 몸을 아예 움직일 수도 없는 곳에 가둔다던지, 꼭 필요하지도 않은 동물실험을 하여 많은 동물들을 희생시키는 등 정말 예도 다양했다. 이러한 문제의 근본은 바로 ‘인간과 동물의 차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종차별주의라는 것인데 나는 종차별주의는 당연히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과 다른 동물들이 모두 똑같은 동물이라고도 하지만 인간과 동물들 사이에는 지적 수준이나 다른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매우 심하게 나기 때문에 사실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말하기엔 지나치다. 이미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뛰어난 능력으로 동물들을 사실상 지배하게 되었으며, 이 상태에서 동물학대의 문제가 생긴 것이지 종차별주의 때문에 동물학대가 생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동물을 사육하여 식용으로 한다는 것은 먹이사슬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으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상품의 질을 높이기 위해 동물에게 먹으면 안 될 것을 먹인다던지, 죽기 전까지의 생활을 극도로 비참하고 불편하게 만든다던지 하는 것은 먹이사슬과는 관련이 없는 동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조차 인정해 주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인간과 평등하게 대해 주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동물로서 대우받아야 하는 최소한의 권리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이 동물을 일방적으로 이용하는 측면에서 이 정도는 지켜줘야 하는 것이다. 또한 동물 실험의 예도 마찬가지다. 인간 사회의 발전을 위해 동물 실험은 불가피하지만, 이 책에서 보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실험한답시고 동물들을 상대로 정신적, 육체적 실험을 매년 상상할 수도 없이 수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류의 발전이라는 명분조차 없지만 이러한 실험은 이미 도를 지나칠 정도로 만연해졌다. 동물 실험이라는 것이 인간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 행한 것이지, 동물들을 괴롭히기 위한 것은 아닌 것이다.
결국 동물학대에 관한 요점은 인간과 동물간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가, 평등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인가라고 할 수 있다. 동물을 인간과 차별하여 대우한다는 것이 동물학대의 원인이 아니라, 그 차이에 맞게 대우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육식문화의 예로 보면, 아예 육식문화를 없애고 채식문화를 발전시키는 것보다는 육식문화를 지키되, 그 동물들에 대한 대우를 개선시켜야 한다. 이미 육식문화는 세계적으로 퍼져 있고 말 그대로 하나의 문화를 형성했기 때문에 그 문화를 없애기란 쉽지 않다. 물론 육식문화의 환경적으로 나쁜 점도 많지만 그것이 동물학대의 근본 원인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일어나는 동물 학대를 보면 대부분 경제적 이익을 위한 것임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잠시일 뿐 언젠가 그것이 또 다른 문제로 인간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동물해방 / 신정원
                                
인류는 오랫동안 자신들을 만물의 영장이라 부르며 인간 아닌 동물들의 머리위에 군림했다. ‘만물의 영장’ 이라는 단어는 인간들에게 동물들을 마음대로 이용할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고, 동물들이 인간의 소유물로 취급당하게 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하였다.
특히 20세기 산업혁명 이후 동물들 또한 대량생산의 목표가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경제수준이 높아지고 삶의 질도 윤택해져 사람들이 육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원래 식물성음식을 주로 먹던 인류가 육식을 더 많이 하게 된 것이다. 고기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기업들은 그에 맞는 공급을 하기위한 수단을 찾아야 했고 그래서 발견된 방법이 바로 동물의 대량 사육이다. 그 때부터 자연에서 자유롭게 뛰놀던 동물들은 그런 전문적인 기업들에 의해 집단으로 사육 당하게 되었다. 동물들은 자신의 삶을 선택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하나의 생명체로서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물론 생태계의 법칙(먹이사슬)에 의해 최상위에 있는 인간은 그 보다 낮은 군에 속하는 동물들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지구상 인간을 제외한 어느 동물도 다른 동물의 모든 삶(태어날 때부터 잡혀 먹힐 때까지) 에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천적에 의해 먹히기 전까지의 생은 그 동물의 천부적인 권리라는 것이다. 이 권리는 먹이사슬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오직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론을 내세워 그들의 권리를 침해할 뿐이다.
우리가 그들의 권리를 침해함으로 인해 인류의 삶이 엄청나게 나아진 것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그로인해 인류의 삶이 더욱 피폐해 졌을지도 모른다. 첫째, 동물들의 권리를 빼앗는 과정 즉, 사육과정에서 인류는 그 본래의 인간성을 말살 당하고 건강까지 해친다. 수백 마리의 생명을 앗아가면서 사육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집단적인 사육으로 인한 불청결한 작업환경은 노동자로 하여금 만성기관지염, 천식과 같은 온갖 질병을 불러일으킨다. 둘째, 그런 동물들의 고기를 먹는 과정에서 인류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번지르르하게 포장된 고기들이나 번쩍번쩍한 광고로 소개되는 패스트푸드들은 본래 그 목적이 최대의 이윤추구 이기 때문에 공정비용 등을 줄이기 위하여 제조공정 중 알 수 없는 화학물질들을 첨가 한다. 이로 인해 불치병에 걸려 죽은 피해자가 수백만 명에 달한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도 안 되는 지위를 내세워 동물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동물에게서 느끼는 그러한 우월감이 도리어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동물이 고통을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에게 존중해주어야 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언어 장애인들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무시하는 행동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자연과 평등한 선에서 어울려 살 때, 비로소 진정한 최대의 이익을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동물해방을 읽고> - 유 소 영-

지구상에 있는 동물들이 진화의 과정을 거듭하면서 인류는 동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으며 두 손을 사용할 수 있는 동물로 진화하게 되었다. 인간들은 언어의 필요성을 인식해 여러 언어를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고 필요에 따라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인간들은 여러 가지 과학을 발전시켜 사회변화를 야기하게 되었다. 다른 동물들과는 차원이 다른 생활을 하다 보니 사람들은 저절로 우월의식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나아가 차별로 이어졌다. 이 동물과 인간사이의 차별이 단순히 동물과 인간을 차별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중의 인종차별로 이어진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왜 동물과 인간은 당연히 차별화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사람들에게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이 더욱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말 할 것이다. 하지만 ‘동물 해방’에서 ‘피터 싱어’는 차별의 기준을 ‘고통의 감지능력의 유무’로 보았다. 인간은 고통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면 동물은 그 고통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일까? 모든 사람들이 이 질문에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동물들보다 우월의식을 갖고 입에 담기도 힘든 잔인한 실험을 하는 것일까?
여기서 한 실험에 대해 예를 들어보겠다. ‘동물의 사회성’에 대한 실험인데 침팬지를 10여년 동안 방에 고립시켜서 다른 어떠한 생물과의 접촉을 막았다. 그리고 강제적으로 교배를 시켜서 새끼를 그 방에 함께 넣었을 때 어미 침팬지는 그 새끼 침팬지를 무척이나 싫어해서 얼굴을 바닥에 문지르는 등의 거부반응을 일으켰다고 한다. 인간들의 우월의식으로 시행된 동물들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이 이러한 잔인한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실험의 결과가 인간에게 끼치는 악영향은 무엇일까? 대부분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잔인한 실험결과를 많이 접하게 될 수록 사람들도 잔인성에 영향을 받게 되어 나중에는 무감각해질 수도 있다. 또한, 이렇게 잔인함에 무감각해지게 되면 저절로 사회적 범죄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동물과 인간간의 차별이 어떻게 해서 인종차별로 까지 이어지는 것일까? 동물과 인간 사이의 차이점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면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지적능력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이 다반수의 대답으로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지엽적으로 생각해 보면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차별을 예로 들 수 있다. 장애인들 중에 정신연령이 실제 나이보다 적은 경우가 있다. 또한 이럴 경우 대부분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기 힘이 든다. 이렇게 비장애인에 비해서 언어능력이 미숙하고 지적능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장애인을 어떤 과학적인 실험에 대상으로 삼아도 되는 것일까? 전체적으로 볼 때 무색인종과 유색인종간의 차별이 있다. 흑인들은 오래 전에 백인들의 노예로 생활했던 적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러한 관계들이 없어졌다. 하지만 백인들은 단지 피부색이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과거에 자신들의 노예였기 때문에 우월의식을 가지고 차별한다. 과연 이러한 태도가 합리적인 것일까? 이렇게 동물과 사람간의 차별이 더 나아가서 인종차별의 원인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동물과 인간 사이의 차별에 대한 방안으로는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없다. 사회가 인류 중심으로 끊임없이 발전해 나가는 한 이러한 차별은 필연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로운 질병의 백신이 발명되었다고 가정을 해보자. 동물들의 평등권을 인정해 주기 위해서 실험 없이 시중에 유통시키려 할 경우 그 백신에서 부작용이 생겨날 우려가 높아지게 되고 새로운 발명을 해도 시중에 유통되기는 힘이 들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발명이 없다면 사회가 발전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필연적이라고는 하지만 이러한 실험도 어느 정도까지만을 허용해야 할 것이다. 동물에 대한 막연한 의문을 없애기 위해서 쓸데없는 실험을 하는 것은 법적으로 막아야 할 것이고 잔인성을 조금이라도 줄여야만 인간에게나 동물에게나 유익하게 될 것이다.